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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족은 훗카이도, 사할린, 캄차카 반도 등에 분포하는 민족으로, 현재는 인류가 본격적으로 아시아로 이동하기 전 먼저 이곳에 진출해있던 '고아시아 인종'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생김새가 동아시아 인들과 다르고 오히려 폴리네시아 인들과 닮아 한 때는 '이방인' 혹은 '백인종'으로 오해받기도 했던 이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일본의 탄압을 받아온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죠.
일본과는 길디 긴 악연으로 맺어져 있는 아이누족. 그런데, 일본의 이웃나라 조선과는 어땠을까요?
17세기, 조선인과 아이누인은 처음으로 서로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주인공 이지항은 조선의 무신으로 1647년(인조 25년)에 태어났습니다. 흔히 '이선달'이라 불리었는데, '선달(先達)'은 문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오르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무과에 급제하고도 몸이 아파 벼슬살이를 하지 못 해 이렇게 불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수어청의 말단 군관으로 시작해 끝내 6품 수어청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무관이면서 글 솜씨, 특히 한시를 짓는데 탁월했다고 하니, 과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지항은, 뜻밖의 사건으로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다음은 이지항이 겪은 뜻밖의 사건이 기록된 그의 기행문, '표주록'의 일부입니다.
서문
지항은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상기(喪期)를 마쳤다, 그 뒤 병자년 봄에 영해(寧海)로 왕래할 일이 생겼다. 그 때 부산포 사람 공철(孔哲)·김백선(金白善)·김여방(金汝芳)이 “어물 흥판을 위해 배를 타고 강원도 연해(沿海)의 각 고을을 다니는데, 그 곳(영해도호부)을 지나간다."는 말을 하니, 그들의 배를 빌려타기로 했다.
1696년 고향 부산에 내려와있던 이지항은 경북의 영해도호부에 볼 일이 생깁니다. 그곳에 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자니, 마침 동해안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들린다고 합니다. 이지항은 그들의 배를 빌려타기로 하죠.
병자년 4월 13일
순풍을 타고 발선(發船)했다. 여덟 사람이 한 배에 타고서 좌해(=동해)로 돌아 항해했다. 풍세(風勢)가 순하지 않기에 포(浦)마다 들러 정박했다.
이지항과 뱃사람들은 순풍을 타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람의 세기가 영 심상치 않네요.
병자년 4월 28일
바람이 조금 순하게 불기에 행선(行船)하였다. 신시(申時)쯤에 횡풍(橫風 가로 부는 바람)이 크게 일어나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하고, 배의 미목(尾木)이 부러지고 부서져, 거의 빠지게 되었다. 노를 대신 질러 비록 물속에 빠져 죽는 것은 면했지만 횡풍으로 대해(大海)에 떠밀려 밤새도록 표류(漂流)했다.
기어이 일을 터지고 말았습니다. 신시(15~17시) 무렵 거센 바람이 불고 큰 파도가 일기 시작했고, 미목(조타기)이 부러지며 일행의 배는 그대로 파도에 밀려 동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병자년 4월 29일?
아침에 보니, 끝이 없는 큰 바다 가운데에, 다만 사방이 구름에 덮여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막막할 뿐, 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배에 걸쳐진 나무에 허리를 매고, 비옷을 덮어 몸을 가렸다. 기력이 이미 다하고 정신이 혼미하여져, 저도 모르게 쓰러져서 잠들어 마치 이미 죽은 사람들과도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이 밝은 뒤 상황은 절망적일 뿐이었습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 위에서 사람들은 거센 파도에 휘말려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몸을 묶고, 체온을 지키기 위해 비옷을 덮었으며, 생쌀을 씹으며 허기를 달래고 약간의 물로 목을 축이며 하루하루를 버티게 됩니다.
병자년 5월 6일?
물이 다 떨어졌다. 작은 꾀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여 바닷물을 솥에 담아 솥뚜껑을 거꾸로 닫고 소주(燒酒) 내리듯이 하여 솥뚜껑에 겨우 반 사발 가량의 증류수(蒸溜水)를 받았는데, 그 맛이 과연 담담하였다. 그것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먹여 약간 기갈(飢渴)을 풀게 했다. 그 후로 번갈아 가면서 불을 지펴 증류수를 받아 먹었다.
물까지 바닥난 절망적인 상황, 이지항은 바닷물을 증류시켜(!) 선원들을 살려내는 기지를 보입니다.
병자년 5월 8일?
초경(初更)쯤에 서북풍(西北風)이 크게 불어 우리는 큰 바다 복판에서 이리저리 표류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날에나 정박할 수 있는가 점쳐 길한 결과를 얻었으니, 사람들이 답답한 근심을 조금 풀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일본 지도를 본 일이 있었는데, 동쪽은 다 육지였다. 또 통신사(通信使)를 배행(陪行)하여 왕래했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 중간에 대판성(大坂城)이 있어, 황제(皇帝)라는 자가 있고, 동북방 강호(江戶)라는 곳에는 관백(關白)이 있다. 대판성에서 육지로만 이어져 강호까지 가는 데는 16~17일이 걸린다.’ 하였다. 이제 우리는 동해가 다하는 곳까지 가면 반드시 일본의 땅일 것이니, 이는 하늘이 도운 요행이다.”
하니, 선인(船人)들은 다 말하기를,
“끝내 육지를 못 만나니, 이건 틀림없이 허허(虛虛)한 큰 바다와 통해 있습니다.”
하고는, 다들 하늘을 부르고, 부모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표류를 시작한지 열흘 정도가 지났고, 사람들은 희망을 완전히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과연 다재다능한 이지항은 점을 치고 오래된 기억마저 꺼내보지만, 이 역시 사람들을 북돋는 데는 실패하죠
그런데 며칠 뒤...
병자년 5월 12일
미시(未時)쯤에, 전로(前路)에 태산(泰山)과 같은 것이 비로소 보였는데, 위는 희고 아래는 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데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점점 가까이 가 살펴보니, 산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어 위에 쌓인 눈이 희게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아가 정박하려는 사이에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배는 동요하여 안정되지 않고, 주림과 갈증으로 기력이 없어진데다가, 파도가 배를 쳐 배 안에는 물이 가득해져서 거의 뒤집혀지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일시에 배를 움직이며, 작은 두 개의 통으로 물을 퍼내어, 물에 빠져 죽는 것만은 면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옷이 다 물에 젖어 추워 덜덜 떨었다. 겨우 물이 얕은 굽이진 곳을 찾아 정박하고는 비옷을 덮고 밤을 지냈다.
아침에 육지를 바라보니, 산이 중천(中天)에 솟아 있는데, 중턱 이상에는 눈이 가득 덮여 있고 그 아래로는 초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은 없고, 다만 산기슭 밑에 임시로 지어 놓은 초가 20여 채가 보일 뿐이었다. 가서 그 집들을 보니, 집 안에는 무수한 고기[魚]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고기는 거의 대구(大口)ㆍ청어(靑魚)였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기타 잡어(雜魚)는 건포를 만들려고 많이 매달아 놓았다. 선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삶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잔뜩 마셔서 배를 북처럼 해가지고는 곤히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대로 그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배에서 내려 비옷을 덮고서 자는둥 마는둥 밤을 지냈다.
일행은 마침내, 그리고 이지항의 말대로, 육지를 발견합니다. 위는 희고 아래는 검은 태산과 같은 섬, 이런 지형은 흔치 않기 때문에, 우린 이지항 일행이 당도한 섬의 위치를 쉽게 특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훗카이도 북부의 '리시리 섬', 아이누인들의 거주지였죠.
병자년 5월 13일?
아침 해안으로 올라가, 연기 나는 곳을 살펴 인가를 찾아보았더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도는 곳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곧 배를 이동시켜 나아가면서 멀리서 바라보니, 과연 7~8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금 고는 사람들의 소금 고는 곳과 매우 비슷하였다. 그것들은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고, 미처 배를 정박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대여섯 사람이 선창(船艙)으로 나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누른 옷을 입었고, 검푸른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검었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선인들로 하여금 불러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묵묵히 서로 바라다보기만 하였으니, 그들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이처럼 묵묵히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털가죽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교환하지 못한 채 다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늙은이가 손에 풀잎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삶은 물고기 몇 덩어리가 있었다. 이어서 그들의 집을 가리키고 고개를 흔들며 야단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는데, 우리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가고자 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심히도 공포에 떨어,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방향을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달아나 보았자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죽기를 각오하고 배를 저어 가 정박하였고, 그곳 선창의 뱃사람들과 일시에 하선(下船)했다.
이지항 일행은 섬에서 조선인 최초로 아이누인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인 줄로만 알았던 곳에서 갑자기 생전 본 적 없던 무엇들(?)이 나타나 외계어를 지껄이니 무서웠을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친절했고, 이지항 일행을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원래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나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는 것을 보고 살해를 하지 않는 것들이라 알고는, 놀라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졌다. 그들의 집 앞에는 횃대를 무수히 만들어 놓아 물고기를 숲처럼 걸어 놓았고, 고래의 포(脯)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서로 통하는 풍습이 없고,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어탕(魚湯)을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무니, 그들은 또 어탕 한 그릇과 고래 포 몇 조각을 주는 것 외에는 끝내 밥을 짓는 거동이 없었다. 나는,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우리 여러 사람의 밥을 먹이는 비용을 꺼리고, 쌀을 아끼느라 이처럼 밥을 짓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 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어탕에다 물고기의 기름을 섞어서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 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배에는 쌀이 떨어졌기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여행용 그릇을 내보이면서 쌀을 달라고 청해 보았지만, 대답할 바를 몰랐다. 나는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친절해 보였던 아이누인들이 쌀밥을 내어오지는 않자 빈정이 상한 양반님 이지항, 그러나 곧 이들이 '쌀'이 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다 굶주린 채로 그곳에서 잤다. 아침에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하였지만 갈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 언덕에 올라 사방을 멀리 바라보니, 육지가 동북쪽에 뚜렷이 보였다. 선인들에게 청해 이르기를,
“이곳에서는 밥을 주지 않고, 배에는 쌀이 떨어졌으니, 꼭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저곳으로 가 봐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돌아갈 길도 찾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다행이겠는가.”
하였다. 선인들은 내 말을 믿고, 일시에 배를 저어, 한 작은 바다를 건너가 정박하였더니, 거기도 역시 그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땅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다만 제모곡(諸毛谷)이라 하였다.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시늉을 하니, 그들은 또 작은 그릇에 담은 어탕을 줄 뿐이었다.
순풍을 타고 30여 리를 옮아 가, 어느 한 곳에 정박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략) 우리가 대구와 청어를 달라고 청했더니, 삶아 먹도록 많이 주었다.
산모퉁이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동남간에 긴 육지가 있는데, (중략) 그곳에 배를 대니, 역시 앞에 나온 무리들과 같아서 그들의 언어를 알 수 있는 방도가 없고, 다만 물고기만 먹는 것이었다.
쌀밥을 지어줄 그 누군가를 찾아 이리저리 다녀보지만, 어딜 가도 긴 수염을 하고 외계어를 구사하는 그들의 마을만이 나올 뿐, 다행히도(?)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어서 어탕만큼은 실컷 들이킵니다.
길가에 집 한 채가 있고, 연기가 많이 피어 올랐다. 그 집을 찾아 들어가 보니, 솥을 걸어 놓고 불을 때는데, 마치 죽을 쑤는 것 같았다. 솥 안의 것을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이 먹는 수제비[水麪] 같았다. 입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좀 달라고 청했더니, 한 그릇을 주었다. 받아 먹어보니, 맛은 의이(薏苡 율무, 식용 또는 약용으로 포아풀과에 속하는 1년초) 같았는데, 곡식 가루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먹어도 쓰지 않았고 배부르고 속이 편안했다. 원 모양을 구해 보니, 과연 풀뿌리인데, 형체가 어린애의 주먹같이 생겼고, 색은 희고 잎은 파랗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풀로, 잎은 파초(芭蕉)잎과 비슷하고, 뿌리는 무와 비슷했으며, 별로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풀의 이름을 물으니, 요로화나(堯老和那)라 했다. 나는 선인들에게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여행용 그릇 일부를 주고, 그 풀뿌리를 가리키어 얻어와서는 죽을 쑤어 많이 먹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다.”
했다. 곧 선인 김한남이 그릇을 가지고 다른 선인들과 함께 일시에 가서 그릇을 주니, 그 무리들은 대단히 좋아하였다.
요로화나, 혹은 오오바유리(オオウバユリ)
쌀밥은 아니지만 그 대신 먹을만한 풀죽을 발견한 이지항, 조선의 우월한 테크놀러지로 만든 그릇을 선물하고 풀죽을 얻어먹으니, 그제서야 먹을 것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답니다.
나는 언덕 위로 올라가, 두루 다니며 구경을 해보았다. 5월인데도 산 중턱 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으니,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또 어떤 곳에 이르니, 마침 날씨는 바람이 불고 추웠는데, 하나는 곰 가죽의 털옷을 입었고, 하나는 여우 가죽을 입었으며, 둘은 담비 가죽의 털옷을 입은 네 사람이 바다와 하수(河水)가 통하는 어구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물은 7~8발[把]에 지나지 않았는데, 실로 짠 것이 아니라, 나무 껍질의 실[木皮絲]로 짠 것이었다. 잡은 고기는, 송어(松魚)와 그 외 이름 모를 잡어(雜魚)가 무수했다. 내가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고 부러워하며 만지니, 그중에서 한 자[尺]가 넘는 송어 20여 마리를 내 앞에 던지고는 가져가라고 가리켰다. 또 담비 가죽의 옷을 입은 자가 내 앞으로 다가서서 내가 입고 있는 남빛 명주의 유의(襦衣)를 가리키고, 제가 입고 있는 담비 가죽 옷을 벗어서는, 번갈아 가리키며 지껄이는데, 바꾸어 입자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바꾸고자 하는 것인줄 알고는 즉시 허락하여 옷을 벗어 주고 바꾸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자년 5월 14일?
떼지어 각기 털옷을 가지고 와 우리 옷과 바꾸자고 하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선인들은 혹은 그릇을 주고 바꾸기도 하였는데 나도 가지고 있던 옷을 다 주고, 담비 갖옷 아홉 가지와 가려서 바꾸었다. 갓끈에 단 수정(水晶) 하나 하나와 바꾸기를 청하기에, 나는 수정 두 알씩을 가지고, 담비 가죽 두석 장과 바꾸었더니, 그 가죽의 수는 60장이나 되었다. 또 허리에 두른 옥(玉)을 가리키면서, 붉은 가죽 일곱 장과 바꾸기를 청하고, 또 여우 가죽 열다섯 장을 가지고는 의복과 바꾸기를 청하기에, 가죽의 품질이 크고 두터워, 북피(北皮 함경북도 지방에서 나는 가죽)의 모양과 같아서 나는 허리에 찬 옥을 끌러 주고, 또 우리 일행이 소지하고 있는 식기와 물에 젖은 면포(綿布) 홑이불 여섯 벌, 보자기 두 장을 다 주고 바꾸었는데, 수달피 석 장을 더 가져왔다. 그 물건은 아주 커서, 한 장으로 털부채를 만들면 네 자루쯤 만들 수가 있다 하였다.
그곳에 머문 지 닷새가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情分)이 있어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부득이 주는 대로 받으니, 고기가 다섯 섬[石]이 넘었다.
생전 본 적 없는 신기한 광경과 음식들, 그리고 '흉악하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착한 사람들. 이지항은 금새 아이누인들과 친해져 정(혹은 물물)을 나누는 사이가 됩니다. 이지항은 양반이 못 돼도 장사로 잘 먹고 잘 살았겠군요.
그런데, 아이누인들은 이지항 일행에게 왜 그렇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던 걸까요? 사실, 아이누인들은 이지항 일행을 일본인들로 착각하고 후하게 대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지항이 동해에 표류했던 1696년, 아이누(에조)인들과 일본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류해오고 있었고, 아이누인들은 야마토계 일본인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
나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선두(船頭)로 나가서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마즈마이……’라 말하였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남을 향해 가라는 것인데 (중략) 배의 기구가 다 갖추어져서 돛을 가득 달아 빨리 가고 순풍을 만나지 못하고 노를 저어 가다가, 배 댈 곳이면 정박하여 상륙을 했다. (중략) 장장(長長) 10일을 가, 약 천여 리까지 갔는데도 끝내 그들 무리만이 있었다. 실로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방책을 물을 길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남쪽을 향해 7일을 갔지만 역시 그 무리들과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당도한 곳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을 데리고 배 있는 데로 끌고 가서, 배를 가리키며 전과 같이 물었더니, 또 남쪽을 향해 가리키면서 ‘마즈마이’라고 할 뿐이었다.
계속 남쪽을 향하여 가다가 4일이 되던 날, 해안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손을 흔들며 부르는 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모습은 전의 무리들과 아주 같지 않았다. 즉시 돛을 내리고 앞으로 가 보니, 일본인 두 사람이었다. 우리 배의 김백선(金白善)이라는 자는 일본어를 조금 알아 그들과 말을 통해 보았더니, 간혹 아는 말도 있었고, 비록 피차간 완전히 통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남촌부(南村府)의 왜인들이었고, 금(金)을 캐려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선달 일행은 아이누인에게 길을 물어 찾아간 마즈마이(마쓰마에松前)에서 일본인을 만나게 되고, 다시 마쓰마에에서 에도(江戸)로, 또 오사카(大阪)와 대마도를 거쳐 고향 부산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됩니다.
이 글은 흥미 본위이므로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선달의 '표주록'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기행문이지만, 사료로서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17세기 아이누인들과 북일본의 여러 모습과 상황을 중립적인 조선인의 시각에서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죠. 무과에 급제하고 글솜씨가 뛰어났으며, 한시를 잘 지어 마쓰마 번주에게 대접받고, '모습이 흉악한' 아이누인들과도 곧잘 정을 나누며 바디랭귀지로 소통했고, 사람을 이끄는 재주가 있고, 부하들이 물개를 죽이려 하자 이를 말리는 착한 성품까지 지니고 있었으며, 뜻밖의 사고로 쓰여진 기행문으로 유명해진 이선달, 그는 이후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춰 몰년조차 알 수 없으니, 정말 비범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표주록 번역문 출처: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재밌네요 ㅋㅋㅋㅋ 팔방미인의 표류기는 참 놀라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