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 1606년(선조39)-1672년(현종13)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춘옹(春翁), 시호는 문정(文正)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추앙… 도학 계승에 온 힘
동춘당을 함께 지칭하는 용어 가운데 양송(兩宋), 삼송(三宋), 충청오현(忠淸五賢) 등이 있다. 양송은 동춘당과 우암 송시열을, 삼송은 여기에서 더해 제월당(霽月堂) 송규렴(宋奎濂, 1630-1709)을, 그리고 충청오현은 양송에다 윤선거와 이유태를 더해 부르는 용어다.
충청오현은 조선 중기에 문묘에 종사할 때 불렀던 오현(五賢,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에 견주어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용어는 모두가 선현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도 동춘당을 기리는 표현 가운데, ‘일대종유(一代宗儒)이요 삼조빈우(三朝賓友)’라는 문자가 보다 여실히 선생의 면모를 설명한다고 본다.
동춘당이 한 시대를 대표한 학자요 선생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유종(儒宗), 또는 종유(宗儒)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임금과 세자를 올바르게 보도하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참여한 신하의 역할을 했는데, 동춘당은 인조와 효종 현종 3대를 걸친 사부(師傅)의 역할이 있었다. 이를 기려서 ‘삼조의 빈우’라고 하는 것이다.
동춘당은 충청도 회덕의 송촌에 세거하는 은진 송씨 가문 출신으로, 서울 정릉에서 청좌와(淸坐窩) 송이창(宋爾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릉은 사계와 신독재가 난 곳으로 동춘당과 함께 문묘에 배향된 세분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에는 이를 기려 ‘삼현대(三賢臺)’라는 곳이 있다 한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그는 황강 김계휘의 아우다. 황강의 아들이 사계 김장생인 점을 고려하면 동춘당은 외손으로 그 학통을 이었다.
동춘당의 사승관계는 사계와 신독재 외에도 청음 김상헌이 있다. 동춘당이 청음에게 올린 편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1646년(인조24, 41세)에 청음에게 편지 한 통을 올린다.
“항상 문하에 나아가 조석으로 모시고 청소의 일을 하면서 높고 크신 도덕을 우러러보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생각건대 청의(淸議)가 비록 한 때는 민멸(泯滅)될 수 있으나 공론(公論)은 길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나, 건강을 더욱 돌보시어 사림(士林)의 기대에 부응하시기 바라옵니다.” 선생님으로 모시며 선생님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제자의 마음이 여실히 담겨있는 편지다.
동춘당은 이 편지에서 선친의 비문을 부탁했고, 이후 4번의 편지를 더 보내 3대의 비문을 모두 청음에게 받게 된다.
동춘당은 우암과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행동한 사이다.
그가 9살 때 우암이 송촌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글을 읽었고 25세 때도 함께 공부했다. 우암이 송촌으로 와 공부한 것은 우암의 부친 수옹 송갑조가 아들을 데리고 와 동춘당의 부친인 청좌와 송이창에게 배우게 한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은 일찍부터 ‘도학지교(道學之交)’를 맺어 평생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분은 어린 시절 서로 옷을 나누어 입은 사이였다. 택당 이식의 아들 외재 이단하(德水人, 좌의정, 1625-1689)는 동춘당을 기리는 만사에서, ‘양송’을 중국의 ‘이정자(二程子,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견주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주요한 비문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우암 글, 동춘당 글씨의 구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순에 있는 정암 조광조 유허비와 남해에 있는 이순신의 사당인 충렬사 비이다. ‘양송’이란 찬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사례다.
동춘당이 15세 때 관례(冠禮, 성년식)를 할 때 사계가 빈을 맡아 행사를 주재했고, 아들인 신독재가 찬(贊, 執事)을 담당했다. 동춘당은 18세 때 역시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된다.
사계와 신독재, 그리고 우복은 동춘당을 ‘예학(禮學)의 대가(大家)’가 될 것으로 예견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예학자로서의 면모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사계의 대표적인 예설서인 의례문해(疑禮問解) 내용 중에 44%가 동춘당의 질문이라는 데서도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동춘당은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한 뒤 문과 별시 초시에까지 합격하였으나 문과로 출신하지는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오직 도학(道學) 계통(系統)의 계승과 후진 양성에 있었다. 동춘당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음의 영향을 받아 존주대의(尊周大義)에 입각해 민족자존(民族自尊)을 일깨우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청음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일시적으로는 꺾이었지만 청의(淸議)와 공론(公論)이 영원할 것임을 강조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동춘당은 추천을 통해 조정에 나아가 이조판서라는 고위직에 이르기도 했으나 관직이 내려오면 끊임없이 사퇴하여 조정에 선 날이 겨우 1년여에 불과했다. 조정에서는 유림의 종장이었던 동춘당의 경륜을 필요로 했지만 그는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무게 있는 정책을 수시로 올렸고 국왕은 이를 경청하려 했다.
왕명으로 간행된 방대한 동춘당의 문집(총 34권 18책 분량)을 보면 1-9권이 상소(上疏)와 차자(箚子), 계사(啓辭), 서계(書啓), 헌의(獻議)다. 이는 40세부터 67세로 졸할 때까지의 27년간 국가 발전을 위해 올린 글이다.
그 대부분이 벼슬을 사양하는 것이지만, 나라와 도(道)를 걱정하고 임금을 바르게 보도하기 위한 내용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가 나라에 올린 글 가운데 문집 16권에 올라 있는 ‘사진춘궁선현격언병폭발(寫進春宮先賢格言屛幅跋)이 주목된다. 동춘당은 학문 뿐 아니라 서법에도 당대 일류였다. 성균관 명륜당에 걸린 현판 글씨를 통해서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우암 역시 필법에 조예가 있어 서단에서는 ’양송체(兩宋體)‘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다.
나라에서 동춘당에게 세자가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선현들의 격언을 정리하고, 또 그것을 병풍서로 써서 올리라는 명이 떨어진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동춘당은 선현들의 말씀 가운데서도 ‘명백하고 쉬운(明白簡易)‘ 것을 위주로 뽑았는데, 중국의 정자와 주자로부터 출발해 우리나라의 퇴계와 율곡의 말씀으로 맺었다. 때는 효종9년(1658, 53세)의 일로 당시 세자는 후일의 현종(顯宗)이었다.
동춘당 문집을 보면 그가 남긴 시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67제(題)에 불과한 작품조차 그 대부분이 사람이 죽었을 때 추모한 시다. 작품 중에 꿈을 노래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평생 퇴계 선생을 내 그리워했거니/세상 버렸어도 아직도 느꺼운바 있네/오늘 밤 꿈속에서 날 가르쳐주셨는데/깨고 보니 산에 걸린 달 창 밝게 비추이는 걸”
그는 ‘평생흠앙퇴도옹(平生欽仰退陶翁)’이라고 고백한 뒤 ‘차야몽중승회어(此夜夢中承誨語)’라 했다.
기몽(記夢)이란 제목의 시 작품은 놀랍게도 돌아가시던 해 정월 11일에 지었다. 공부를 막 시작할 때가 아니라 생을 마감할 때 이 작품을 지은 것이다. 이는 그가 평생을 주자와 함께 퇴계를 스승으로 따라 배우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숙(私淑)의 과정이다. 우암이 기록한 일화 속에도 “공은 동방 선현들 가운데 臍?선생을 가장 존경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동춘당은 온화한 성품으로 예학을 체계화했고 또 험난한 붕당의 시대를 비교적 평탄하게 산 사람이다. 그에게는 많은 일화가 있다. 청장관 이덕무의 저술인 청장관전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청장관은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집에 가서 서책을 보면 첫 권은 손때가 묻었지만 그 나머지는 한 장도 넘기지 않은 상태라고 하면서, 동춘당의 사례를 든다. 동춘당은 남이 빌려간 책을 돌려 받을 때 손때가 묻어 있지 않으면 꾸짖고 다시 주어 읽게 했다.
이에 어떤 사람은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서 그 책을 일부러 깔고 앉고 발로 밟기 까지 해 돌려주었다. 청장관은 이를, 선현의 깊은 뜻을 모르는 한심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동춘당은 특이하게도 시경(詩經)을 읽어 문리(文理)를 얻었다고 했다. 둘째 손자의 증언이다. 그런데 정작 시 작품은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 주자(朱子)의 가르침대로 시의 효용(效用)을 수양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춘당의 어록 가운데, ‘공께서는 항상 인간 만사 가운데 좋은 자손을 두는 것 만한 것이 없다(公嘗曰 人間萬事 莫如有好子孫也)’라는 기록이 있다. ‘호자손(好子孫)’이란 부귀한 자손도, 세상에서 출세한 이도 아닐 것이다.
집을 잘 다스리고 수양을 통해 반듯한 행검을 하며,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후대에 이어주는 ‘봄바람’ 같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사후에 동춘당은 대전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충현서원(忠賢書院), 충북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충남 연기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충남 금산의 용강서원(龍江書院), 경북 상주의 흥암서원(興巖書院), 경남 거창의 성천서원(星川書院), 충북 청원의 검담서원(黔潭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처럼 여러 서원에 배향된 것을 통해 우리는 동춘당 선생이 유림 사회에 끼친 크나큰 업적과, 풍속 교화에 널리 기여한 바를 알 수 있다.
[출처] 恩津宋門(은진송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1606년(선조39)-1672년(현종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