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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물건의 판매와 구입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가상세계라고 불리는 인터넷으로 판매되는 물건의 규모가 엄청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물건을 만져보고 어떤 지 자세히 살펴보면서 구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화려하고 웅장한 백화점, 대형 할인매장등에 물건을 빼곡하게 전시해서 보여주며 만져보게 하면서 손님들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대형건물로 지어진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마트의 판매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터넷 쇼핑몰등 온라인 판매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 1인 미디어시대라고 불리며 각종 SNS와 개인방송을 통해 물건을 홍보하고 판매하기도 합니다. 대형쇼핑몰이나 각종 아울렛매장을 만들어 물건을 파는 고비용구조보다 컴퓨터 몇 대를 놓고 물건을 파는 저비용 구조가 더 효율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인터넷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그 만큼 변했습니다. 변화되는 세상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기업은 살아남지만, 변화되는 세상에 효과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이 접했습니다. 불과 약 30년 40년 사이에도 수없이 많이 접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정보화된 사회에서는 아무리 작은 기업일지라도 이런 매체를 활용한 전문성을 갖춘 기업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을 실제적으로 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새 시대, 새 부대라는 단어를 씁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성경과 연관된 단어중에 잘 알고 있는 단어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은 교회 밖에서도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은 ‘새로운 것은 새로운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 포도주는 아직 더 발효되어야 합니다. 새 가죽부대는 탄력이 있어서 발효하는 힘을 견딥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탄력이 없어서 발효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립니다. 부대도 못쓰게 되고 포도주도 쏟아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무조건 이전의 것은 다 바꾸고 새로운 부대를 준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말할 때 본질적인 의미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참 신앙의 새 부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살펴볼 내용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금식에 관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외견적으로 금식에 관한 논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혹은 그 당시 형식적인 종교행위로 금욕주의에 빠진 거짓 신앙인들의 왜곡된 종교 행태의 잘못을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정말 바른 신앙가치관으로 참 신앙의 회복이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신앙회복을 위해 첫째로, 종교행위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입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세리 마태의 집에서 잔치할 때 일어난 두 번째 사건입니다. 이번에는 유대인 종교지도자가 아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합니다. 이 당시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금식에 대해서였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있고 서로 세력다툼으로 보일 만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주변 사람들이 볼 때는 그 두 그룹은 똑같은 팀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세력으로 볼 수 있었고 한 팀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분봉왕 헤롯도 예수님의 활동을 보고 듣게 되었을 때 세례 요한과 똑같은 활동을 하는 줄, 똑같은 주장을 하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자신이 하는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역의 과정에 이어 오시는 구원자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시는 이 일을 준비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주님의 길을 예배하는 자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째서 당신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평범한 질문 같지만 이것은 결국 그 당시의 종교행위가 습관처럼 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비방하도록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방법이 수포로 돌아가자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공격하게 만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전통적으로 오직 대속죄일에 지켜야할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거기에 더해서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고 더 많은 금식이 신앙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12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지금 읽은 본문 중 누가복음 18장 12절에 보니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했고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마태복음 9장 14절을 보니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유대 전통에 따라 금식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알고 그들과 똑같이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경건의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금식훈련, 혹은 금식이벤트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행위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금식이 어떤 신앙수준을 높이는 대단한 훈련방법인 줄 생각했고 금식이 구원의 척도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모습, 말씀읽기, 기도, 찬송, 헌금, 금식 그리고 기타 여려 종교적 행위가 우리 자신의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나 말씀생활, 기도, 찬송, 헌금, 전도 등 하나님의 명령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우리 신앙의 분명한 의무는 맞습니다. 이런 의무는 그런 종교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잘해서 은혜의 풍성함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잘 하는 것이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잘하면 잘 할수록 겸손해지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잘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 찬양을 열심히 부르는 사람,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 말씀을 많이 읽고 말씀속에 살아가는 사람 등등 신앙행위를 잘 하는 사람들은 남들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은혜를 알기에 그 은혜속에 들어오도록 도와주려고 하지 ‘왜 그런 것을 하지 않냐?’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종교행위를 마치 자신들의 의로 여기면서 그 종교적 행위를 함께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깨달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는 이 질문속에서 우리에게도 어떤 깨달음이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전통적 종교행위’, ‘우리의 보편적 신앙생활’에 대해 ‘나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고 있는것인가?’ ‘이 신앙적 행위가 과연 말씀에 근거한 바른 신앙인가?’라는 의문이 우리 속에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행했던 어떤 종교행위가 과연 진정 바른 것인지 물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 제자들의 의도는 잘못되었고 예수님을 무너뜨릴 계략으로 찾아와서 질문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 찾아와 이게 맞는거냐? 이게 틀린 것이냐?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이냐? 질문은 생길 때 진정 신앙의 회복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하는 중에 만난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듣자 마자 이 말씀대로 역사가 일어날 것인지 그 말씀의 의미를 찾고 항상 묵상하며 그런가 아니한가 말씀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그 말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계속 묻고 답하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나는 정답이다’, ‘내가 아는 것이 정석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이 신앙생활, 내가 하고 있는 이 신앙의 훈련이 과연 정답인지 바른 것인지 항상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답, 신앙의 답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행했던 모든 신앙의 가치관, 그리고 모든 신앙행위에 대해 질문을 해보며 더 좋은 신앙, 더 바른 신앙을 찾아가기를 갈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신앙회복을 위해 둘째로, 종교 행위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여기 나오는 ‘혼인 집’은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그들이 기대하며 기다렸던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금식하기보다 기뻐하며 잔치에 참여해야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이 마태집에서의 잔치상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잔치상이고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신 잔치상이기에 기쁨이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에 가서 베풀어놓은 음식을 보면서 금식해야 한다며 잔치를 즐기지 못한다면 그 잔치를 베푼 혼주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차라리 오지나 말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잔치를 축하해달라고 해서 찾아와서 결국 그 잔치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앞으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게 되는 때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묘사하고 있고 결혼예식을 은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서에서도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품으시는 하나님을 호세아의 삶에 빗대어 보여주셨습니다. 호세아와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이런 배경으로 예수님과 죄인된 백성들의 식탁교제는 바로 신랑이신 메시아에게 돌아온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타락한 신부가 의인인 신랑을 만나 이제 의인의 세계에 들어올 자격을 얻게 된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나누는 식탁교제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의 사건은 금식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도 그들이 금식일로 지키고 있는 매주 월요일이나 목요일에 결혼예식이 진행된다면 그 결혼식장에서는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의 기쁨이 금식으로 인해서 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사용하셔서 지금 당장은 금식이 필요 없음을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기본적으로 기쁨이 베어있는 생활입니다. 신랑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기쁨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을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부이며 죄와 사망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고린도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신부일 뿐만 아니라 죄와 사망을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지속적인 주님과의 사귐이 있습니다. 관계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신자의 위치입니다. 그러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잔치의 자리는 기쁨의 시간이며 믿는 자로서 누리는 은혜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이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슬픔을 느끼지 않고 기쁨이 가득한 삶이 주안에서의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기쁨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만약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기쁨은 느끼지 못하고 참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내가 진정 신앙인인지 의심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심각하게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물론 신부에게도 신랑을 빼앗길 때도 있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의 백성이 주님을 잃을 때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15절 하반절에 ‘신랑을 빼앗길 때’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주님을 빼앗길 때가 찾아올 것인데 그 때에는 금식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자체를 부정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금식할 때가 분명히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나 큰 문제를 당하게 되었을 때 갈급함을 표현하기 위해 금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랑이 있을 동안에는 금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은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시간이고 이 혼인잔치에서는 혼주이신 하나님,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금식해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의문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항상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답은 바로 우리 주님 말씀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종종 우리 주변에서 신앙의 질문이 생겨 기존에 해오던 종교생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답을 찾다가 이상한 곳에서 답을 찾고 세상의 책이나 인간학설에서 답을 찾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우리 주님에게 있습니다. 정답은 우리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말씀에 근거해서 질문하고 말씀으로 답을 찾고 예수님께 묻기도 하며 응답을 듣기도 하면서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신앙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고 살아갈 때 바른 답을 찾아가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신앙회복을 위해 마지막 셋째로, 답을 찾았으면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16,17절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베 조각’과 ‘새 가죽부대’가 같은 의미이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가 같은 의미입니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말합니다. 하늘 나라의 새로운 삶,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말합니다. 새 부대는 이런 것들에 동참하기에 합당한 새로운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급격하게 잘 살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온 국민이 벌였던 캠페인인 ‘새마을운동’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을 연구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중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이런 새마을운동이 잘 진행되지 않고 사회계몽, 사회정화가 잘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새마을운동의 여러 실행세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마음운동입니다. “새마을운동보다 새마음운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새마음운동을 하지 않고 새마을운동을 했기 때문에 열심히 했고, 부분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어서 외국에서도 견학오고 나라마다 적용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뭐가 진짜인지 잘 모르고 자신들이 그냥 매뉴얼이라고 생각했던 대로만 하다보니 뒤죽박죽 원칙이 흐트러지고 잘못된 적용이 되어지고 결국은 실패했던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마음이 달라지고 온전히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세례 요한 때까지 계속된 옛 시대, 율법에 사로잡힌 낡은 질서와 가치, 낡은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존 가치관과 기존의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는 새로운 세상을 제대로 만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이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종교 행위는 새 천을 낡은 옷에 기우려고 하는 것, 혹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부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결국 둘 다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분명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지키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답은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라는 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분명한 메시지는 ‘새 것’과 ‘헌 것’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낡은 종교 형식과 틀을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내려놓지 못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과거 유대인들의 낡은 종교행위의 틀을 과감히 깨뜨리고 참다운 신앙의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셨고 바른 신앙의 모습이 바로 새 가죽부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새 시대 새 나라. 새로운 천국 복음은 곧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적 행위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방법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7,28절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의 신앙기준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의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기쁨이 충만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믿음의 모습속에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행위와 우리의 이성적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말씀보다 우리의 생각이 앞서고 믿음보다 우리의 이성이 앞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보다 내가 더 신앙생활의 기준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 선과 의와 진리를 세상이라는 그릇, 우리의 이성이라는 그릇에 담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 윤리적 기준이 말씀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으로 나를 비춰봐야지 내 가치관을 기준으로 말씀을 난도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낡고 썩은 가치관, 세상적 윤리의식속에 예수님을 담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썩어질 세상의 가죽부대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야지 감히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무지몽매한 세상 사람들은 감히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썩어빠진 자기 이성의 틀에 하나님을 담으려고 합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오류를 범하면 안된다. 오직 겸손히 엎드려 우리 이성을 깨트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내가 새 가죽부대가 되어 복음을 우리가운데 온전히 담음으로 새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기독교의 5대핵심, 즉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오직 믿음 ‘Sola Fide’ 오직 은혜 ‘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새 가죽부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참 신앙의 의식개혁이 이뤄지고 이 가죽부대안에 복음이 담겨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담겨지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적 가치관, 인간의 도덕의식속에 예수님을 가두거나 내 종교적 활동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언젠가 터져버려 못쓰게 될 신앙이 될 것입니다. 주님안에서 온전한 가죽부대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이 내용없는 형식이나 생명력없는 문장에 사로잡혀 외식하는 듯한 신앙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들이 매주 드리는 예배와 우리의 생활속에서 말씀읽기, 기도, 찬양과 여러 신앙행위가 내 의를 만들기 위한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을 볼 때에도 나는 종교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비난하며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가치관을 내려놓고 참 신앙의 회복이 우리속에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입니까? 어떤 교회가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교회일까요? 우리는 오늘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적 형식과 종교적 오만에 가득 찬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보았습니다.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닌 낡은 옷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성도는 결코 외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근본이 변해야 합니다. 낡은 부대는 버리고 새 부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참으로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은 사람들은 삶이 달랐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스데반은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의 돌에 맞아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 새 부대인 베드로, 바울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은 낡은 가죽 부대의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변함없이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타락한 것, 세상의 모든 죄악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분, 이 세상의 낡은 사고와 낡은 가치관과 세상의 죄악된 모습을 모두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 그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낡은 것이 새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부흥의 새 포도주, 은혜와 감격이라는 영적 새 포도주를 참 신앙의 새 부대에 담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참 신앙가치관을 깨닫고 참 신앙의 새로운 가죽부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온전한 신앙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