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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5장1~4절/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나
사람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고 또 사는 의미와 목적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하며,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뻐하고 슬퍼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가 하는 것은 삶의 의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은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왜 부지런하게 일합니까? 왜 열심히 돈을 법니까? 왜 명예를 추구합니까? 왜 권력을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동분서주합니까? 왜 사랑을 찾아 헤맵니까?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행운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영어로 행복을 ‘happiness’라 하고, 행운을 ‘fortune’ 혹은 ‘lucky’라고 합니다. 행운은 운(運)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요행히 운이 좋은 것이고, 운이란 우연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가령, 복권을 샀는데 이것이 들어맞아 천만 원을 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행운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요, 요행의 결과입니다.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요, 지혜와 끈기의 결과가 아닙니다.
행복은 행운과 다릅니다. 행복은 우연이나 요행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연히 얻어지는 진리가 아닙니다. 행복은 내 의지와 노력과 정성으로 쌓아올리는 피와 땀의 결정체입니다. 우리는 행운을 바라듯이 행복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바라서 얻을 수 있는 요행의 선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까운 데서 찾지 못하고 먼 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붙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행운을 바라듯이 행복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요행의 선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까운 데서 찾지 못하고 먼 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붙잡지 못합니다.
사랑, 행복, 축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물론 사랑과 축복,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기초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남녀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친구관계, 직장동료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등이 있습니다. 관계가 생기면 친해집니다. 그러나 관계가 없으면 친할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가 되면 좋은 감정이 생깁니다. 사랑이 생기고 발전하며 행복해집니다. 부부관계가 좋으면 행복해집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좋으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축복을 경험합니다. 열심이 일하지만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니까 소득이 많아집니다. 당연이 풍요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깨지면 정반대 현상이 생깁니다. 얼굴을 붉히고 서로 미워하는 감정이 생기고 불행해집니다. 그리고 자칫하면 저주로 끝나고 맙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이 관계를 잘못 맺으면 큰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관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지면 다 깨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면 다 회복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는 부모님이 계시지만 부모님께 연락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관계가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잘 믿지만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비참해집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것이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했을까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포도나무라면 하나님은 농부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참’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쓰셨습니다. 1장9절을 보면 ‘참 빛’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참 빛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6장32절을 보면 자신을 ‘참 떡’, ‘생명의 떡’(요 6:35)이라고 하셨습니다. 10장2절에서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8장2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장막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포도나무 비유를 선택하셨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농부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 되어 있으면 포도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농부의 마음도 기쁨이 가득차고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나무라는 단어를 쓰면 빨리 알아듣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이 토속적이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조금 더 관찰해 보겠습니다. 포도나무를 말할 때 사람들은 나무로 생각할까요? 열매를 생각할까요? 열매입니다. 포도나무 자체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포도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탐스럽고 맛있게 열린 열매 때문입니다. 먹음직하고 옆에만 가도 단내가 납니다.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볼품이 없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0장1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농부입니다. 농부가 관리하는 포도나무와 관리하지 않는 포도나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농부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잘 가꾸신 나무이기 때문에 나와 관계를 잘 맺으면 열매가 풍성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2절에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1절에는 농부와 포도나무가 나왔는데 2절에는 가지가 추가로 나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나오는데 이 가지가 누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사람들을 가리켜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본질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마치 가지와 같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가지가 독립을 했을 때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불쏘시개에 불과합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조금 더 관찰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무에 붙어있다고 다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어도 잎만 무성한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해서 열매를 맺을 것도 같은데, 막상 가보면 가지에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농부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가지를 쳐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나무에 붙어있다고 다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성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고 목사다 장로다 해도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으면 아버지 하나님이 가지를 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가지를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가 가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가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께 상처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안타까워하십니다. 가지를 사정없이 치는 분은 농부이신 하나님입니다. 농부는 왜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사정없이 치는 것일까요? 더 깨끗하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설명이 됩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성경의 영적 원리는 ‘빈익빈 부익부’입니다. 있는 사람은 더 주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까지 빼앗습니다.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더 생길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해서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없어집니다. 영적인 냉혹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멀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지치기입니다. 이것은 우리 정서와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다 가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하나님이 사정없이 자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가지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내게 나쁜 성격이 있습니다. 내게 나쁜 습관과 인격이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것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내가 죽지 않을 만큼 치십니다. 그것이 붙어있으면 나중에 당신의 인격까지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수술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지치기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치기를 할 때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너무하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정확한 때에 수술을 하십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불필요한 것, 잎만 무성한 것, 다른 과실의 양분을 도둑질해가는 가지만 골라서 하나님이 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지치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3장10절을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기 위해 사정없이 도려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가지치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 감정적으로 함부로 가지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 잘못된 가지만 골라서 용서 없이 친다는 것입니다. 셋, 따라서 꼭 필요한 것은 남겨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를 하나님의 가지치기 원리로 해석하십시오. 왜 내가 고난을 받는가? 죄 때문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고통을 겪을 때 자신을 욥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욥과 같은 인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맞아도 싼 짓을 했기 때문에 맞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욥이든 아니든 내 안에 거품, 군더더기, 불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형편대로 하십니다. 우리가 죽을 것 같으면 안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수준만큼 손을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치기를 하실 때 여러분은 세 가지를 명심하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가지치기를 받아들이십시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병들면 병든 대로, 실직을 했으면 실직한 대로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새롭게 하시는 작업입니다. 둘째는, 인내하십시오. 발버둥 치면서 안하겠다고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받아들이고 인내하셔야 합니다. 셋째는, 감사하십시오. 결과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열매를 더 깨끗하고 소중하게 관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지치기의 결론은 나를 살리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수술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합니다. 수술 자체는 고통스럽지만 수술을 해야만 살릴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열매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을 때 ‘이 사람은 열매가 있는 가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22~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에 이런 열매가 맺히기를 축원합니다. 죄의 성품에서 의의 성품으로, 외면적인 성품에서 내면적인 성품으로 바뀌어 육체의 열매가 아니라 거룩함의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로마서 6장21~22절을 보면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7장4~5절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즉, 하나님을 위한 열매가 있고 사망을 위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가지의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 중에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전도의 열매입니다. 다니엘12장3절을 보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28장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마가복음16장15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요한복음21장15~17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사도행전1장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들이 모두 전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열매입니다. 내면에 인격적 열매가 있고, 이런 열매들이 맺힐 때 하나님께서 이에 더 복을 주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십니다. 가지에 열매가 없으면 인정사정없이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가 될 수 있을까요?
3~4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미 우리는 깨끗해졌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비결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답은 하나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칭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 때문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이 깨끗하게 되는 유일한 비결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롬10;9~10)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을 통한 거룩하게 됨, 즉 칭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입니다.(창15;6; 롬1;17) 누구나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계기가 되어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도덕적인 계명들로 제한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도덕적인 계명에 충실하여 세상으로부터 성자라 일컬음을 받을 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며, 예수 안에 있지 않으므로 그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과 영적 사귐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실한 포도나무라 가지라 할지라도 줄기에서 잘리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와 관계가 단절되거나 사귐이 끊어진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중시해야 합니다.
예수와 사귐이 있는 사람, 곧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 등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일에 예수를 본받고자 힘씀은 물론, 언제든지 예수와 함께 있기를 즐거워합니다. 이 관계의 특징은 아버지 안에 거하는 예수님의 생활에서 확연히 들어납니다. 그분은 모든 일은 아버지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으며, 십자가조차도 기꺼이 감수하신 것입니다(빌2;6~7)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쫒아가는 것입니다.(마16;24) 그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또 무엇을 명하든지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이 예수 안에 거하는 성도입니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에 맞서 싸우고 무기력하게 만들어야(골3;5)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