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맹자의 인성 4단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착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가 요즘 뉴스에 화제로 대두되고 있으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서 그런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어린 아이가 물에 빠졌다면 자신의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뛰어들어 건져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심성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인간의 심성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말이나 글로 대하는 맹자(孟子)입니다.
맹자의 공손추 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측은지심 비인야, 무수오지심 비인야, 무사양지심 비인야, 무시비지심 비인야. 측은지심 인지단야, 수오지심 의지단야, 사양지심 예지단야, 시비지심 지지단야.”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이 말은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인성론으로서 '사단설' 또는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하는 말입니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고 보는 학설입니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조되는 학설입니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확충작용에 의해 덕성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왕도정치인데, 이 왕도정치가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가면 '인·의·예·지'라는 4가지 덕을 완성하게 되고,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본 것입니다.
맹자는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4단(四端)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를 비교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에게는 4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맹자의 견해에 의한다면 바리사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율법을 잘 지키고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큰소리를 치면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값진 태도는 뉘우치는 자세입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회개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축일3월 9일 성 도미니코 사비오 (Dominic Savio)
신분 : 소년, 증거자
활동 연도 : 1842-1857년
같은 이름 : 도메니꼬, 도메니코,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성 도미니코 사비오(Dominicus Savio)는 1842년 4월 2일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토리노(Torino) 근처의 산 조반니 디 리바(San Giovanni di Riva)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인 아버지 카를로 사비오(Carlo Savio)와 재봉사인 어머니 비르지타(Birgitta) 사이의 10남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부터 매일 미사의 복사를 섰고, 7살 때에 예외적으로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려는 소망을 불태워왔다.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월 31일)가 청소년 교육을 위한 사목을 준비하면서 토리노의 성직자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을 도와주도록 부탁했는데,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본당 신부가 그를 추천하였다. 면담에서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이 소년의 영혼 속에 은총이 충만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2살 때에 토리노의 종합기숙학교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오라토리오에 입학하였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성인이 되려는 열망으로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원했으나 성 요한 보스코 신부의 지도에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충실히 하는 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를 결성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성덕을 닦았다. 성인이 조직한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회는 신심적인 목적 외에도 성 요한 보스코를 여러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도와주었는데, 성 요한 보스코가 살레시오회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했을 때 그 모임의 회원 22명이 주요 회원이 되었다.
한 번은 학교 내에서 두 학생이 돌을 들고 싸울 때,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작은 십자가를 들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 십자가를 먼저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운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앙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자, 이제 싸워도 된다. 그러나 그 돌을 먼저 나에게 던져라.” 나이 어린 소년의 이 한마디 말은 그의 인품과 성덕을 밝히는 중요한 말이다.
그는 학교 규칙을 지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의 기도 정신은 당대의 어느 큰 성인에 못지않았다. 가끔 성 요한 보스코가 그의 과도한 열성을 탓하고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저는 큰일은 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성 요한 보스코가 고행에 몰두하는 그를 다소 저지했을 때도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성 도미니코 사비오가 얇은 시트 한 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본 성 요한 돈보스코가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폐렴에 걸리면 어쩌려고?” 하자,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성 요한 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아침 미사 때부터 몇 시간 동안 기도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런 내밀한 기도 시간을 ‘나의 기분 전환’이라고 불렀는데, 이 순간이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었다. 한 번은 그가 이런 기도 중에서 일종의 환시를 보았는데, 황량한 들판에 수많은 군중이 있고, 그곳으로 횃불을 들고 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성 요한 보스코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횃불은 영국 국민에게 전해야 할 가톨릭 신앙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이 사실을 당시의 교황 비오 9세(Pius IX)에게 알렸고, 교황은 이 말을 듣고 영국에 대해 더 큰 사목적 배려와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건강이 날로 악화하고 폐렴까지 겹치자 건강 회복을 위해 1857년 3월 1일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수술의 고통을 견뎌냈지만, 3월 9일 아스티(Asti)의 몬도니오(Mondonio)에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당신께 영원한 찬미를 드리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아!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습니다”였다. 그의 시복식은 1914년에 로마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몇 가지 반대에 부딪혀서 성 요한 보스코의 시성 후인 1950년 3월 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4년 6월 12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는데, 교회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성인 가운데 한 명으로서 소년 성가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9일에 지내나, 살레시오회 등에서는 성인의 축일이 늘 사순시기와 겹치는 이유로 5월 6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발행되어 2004년 개정된 최신 “로마 순교록”은 3월 9일 목록에서 “달콤하고 행복한 영혼을 지닌 어린 시절부터, 아직 청소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리스도교의 완덕의 길을 걸었다”라고 성 도미니코 사비오의 성덕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도메니코 사비오(Domenico Savio)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도미니코 사비오 (Dominic Savio)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