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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닥터 지바고' ]
영화 <닥터 지바고>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대형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1955년에 완성됐지만 볼셰비키 혁명을 불순하게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소련에서는 출판이 금지됐고 파스테르나크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1957년 이탈리아에서 첫 출판된 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작가가 의도했던 아니든 소설 속 주인공 닥터 지바고와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비슷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둘은 제정 러시아의 공산화와 양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적 시대를 살았으나 정치나 혁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문학과 예술에 몰두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들의 작품은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켜 본인들을 괴롭힙니다. 또한 체제전복과 혁명, 그에 따른 반동이란 잔인한 시절을 살면서도 끝까지 조국에 남기를 선택했다는 것 역시 공통점이었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는 불안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혁명과 전쟁 속에서 사라져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인 주인공을 통해 예술적 감성을 지닌 개인의 인생사를 그리면서 예술가도 혁명가도 죽음을 피할 순 없지만 순수한 열정이 담긴 예술은 시대를 넘어 불멸의 생명력을 지님을 보여줍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일찍이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로 소설을 영화화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 <콰이강의 다리>로 전쟁과 한 인물의 연대기 연출에 뛰어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과 지바고란 인물의 일생을 다룬 <닥터 지바고>는 그의 역량을 한껏 펼쳐 보일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제작된 1960년대는 냉전이 한창이었고 소련에서의 영화 촬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한 뒤 핀란드에서 겨울 장면들을 촬영했습니다.
린 감독은 각본가 로버트 볼트, 작곡가 모리스 자르, 촬영감독 프레디 영, 오마 샤리프와 알렉 기네스까지 그간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와 배우들을 기용했기에 어느 때보다 안정적인 연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익스트림 롱 숏’으로 보여주는 설원의 풍광은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주었고 영화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이 됐습니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이외에도 각본상, 작곡상, 미술상, 의상상의 5개 부분을 수상한 <닥터 지바고>는 한때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대작 서사 영화들 중에서도 최고의 완성미를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노련한 거장답게 각국에서 데려온 유명한 배우들을 잘 조화시켰고, 또한 로드 스타이거 등 조역 연기가 특히 뛰어났습니다. 촬영감독 프레디 영은 러시아의 광활하고 거친 풍광을 생생하게 재현했고 모리스 자르의 음악은 스토리를 더욱 아름답게 보완해 나갔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강렬한 연기와 함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닥터 지바고>는 엄청난 흥행수익을 올렸으며 텔레비전 방영을 통해서도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이듬해(1914년) 처녀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를 내면서 시인으로 출발했습니다. 파스테르나크가 <닥터 지바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45년이었고, 1956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국내 출판이 여의치 않아 다음해 밀라노에서 이탈리어판으로 처음 출판된 후 1958년 노벨상이 주어지자 소련 정부는 그를 '인민의 적'으로 매도하면서 작가동맹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수상을 사절했고, 2년 뒤인 1969년 침묵과 고독과 실의 속에서 죽었습니다.
* 파스테르나크의 생가
고르바초프 정권이 들어서자 1986년, 시인 예프투세코 등이 서명운동을 벌여 그의 복귀를 요구했고, 이듬해 2월 작가동맹이 파스테르나크의 제명을 정식으로 취소함으로써 30년 만에 복권되었습니다.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인 라라는 파스테르나크의 애인이던 올가 이빈스카야가 주모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올가는 두 아이를 가진 34세의 과부였고, 파스테르나크는 56세의 유명한 시인이던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파스테르나크는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아내와 올가 사이에서 이중생활을 하게 됩니다.1948년 올가는 파스테르나크와의 관계 때문에 스파이 혐의를 쓰고 4년간의 옥살이를 했고 임신 중인 아기를 유산까지 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죽음으로 석방되자 두 사람은 재회를 하게 되지요.
노벨상 소동 때문에 파스테르나크가 동반자살을 권유했으나 올가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시인이 죽은 후 올가는 다시 체포되어 4년간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했습니다. 1978년에는 올가의 회상록 <시간의 포로-파스테르나크와의 나날들>이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올가는 82세의 나이로 1995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생전에 파스테르나크를 알던 친구들은 그를 "천재적이고 심플하고 델리킷하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 간략한 줄거리 ]
어린 지바고는 양친을 잃고 유복한 크로메코 부부에게 맡겨집니다. 지바고는 의학을 전공하며 시를 쓰는 청년으로 성장하고 크로메코 부부의 딸인 토냐와 사랑을 키워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차에서 우연히 라라와 스쳐지나갑니다.
라라는 의상실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죽은 아버지의 친구인 코마로프스키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17세의 대학생입니다. 그러나 코마르스키와 라라의 어머니는 내연의 관계였고 코마르스키가 라라에게 눈을 돌리자 라라의 어머니는 자해 소동을 일으킵니다. 그 일 때문에 은밀히 왕진을 오게 된 지바고는 또 한 번 라라를 보게 됩니다.
라라는 볼셰비키 혁명을 꿈꾸는 열혈 청년인 약혼자, 파샤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코마르스키와의 다툼 끝에 순결을 잃습니다. 라라는 상류층 인사들의 성탄절 파티장을 찾아가 코마르스키를 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지바고가 그를 치료해줍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세 번째로 스쳐갑니다.
얼마 후, 지바고는 토냐와 결혼하고 라라는 파샤와 결혼해 각자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립니다. 그러나 곧 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둘은 후퇴하는 러시아군 대열 속에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이 귀향하기도 전에 러시아 내전이 터지고 둘은 한 임시 야전 병원에서 6개월간 의사와 간호사로 일합니다. 그러면서 둘은 좋은 동료이자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각자의 배우자에게 충실하기로 하며 헤어집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지바고는 집이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에게 점령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기근과 혹한이 러시아를 덮치고 땔감을 훔치던 지바고는 경찰이 돼있는 배다른 형제, 예프그래프를 만나게 됩니다. 예프그래프는 당이 지바고의 시를 싫어한다며 시골로 도망쳐 숨어살라고 충고합니다. 그래서 지바고는 가족을 데리고 열차에 오릅니다.
도중에 암살범으로 오인돼 라라의 남편인 파샤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지바고와 가족들은 무사히 바리키노로 갑니다. 그곳에서 직접 땅을 일구며 살아가던 유리는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가 라라와 재회합니다. 지바고는 라라와 밀회를 거듭하며 괴로워하다 라라에게 이별 선언을 하고 돌아오던 중 빨치산에 납치됩니다. 2년 넘게 빨치산에게 끌려 다니다 탈출한 지바고는 바리키노로 돌아가던 중 가족들이 떠났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지바고는 가까운 곳에 있는 라라를 찾아가고 그녀의 보살핌 속에 건강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를 알고 있던 토냐가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토냐는 가족들과 파리로 망명하여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갑자기 코마르스키가 찾아와 라라와 지바고에게 도와주겠노라고 말하지만 둘은 이를 거절하고 바리키노의 별장으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 지바고는 라라를 주제로 한 시들을 쓰며 시인으로서의 생활을 만끽하지만 파샤의 죽음으로 라라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서 유리는 라라와 그녀의 딸을 코마르스키에게 맡기면서 둘은 헤어집니다.
세월이 흘러 모스크바에서 혼자 살던 지바고는 어느날 전차를 타고 가다 라라를 발견하고 전차에서 급히 내려 그녀를 따라가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둡니다.
[ 러시아 혁명 ]
20세기는 러시아 혁명(1905년)으로 막을 열었고, 러시아 혁명으로 세워진 공산국가 소련의 해체(1989년)로 막을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러시아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세력의 등장은 20세기 내내 파장을 몰고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도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가져왔던 대사건이었습니다.
* 러시아 혁명의 배경
20세기 초까지 서유럽에서는 혁명과 변혁이 잇따랐지만 러시아는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나라로 차르(황제)의 전제정치와 압제가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차르는 군주 신권의 이론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도 프로테스탄트(기독교)도 아닌 러시아 정교는 다른 나라보다 더 권위적이어서 차르 정부의 기풍이 되고 도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거룩한 러시아’라고 불리었고, 차르는 만만의 거룩한 아버지였습니다. 교회와 당국자에 의한 이와 같은 쇼가 국민들의 정신을 잠들게 했고 그들의 시선이 정치와 경제에서 빗나가게 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거룩한 러시아’를 상징하는 것은 ‘나우트’며 자주 ‘포그롬’이 행해졌습니다. 나우트는 농노 등을 벌주는 채찍이고 포그롬은 파괴와 조직적 박해라는 뜻입니다. 차르의 러시아의 배후에는 유형과 감옥과 절망과 함께 반드시 연상되는 황량하고 적막한 시베리아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정치범들이 시베리아로 보내져 커다란 수용소와 유형지가 생겨났고, 그 부근에는 자살자들의 묘비가 마련되었습니다.
오랜 유형생활과 감옥에서 장기간 형기를 마친다는 것은 지독하게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어서 많은 용감한 사람들의 정신은 꺾이고 육체는 쇠사슬 아래 썩어 문들어져 갔습니다. 이와 같은 차르의 러시아는 닥치는 대로 쳐드는 목을 베어 버리고 자유의 기도를 짓밟아 버렸습니다.
외부로부터 자유주의 사상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여행조차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은 눈사람처럼 녹기 쉬운 것이어서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는 빠른 속도로 낡은 수레를 단번에 뒤집어 놓기도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 영화에서...
차르 시대의 러시아 농민은 사실상 노예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토지에 얽매여 있어서 특별한 허가가 없이는 그곳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교육은 모두 시골 귀족계급에서 뽑힌 관리층과 지식계급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지나친 압제에 대한 본능적인 반항으로 수차례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곤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상층부에 약간의 교육이 보급되면서 서유럽에 유행하고 있던 자유와 민주사상이 흘러 들어왔는데, 그 시기는 대략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는 시대였습니다.
*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쫓아 서유럽 깊숙이 파리로 들어온 러시아군의 청년 장교들에게 자유와 평등 같은 프랑스 혁명이념이나 인권사상에 대한 개념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776년 영국 식민지인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정신 아래 저 먼 곳, 북미에 자유스러운 입헌 공화국이 세워졌다는 소식, 그리고 1789년 프랑스가 일어난 자유,평등,박애의 깃발아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음을 그들은 현장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특히 감동을 준 것은 비교적 자유로우며 활력에 넘치는 상공인들과 농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확실히 러시아의 청년 장교들이 호흡한 유럽의 공기는 신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조국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비록 청년 장교들이 대부분 귀족의 자제들이었지만 차르의 폭정으로 신음하는 조국 러시아 농민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겁니다.
* 시베리아로 유형간 데카브리스트들(반란자들)
러시아로 돌아간 이들 청년 장교들과 일단의 지식인들이 1825년 12월에 일으킨 반란이 바로 ‘데카브리스트(러시아어로 12월은 데카브리라고 합니다)반란’이라고 하는데 이 반란은 러시아 최초의 정치적 각성의 표시였습니다.
비록 이 반란은 가혹하게 진압되었지만 이 반란으로부터 각종 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이후 새로이 탄생한 마르크스 공산혁명 이념이 반 차르운동과 더불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혁명의 중요한 이념적 배경이 됩니다.
< 피의 일요일 >
* 차르 니콜라이 2세
먼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던 1905년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합니다. 그의 성격과 무능력이 혁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콜라이 2세는 부황 알렉산드를 3세로부터 대제국을 물려 받았습니다. 당시 러시아 인구는 1억 2천 5백만, 면적은 세계 1위, 경제는 세계에서 5위에 해당한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울러 트로츠키(러시아 혁명의 거두)가 재치있게 표현하였듯이 그는 혁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니콜라이 2세는 이처럼 큰 제국을 다스릴 만한 능력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절대 전제정은 절대 전제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는 전제자에게 요구되는 지능과 성격을 구비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그는 어려서부터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예컨대 행동거지가 지나치게 섬세했으며 수줍음을 잘 탔고 조용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부드러웠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거의 없었고,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과 자리다툼을 경멸했으며 고관들의 음모를 천하게 여겼고 행사같은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 차르 부부
강한 성격의 사람들을 싫어해 자신의 중신들 가눈데 그런 특성을 보이는 신하들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짤라 버렸고, 귀염성 있고 겸손하면서 변변치 못한 신하들을 중용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시간 보내기를 제일 좋아했으며 특히 야외에서 산책하거나 가볍게 운동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부황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계집애 같다”라고 걸핏하면 핀잔을 주었고 23세의 황태자를 어린애처럼 다루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저 아이가 과연 대제국의 절대 전제자가 될 수 있을까”하고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적으로는 바보같다고 알려졌으며 국정의 현안들에 대해 토론하거나 연구하기를 싫어했고 지적인 대화 자체에 싫증을 내곤 했습니다.
“내가 차르가 되지 않는 것이 러시아에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그만두고 싶다”라고 본인 스스로가 측근에게 내뱉곤 했다고 합니다. 요컨대 시대의 대변혁기에 놓여진 러시아를 참으로 무능하고 무기력한 차르가 통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니콜라이 2세의 무능과 불운을 더 나쁜 쪽으로 끌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황후 알렉산드라였습니다. 그녀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가 되는데 독일의 헤세 공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거만한데다가 냉정하기까지 해서 그녀는 곧바로 수도의 상류사회에서 인기를 잃었습니다.
자연적으로 극소수의 측근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립되고 맙니다. 웃는 일이란 거의 없었고 두통을 자주 앓았으며 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불안해 보였는데 특히 미신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니콜라이 2세가 성격적으로 나약하고 우유부단하다고 늘 걱정하면서 이에 따라 자신이 계속해서 가르쳐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를 마치 “성품이 착한 어린이‘처럼 대하면서 자신의 미신을 주입하기도 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아내의 말이라면 거의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렇게 볼 때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앞으로 닥칠 혁명 앞에 희생될 니콜라이 2세 부부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된 루이 16세 부부와 참으로 많은 점이 닮았습니다. 우선 니콜라이 2세의 경우 즉위에 즈음에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부황은 내가 무엇을 시작하도록 준비시켜 놓지 않았다.”라고 불멘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루이 16세도 “이게 무슨 부담이람. 나에게는 아무 곳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라고 말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황후가 외국인이었듯이 루이 16세의 왕후인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오스트리아 공주였습니다. 앙투아네트 역시 거만했고 냉정하고 쌀쌀맞아서 사람들의 인심을 잃었으며 왕실을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 루이 16세
* 마리 앙트와네트
니콜라이 2세 부부는 금술만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서로 깊이 사랑하며 헌신적인 부부였습니다. 그들은 여론이란 말을 경멸했고 인텔리겐자(지식인)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마치 매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표정같았으며 러시아 사전에서 아예 삭제되어야 한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들에게는 3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계급에서 살았더라면 어쩌면 행복했을 부부가 황제와 황후가 되는 바람에 본인들에게도 불행했고 러시아에도 불행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 피의 일요일과 가퐁 신부
러일 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9일 일요일, 20만 명 가량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앞으로 모이면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위의 지도자는 사제이며 노동운동가로 잘 알려진 가퐁 신부였습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제헌의회의 구성, 노동시간의 단축, 최저 임금의 보장 등을 내걸고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거리를 행진하던 시위자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고 질서를 지켰으며 그중 다수는 성상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으며 또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라는 국가를 합창했습니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동원되어 군중들에게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이에 불응하자 군인들은 발포하였고 그 결과 500 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백설은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알려지게 된 이 사건의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 전역에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여러 도시에서 지역 단위 소비에트(노동자들의 단위조합)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차르의 반응은 재빠르고도 신속했습니다. 우선 그는 ‘1월 선언’을 발표, 약간의 정치적 양보를 함으로써 일반민중이 소비에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끔 유도했고 한편으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요원들을 무더기로 체포했고 모스크바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분쇄했습니다.
1905년의 혁명은 이렇게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치유되지 않은 이때의 상처로부터 보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12년 후에 기어코 터지고 맙니다.
* 가퐁 신부
‘피의 일요일’ 시위를 주도한 가퐁은 우쿠라이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혁명 당시 32세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지성적이며 진지하고 명상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미남자였던 그는 웅변에 능했으며 카리스마를 보여 주는 등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으며 1904 년말 경에는 러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노동 지도자로서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레닌이나 기타 혁명가들과는 달리 차르 체제를 전복하려는 과격성은 없었으며 단지 체제 내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확보하는 데에만 그의 활동을 국한시켰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태가 진압되면서 그는 해외로 도망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니콜라이 2세에게 다음과 같은 짤막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차르에 대해 일체의 존칭을 버렸습니다.
“노동자들과 그들 처자식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인민들 사이에 영원히 가로 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 연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흘려져야 할 모든 피가, 교수자(목을 매다는 자)인 그대와 그대의 가족들에게 흘러 떨어질지어다”
실제로 차르와 그 가족은 가퐁의 예언대로 나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 제1차 세계대전과 괴승 라스푸틴
1914년 터진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는 모든 교전국 중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원래 러시아 장군들은 무능하기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장비도 변변치 못한 러시아 병사들을 엄호사격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적진으로 돌격케 함으로써 한꺼번에 수백,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습니다.
한편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그밖의 도시에서는 투기 상인들이 전쟁을 이용해 엄청난 돈을 벌었고, 반면에 병사들과 노동자, 농민들은 기진맥진하여 굶주림에 허덕이고 불만의 소리는 날로 높아만 갔습니다.
어리석은 니콜라이 2세는 드세고 멍청한 황후와 고약한 성직자인 라스푸틴에 둘러싸여 온갖 악정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괴승 라스푸틴은 원래 말을 도둑질하다 잡힌 적도 있는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돈벌이가 쉬운 성직자가 되기로 작성하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잔꾀를 부려 궁정에 까지 알려질 정도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차르의 외아들 알렉시우스는 혈우병(피가 한번 나면 멈추지 않는 병)에 시달리는 환자였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황태자가 출혈을 일으킬 때마다 라스푸틴이 고통을 덜어주곤 해서 황후의 신임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둔한 차르를 마음껏 요리해서 최고층 인사까지도 그의 진언에 의해 결정되는 판이 되어 버렸고 한편으로는 거액의 뇌물들을 챙기는 등 악덕을 일삼으면서 몇 해 동안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온건파 귀족들까지 불만이 높아져 강제적으로 차르의 폐위를 논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럴 즈음 니콜라이 2세는 스스로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 여러 가지 삽질을 하는 바람에 전투를 더욱 그르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1916년말 경 라스푸틴은 소수의 귀족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에게 독약을 먹였는데 죽지 않자 다시 또 두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는데 그래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그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관통하는 네바 강으로 끌고가 빠트려 죽여버렸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그로 인해 차르의 비밀경찰의 단속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 2월 혁명
1917년 2월 24일 불만이 극에 달한 20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진압을 명령받은 황제의 돌격대인 코사크 기병대가 진압에 임했다가 멈칫했습니다. 전선에서는 동료들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고 후방에서는 국민이 신음하는 참상을 보고 그들 자신도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시가에 포진하고 있었던 군인들이 반란에 합세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리의 군중과 합세하였고 이 사태를 저지하려고 나선 장교들은 자기 부하들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 레닌
전선에 있던 차르는 모스크바까지 페테르부르크에 동조하여 혁명에 가담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예부대를 급파했으나 이들도 시민들 편에 붙어버렸습니다. 3월 2일 군대로부터 버림을 받고 퇴위 요구에 직면한 차르는 이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 퇴위합니다.
동생 미하일에게 양위하려고 했으나 그도 황제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를 통치해 온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체포된 황제의 가족들은 서부 시베리아의 예카테린부르크로 송치되었습니다.
* 차르 가족
1918년 7월 17일, 이들 황제 가족의 탈출을 우려하던 감시 담당 볼세비l키 병사들에 의하여 총살되었습니다. 오전 1시 30분, 차르 가족들과 시종들을 포함한 11명은 지하실로 인도되었습니다. 니콜라이 2세와 14세의 아들 알렉시우스, 황후 알렉산드라, 23세의 올가, 19세의 마리, 17세의 나타샤, 15세의 아나스타샤 등 네 딸과 1명의 시의 그리고 3명의 시종들을 나란히 세우고 총살되었습니다.
지하실은 연기와 화약 냄새로 가득 찼으며 시체들로부터의 피가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 니콜라이 2세, 처형당하기 얼마전, 유배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 10월 혁명
돌연한 노동자 계급의 대두와 지배자들의 지팡이였던 군대가 노동자와 합류한 것을 본 귀족, 지주계급 등의 상층계급과 부유층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지주계급과 상층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두마(러시아 의회)의 의장과 의원들조차 공포에 질려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게렌스키가 수상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멘세비키(온건한 공산주의자들)와 볼세비키(과격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권력다툼과 러시아 군 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 등 혼란은 지속되었습니다.
이 무렵 잠깐 핀란드로 피난을 갔던 레닌은 10월 7일 몰래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2월 혁명 때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돌아왔었으나 게렌스키에 의하여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핀란드로 잠시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에 의해 이번에는 볼세비키 혁명이 막을 올리게 됩니다. 10월 25일 새벽 6시 경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공서들이 볼세비키의 수중에 장악되었고, 반란의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순양함 오로라호가 네바 강에 정박했습니다. 함포들은 내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겨울궁전을 향하여 포탄을 겨냥하고 있었고 그곳에는 우유부단한 게렌스키가 정신을 못차리고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25일 이른 아침 부관 한사람이 그가 처해있는 곤경을 무자비하게 한마디로 요약해 주었습니다. “정부가 믿을만한 부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길로 그는 보따리를 싸갖고 외국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 26일 새벽, 임시정부 최후의 각료들이 마침내 백기를 들고 투항했습니다.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들이 마침내 승자가 되었습니다. 레닌이 새정부의 주석이 되고 그의 오른팔인 트로츠키가 외상이 되었습니다. 11월 8일 레닌이 스몰리 학교에서 열린 소비에트 회의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회의장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미국인 기자 리드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울퉁불퉁한 대머리를 어깨위에 올려놓은 다부진 체구, 작은 눈, 사자 코, 넓적하고 여유있는 입, 무게가 있는 턱은 깨끗이 면도를 하고 있지만, 그전부터 훗날까지 잘 알려진 수염이 벌써 자라고 있었다.
옷은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다리에는 너무 긴 양복 바지을 걸치고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대중들의 우상으로 생각되지 않는 평범함, 대중 지도자로서는 아주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 소박하고 냉철하며 비타협적이고 완고한 그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끄는 천재적인 모습은 없고 그 재능은 오로지 머리에서만 나온 것이다.
* 스탈린(왼쪽)과 레닌(오른쪽)
복잡한 이념을 단순한 말로 설득하는 재능과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력, 그리고 고도의 지적인 대담성과 예리함을 결부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가장 다사다난했던 소비에트 초기 시기에 모스크바에서 지낸 영국대사 로커트는,
“레닌이라는 사람은 일에만 몰두하고 그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비인간적인 기계같은 사람이 아니다. 확실히 그는 일과 그의 일생의 사명에 절대적으로 헌신했다. 동시에 전혀 사심이 없었으며 흡사 하나의 이념의 화신같았지만 그는 인간미가 풍부해 진심으로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레닌은 항상 기분이 좋았으며 내가 지금까지 만난 공인 중에서 누구보다 기분의 변화가 적은 인물이었다.“라고 이 영국의 외교관은 회고합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에도 그는 소박하고 솔직했으며 호언장담과 허세를 미워했습니다. 또한 그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일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습니다.
* 영화에서...
* 러시아 내전(적-백 전투)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가 정권을 잡았으나 전국은 파국적인 내란에 휩쓸려 갔습니다. 1918년 코사크의 백군(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군대)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백군 부대들도 속속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1차대전 중 러시아의 맹방이었던 나라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전염을 두려워하여 백군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 적-백 내전 초기
러시아에 해상봉쇄를 가하는 한편 백군에게 무기와 보급품을 지원했고 나중에는 별력을 파견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동쪽에서는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시베리아의 전략적인 요충지를 점령했고, 서쪽에서는 폴란드와 체코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적군(볼세비키 군대)을 공격했습니다.
3 년여에 걸쳐 당시 군사위원장이던 트로츠키는 제한된 병력으로 이 새로운 위험에 대처하느라고 동분서주했습니다. 전투시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그는 하나하나 적대세력을 격파해 나갔습니다. 1921년 말까지 공산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위협은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의 시련을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레닌의 치하에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처치하는 방편으로 테러가 도입되었던 것입니다.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 치하에서는 이 테러가 가공스럽고 괴이한 경찰국가를 건설하는데 탁월한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 레온 트로츠키
레온 트로츠키는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으며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 당시 적군을 지휘하는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전역의 노동자들로 소규모 노동군을 조직하여 백군 및 외국에서 파견된 군대와 싸우게 했습니다. 내전의 와중에서 레닌은 친구이자 대문호인 막심 고리키에게 트로츠키를 이렇게 칭찬했다고 합니다.
“1년 이내에 모범이 될 만큼 완벽한 군대를 창설하고 게다가 군사 전문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재능을 가진 자가 있다면 한번 말해 보라.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트로츠키다”
* 영화에서...
1879년 우쿠라이나에서 부유한 유태인 농장경영주의 아들로 태어난 트로츠키는 처음 혁명활동기에는 레닌과 팽팽히 맞섰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레닌과 완전히 정치적인 합의에 도달하여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었습니다.
설득력과 웅변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합니다. 레닌이 주석직을 맡고 있을 때 수상직을 맡았으며 내전이 벌어지자 적군을 지휘하여 볼세비키 정권을 확고하게 다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레닌이 죽은 뒤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에게 밀려 1929년 아내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터키로 가서 4년 동안 체류하면서 ‘나의 생애’라는 자서전과 ‘러시아 혁명사’를 집필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스탈린의 암살 위협으로 프랑스, 노르웨이로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멕시코로 피신하였습니다.
1940년 5월 24일에는 스탈린이 밀파한 암살 특공대 약 20 명이 기습, 적어도 300 발 정도의 총탄을 퍼부었는데도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8월 20일, 그 동안 비서로 위장했던 암살자가 트로츠키의 서재에 단신으로 들어가 도끼로 트로츠키의 머리를 내리 찍었으나 즉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원으로 옮겨 간 그는 심하게 뇌를 다쳐 26 시간 뒤인 8월 21일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암살자는 근처에 있던 추종자들과 경비원들에 의해 잡혔습니다. 우쿠라이나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한줌의 재로 끝난 트로츠키가 남긴 저술은 오늘날에도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 러시아 혁명이 남긴 것 ]
마지막으로 러시아 혁명이 남긴 것들을 살펴봅니다. 우선 차리즘 체제(차르가 지배하던 러시아 전제정치 체제)의 비인도적인 성격입니다.
차리즘 체제는 극소수 특권층의 향락과 부귀영화를 위해 대다수 피치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그 점에서 차리즘 체제는 국가를 빙자한 범죄 집단에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이 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한 혁명가들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째서 차리즘 체제가 스스로 개혁의 길을 걷지 않아 마침내 혁명을 불러일으켰던가를 묻게 됩니다. 우선 차리즘 체제의 둔감과 무지였습니다. 세계의 조류가 인도주의와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인간의 해방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당장의 쾌락과 탐욕에 눈을 감았습니다.
* 영화에서...
그것은 차리즘 체제의 오만을 의미했습니다. 너희 상것들이 감히 우리에게 도전해 오다니하는 오만이 세계사의 진운을 무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땅 한 평이라도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이미 많이 가졌는데도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물질적 욕심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또한 이 물질적 욕심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도구로 권력을 그대로 유지해야겠다는 권력욕이 개혁을 가로 막았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억압받고 착취 받는 사람들의 한은 쌓이고 쌓이면서 분노와 증오는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혁명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영화에서...멀리 라라가 걸어가고 있고 뒤따라가는 지바고, 심장이 멎으면서...
이렇게 볼 때 1905 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이나 1917년의 2월 혁명과 10 월 혁명은 역사의 당연한 진행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10월 혁명으로 집권에 성공한 볼세비즘이 유일한 대안이었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국의 세계적인 철학자인 버틀랜드 러셀경의 경구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볼세비즘을 거부하게 된다. 첫째, 볼세비키 방식으로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인류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끔찍하다는 것이고, 둘째, 그 대가를 치른 뒤에 조차도 나는 단언하건데 볼세비키가 이루고 싶다고 말하는 그 결과를 결코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게 정곡을 찌른 말입니다.
* 영화에서...
확실히 볼세비즘은 너무나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습니다.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러시아 ‘맑시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플레하노프는 레닌에게 “그대가 말하는 노선을 따라가면 러시아는 또 하나의 거대한 차리즘 체제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실제로 또 하나의 거대한 차리즘 체제가 되고 만 볼세비즘의 통치 아래 러시아 사람들은 과연 러시아 혁명이 가치있는 일이었던가를 물었을 겁니다. 또 그렇게 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르고도 소련이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물었을 것입니다.
* 10월 혁명 당시의 레닌
결국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의 차리즘’을 ‘붉은 차리즘’으로 대체시킨 것이 지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이 폭력혁명을 배제한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길은 볼세비키에 의하여 ‘수정주의’이며 ‘혁명에 대한 배반’이라고 매도된 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는 그 길이 다수 국민들에게 보다 큰 자유와 보다 많은 복지를 베풀어주었음을 증면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지난 시절 동유럽 국가들에서 조차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지도자들이 나왔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 영화에서...
러시아 혁명가들이 그 길을 걷지 못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크게 영향을 받은 다른 많은 국가들의 불행이었습니다. 물론 차리즘의 야수성 밑에서 어떻게 온건한 방법인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을 걸을 수 있었겠냐 하는 반론이 나올 수 있고 이는 곧 레닌의 이유였던 겁니다.
이렇게 볼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생략한 채 곧바로 쿠데타(10월 혁명)를 통해, 그리고 이어서 공포와 폭력 및 세뇌를 통해 사회주의 단계를 뛰어 넘으려 했던 레닌의 방식은 많은 희생을 낳았고 결국은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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