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느새 어머니 품처럼
따사로움이 저며온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렇다 꿈엔들 잊을 수 있겠는가?
비록 지금은 옛 모습 간 곳 없고,
흉칙한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차 있고,
4차선 도로가 고향 앞 동네까지 뚫리고,
시에 편입된 산골 마을까지
무슨무슨 ‘가든’ 이라는
음식점이 줄줄이 들어섰으며,
논바닥을 갈아엎은 곳에는
장급 여관과 러브호텔이 솟아있다.
작가 이문열씨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고향을
가졌던 마지막 세대’라고 전제하고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시인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로다’ 노래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다.
명절 연휴 때면 수천
수 백만명이 대 이동길에 오른다.
고향을 떠나왔던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찾는 것이다.
작년에 실망하고 돌아섰던 그 고향을
올해도 여전히 설레이는 마음으로 찾는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속의
고향은 더욱 또렷해진다.
나처럼 고향에서 보다 서울에서 산 세월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게다.
지나가다 「고향 집」이니 「보리밥집」이니
하는 간판만 보아도
마음이 설레인다.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 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생각을 바꾸면 천국이 보인다.
/고향은 모든 것의 함축어/
고향은 모든 것의 함축어
입니다. 고향은 귀한 것,
중요한 것, 아름다운 것의
근원이요 모어입니다.
고향에서 멀어지면
원형이 변질되고
고향을 잃으면
생명력이 소멸됩니다.
변덕스럽고 거칠어진 이방
의 언어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떠돌이들의 즉흥적 행위가
현실이나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인정과 수용을
강요합니다. 그래 돌이킬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새로워지려는 바람을 희석
하고 인간으로 설자리를
흔들어 유랑을 정당화하고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오랜 방황으로 비틀거린
발걸음은 고향을 향한
꿈 때문이었다.
어디를 향해도 마음 담을
곳이 없으니 어디에도 고향
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항상 그리운
것은 어머니의 포근함이며,
님의 숨결에 서린 감미로
움이며, 파란하늘과 시냇물
흐르는 초원을 함께 노래할
친구들이었다.
고향을 향할 길이 있다면
기꺼이 나의 눈물과 땀을
드리리 그리운 얼굴들 속에
잠들고 사랑하는 님들의
초대로 아침해가 기쁘고
신나는 날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상황에서 찾지만 상황은
또다시 더 나은 상황을 요구
하기 때문에 상항에서의 행복
은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래서 '욕심은 끝이 없다'
는 말로 설명됩니다.
행복은 사람과의 만남
에서 생명을 갖습니다.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눈물과 따뜻함과
고마움이 우리를 감동지게
하여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곳을 있어야할
고향이라 그리며
우리는 그런 곳을 현실
로 드러내려 애씁니다.
/분명히 고향 같은 마을은 있다/
정열이 없는 삶의 구가를 보라.
그것은 구멍 난 풍선과 같다.
이미 실패를 전제하고,
슬픔을 내포하고
허무의 쓴잔을 마셔야
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가슴 벅찬 정열을 안고
삶에 철저 하려는 값비싼 노력,
이것이 농부의 인격이다.
가장 큰 재산은 용기와 정열이다.
젊음의 새빨간 피는
태만을 용서치 않는다.
다만 우주를 향해 도전하려는
무사로서의 기백과
무장을 갖추어야하며
적과 대면하고 있는 절박한 현실의
주인공임을 자각할 것을 요구한다.
생명의 성장과 번식을 방해하는
일체의 냉혹과 무시와 경멸,
비웃음과 무관심의 추방을 위해
생명을 다할 정열과
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분명히 고향 같은 마을은 있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을.
서로를 섬기고 ,하는 마을,
서로가 그리워서
달도 눈물나는 마을,
서로를 초대하려
해가 크게 웃는 마을,
아이들은 나이 먹는
게 자연스러워
멋진 노인 된 자기를 꿈꾸고,
서로에게 어머니 되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모두가 가슴깊이
그리는 마을은 있다.
그런데 현실로 그런 마을은 없단다.
그러나 현실로 그런 마을에 살고 싶다.
그러면 현실로 그런 마을을 만들어야지.
고향이 있는 자만이
참으로 현재를 살 수 있고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창문은 모두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심히 창문을 열지 않는다면
바로 그 창으로 고향을 볼 수 있고
고향을 들을 수 있고
고향을 냄새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은
창문 너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창문 안에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향의 일은
고향에 가서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향은 지나가 버린
과거로 남아 있는 게 아니고
다시 살리고 아름답게 하고
따뜻하고 밝게 가꾸어야
할 현재로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이 있는 자만이
망각의 늪 속에 파묻힌
지난 날을 되찾고
기억의 한 끝에 매달린
가냘픈 사건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이
있는 자만이 참으로
현재를 살 수 있고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옥수수와 고추가
자라고 있는 밭에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냅니다.
따사로운 한 낮
뻐꾹새 우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즈음
후투티 한 마리가
날아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뻐꾹 뻐꾹 뻑 뻐꾹
훅훅크 훅훅크 훅크
살짝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후투티 얘는 머리를 수그리고
소리를 내고 머리를 쳐듭니다.
웃통을 벗어 알몸인데도
일을 하니 땀이 흐릅니다.
그 때 한 아름 바람이
내 몸을 흝고 지나갑니다.
"아 ! 어머니가
보내주신 바람이구나“
시원한 바람 ! 고마운 바람!
나는 밭일 할 때마다
땀을 식혀주는 바람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내주신
바람이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준 하나님이라 할까요?
어머니가 있는 이 고향이기에,
내 찾아갈 곳이고향이기에,
어디에도 어머니가안 계시기에,
내가 어머니 될 마음으로
하늘을쳐다봅니다.
후투티는 날아갔지만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가로히 풍요롭습니다.
/고향가는 길/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여정이천국을
목적지로 하는
여행길이라고 한다면,
그 여행을 포기하고
이 세상의 즐거움과
행복에 안주하고자 하는
유혹들이 많지 않던가요?
영혼의 주장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신실하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육체의 정욕은 힘들고 피곤한
여행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즐거움과 편리함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자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좋은데
왜 힘들게 고생하며
여행을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명절에 고향 가는 사람들이
여행이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천국을 가진 사람들은
그 천국을 향한 여행을
멈추거나 머뭇거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종종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자기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나쁘다고,
악행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그런 비방에
대항해서 싸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모습을 보고
놀라고 감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모습에 감동하게 하려면
웬만큼 착해가지고는 안 될 같습니다.
우리의 나그네 삶은
그래서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힘들고 피곤한 것이
우리의 목적지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그렇게 지쳐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여러분의 마음을 적셔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같은 나그네 길을 가는 우리가
서로 위로하며 힘들 때 부축하고
끌어주면서 힘든 여행길을
기쁨과 감사함 속에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향 가는 길이
어렵고 피곤할지라도
목적지를 향한 소망과 기대 속에
행복한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