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별은 여전히
강철수
70여 년 전 항도 부산은 피란민들로 북적였다. 거리마다 사람들 물결이 넘실대고 용두산을 비롯한 야트막한 산들에는 게딱지 같은 판잣집이 빼곡했다. 자갈치에는 미군들 음식 찌꺼기로 끓인 꿀꿀이죽 앞에 긴 줄이 늘어서고, 길가 곳곳마다 노점상들이 진을 쳤다.
노점상,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행상을 접고 자리를 잡은 곳은 번화가인 광복동 뒤쪽 남포동 골목이었다. 주로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물품들을 취급했다. 담배, 초콜릿, 드롭스(DROPS) 그리고 스킨로션 같은 화장품들이었다. 대부분 서면 미군 부대 앞에서 ‘미제 아주머니’가 치마 속에 감추어 온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목이라 장사는 곧잘 되었다. 허리에 찬 전대가 불룩해진 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외출금지가 길어지면 그 아주머니로부터 물건을 받지 못해 공칠 때도 있었다. 거기다 한미 합동 군수물자 단속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골목 들머리에 단속반이 떴다, 하면 부리나케 보자기 네 귀퉁이를 싸잡아 들고 박씨 아저씨 집으로 내달렸다.
박씨 아저씨, 훤칠한 키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그분은 이 남포동 골목에서 경우 밝은 사람으로 평판이 나 꽤 말발이 서는 편이었다. 고래고래 악다구니 드잡이 판에도 으레 아저씨가 해결사로 나서곤 했다. 골목 사거리 모퉁이 집, 지붕에는 국방색 방수포가 펄럭이고 대문이 없어 담벼락에다 출입구를 낸 임시변통의 바라크 같은 게 그의 거처였다. 그곳에 내 물건을 보관하는 궤짝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상품을 꺼내오고 파해서는 도로 가져다 넣곤 했다. 월세를 내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대략 삼십 만원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날 조금 일찍 갔더니 그 집 딸인 듯싶은 학생이 등교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명문 K 여고였다. 매무새가 단정하고 얼굴도 고왔다. 순간 얄궂게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언감생심, 야간학교 출신에다 노점상인 주제에 감히 어디를 넘보느냐는 자책도 해 보았지만, 한번 당겨진 불은 쉬 꺼지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그 여학생이 가방 챙기는 시간대에 맞추려고 아침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헐레벌떡 달려갔다. 너무 일찍 도착하면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눈은 손목시계에 가 있었다. 궤짝에서 괜히 물건을 꺼냈다 넣었다 시간을 끌면서 힐금힐금 가방 챙기는 학생을 바라보곤 했다. 늘씬했다. 갸름하고 뽀얀 얼굴, 보면 볼수록 가슴이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밥을 먹으면서도 버스 속에서도 그리고 잠을 자다가도 뽀얗고 청순해 보이는 그 얼굴이 떠오르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 년이 다 되어 가도 그녀는 내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볼 때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하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황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박씨 아저씨의 조카딸이었다고 했다. 동생네가 피란 왔다가 서울로 가면서 형네에 맡겼는데, 졸업하자마자 서울 본가로 올라갔다고 했다.
절굿공이로 치받는 듯한 명치끝의 통증, 뻥 뚫린 가슴으로 찬바람이 들이쳤다. 출근하지 못했다.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을 갖다 붙여도 전혀 위안되지 않았다. 며칠 마음앓이 끝에 고향 선산을 둘러보고 와서야 마음이 잡혔다.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는가, 고맙게 생각하자.’ 스스로 다독였다.
작은 가게를 얻어서 비누, 성냥, 양초 같은 생필품을 팔기 시작했다. 새벽같이 문을 열고 이슥해서야 문을 닫았다. 찾는 손님이 날로 늘어났다. 일 년이 채 안 되어 넓은 가게로 옮겨 ‘H 상회’라는 큼직한 간판을 달고 소매업에서 도매업으로 도약했다. 문전성시(門前成市), 울산, 마산 같은 지방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다. 두어 해가 지나면서 직원이 십여 명으로 늘어났고 ‘소나무’라는 상표로 양초도 직접 만들었다. 염색 군복을 벗어 던지고 정장에 꽃무늬 넥타이를 매고 빳빳한 명함도 만들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박씨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호칭이 ‘노점 총각’에서 ‘강 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에두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 사장, 서울 간 영희하고 결혼하면 어떻겠나?”
믿기지 않아 우두망찰하고 있으니 한 번 더 부연했다.
“내 조카딸과 결혼하라는 얘길세, 서울 쪽과는 이미 얘기가 되었으니 이제 강 사장 대답 여하에만 달려있네.”
불감청 고소원 (不敢請 固所願), 감읍했다. 궤짝 앞에서 우물쭈물 시간을 끌던 내 마음을 아저씨가 간파했던 것일까. 당연히 오케이였다. 두 팔 번쩍 들어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간 내 대답은 조금 달랐다.
“형님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그새 사업가로서의 신중함이 몸에 배어서일 것이다.
일사천리, 말이 나온 지 일주일 만에 결혼 날짜가 잡히었다. 신부, 신랑 나이가 스물과 스물다섯인 그해(1959년) 4월 26일이었다. 그 두 주일 전인 약혼식은 마땅히 신부 쪽인 서울에서 해야겠지만 사업하는 신랑 쪽을 배려해서 부산에서 하기로 했다. 약혼 날짜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날 그녀는 신성(神聖)한 하늘의 별이었고 나는 그 별바라기 노점상이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그 별이 내 곁으로 온다지 않는가. 부르르 몸이 떨렸다.
첫 만남, 회색 투피스 정장에 흰색 구두, 등교 가방 챙기던 학생이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신성한 하늘의 별이었다. 조심 또 조심, 더럼 탈세라 손도 잡지 않았다. 약혼식이 끝나고 벚꽃이 만발한 금정산 기슭에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때도 손을 잡지 않았다. 그때 사진을 보면 신랑 손은 뒷짐을 졌고, 신부의 두 손은 가슴 아래에 얌전히 포개져 있다.
그 별을 우러르는 마음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1박 2일 해운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도 그대로였다. 그게 어느 정도 해소된 건 아마 사랑의 결실인 첫아이가 태어나고가 아니었을까. 육십여 년을 함께한 지금도 그 별은 여전히 내 곁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첫댓글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육십년, 그 오랜 세월을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사모님을 대하셨으니 두 분이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지금껏 해오신것처럼,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모님과 행복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의 삶이 많은 귀감이 됩니다.
김지영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