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약3:1-12)
갈등
1.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1년에 두 번씩 있는 명절 연휴는 우리 민족에게 여러 면에서 좋은 전통이 이어집니다. 명절은 축제의 날입니다. 축제의 날인 명절에는 나쁜 말을 삼갑니다. 좋지 않은 감정도 서로 절제하며 축복하는 말-덕이 되는 말을 주로 해요. 오늘 본문은 사도 야고보가 흩어진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1-2절,“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사도 야고보는 자신이 선생임을 밝힙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밑 동생이었어요. 요한의 형제가 아니고요.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고, 야고보도 아버지의 가업을 따라 형이신 주님과 함께 목수 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고보는 주님 생전에는 주님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이 임하시며 그때 비로소 그가 주님을 바로 알고 베드로와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제자요 사도로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같은 선생들은 말이 많이 하기에 실수가 많음을 인정하며,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2. 온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예수님의 제자)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제자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대용어가 나타났어요. 그 중의 하나가 온전한 사람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 가지 비유로 말했어요. 말의 재갈(3절), 배의 키(4절), 그리고 불(5절)입니다. 말은 사람보다 크기나 무게가 나가지만 재갈을 입에 물려 사람이 말 위에 타고 조종합니다. 배의 키는 배 크기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배의 방향을 정하고 나가게 합니다. 불은 시작은 작지만, 불이 붙으면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사도 야고보는 6절,“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우리 말이 불과 같고, 불의한 세계라고 말했어요. 불과 같고 불의한 세계를 만드는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온 몸을 더럽히고 급기야 우리 삶의 수레바퀴-우리 일생을 불사르고 맙니다. 지옥 불에서 나는 불처럼요. 곧 잘못된 언어생활이 우리를 지옥 불에 던진다고 선언했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이 미치는 영향을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갈등 심화
3. 사도 야고보는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말을 잘 길들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7-8절,“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수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바울은 세상에 길들일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고 말했어요. 길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 바다의 생물 등입니다. 동물원에 가면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길들여 쇼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태국에 가면 코끼리 쇼나 악어, 호랑이 쇼를 합니다. 거대한 동물들-다루기 쉽지 않아 보이는 짐승들을 먹이를 주면서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 놀라워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 가면 돌고래만 아니라 대형 고래가 쇼를 합니다. 공원 크기도 엄청나고 이 거대한 짐승을 길들여서 다루는 솜씨가 대단합니다. 새와 벌레-곤충을 길들이기는 더 쉽고요. 이렇게 세상 피조물들은 길들일 수 있는데, 길들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고 야고보가 선언했습니다. 사람의 말입니다. 독재자들이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을 잡아들이고, 온갖 고문을 다해도 그의 혀를 통제는 못합니다.
4. 사람의 말은 도무지 제어가 되지 않아 쉬지 아니하는 독과 같고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선언했습니다. 9-11절,“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가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고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를 말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한샘에서 쓴 물과 단물을 동시에 낼 수 없듯이 말이에요. 야고보는 12절,“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야고보는 여러 가지 비유를 지혜롭게 말하며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권면했습니다. 그가 당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마리
5.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각기 어느 시대-어떤 상황에서 쓰였는지 먼저 알아야 해요. 모든 역사 연구에는 반드시 컨텍스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쓸 때와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쓸 때의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쓴 편지들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한 이후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로마서는 바울이 아직 가보지도 않은 로마에 편지를 하며 장차 만날 날을 기다리며 쓴 편지입니다. 그가 로마서에 전한 복음은 자연스럽게 칭의-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이야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도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하며 3년이나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와 더불어 한 곳에 가장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아시아의 수도로서 대도시로 인구가 많았고, 갈라디아는 터키 중부 지방을 넓게 차지하는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어요. 바울이 갈라디아에 공을 들여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떠난 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복음의 초보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칭의)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예수를 믿어도 할례도 받고 유대교적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6. 야고보서의 상황은 두 성경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어요. 앞의 두 성경이 구원론의 본질을 말했다면, 야고보서는 구원받은 성도들(교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전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부정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행함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도들끼리 차별하지 말라는 권면부터요.(부자와 가난한 자)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밸런스(조화-균형)를 설교했습니다.
2:22,“내가 보거니와 믿음의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6절,“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당연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답게 언어생활을 하라, 4장은 세상과 벗하거나 허탄한 생각을 하지 말라, 5장에서는 부자들에게 주는 경고-사치하고 방종하지 말고, 이인을 정죄하고 죽이지 말라. 야고보서를 보면 구약의 예언서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한 책만 보면 되지 않고, 전체를 보고 밸런스(균형)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7.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을 이야기하며, 말에 실수가 없기를 촉구했습니다. 실수라고 우리 성경은 번역했지만, 실족이라는 말이 더 적적합니다. 영어 성경도 대체로 stumble로 번역을 했어요. 발이 걸리다, 발을 헛디디다, 허둥대다는 의미입니다. 말 하나하나는 작아 보이지만, 말의 재갈처럼-배의 키처럼-큰불을 일으키는 불과 같다고,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야고보가 편지를 통해서 설교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성숙해야 또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규호,『말의 힘』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말 하나가 집을 지어간다. 집을 짓는데는 시간이 걸리고 여러 자재들이 들어가듯이, 한마디 한마디 말이 결국 집의 모양을 결정짓는고 했습니다.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런 식으로 한 교육학자가 설명했어요. 야고보는 말의 영향력-특히 부정적 영향력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는 말은 길들일 수 없다는 사실도 이야기했습니다. 세상 어떤 짐승도 대부분 길들일 수 있지만, 사람의 말을 길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요.
복음 제시
8. 사도 야고보는 언어생활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면서 12절에 나무 이야기를 했어요.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포도나무도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 이처럼 짤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한다. 야고보의 이 말에 복음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말로 접근했어요. 하와가 사탄의 속이는 지혜를 간파하지 못하고 유혹을 당했습니다. 사탄이 유혹한 것처럼, 하와의 마음에도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원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런 유혹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현혹하는 말에 걸려들지 않고 물리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나무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무화과인지-감람나무인지-포도나무인지요. 무화과 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내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다움 언어가 나와야 한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어주셨듯이,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보혈로 씻어주시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기대
9. 사도행전 이후 제자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는 제자의 규모가 방대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12사도를 제자로, 이후 70인-120인-500여 형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최대 규모였어요. 하지만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고 교회 성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제자라는 말이 따로 필요 없었습니다. 둘째는 제자라는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문맥에 따라 대용어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온전한 자입니다.(엡4:13, 골1:28, 살전5:23, 딤후3:17, 히7:25, 약3:2이 대표적)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중의 한 증거가 언어생활입니다. 한 입에서 찬송가 저주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비결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의 비율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7:3 비율입니다. 긍정적인 말-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비판하는 말을 줄이는 것입니다. 적게-느리게-부드럽게.(우리 동료 목사님 중) 이 시간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게 하시며, 절제 가운데 성숙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