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회 전국풀꽃시낭송 대회 지정시 전문
- 목차 -
1. 대숲 아래서 2. 빈손의 노래 3. 가을 서한 4. 사는 일 5. 아버지를 찾습니다. 6. 오늘의 약속 7. 아우내의 별 8.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9. 돌계단 10. 황홀극치 11. 꽃피는 도화동 12. 악수 13. 겨울 농부 14. 화이트 크리스마스 15. 천천히 가는 시계
1.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2. 빈손의 노래
1 가을에는 빈 뜨락을 거닐게 하소서.
맨발 벗은 구름 아래 괴벗은* 마음으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들길을 돌아와 끝내 빈손이게 하소서.
가을에는 혼자 몸져 앓아누워 담장 너머 성한 사람들 떠드는 소리 귀동냥해 듣게 하소서.
무너져 내린 꽃밭 귀퉁이 아직도 분명 불타고 있을 사르비아꽃 대궁이에 황량히 쌓이고 있을 이국의 햇볕이나 속맘으로 요량해 보게 하소서.
2 들판이 자꾸 남루를 벗기 시작하는데, 나무들이 자꾸 그 부끄러운 곳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는데,
내 그대 위해 예비한 건 동산 위에 밤마다 솟는 저 임자 없는 달님뿐이다. 새로 바른 문풍지에 새어나오는 저 아슴한 불빛 한 초롱뿐이다.
누군가의 어깨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데, 누군가의 발자국이 어둠 속에서 돌아오는데,
이 가을 다 가도록 그대 위해 예비한 건 가늘은 바람 하나에도 살아 소근대는 대숲의 저 작은 노래뿐이다.
아침마다 산에 올라 혼자 듣다 돌아오는 키 큰 소나무 머리칼 젖은 송뢰뿐이다.
3 애당초 아무 것도 바라지 말았어야 했던 걸 모르고 너무 많은 걸 꿈꾸다가 너무 많은 걸 찾아다니다가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만 이제 또 가을.
문지방에 풀벌레 소리 다 미쳐 왔으니 염치없는 손으로 어느 들녘에 가을걷이하러 갈까?
허나, 더 늦기 전에 나도 들로 내려 드디어 낭자히 풀벌레 소리 강물 된 옆에 실개천 물소리 되어 따라 흐르다가 허리 부러진 햇살이나 주머니에 가득 담아가지고 한나절 흥얼흥얼 돌아올거나.
오는 길에 그래도 해가 남으면 산에 올라 들국화 몇 송이 꺾어 들고 저승의 바닷비린내 묻어오는 솔바람 소리나 두어 마지기 빌려다가 내 작은 뜨락에 내 작은 노래 시켜볼거나.
* 괴벗은: <헐렁한, 풀어진 듯한>의 뜻.
3. 가을 서한
1 끝내 빈 손 들고 돌아온 가을아, 종이 기러기 한 마리 안 날아오는 비인 가을아, 내 마음까지 모두 주어버리고 난 지금 나는 또 그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몰라.
2 새로 국화잎새 따다 수놓아 새로 창호지문 바르고 나면 방안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저승의 햇살.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겨울 양식.
3 다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내려오는 등성이에서 돌아보니 타닥타닥 영그는 가을 꽃씨 몇 옴큼. 바람 속에 흩어지는 산 너머 기적 소리.
4 가을은 가고 남은 건 바바리코트 자락에 날리는 바람 때 묻은 와이셔츠 깃.
가을은 가고 남은 건 그대 만나러 가는 골목길에서의 내 휘파람 소리.
첫눈 내리는 날에 켜질 그대 창문의 등불빛 한 초롱.
4. 사는 일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 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2 세상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퇴근 버스를 놓친 날 아예 다음 차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길바닥에 나를 놓아버리기로 한다
누가 나를 주워가 줄 것인가? 만약 주워가 준다면 얼마나 내가 나의 길을 줄였을 때 주워가 줄 것인가?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시험 삼아 세상 한복판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나는 달리는 차들이 비껴 가는 길바닥의 작은 돌멩이.
5. 아버지를 찾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셨습니다 나이는 칠십 세 약주를 너무 많이 잡수셔서 기억상실증에 걸리셨는데 어느 날 동네 이발관에 가셨다가 길을 잃고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합니다 집 번짓수도 대지 못하고 전화번호도 대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밥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신 분이십니다 흰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 나무막대를 지팡이 삼아 짚고 나가셔서 벌써 보름째 종무소식입니다 방송에도 내고 신문에도 내고 광고지를 만들어 여기저기 붙여도 보았지만 별무효괍니다 양로원에도 가 보고 시장에도 가 보고 정신이상자 합숙소에도 가 보았지만 안 계셨습니다 세상에 노인들은 많고 많아도 정작 아버지는 안 계셨습니다
집을 나가실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사시던 고향에서 이사 안 오시겠다는 걸 좀 잘 살아 보자고 대전시외 개발 예정지구로 이사 와 약주가 더 느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골이 좋다 하시는 분을 억지로 모시고 이사 온 게 불찰이요 술보다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것이 불효이지요 나이는 칠십 세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집 나가신 분 아버지를 찾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찾습니다.
6. 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7. 아우내의 별
조국이란 말 모국이란 말 앞에 문득 떠오르는 어여쁜 이름 하나 있으니 유관순 열아홉 꽃다운 나이 철없는 처녀의 나이에 어쩌면 그리도 의젓하고 당당할 수 있었을까 끝까지 굳세고 한결같을 수 있었을까
천안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공부하고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어여쁜 아기씨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불길 고향땅 아우내로 옮겨와 어버이들 함께 목청껏 외쳤으니
아름다우셔라 곱기도 하셔라 봉숭아꽃보다 동백꽃보다 붉은 마음이여
배고픈 시절 고달픈 날들 기차 소리를 듣고서도 다른 동무들 귀에는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들렸다는데 ‘대한 독립 대한 독립’ 그렇게 들렸던 귀여 보배로운 귀여
아름다우셔라 곱기도 하셔라 봉숭아꽃보다 동백꽃보다 붉은 마음이여
구름 낀 밤하늘이라도 별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구름 너머 별빛은 여전히 반짝이는 것 조국의 하늘 모국의 하늘에 여전히 빛나는 별빛이여 아우내의 처녀 별빛이여
우리들 가슴속에도 오래 반짝여 꺼지지 마소서 길이 함께 하소서.
8.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했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마한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 주고 보듬어 껴안아 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을 또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했다 너, 너무도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
9. 돌계단
네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돌계단 하나에 석등이 보이고 돌계단 둘에 석탑이 보이고 돌계단 셋에 극락전이 보이고 극락전 뒤에 푸른 산이 다가서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돛을 달고 마악 떠나가려 하고 있었지.
하늘이 보일 때 이미 돌계단은 끝이 나 있었고 내 손에 이끌려 돌계단을 오르던 너는 이미 내 옆에 없었지.
훌쩍 하늘로 날아가 흰구름이 되어버린 너!
우리는 모두 흰구름이에요, 흰구름. 육신을 벗고 나면 이렇게 가볍게 빛나는 당신이나 저나 흰구름일 뿐이에요. 너는 하늘 속에서 나를 보며 어서 오라 손짓하며 웃고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어 땅에서 울고 있었지. 발을 구르며 땅에 서서 울고만 있었지.
10. 황홀극치
황홀, 눈부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함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음 어쨌든 좋아서 죽겠음
해 뜨는 것이 황홀이고 해 지는 것이 황홀이고 새 우는 것 꽃 피는 것 황홀이고 강물이 꼬리를 흔들며 바다에 이르는 것 황홀이다
그렇지, 무엇보다 바다 울렁임, 일파만파, 그곳의 노을, 빠져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황홀이다
아니다, 내 앞에 웃고 있는 네가 황홀, 황홀의 극치다
도대체 너는 어디서 온 거냐? 어떻게 온 거냐? 왜 온 거냐? 천 년 전 약속이나 이루려는 듯.
11. 꽃피는 도화동
끝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 스물다섯 살 1월의 인천시, 번지수도 잊어먹은 도화동 한 처녀한테 반해 사랑을 구걸하러 가는 길이었다 싸구려 모직 밤색 양복 차려입고 단도직입으로 처녀의 부모 허락을 얻으러 가던 길이었다
꼬불꼬불 염소 창자처럼 길고도 가느른 길을 따라 겨울철이라 깊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처음 보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골목길 끄트머리 밀가루방앗간 안집이 처녀네 집이었다
그러나 끝내 거절당하고 말았다 울면서 돌아서야만 했다 낯선 고장의 찬바람에 두 볼이 얼어 겨울철인데도 복사꽃이 마구 피어나고 있었다 복사꽃잎은 눈 위에 떨어지면서 얼음이 되고 있었다
지금도 찾아가면 분명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인천시 도화동 밀가루방앗간 안집 내가 처음 사랑을 고백하고 거절당했던 처녀네 집 코가 발름하고 두 볼이 언제나 볼그레했던 제물포 처녀
끝내 잊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12. 악수
가을 햇살은 모든 것들을 익어가게 한다 그 품안에 들면 산이며 들 강물이며 하다 못해 곡식이며 과일 곤충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까지 익어가지 않고서는 배겨나지를 못한다
그리하여 마을의 집들이며 담장 마을로 뚫린 꼬불길조차 마악 빵 기계에서 구워낸 빵처럼 말랑말랑하고 따스하다
몇 해 만인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동갑내기 친구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얼굴 나는 친구에게 늙었다는 표현을 삼가기로 한다
이 사람 그 동안 아주 잘 익었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진 친구의 손을 잡는다 그의 손아귀가 무척 든든하다 역시 거칠지만 잘 구워진 빵이다
13. 겨울 농부
우리들의 가을은 논 귀퉁이에 검불더미만을 남겨놓고 저녁 하늘에 빈 달무리만을 띄워놓고 우리들 곁을 떠나갔습니다.
보리밭에 보리 씨를 뿌려놓고 마늘밭에 마늘쪽을 심어 놓고 이제 이 나라에는 외롭고 긴 겨울이 찾아올 차례입니다.
헛간의 콩깍지며 시래기를 되새김질 하는 염소와 눈을 집어먹고 껍질 없는 알을 낳는 암탉과 어른들 몰래 꿩약을 놓는 아이들의 겨울이 찾아올 차례입니다.
그리하여 봄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만이 눈 속에 갇혀 외롭게 우는 산새 소리를 들을 것이며 눈에 덮여서 더욱 싱싱하게 자라나는 보리밭의 보리싹들을 눈물겨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눈물겨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14.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15. 천천히 가는 시계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을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 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