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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반도의 적색테러와 폰 렌넨캄프 살해 사건 이후로 지도부에게 미운 오리로 낙인찍혔던 스탈린이 지도자 후보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사이, 민주주의 직접 선거라는 최대의 장벽을 넘은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0년 7월 22일 신생 소비에트 연맹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물론 실제 연맹 통합 절차에는 시간이 더 걸릴 예정이었지만, 7월 혁명이 일어난 날짜에 다시금 소련이 결성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위해 결정된 날짜였죠.
핀란드와 폴란드를 제외하고 러시아 제국의 영역 전부를 장악한 소비에트 연맹은 1억 5천만이 넘는 인구와 막대한 천연자원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극동에서 맞붙었던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를 전부 합친 인구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였죠.
넘치는 인력으로 소련 전역에 개발 붐이 부는 동안, 소련은 참관국으로 연맹 가맹을 천명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을 도와주기 위해 나섰습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 간의 분쟁은 거의 대전쟁 이후 일어난 유럽의 대규모 분쟁 중 마지막이었죠. 소련 측에서는 쿤 벨러의 친구인 [로잘리아 제믈랴치카]를 비롯한 인사들을 헝가리로 파견했습니다.
헝가리는 자신들의 고토이자 핵심 영역인 트란실바니아를 두고 루마니아와 분쟁 중이었습니다.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루마니아인의 다수 거주지로 바뀐 트란실바니아를 어떻게든 자신들의 영토로 병합시키고자 하는 루마니아도 한 발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죠. 이외에, 남부의 바나트 지방을 둘러싸고 유고슬라비아와의 긴장 관계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인터내셔널의 중개를 통해 카르파티아-루테니아와 북부 슬로바키아 중 헝가리인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을 갈리치아-로도메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 할양한 헝가리는 양국의 지원 약간만을 받으며 어떻게든 루마니아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죠.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체코슬로바키아와도 우방국이지만 엄연히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헝가리를 더 중요시했던 소련으로서는 헝가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를 통한 육로가 개방된 직후 헝가리에 많은 물자와 인력이 지원되었지만 충분한 양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루마니아는 폴란드의 패망 이후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막을 마지막 보루라는 것을 내세워 협상국의 지원을 받는 중인데다 인구와 인력 면에서 헝가리보다 우월했습니다. 이러한 난관이 겹쳐 헝가리는 사실상 트란실바니아 대부분을 이미 루마니아에 빼앗긴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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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체를 총괄하는 외무위원회의 외무부위원으로 영전한 바레츠노프는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에 주민투표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밀리는 처지인 헝가리에서는 동의하였지만, 전선에서 우세를 점하는 데다 헝가리인들이 거주하는 영토에 영유권 주장을 하는 다른 두 나라는 당연하게도 바레츠노프의 제안을 거절하였죠.
유고슬라비아 측이 전선에서도 소극적인 데다 적대감도 덜하다는 것을 눈치챈 소련 지도부는 베오그라드로 밀사를 보냈습니다. 밀사가 품고 간 것은 서부 바나트 지역에서 헝가리인 다수 지역을 경계로 영토를 나눠 새로운 국경을 긋자는 제안이었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일대 분쟁이 일어났지만, 공산주의의 방벽으로 열강 중 말석이라는 이탈리아를 강화하려는 협상국의 농간으로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주력함과 달마티아 지방 전체를 비롯한 아드리아해의 항구 대부분을 이탈리아에 빼앗긴 유고슬라비아로써는 사상으로는 대척점에 있을지라도 헝가리 및 소련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물론 루마니아는 티서강 이동 지역 전역을 원했기 때문에 협상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소련 외무위원회와 GRU는 상호 협력하에 협상국의 상태를 알아보았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낌새를 보이는 미국을 내버려 둔 채,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을 살펴본 것이었죠.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은 물론 루마니아의 분쟁에 소련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두 나라는 생제르맹 조약과 파리 평화협정에서 루마니아의 영토가 동부 바나트와 데브레첸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선으로 확정되었다고 주장하였죠. 특히, 소련이 병력을 차출해 주권국가인 루마니아를 공격하면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세계 2위의 해군인 독일 인민해군과 소련 해군이 공동 출격하여 영불해협을 맞봉쇄하자는 초강수를 주장하였지만, 소련 혁명군사위원회는 이 주장을 단칼에 일축했습니다. 대전쟁을 재개할 수는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라는 흥미로운 주장이 GRU에서 나왔기 때문이었죠.
국경의 경우 루마니아에 양보해도 헝가리 공산정권의 생존으로 충분하다 믿던 소련 지도부는 GRU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GRU는 알아서 망해가는 프랑스는 놔두더라도 염전도가 극에 달한 영국의 인민들을 자극하면 알아서 반전시위가 폭발할 것이고, 그동안 루마니아를 압박하면 루마니아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소련은 전쟁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미 노농적군 인력 대부분은 ‘건설사단’이라는 명목으로 경제개발에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일명 ‘체스 동호회’에 소속했던 장교들이 스워지니치니와 관련된 모종의 공개되지 않은 이유로 일괄적으로 강제 예편되었기에 전력의 감축은 분명 상당한 수준이었죠.
따라서 소련이 유일하게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은 이름 높은 7월 혁명 차량화보병사단과 노농해군의 함대였습니다. 7월 혁명 사단이 루마니아-소련 국경으로 이동하여 무력 시위를 진행하는 사이, GRU 산하의 특공대는 루마니아로 잠입하여 철도 폭파 공작을 시도했습니다. 큰 효과는 보지 못했지만, 루마니아는 당장이라도 소련이 쳐들어올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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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의 대영 공작은 ‘과하게’ 효과적이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대전쟁이 재개될 수도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프랑스의 조합주의 혁명에 경도된 영국 내 극우 인사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운동가와 개혁주의자들을 모조리 규합해 거대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었죠.
그들의 수장인 [로타 린톤오만]과 [오스왈드 모슬리]는 대단한 선동력으로 무소속 친좌익연대를 구성하였으며, 국제주의를 단호히 배격하고 평화롭고 안정된 대영제국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전 브리튼 노동자 대회’라는 대회를 열고 ‘대전쟁이 재개되면 프랑스식으로 총파업을 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총파업 한 방에 정권이 전복될 것이라는 주장에 소련과 독일이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이, 영국 정부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반전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고, 내각의 지지율은 수직으로 하락했죠.
프랑스의 붕괴 이후로 파업 알레르기에 걸려 있던 영국 정부는 당장이라도 이들을 강경히 진압하자는 자유당, 그랬다가 총파업이 일어나면 영국도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 주장하는 보수당의 견해차로 내각 붕괴 위기에 처했습니다. 야당인 노동당은 극우성향을 보이는 이 조합주의자들을 지지할 수도 없고, 이들을 비판하자니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을 우려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의 대응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습니다. 독일과 소련이 24척의 전함을 끌고 와 발트함대-대양함대 연합훈련을 북해에서 실시하는데도,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은 이를 갈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발칸반도에 대한 개입은 완전히 중단되었죠.
대전쟁 시절부터 영국의 사령탑이었던 자유당 당수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총리는 결국 보수당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로이드 조지는 가까운 시일 내로 사임한다고 발표하는 한편, 라인란트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습니다.
영국 내의 노동계급을 믿을 수 없게 된 반작용이었죠. 라인란트의 수반으로 옹립되었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1년도 되지 않아 해임되었고, 후임으로는 [루트비히 카스]가 옹립되었습니다. 국제사회가 이 막장 같은 사태를 개탄하는 가운데, 카스 또한 자신이라고 영국의 주구 노릇을 하겠냐며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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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마비되고 프랑스가 행동하지 않자, 루마니아는 다급해졌습니다. 마침 로잘리아 제믈랴치카가 너지바러드(오라데아)로 소련의 특사 자격으로 향한 것이 이때였죠. 제믈랴치카는 이해하기 쉬운 조건을 내놨습니다.
1. ‘헝가리 기준 트란실바니아 국경’에서 국경에 인접한 루마니아인 거주지를 할양해주겠다.
2. 헝가리에 거주하지만 떠나길 원하는 루마니아인 및 타민족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재산을 가지고 이주할 수 있게 해 주겠다.
때마침 베사라비아 너머에서는 7월 혁명 차량화보병사단이 도하 훈련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윽고 콘스탄차항에 독일의 지원으로 완공된 소련의 최신예 전함인 ‘민주주의(Демократия)’ 호와 호위함대가 당도하자, 루마니아는 결국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0년 9월 22일, 트리아농 조약이 체결되어 발칸반도 및 중부 유럽의 국경이 확정되었습니다. 조약 체결의 여파로 루마니아 정부와 영국 정부가 둘 다 사퇴하는 가운데, 소련은 국제정세에서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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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참관국임을 명분 삼아 국가 안정화를 위해 점점 더 소련의 힘을 빌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에 핵심 공업지대인 주데텐란트와 인구 밀집지대인 남부 슬로바키아를 각각 독일과 헝가리에 할양한 대가를 후하게 치렀죠. 심지어 주데텐란트에 건설되어 있던 공업지대 일부를 통째로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내로 이전하는 거래까지 주선했으니까요.
헝가리인들이 사는 영토를 전부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성과에 쿤 벨러는 내각인 혁명정부평의회의 위원 대다수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은 지 오래였던 소련 지도부는 공산주의자는 소수고 사회민주주의자가 대다수인 헝가리의 정부 대표단을 만나 대단히 당혹해했지만, 헝가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영토보전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실현한 소련의 노선을 결코 위배할 생각이 없었죠.
가장 큰 피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협상국과 사회주의 진영 양쪽으로부터 버려진 루마니아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이 서로 맞붙는 가운데, 루마니아 민족주의와 정교회, 계급협동주의 등이 혼합된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민족수호연맹'과 [게오르게 칸타쿠지노 그러니체룰] 장군과 그의 오른팔 [이온 안토네스쿠] 대령, 이론가인 [알렉산드루 C. 쿠자] 박사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좌우 모두의 협력을 추구하며 국가를 재건한다는 이들의 시도는 바로 국경을 맞댄 소련이 이 기상천외한 이념이 점점 퍼지는 것에 우려하게 했죠.
여전히 혼란이 계속되는 프랑스에서는 좌익세력의 대분열 또한 발생했습니다. 1920년 12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의 지도부와 대의원 대다수가 소련 지지를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C)’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집단을 명명한 이들은 '좌익세력의 승리를 위해서 선거 단일화를 비롯한 여러 방식으로 기존 SFIO와의 연합을 유지하겠지만, 우리만의 색깔을 유지하겠다'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또한 SFIC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이라는 별칭이 붙은 '모스크바 인터내셔널'에 가입하겠다는 의식을 밝혔습니다.
투르 회의에서 극우 조합주의 세력에 결탁한 인사들을 제외하고서라도 , [레옹 블룸]을 비롯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습니다. 다만 SFIO의 전당대회에 모인 대의원의 3/4가 SFIC의 창설에 동의한 상황에서 블룸은 점잖은 어조를 유지했습니다. '누군가는 옛집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블룸은 의석을 가지고 있는 의원들을 이끌고 SFIO의 유지를 천명했지만, 리요테 장군의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서라면 일단은 SFIC의 과거 동지들과도 협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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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러시아 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여러 나라들도 소련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이란에는 특사가 파견되었고, 이란의 자생적 공산주의 반군이었던 길란 소비에트는 사면과 개혁정책 도입을 조건으로 이란 조정에 백기 투항했죠.
영국의 새 총리로 선출된 전직 외무상 [조지 커즌] 경은 중앙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외교적 참사를 내각의 첫 성과로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커즌 경은 몽골에 비밀리에 지원을 보내 백군 출신의 군사고문인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정변을 사주하였습니다.
북중국의 실권자인 [돤치루이]가 개입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디바이드 앤 룰에 정통한 영국답게 영국이 단독으로 진행한 이 시도는 소련조차 눈치 못 챌 정도로 치밀했고, 몽골의 군주인 복드 칸이 쿠데타 시도 과정에서 사망하는 비극까지 일어났죠.
그러나 몽골 인민당의 지도자 [담딘 수흐바타르]는 신속하게 행동했습니다. 소련으로 도피해 노농적군을 불러오자는 인민당 간부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수흐바타르는 민족주의 인사들과 심지어 승려들과도 손을 잡고 '몽골의 진정한 군주인 복드 칸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운게른슈테른베르크를 처단하자'라는 명목으로 지지세를 모았습니다.
암살과 테러를 두려워하지 않는 수흐바타르의 지도력에 반란군은 순식간에 붕괴하였습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백군의 잔당은 체포되어 소련으로 압송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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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인 중국에서는 소련 고문단의 대표로써 파견되어 온갖 고생을 했던 카튜셰프의 노력 결실이 마침내 맺어지려 하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군대 꼴을 갖춘 국민당의 당군인 국민혁명군이 마침내 북양정부를 타도하고 '자칭' 정통정부인 국민정부를 회복시키기 위해 나선 것이었죠. 이른바 '북벌', 정식 이름으로 '2차 호법운동'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국민당이 일단은 모든 것을 지도한다는 '훈정' 체제를 선포하고 쑨원을 수반으로 하되 당내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체계를 도입한 국민정부는 북벌이 성공하면 훈정을 청산하고 다당제 민주주의는 물론 지방자치까지 인정한다는 야심 많은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의 연방제 국가화, 즉 연성자치를 바라는 광둥성의 실권자 [천중밍]은 이 지방자치 계획안이 제한이 많다며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소련의 지원을 아슬아슬하게 횡령과 배임이 아닌 수준에서 독점하며 만족하고 있었죠.
막대한 지원과 자금을 대가로 천중밍에 북벌 협력을 약속받은 쑨원은 1921년 가을을 기일로 삼았습니다. 비록 국민혁명군의 실권자인 장제스는 천중밍과 극도로 사이가 나빴지만, 소련은 국민혁명을 성공시켜 중국을 장악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떻게든 국민정부 내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진란]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얻고 중국어를 밤낮으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 부인까지 맞아들인 카튜셰프의 노력은 이러한 소련 지도부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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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간 법적 분쟁이 드라마 속에서만 나지 않는다는걸 현재진행형으로 체험 중입니다.
첫댓글 간만에 나오네요.
오헝 민족 분포도는 지금봐도...
저일대에 발칸 얹어서 그래서 내전이나 분쟁이 터지는구나 하는...
겁나 오랜만...
아아.. 현생이 우선입니다 선생님... 잘 풀리시면 좋겠네요..
라인란트 착취와 프랑스 친소세력 등장, 중국 북벌...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는..
허억 ㄷㄷㄷ... 작중에서의 해방의 쾌감을 누르는 마지막의 현실... 무겁네요. 잘 해결되시길 빌겠습니다.
소비에트의 광폭 행보가 본격화되는 후반부의 모습… ㅎㅎ
그나저나 모두 잘 해결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춘래불사춘-3이 아닌 2로 되어있네요. 얼마나 현생이 급하시면...
아이고 수정했습니다
정권 잡은 스탈린: 너 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