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梅花)에게 물 줬느냐(給梅花澆水了吗) !
문을 열면 바로 눈앞 정원에도 아침운동삼아 걷는 북한산 둘레길 옆에도 붉은 매화(梅花)가 피었다.
해마다 어김없이 봄보다 먼저 오는 매화(梅花)다. 그래서 한매(寒梅)라 하였던가 ! 봄이 오면 꽃은 피기 마련이다.
歲歲年年花相似(세세년년화상사)-작년에도 올해도 꽃은 똑같이 피는데 歲歲年年人不同(세세년년인부동)-작년과 올해에 사람은 똑같지 않구나
옛 어른들은 백가지 꽃 중에서 매화(梅花)를 최고로 여겼다. 극상품(極上品)의 꽃이 매화(梅花)다. 그래서 선비들이 서로 매화(梅花) 선물하였다.
조선에서는 분재(盆栽)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매화만큼은 예외였다. 화분에 심은 분매(盆梅)를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선물하였다.
매화는 가난한 선비(寒士)를 상징하는 꽃이다. 춥고 배고픈 선비들이 특히 애호하였다. 정쟁(政爭)에서 패배(敗北)하여 적막강산(寂寞江山)의 오지(奧地)로 유배(流配)를 당하였을 때 귀양지(歸鄕地) 고독(孤獨)을 달래주던 꽃이 바로 매화였다.
중국 송(宋)나라 이후 한국에 들어온 성리학(性理學)이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때에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하였던 강화학파(江華學派)는 조선시대 춥고 배고프던 비주류 학파였다.
이 강화학파(江華學派)에서 유별나게 매화(梅花)를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 이후 역사학자 민영규(閔泳珪)가 쓴 “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 에 강화학파(江華學派)에서 전해져 내려왔던 “월사매(月沙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월사매(月沙梅)는 조선시대 4대 문장가의 하나로 꼽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애호(愛好)했던 매화를 가리킨다. 월사(月沙)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북경(北京) 곤명원(昆明灣Kunming Bay)에서 가져왔던 매화라고 했다.
“악록선인(愕綠仙人)”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특별한 매화였다고 한다. 이 매화(梅花)에 접을 붙여 번식시켜 강화학파 멤버들 간에 서로 나눠가지는 습관이 있었다고 전한다. ※악록선인(愕綠仙人)-어둠속에서 선인(仙人)을 찾는다.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이며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한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은 항상 이 월사매(月沙梅)를 주변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던 이건창(李建昌)의 사랑채는 강화학파 친구들이 출입하면서 시회(詩會)를 열었다. 자연스럽게 월사매(月沙梅)에 대한 이름이 퍼져 나갔다.
강화학파의 이건창과 깊은 인간적 교류가 있었던 구례사람으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매천(梅泉) 황현(黃玹)도 호(號)가 말해 주듯 매화를 사랑한 사람으로 월사매(月沙梅)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역시 강화학파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 사람이다.
梅花冷一世不賣香 !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더라도 향기(香氣)를 팔지 않는다.”
조선 중기 문신(文臣)인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야언(野言)”에서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매화(梅花)를 읊은 시가 유명하다.
신흠(申欽)의 야언(野言)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다. 桐千年老恒藏曲-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제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버드나무는 100번 꺾여도 새가지가 올라온다.
매화는 이른 봄, 모든 꽃 중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 중의 꽃으로 화괴(花魁)로 불린다. ※화괴(花魁)-꽃의 우두머리 곧 매화(梅花)다
조선의 선비들은 겨우내 기다렸던 매화(梅花)를 마중하므로서 한해를 시작했다. 그들이 매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추위를 무릅쓰고 꽃을 피우는 매화의 생태가 지조(志操)와 의리(義理)를 중시한 그들의 정신세계와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사가(好事家)들은 한국 4대 매화를 아래와 같이 정하고 있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栗谷梅)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華嚴梅)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를 꼽는다. 이 매화들은 모두 문화재청이 지정한 천연기념물이다.
또한 경북(慶北) 2매(梅)로는 도산매(陶山梅)와 서애매(西厓梅)가있다 산청(山淸) 3매(梅)로는 정당매(政堂梅) 남명매(南冥梅) 분양매(汾陽梅)를 일컷는다.
매화를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다. 그중 조선역사에서 퇴계 이황을 빼 놓으면 매화이야기가 안된다. 퇴계선생은 누구보다 매화를 아꼈다. 평소에 매화를 매선(梅仙), 매형(梅兄), 매군(梅君)으로 의인화(擬人化)하여 인격체(人格體)로 대접하였다.
퇴계 선생의 매화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특히 100수가 넘는 매화시(梅花詩)를 모아 엮은 “매화시첩(梅花詩帖)”은 조선 중국을 통하여 유일한 매화시집(梅花詩集)이다.
퇴계만큼 매화를 아꼈던 인물은 한중일 세 나라에서 으뜸이다.
꽃으로서 좋아한 정도가 아니다. 퇴계는 매화를 자신의 또 다른 자아(自我)로 여기는 경지까지 나아갔다. 자기 내면세계에는 매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확인할 때마다 매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때는 매화가 퇴계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퇴계는 돈과 권력이 보장되는 서울의 출셋길을 뿌리치고 고향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귀향(歸鄕)길을 떠나면서 자신이 아끼던 화분(花盆)의 매화에게 작별시를 써준다.
東歸恨未携君去-도산으로 돌아가는 길 그대와 함께 못 가서 아쉬움이 크구려 京洛塵中好艶藏-나 없는 사이 서울의 먼지 속에서도 기품 있는 모습 잘 간직하고 있게나
퇴계(退溪)의 이 시를 받고 화분의 매화는 이렇게 답한다. 玉雪淸眞共善藏-자네도 옥설(玉雪) 같은 맑고 진실한 마음을 잘 보존하고 있게나.
퇴계의 제자 김취려(金就礪)는 퇴계가 서울 거처에 놓고 갔던 화분의 매화(盆梅)를 이듬해에 도산(陶山)으로 보냈다.
도산(陶山)에 도착한 분매(盆梅)를 보고 퇴계는 이렇게 반가움을 표했다. 脫却紅塵一萬重 來從物外伴 翁! 자네가 만겹의 풍진(風塵)을 벗어나서 강호(江湖)에서 한가롭게 살고 있는 삐쩍 마른 늙은이와 같이 놀려고 왔구려 !
퇴계는 죽기 직전에도 유언(遺言)과 같은 말을 하였다 給梅花澆水了吗? 매화에게 물 줬느냐?
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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