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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출애굽기 제2강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돌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말씀 / 출애굽기 2:1-25
요절 / 출애굽기 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우리는 지난 주일, 태어난 이스라엘 민족의 남자 아기는 모두 다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뭇별과 같은 무수히 많은 민족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낳고 낳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져 가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 왕의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위험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무력하게 보입니다. 반면 세상의 강대국인 애굽 왕이 훨씬 능력 있고 강해 보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안 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애굽 왕에게서 구원하고자 하는 완전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세 한 사람을 택하여 출애굽의 지도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택하신 우리 각자의 어려움과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습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매우 비극적인 상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레위 족속으로 아버지는 아므람, 어머니는 요게벳입니다. 모세의 형은 아론, 누나는 미리암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모세를 바라볼때 어땠습니까? 모세가 잘생겼다고 했습니다. 외모가 출중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성경적 관점은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7장 20절을 보면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라고 했습니다. ‘잘생겼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토브’ 즉 ‘선하다, 아름답다, 좋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에서 ‘좋았다’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모세가 태어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고 이 하나님의 마음만큼이나 부모도 모세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도 결혼해 자녀가 태어나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자녀, 하나님이 보실 때 기쁨이 되는 자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자라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도합니다. 이게 신앙인의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분명 애굽 왕은 히브리인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했는데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간절하고 절박하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석 달을 숨겼습니다. 아이가 백 일이 지나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더 우렁차졌고 금방 고발당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위해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해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고 거기에 아이를 담아 나일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여기 ‘갈대 상자’는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방주’라는 단어와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운전대가 없었습니다. 방향을 알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단순한 보호입니다. 마찬가지로 갈대 상자라는 작은 방주는 어린 아기 모세의 운명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보호하심에 맡길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할 바 모르는 인생의 현실 문제 속에서 우리 삶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겠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그 갈대 상자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리암의 나이는 15세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려고 나일강으로 나왔습니다. 원래 애굽의 공주는 최고급 상아로 만든 화려한 궁중 욕조에서 우유와 허브를 풀어 목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따라 웬일인지 나일강 가에 나아가 목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던 모양입니다. 애굽의 공주가 나일강 가 갈대숲 사이에 있는 갈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열어보니 히브리인 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아기를 보니 ‘히브리인 아기’인 줄 금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브리인 아기이기 때문에 나일강에 던져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오히려 그 아기를 왕궁으로 데려와 양아들 삼습니다. 6절에 보면 공주는 아기를 ‘불쌍히 여겼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애굽의 공주를 통해 출애굽의 지도자로 키우려는 어린 아기 모세를 살리시고 양육하도록 맡기신 것입니다. 왕은 죽이라고 했는데 공주는 살리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깁니다. 이는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 이성과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임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대목에서 별 감흥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시기 위해 모세를 살리셨다, 이렇게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아기 때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이 모세를 예쁘게 보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실 것은 믿었지만 자기 아들이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는데 쓰임 받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결말을 성경을 통해 당연히 알지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결말은 아직 ~ing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앞날을 다 알지 못해 때로는 불안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에 관여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삶을 베스트웨이로 인도하시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열심을 가지고 일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용기 내어 공주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우는 아기를 위해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데려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친어머니인 요게벳을 불러와 이제 모세의 어머니는 월급까지 받으면서 자기 아들을 궁중에서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를 통해 아기 때부터 어머니 품 안에서 생활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교육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세워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모세가 운이 좋아서, 또는 요게벳이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임을 믿습니다. 또 이때의 신앙교육이 모세가 장성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결단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애굽의 공주는 아기 이름을 ‘모세’ 즉 ‘건져내어진 자’란 의미를 가진 ‘모세’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모세의 운명은 나일강에 버려져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데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고 왕궁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애굽의 왕자로서 빼어난 학자들로부터 애굽 최고의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서른 살에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에 군사를 끌고 나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모세는 강대국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우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궁중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강한 사람으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런 모세의 삶에도 순탄치만은 않은 일들이 생깁니다. 앞으로 40년간 미디안 광야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장성한 후’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모세의 나이가 사십이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지금껏 애굽의 왕자로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은 영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고된 노동을 감당하는 동족 히브리인들을 보면서, 애굽의 관리들이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에게 채찍질하면서 다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고민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자기는 애굽의 왕자입니다. 그런데 또 어머니에게 배웠던 것은 자기 동족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이 애굽의 관리에게 맞고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살아가면 참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인입니다. 모세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어느 날,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동족을 치는 것을 모세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쳤다'는 것은 단순한 구타가 아니라 죽도록 때리는 장면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 순간 자기도 히브리인이라는 동족 의식이 생겨났고 좌우를 살피다가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시신을 숨겼습니다. 내 동족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음날 다시 나가보니 이번에는 히브리인 두 사람이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타이르면서 그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말했습니다. 당연히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요 재판장으로 세웠냐며 반발합니다. 모세는 동족들을 돕고자 했지만 동족들은 모세를 받아주질 않습니다. 당연히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왕궁의 금수저 모세와 노가다꾼 흙수저 자기들과는 차원히 다르기에 반발감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게다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까지 밀고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정체가 이제 드러나 애굽의 궁중에 한시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두려웠습니다. 결국 머나먼 미디안 땅까지 도망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동족들을 돕고자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애굽 왕의 입장에서 볼 때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은 은혜를 악으로 갚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또한 자기 동족들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애굽에서도 지도자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피신해 있는 처지입니다. 모세는 40대의 나이에 인생의 실패자일까요? 모세는 그 순간만큼은 낙오자처럼 생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낙오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관점은 실패자, 낙오자로 낙인찍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관점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우리를 빚으시고 준비시키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 귀하게 써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빚으시고 있고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고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하심의 손길에 붙들린 바 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자도 없고 낙오자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연단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귀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80세까지 미디안 광야 훈련을 시키면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참 오랜 세월을 훈련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빨리 빨리를 좋아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다 동일한 방법으로 쓰임 받는 것도 아니고 다들 엄청난 일들을 해내는 방식으로만 쓰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과 성품에 맞게 우리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신앙 속에서 엄청난 일을 못한 것 같다고 자괴감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다 모세처럼 바울처럼 베드로처럼만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처럼 기드온처럼 때로는 사무엘처럼 다윗처럼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완전한 계획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영적 소원만큼은 부족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미디안 광야로 도망 온 모세는 실의 가운데 우물 곁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미디안의 제사장인 르우엘의 일곱 딸들이 양 떼를 몰고 와 물을 먹이려는데 목자들이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이를 본 모세가 가만있었겠습니까? 불의한 목자들과 맞붙어 싸웠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딸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사장의 딸들은 모세의 일을 아버지에게 소상히 말씀드렸습니다. 제사장 르우엘은 모세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딸들을 많이 두고 있는 아버지로서 모세와 같은 준수하고 멋지고 신사도 기질을 발휘하는 모세를 그냥 놔둘 순 없었습니다. 자기 딸 십보라와 결혼시켜 모세를 사위 삼습니다. 모세는 동족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미디안 제사장과 딸들로부터는 성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게르솜’ 즉 ‘나그네가 되었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지금 현실은 미디안 광야에서의 나그네 인생입니다. 자기 현실에 대한 푸념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가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제까지 자기 동족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라고 하면 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모세는 언젠가는 떠나가야 할 그곳에서 40년 동안 머물며 미디안 광야 훈련을 받게 됩니다.
D. L. 무디는 모세의 생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는 처음 40년 동안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40년 동안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기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40년은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의 훈련을 통해 모세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도록 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룰 지도자인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다면 자기 능력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룬 것처럼 교만해져 못쓰게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출애굽의 역사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생 훈련을 통해 철저히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식하고 자기를 낮추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곧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떠나서는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5장 5절을 보십시오.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나 한 사람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어가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한편 애굽에 있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애달픈 신음에 가까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 아기들이 죽어갔을 것입니다.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위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래로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던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에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출애굽시킬 하나님의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심한 고통을 겪기 전에 좀더 빨리 출애굽시켜 줄 수 없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얼마든지 빨리 출애굽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 때 보면 애굽 왕을 얼마나 아작을 내버립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척 오랫동안 침묵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을 잊었거나 내버려두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한 시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습니다.
25절의 ‘기억하셨더라’의 히브리어 의미는 ‘깊이 알다, 처지를 생각하다, 한 몸이 되다’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생각하셨습니다. 그 아픔에 깊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들과 한 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나의 아픔을 헤아리시고 나와 한 몸이 되어주셨다는 그 사실이 우리에게 큰 은혜로 다가옵니다. 우리와 한 몸이 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 허물, 우리의 고통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부부를 가리켜 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부부는 고통도 아픔도 함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연약함과 허물도 함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우리와 한 몸이 되어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은혜가 됩니까?
여러분! 우리 처지가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든 상황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가 나의 아픔과 고통,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우리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다 아시고 구원해 주시고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