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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김성희)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국내에서 제작된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역사를 조망하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전을 11월 16일(목)부터 2024년 5월 19일(일)까지 과천관에서 개최한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점과 선, 원과 사각형 등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의 한 경향이다. 서구에서는 몬드리안,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각광을 받고,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의 주요한 경향으로 여겨졌다.
국내에서도 기하학적 추상은 1920-30년대 근대기에 등장해 1960-70년대에는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등 한국 미술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존재해왔다. 그러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장식적인 미술 혹은 한국적이지는 않은 추상으로 인식되며 앵포르멜이나 단색화와 같은 다른 추상미술의 경향에 비해 주변적으로 여겨져 왔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지닌 독자성을 밝히고 숨은 의미를 복원함으로써,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 대표 추상미술가 47인의 작품 150여 점을 통해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역사를 조망한다. 특히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건축과 디자인 등 연관 분야와 접점을 형성하고,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연동되면서 한국 미술의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단성주보 제300호 표지’, 단성사, 1929년 2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영화주보는 1920, 30년대에는 극장이 무척이나 번성하던 시기였다. 자연히 극장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했는데, 당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극장이었던 단성사와 조선극장은 홍보 전담 부서를 운영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홍보 수단이 바로 영화 주보이다.
상영 영화와 프로그램을 소개하기 위해 발행했던 영화주보의 표지는 일반적으로는 조선 영화나 서양 영화의 스틸컷 이미지로 장식되곤 했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구성과 원색의 색면을 사용한 추상적인 디자인들 역시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극장의 주요 고객은 최신 유행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었다.
이들에게 배포되었던 영화 주보에 이런 추상 디자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런 디자인이 근대적인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롭고 세련된 이미지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제일선’ 표지, 디자인: 김규택, 보성사, 1932년 7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제일선’ 표지, 디자인: 김규택, 보성사, 1932년 8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잡지 제일선의 표지는 1920-30년대에는 잡지 표징에서도 대담하고 실험적인 표지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관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을 표지에 실었던 것은, ‘제일선’이라는 잡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였던 ‘개벽’에서 이름을 바꿔 재발간한 잡지인데, 당시에는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으로 인해 잡지가 폐간되면 명칭을 바꿔 재발간을 하곤 했는데, 개벽 역시 폐간 후, 혜성이라는 이름을 거쳐 제일선으로 다시 발행된 것이다.
이 잡지의 표지에 기하학적인 추상이 자주 등장한 것은, 이처럼 검열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디자인이 근대의 혁신적 이미지와 계몽의 이념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제일선’의 표지 디자인을 담당한 것은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기자이자 만화가로 활동했던 김규택이었는데요, 그는 이 잡지에 ‘모던 춘향전’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춘향과 이도령이 1930년대의 모던걸과 모던보이로 등장하는 이 만화는 당대의 최신 풍속과 춘향전이라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결합함으로써 1930년대 우리 사회의 유행을 이끌던 모던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동아’ 표지, 신동아사, 1932년 3월,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및 제공./
‘신인간’ 표지, 신인간사, 1927년 7월, 독립기념관 소장.
‘조국성주보’ 표지, 제104호, 조선극장, 1929년 6월 14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중성’ 표지, 디자인: 이상, 중성사, 1929년 6월,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문예운동’, 창간호, 디자인: 김복진, 백열사, 1926년 2월, 현담문고 소장.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 이상, 조선건축학회, 1930년 7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조선강단’ 표지, 조선강단사, 1930년, 근대서지연구소 소장.
김기림, ‘기상도’, 장정: 이상, 창문사, 1936년, 회봉문고 소장 및 제공./
‘제1회 신조형파전 포스터’, 디자인: 손계풍./ ‘제1회 신조형파전 리플릿’ 앞면, 디자인: 변영원.
이상(李箱, 1910-1937) 전 시집, '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
경성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층별 안내도, 국립민속박물관 제공.(현재 신세계 백화점)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시(詩)는 우리에게 이상은 천재적인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인 동시에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건축기사였으며, 잡지의 표지를 디자인하고 소설의 삽화를 그리던 디자이너이자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는 이상의 이런 면모를 드러내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데, 미츠코시 백화점 내외부의 기하학적 외형을 언어를 통해 묘사하는 이 시에는, 공간을 이동하는 화자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비누, 양말, 향수 같은 상품들을 구경하다가 옥상정원에서 도시의 외경을 바라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헤드라이트를 켠 채 달리는 자동차들이 즐비한 거리로 나서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듯한 이 시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기하학적인 디자인과 건축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었음을 알려준다.
전시는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시대별 주요 양상을 따라 5개 섹션으로 구성했다. 첫 번째 “새로움과 혁신, 근대의 감각”에서는 근대기에 미술과 디자인, 문학의 영역까지 확장된 기하학적 추상의 사례를 살펴본다. 1920-30년대의 경성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이 새로움과 혁신을 상징하는 감각으로 인식되었다. 1930년대 김환기와 유영국의 최초의 한국 기하학적 회화 작품 〈론도〉(1938), 〈작품 1(L24-39.5)〉(1939)을 비롯, 1930년대 단성사와 조선극장에서 제작한 영화 주보와 시사 종합지의 표지, 시인 이상의 기하학적 디자인이 돋보이는 잡지 『중성(衆聲)』(1929)의 표지 등을 소개한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달 두 개(Two Moons)’, 1961년, 캔버스에 유채, 김환기미술관 소장.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론도(Rondo’, 1938년, 캔버스에 유채, 61×7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환기(金煥基, 1913~1974), ‘23-Ⅴ-68#22’,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15.3×8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새벽 3(Dawn 3)’, 1964-65년, 캔버스에 유채, 176.9×109.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재)환기재단.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20세기 한국의 추상 미술을 이끈 대표적인 화가로 사실 구상과 추상을 모두 섭렵한 작가이다.
강과 산, 달과 구름 같은 한국적인 정서를 단순하고 절제된 조형 요소를 통해 표현했던 그는, 완전한 추상미술로 전환한 이후에도, 자연과 고향, 그리움의 정서를 잃지 않았다.
김환기의 작품세계는 크게 몇 개의 시기로 구분되곤 하는데, 1950년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다 귀국한 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이른바 파리시기와 서울시기는 자연에 기반한 반추상적인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1960년대 초반의 작품들은 산과 달, 구름 같은 자연의 대상을 단조로운 이미지와 구성, 그리고 청색의 톤으로 표현한다. 고향 앞바다의 물색과 닮았다는 이 청색은, 이후 김환기의 대표적인 색이 되었다. 이후 미국 시기로 들어가면, 그의 작품은 점과 선, 면에 기반한 완전 추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유영국(1916-2002), '산(Mountain)', 1970년, 캔버스에 유채,
136.5×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작품 404-c’, 1940년(2003년 유리지 재제작), 혼합 재료, 48×40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작품 LA-101’, 1938년(2003년 유리지 재제작), 혼합 재료, 40×51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작품 1(L24-39.5)’, 1939년(1979년 유리지 재제작), 유영국미술재단 소장./ 유영국(1916-2002), '역정 2(Joumey 2)', 1938년(2002년 유리지 재제작), 혼합 재료, 81×90.5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산(Mountain)’,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36×13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산(남)(Mountain(South)’,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29×12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산-Blue(Mountain-Blue)’, 1994년, 캔버스에 유채, 126×9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산-Red(Mountain-Red)’, 1994년, 캔버스에 유채, 126×9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작품(Work)’, 1972년, 캔버스에 유채, 133×13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 ‘작품(Work)’, 1974년, 캔버스에 유채, 136×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유영국미술문화재단.
미국 뉴욕 페이스갤러리에서는 유영국의 해외 첫 개인전 ‘Mountain Within’이 10일(현지 시간) 개막했다.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 등 1960, 70년대 작품 17점을 선보이는 이 전시는 12월 23일까지 열린다. 아니 글림셔 페이스갤러리 회장이 유영국을 두고 ‘톱 클래스 화가’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페이스와 PKM갤러리,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은 내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도 유영국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유영국의 아들 유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가 1940년대 일본에서 귀국 후 해외 미술 동향을 접할 수 없어 선택한 것이 가장 변하지 않는 주제인 산”이라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산의 형태를 본질만 남기고 자신의 느낌을 색채로 입혔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러한 보편성이 해외로도 전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유영국(1916-2002), ‘산’, 1966년, 163.2×130cm.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소장.
유영국 화백, 그는 삶이란 '산' 을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산’ 이라는 한 음절은 산을 담기에 너무 짧다. ‘삶’ 이라는 단어 또한 삶을 담기엔 간소하다. 그러나 산을 오르내리고 삶의 곡절을 겪고 나면 결국 산은 산이고 삶은 삶일 수밖에 없는 간명한 진리에 감복한다. 복잡할수록 단순해진다. 고단할수록 선명해진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로 일컬어지는 유영국 (1916~2002)의 ‘산’ (1966년작)은 가장 구체적인 추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난해하고 모호하다는, 추상에 대한 오래된 오해와 편견은 유영국이 생전에 했던 말로 갈음한다. “추상은 말이 필요 없다. 설명이 필요 없다. 보는 사람이 보는 대로 이해하면 된다.”
유영국이 평생을 두고 천착했던 산은 삶의 시원 (始原)이다. 1916년 강원도 (현재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그에게 고향의 높고 웅숭깊은 산은 압도적인 자연의 원형으로 영혼의 마디마다 새겨진다. 해상 상업으로 치부한 집안 출신으로서 후미진 벽촌에서 경성 제2고보를 거쳐 도쿄 문화학원 유학생이 되었고, 추상적이고 전위적인 자유미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활동한다. 해방 후 귀국하여 가업을 이었던 유영국 개인의 삶은, 급경사의 험산 같은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며 생업과 예술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숨 가쁘게 오간다. 고향과 가족은 힘이면서 짐이었다. 귀국 후 10년 동안 붓을 꺾었던 시간은 스스로를 몰아치게 만드는 공백의 공포이기도 했다.
‘문제적 인간’ 임에 분명한 유영국은 중간이 없는 캐릭터다. 1964년 첫 개인전을 열면서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현대미술운동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내던졌고, 개인의 작업실로 돌아간 후로는 심장 박동기를 부착한 채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작품에 매달렸다. “60세까지는 기초 공부” 를 한다며 정해진 일상의 시간표에 맞춰 “기계같이” 그림을 그렸다. 그 타협 없는 숨 가쁜 날들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 듯한 집중과 몰입이 강렬하지만 편안한 ‘균형과 하모니’ 의 색채로 ‘산’ 에 표현되어 있다. 산은 다정한 듯 가혹하다. 고독한 정상과 비밀의 골짜기가 숨어 있고 변화무쌍한 날씨에 시시때때로 낯빛이 달라진다. 그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삶과 같아서, 사람들은 삶을 닮은 산에 간다. 추상은 수많은 해석을 낳기 마련이지만, 1960년 8월 23일 자 ‘조선일보’ 에 그림과 함께 “화제(畵題) ㅡ 산” 에 대해 기고한 유영국의 글은 의외로 소박하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산 고장에서 자란 탓일 게다. 내가 자란 마을에서 평탄한 길을 걸어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가면 끝없는 바다였다 바다를 둘러싸고 첩첩이 헐벗은 산과 웃 입은 산들이 보였다.” (출처: 조선일보 2023년 7월 26일, 글: 김별아 소설가)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은 울진에서 출생한 유영국은, 1935년 동경의 문화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이 전위 미술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유영국 역시 이 시기, 자유미술가협회 같은 전위 미술 그룹에서 활동하면서 합판을 이용한 기하학적인 조형의 부조 작품들을 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40년, 이 작품들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그의 작품에 대해 김환기는 혹독한 평가를 내린다. 마치 새로 생긴 다방의 실내장식처럼 유행만 따를 뿐, 아무 내용도 없는 그림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위적으로 평가받던 미술이 귀국한 뒤에는 인테리어 장식 같다고 폄하된 것이다. 사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기하학적 추상은 일반적으로 인쇄물의 표지 디자인이나 다방, 백화점의 인테리어에 주로 활용되곤 했다.
유영국의 작품에 대한 김환기의 평가는 이런 당대의 분위기에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비판은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순수 미술이냐, 디자인이냐에 대한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런 비판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됐었다. 하지만 유영국은 평생토록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지속적으로 제작했다. 특히 해방 이후로는 점차 자연에 기반한 한국적인 기하학적 미술을 시도하게 된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 유영국(1916-2002)
이상욱(李相昱, 1923-1988), '점(Point)', 1976년, 캔버스에 유채, 91×72cm, 유족 소장.
이상욱(李相昱, 1923-1988), ‘무제 70(Untitled 70) 1970년, 캔버스에 유채, 62×47cm, 유족 소장./
이상욱(李相昱, 1923-1988), ‘무제(Untitled) 1982년, 캔버스에 유채, 93×93cm, 유족 소장.
이상욱(李相昱, 1923-1988)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전, 함흥의 세무서에 취직해 근무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결국 세무서를 그만두고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게 된다.
이후 신조형파 운동에 참여해 1958년 열린 제2회 전시회에 3점의 작품을 출품하는데,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기하학적 추상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자연의 대상을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하는 대신, 부드러운 선과 형태를 기반으로 서정적인 화풍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일필휘지를 바탕으로 한, 절제되면서도 자유로운 서체적인 추상 역시 그의 추상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상욱은 또한 판화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당시로선 새로운 장르였던 판화 기법을 국내에 도입하고 한국판화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미술 교과서 집필에도 여러 차례 참여한 미술 교육자이다.
두 번째 “한국의 바우하우스(Bauhaus)를 꿈꾸며, 신조형파”에서는 바우하우스를 모델로 하여 1957년 한국 최초로 결성된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의 연합 그룹 ‘신조형파’의 활동상과 전시 출품작을 소개한다. 이들은 현대사회에 적합한 미술은 합리적인 기준과 질서를 바탕으로 제작된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라고 보았고, 이것을 산업 생산품에도 적용해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이상을 보여주었다. 건축가 이상순(李商淳)이 당시 촬영한 《신조형파전(新造型派展)》 작품 및 전시장 사진과 김충선의〈무제〉(1959)를 포함한 변영원(邊永園, 1921-1988), 이상욱(李相昱, 1923-1988), 조병현(趙炳賢, 1921-2011)의 출품작 등을 소개한다.
전성우(雨松 全晟雨, 1934-2018), ‘색동만다라(Colorful Mandala)‘,
1968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168×136.3cm, 유족 소장.
전성우(雨松 全晟雨, 1934-2018), ‘공간만다라(空間曼茶羅)’, 1965년, 유족에 따르면 작가가 개인적인 애착을 크게 가졌던 작품이다./ 전성우(雨松 全晟雨, 1934-2018), ‘청화만다라(靑華曼茶羅)광배(光背#47’, 1999년, 캔버스에 유화.
전성우(雨松 全晟雨, 1934-2018), ‘연화만다라(蓮花曼茶羅), 1986년, 수채화 종이.
전성우는 201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간송미술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사재를 들여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하고 지켰던 간송 전형필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미국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던 1세대 화가이기도 하다.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중 터진 전쟁 때문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곳에서 미국 대사관이 주최한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밀즈 칼리지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중, 대학의 만다라 컬렉션을 접하게 되는데, 만다라는 사각형이나 원 같은 기하학적 형태와 불교의 상징적 도상을 통해 부처나 보살의 가르침과 불교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이다. 만다라가 지닌 정신적이면서도 우주적인 의미에 매료된 전성우는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다라라는 주제 아래 자연과 인간, 우주의 신비를 펼쳐낸다.
덕분에 만다라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는데, 서양 중심의 추상회화가 미술의 주류가 된 시점에서, 그는 만다라 속의 기하학적인 조형과 한국적인 미감을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거듭한다. 그 결과 나온 그의 그림은 기하학 문양이 대칭적으로 반복되는 일반적인 만다라 그림과는 달리, 스밈과 울림을 강조하면서 동양적인 철학을 표현한다. 특히, ‹색동 만다라› 시리즈는 색동이라는 한국적인 전통적 색감을 만다라의 기하학적 조형 속에 녹여내고 있다.
이준(2019-2022), '송(頌)-유향(幽鄕)', 1985, 캔버스에 유채, 130.5×9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준(2019-2022), ‘달무리(Halo around the Moon)’, 1979년, 캔버스에 유채, 130×194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준(2019-2021), ‘석양(夕陽)’, 199년1, Acrylic on canvas, 97x130cm.
이준(2019-2021), ‘채원(彩苑)‘, 1994년, Acrylic on canvas, 130x230cm.
이준(2019-2021), ‘축제(祝祭)’, 1990년, Acrylic on canvas, 59x101.5cm.
남사(藍史) 이준(2019-2021)은 한국의 풍경과 서정에 기반한 한국적 기하 추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경상남도 남해에서 출생한 그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의 자연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때 보았던 햇살이 비추는 바다의 빛깔과 아름다운 섬의 풍경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이후 그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그는 1960년대, 앵포르멜 경향의 표현적인 추상을 제작하다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한다.
이준은 자연을 평면화해 삼각과 사각형, 동그라미를 조형 요소로 삼아 자연을 그려냈다. 이렇게 고향 남해의 모습을 기하학적 조형과 연계한 작품에 그는 ‘고요하게 고향을 기리다’라는 뜻의 ‹송-유향(頌-幽鄕)›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것으로 서정적 분위기를 더했다.
그의 작품에서 돋보이는 따뜻한 색채와 서정적 작품명은 기하학적 형태가 가지는 차가운 이미지를 대체시키고 있다. 자연의 이미지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추상이라는 점에서 이준의 작품은 독자적인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보여준다.
조병현(1921-2011), ‘작품 4-69(Work 4-69)’,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30.3×130.3cm, 유족 소장./
조병현(1921-2011), ‘작품 2-69(Work 2-69)’,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28×12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조병현(1921-2011)은 충북 청원 출생으로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57년 신조형파에 가담해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건물이나 도시의 풍경을 입체주의적으로 분할하면서 평면화해 나간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추사 김정희의 서예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체를 연상시키는 표현적인 추상 작업을 보여주기도 했다. 동시에 삼각형과 원 등 기하학적인 형태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듯이 배치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1960년대에는 신조형파에 이어 미술가와 디자이너가 함께 활동했던 신상회에 가담해 추상 작업을 선보였다.
세 번째 “산과 달, 마음의 기하학”에서는 김환기, 유영국, 류경채, 이준(2019-2022) 등 1세대 추상미술가들의 작품과 이기원, 전성우, 하인두 등 2세대 추상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적인 기하학적 추상의 특수성을 살펴본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서는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하는 과정을 거쳐 추상을 제작하거나, 자연을 대하는 서정적인 감성을 부여한 작품들이 발견된다. 엄격한 기하학적 형식을 탈피하여 한국적 특수성을 담아낸 유영국의 〈산〉(1970), 전성우의 〈색동만다라〉(1968) 등을 선보인다.
이승조(李承祚,1941-1990), '핵(核) G-999', 1970년, 캔버스에 유채, 192×11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승조(李承祚,1941-1990), '핵 (Nucleus)‘, 1987년,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100).李承祚./
이승조(李承祚,1941-1990), '핵(核) Nucleus,77’,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73x130cm.
이승조(李承祚,1941-1990), '핵(核) PM-76(Nucleus PM-76)‘,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62x162cm.
이승조(李承祚,1941-1990)는 홍익대 서양화과를 다니면서 동료들과 함께 오리진 그룹을 결성하여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핵(核)› 연작을 출품하면서 본격적인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핵’은 모든 물질의 기본이 되는 요소, 즉 핵심을 의미한다.
이승조에게는 파이프 같은 원통과 원기둥 형태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주요한 조형 요소이자 모티브가 되었는데, 그는 이 핵 시리즈를 통해 조형적인 질서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단단한 금속의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그림에 ‘핵’이라는 제목까지 붙여졌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핵발전을 동력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던 당대 한국사회의 상황과 연계돼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급격하게 도시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의 현대적 면모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1960년대 말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 발사를 계기로 우주 공간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이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김창억(1020-1097), ‘환상(Fantasy)’, 1964년, 캔버스에 유채, 131×161cm, 개인 소장.
김창억(1020-1097), ‘추상(Abstraction)’, 1969년, 캔버스에 유채, 90×73cm, 개인 소장./
김창억(1020-1097), ‘추상(Abstraction)’, 1970년, 캔버스에 유채, 90×73cm, 개인 소장.
김창억(1020-1097)은 서울에서 출생해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한 1세대 추상미술가이다. 피카소와 칸딘스키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자연이나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하는 것으로 추상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작업의 핵심은 풍경이다. 1960년대에는 경주의 탑과 같은 전통적 소재를 추상화해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 출신의 유영국, 이대원, 임완규, 장욱진과 함께 1961년 2·9동인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 작가들 대부분이 가담했던 그룹 신상회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이번 전시에 출품된 김창억의 ‘환상’은 1964년도 신상전 출품작이다.
하인두(1930-1989), ‘피안(Nirvana)’, 1979년, 캔버스에 유채, 116×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인두(1930-1989), ‘혼불-빛의 회오리(Fire of Soul-Cyclone of Light)’,
1989년, 캔버스에 유채, 194×26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인두(1930-1989)는 경상남도 창녕 출생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현대미술가협회와 악튀엘에 가담하며 앵포르멜 미술 운동을 주도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이후에는 불교 사상에 기반해 불화, 단청, 민화 등의 요소와 기하학적 추상의 구성을 연계한 ‘만다라’, ‘혼불’ 연작을 제작했다.
변영원(邊永園, 1921-1988), ‘합존 97번’, 1969년, 캔버스에 유채, 91×11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邊永園, 1921-1988), ‘미상 8(Tite Unknown 8)’, 1975년, 캔버스에 유채, 91×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1921-1988), ‘미상 14(Tite Unknown 14)’, 1969년, 캔버스에 유채, 91×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1921-1988), ‘미상 6(Tite Unknown 6)’,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16.5×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1921-1988), ‘미상 10(Tite Unknown 10)’, 1966년, 캔버스에 유채, 91×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1921-1988), ‘원중원(2)Circles in Circle(2)’, 1966년, 캔버스에 유채, 91×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1921-1988), ‘원중원(A)Circles in Circle(A)’, 1961년, 캔버스에 유채, 91×9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邊永園, 1921-1988), '전위정신(Spirit of Avant-garde)‘, 1959년, 캔버스에 유채, 115×8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邊永園, 1921-1988), '서울역 부근(Seoul-Station Neihborhood)’, 1957년, 캔버스에 유채, 112×72.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邊永園, 1921-1988), '반공여훈(Anti-Communist Female Souls)‘,
1952년, 캔버스에 유채, 77.5×114.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邊永園, 1921-1988)은 서울에서 출생,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이후 귀국한 그는, 구상적이고 아카데믹한 화풍 중심의 국전과는 거리를 둔 채 비구상적인 작품을 일관되게 제작한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현대미술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던 그는, 그 바탕이 되는 예술이론도 적극적으로 탐구했는데, 1950년대, 입체파와 초현실주의를 절충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그의 화풍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게 된다. 특히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바탕으로 1957년 신조형파를 결성하면서 새로운 조형 실험을 주도적으로 해나갔다.
1959년에 제작된 ‹전위정신›에는 당시 작가가 추구했던 현대적인 미술, 전위적인 미술이 어떤 것인지 잘 드러나 있는데, 이 작품을 이루는 모든 것은 점과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면에 포착된 세상의 모습은 이렇게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치환되고 있다.
점, 선, 면에 기초한 변영원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이후, 원의 구조에 기초한 화풍으로 다시 변화하게 된다.
변영원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원색의 바탕 위에 반듯한 원을 다양하게 배치한 작품들을 제작한다. 밝은 색조와 원형의 기하학적인 형태를 강조한 이 작품들은 작가의 독자적인 조형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는 세상의 모든 물체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대상 또한 단순한 선과 색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과 색만으로 이루어진 추상미술이야말로 미래의 원자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미술이라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그림에 표현된 동그랗고 반듯한 원은 세상의 기본 요소인 원자를 연상시키도 하는데,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물리학 같은 현대과학과 동양의 음양 사상을 조화시킨 ‘합존 조형론’을 만들어낸다. 우주 전체의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생성하고 변화한다는 합존 조형론 속에서 꾸준히 작업을 지속한 그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미래적인 미술을 꿈꾸며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성실하게 구축해나간 작가였다.
한묵(韓默, 1914-2016), ‘금색운의 교차’, 1991년, 캔버스에 유채, 254×20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묵(韓默, 1914-2016), ‘금색운의 교차(Crossing of Gilded Rhyme)’(부분도), 1991년, 캔버스에 유채, 254×20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묵(韓默, 1914-2016), ‘무제(Untitled)’, 1967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54×54cm, 개인 소장./
한묵(韓默, 1914-2016), ‘십자구서(Cross C0mposition)’, 1969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79.5×80cm, 개인 소장.
한묵(韓默, 1914-2016)은 1961년 프랑스로 이주한 이후 작고할 때까지 50년 이상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했다. 1960년대 말부터 컴퍼스를 사용해 작품을 제작하면서 기하학적인 형태와 수학적으로 계산된 듯한 화면의 구조를 만들어냈던 그는, 70년대부터는 원형과 나선형의 형태를 통해 움직임을 강조한 작품들을 제작하게 된다.
전시된 작품, ‹금색운의 교차›를 보시면, 초록색 바탕 위에 노랑과 주황색의 사각형, 마름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선형의 금빛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복적인 선과 교차하는 색은 화면의 공간 위에 리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 리듬은 순환하는 우주의 리듬과 일맥상통하는데, 한묵은 1969년,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는 것을 목격하며, 한동안 붓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충격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으로 이어졌고, 이후 작가는 우주 시대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기하학적 추상과 옵아트를 통해 보여주게 된다.
한묵(韓默, 1914-2016), ‘상봉’, 1991년, 캔버스에 아크릴, 200×300cm, 개인소장.(참고작품)
최명영(崔明永, 1941- ), ‘오(悟) 68-C(Satorie 68-C)’,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65×142.5cm, 작가 소장.
최명영(崔明永, 1941-현재), ‘PEN 69-O’,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95×132cm, 작가 소장./
최명영(崔明永, 1941- ), ‘오(悟) 26(Satorie 26)’,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95×132cm, 작가 소장.
최명영(崔明永, 1941- ), ‘오(悟) 68 A(Satorie 68 A)’,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62×14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최명영(崔明永, 1941-현재), ‘등식 75-31’,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46.5x112cm.
최명영(崔明永, 1941-현재)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서승원과 함께 홍익대 재학 시절 오리진 그룹의 창립에 참여했다. 근원, 기원을 뜻하는 오리진이라는 그룹명을 직접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이름에는 기성의 미술과 구분되는 새로운 미술을 만들기 위해 조형의 근본을 탐구하고자 했던 청년 작가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 최명영은 1960년대 말부터 깨달음을 뜻하는 ‹오(悟)› 시리즈를 통해 원색의 기하학적 추상 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당시 그는 한창 도시화, 산업화 되어 가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기하학적인 패턴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당대의 유행 패션에서도 이런 패턴들이 증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런 주변적 요소들은 그가 이런 미술을 제작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등식› 연작과 펜촉을 확대한 ‹펜› 연작을 제작한 그의 작품 세계는, 평면을 탐구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성자(李聖子, 1918-2009), ‘, ‘2월의 도시 74(City of February 74)’,
1974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150cm, 이성자 기념사업회 소장.
이성자(李聖子, 1918-2009), ‘극지로 가는 길 87년 5월(Chemin des Antipodes Mai 87)’, 1987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20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성자(李聖子, 1918-2009), ‘극지로 가는 길 87년 5월(Chemin des Antipodes Mai 87)’, 1987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20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성자(李聖子, 1918-2009)는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처음으로 미술 수업을 받고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후 2009년 작고할 때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1970년대부터 작가는 ‹도시› 연작을 통해 기하학적 추상 미술을 제작한다. 이 연작에서는 특히 음과 양으로 분리된 원의 형상을 강조하는데, 사실 이 연작은 파리와 뉴욕 같은 서구의 대도시 풍경에서 감화를 받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동양의 음양론을 접목함으로써 도시를 음과 양의 상반된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표현한다.
이 시리즈는 1970년대 말이 되면 ‹극지로 가는 길› 연작으로 이어진다. 이 연작부터는 원형의 크기가 작아지는 대신 배경 공간이 보다 강조된다. ‹극지로 가는 길›은 작가가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 위를 지나갈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극지 풍경을 보며 구상하게 됐다고 하는데, 이 연작들에서는 드넓은 창공과 산맥, 그 사이를 맴도는 단청색의 띠와 반원, 선과 점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로 반짝이고 있다.
‹도시› 연작에서 보여준 도시공간에 대한 관심이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이 연작의 배경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 점차 광활한 우주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어 간다.
김재관(1947- ), ‘운명 1970-1(70-2021) Destiny 1970-1(70-2021)’,
1970-2021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9×259.1cm, 청주시립미술관 소장.
김재관(1947- )은 충북 청주 출생으로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운명1970-1(70-2021)’은 1970년에 제작한 동명의 작품을 2021년에 재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작품은 기둥이나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중앙에 배치하고, 여기에 원자 구조의 배열처럼 보이는 반복적인 원형의 형태를 더한 것이 특징이다. 김재관은 1970년도 국전에 ‘운명 1970-1(70-2021)’과 유사한 구성의 ‘파워 F(Power F)’를 출품해 입선했는데, ‘파워’라는 제목이 당시 확산한 원자력이나 핵에너지의 파워를 상징함은 직접 밝힌 바 있다. ‘운명 1970-1(70-2021)’은 개인사적 경험을 반영한 제목이지만, 그의 1970년대 작업은 기본적으로 과학과 원자력의 발전을 강조했던 1970년대라는 시대와 관련한다.
김종일(1941-2023), ‘미니 25(Mini 25)’,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60.5×129.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종일(1941-2023), ‘미니 25(Mini 25)’,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60.5×129.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최종섭(1938-1992), ‘71-양화(Painting-71)’, 1971년, 캔버스에 유채, 130×16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종일(1941-2023)과 최종섭(1938-1992)은 1964년 산수화와 같은 전통적인 회화가 대세를 이루던 호남지역에서 현대미술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목적으로 그룹 에포크를 결성했다. 추상미술의 저변확대를 기치로 결성된 이 단체에서 김종일과 최종섭은 기하학적 추상미술 중심의 작업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작업과 그룹 에포크의 활동은 1960-70년대에 기하학적 추상이 지방으로까지 확산하였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하동철(1942-2006), ‘반응-72-감마(Reaction-72-γ)’, 1972년, 캔버스에 유채, 스폰지 저부조 179.5×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동철(1942-2006), ‘반응-72-베타(Reaction-72-β)’, 1972년, 캔버스에 유채, 179.5×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동철(1942-2006)은 충북 옥천 출생으로 1965년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60-70년대 국전에서 기하학적인 형태와 표현적인 기법을 결합한 작품으로 여러차례 특선을 수상하기도 했다. ‘반응-72-감마’와 ‘반은-72-베타’는 마름모꼴 형태 안에 원형의 오브제를 배치하고 형과 도료로 채색한 기하학적인 추상 작품이다. 그리스 문자 감마와 베타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의 기원을 밝힌 ‘알파 베타 감마 이론’과도 연계해 해석할 수 있다.
하종현(1935- ), ‘도시 계획 백서 68(Urban Planning 68)’,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20×120cm, 개인 소장.
하종현(1935- ), ‘도시 계획 백서(Urban Planning)’, 1970년, 캔버스에 유채, 80×8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종현(1935- ), ‘탄생-A(Naissance-A)’, 1967년, 캔버스에 유채, 실 130×16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종현(1935-현재), ‘conjunction 91-57', 1991년, oil on and pushed fr, 101×81cm.
하종현(1935-현재), ‘conjunction 86-23’, 1986년, Oil on and pushed fr, 120×120cm, /
하종현(1935-현재), ‘conjunction 92-54’, 1992년, oil on and pushed fr, 100×80cm.
하종현(1935-현재), ‘Conjunction 97 027-1접합’, 1997년 Oil on and pushed fr, 260×190cm.
하종현(1935- )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홍익대학교 회화과 출신으로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학생의 시절 서양식 물감, 기법을 활용하면서 기존의 서양화를 능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어 본인만의 스타일대로 동양적이고 독창적인 예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홍익대 동문이었던 박서보 작가와 같은 연배였던 정상화 작가와 함께하게 되며 한국 앵포르멜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하종현 화백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면서 ‘접합’시리즈와 2010년부터 시작되었던 ‘이후접합’등을 선보이며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박서보(1931-2023), ‘유전질 No.1-68(Hereditarius-No.1-68)’, 1968년, 캔버스에 유채, 79.8×7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서보(1931-2023), ‘유전질 No.2-68(Hereditarius-No.2-68)’,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31×131cm, 서보미술문화재단 소장.
박서보(1931-2023), ‘유전질 No.4-68(Hereditarius-No.4-68)’,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28×128cm, 서보미술문화재단 소장.
박서보(1931-2023) 서양화가는 <묘법> 연작을 비롯한 단색화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았다.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뒤 동방문화회관화랑에서의 4인전을 시작으로 화단에 나왔다. 한국현대미술가협회전의 핵심 멤버로 앙포르멜 미학의 선두주자로 활약했다. 추상미술 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표작 <원형질> 연작과 <묘법> 연작을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아라리오 갤러리 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전시를 열었다.
변희천(1909-1997), ‘미상(Unknown)’, 1957년, 하드보드에 유채, 44.5×36.5cm,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변희천(1909-1997), ‘미상(Unknown)’, 1960년, 하드보드에 유채, 89×70.5cm,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변희천(1909-1997)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1세대 추상미술가이다. 해방 이후 이철이, 김종하와 함께 <3인전>을 개최하며 미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 신조형파 작가들 중 가장 연배가 높았지만 후배 작가들과 함께 신조형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주로 풍경을 평면화, 단순화하면서 추상을 만들어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조형파는 그가 유일하게 참여한 미술 그룹으로 1960년대 이후에는 고향 춘천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재야 작가로 활동했다.
네 번째 “기하학적 추상의 시대”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 기하학적 추상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된 양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우선, 1967년에 개최된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계기로 ‘청년 미술로서의 기하학적 추상’이 등장하게 된 상황을 소개한다. 앵포르멜(Informel) 이후의 미술을 모색했던 최명영(崔明永, 1941-현재), 문복철이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출품했던 작품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재공개된다.
이승조의 1970년 《제4회 오리진》전 출품작도 53년만에 재공개된다. ‘미술, 건축, 디자인의 삼차각설계도’에서는 당대의 미술가, 건축가, 디자이너들이 공통적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서울의 현대성과 미래적인 국가의 면모를 재현하는데 적합한 미술로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상정한 상황을 소개한다. 최초로 공개되는 윤형근의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작 〈69-E8〉(1969)을 포함해 박서보, 하종현(1935-현재) 등 한국 추상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기하학적 추상 시기의 작품을 선보인다. ‘우주시대의 조감도’에서는 1969년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시작된 우주시대와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접점을 소개한다. 변영원의 〈합존 97번〉(1969)을 포함해 이성자(李聖子, 1918-2009), 한묵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조용익(1934-2023), ‘68-112’,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46×112cm, 개인 소장./
조용익(1934-2023), ‘68-113’,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46×112cm, 개인 소장.
조용익(1934-2023)은 1934년 함경남도 북청 출생으로 1958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 현대미술가협회전, 악튀엘전 등에 참여하며 앵포르멜 미술을 제작했다. 1960년대에 파리 비엔날레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했고, 1960 년대 말부터 점차 기하학적 추상으로 나아갔다. 한복을 입은 인물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거나 오방색과 같은 전통적 색채를 사용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1967년 한국조형작가회의에 참여하는 등 건축가들과의 협업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김봉태(1937- ), ‘그림자 연작 79-25(Shadow Series 79-25)’, 1979년(2015년 재제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183×121cm, 작가 소장./ 김봉태(1937- ), ‘그림자연작 79-28(Shadow Series 79-28)’, 1979년(2015년 재제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180×121cm, 작가 소장.
김봉태(1937- )는 1937년 부산 출생으로 1961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60년 서울대, 홍익대 재학생들과 국전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며 60년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1962년에는 악튀엘 창립에 가담하면서 앵포르멜 미술을 시도했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티스 미술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 시기에 그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조형으로서 기하학적 형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림자연작>은 1970년대에 제작된 김봉태의 대표작으로, 2차원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그림자를 통해 3차원의 입체로 확장한 작업이다.
최상철(1946- ), ‘1970년 여름-K(1973 Summer-K)’, 1970년, 캔버스에 유채, 200×20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최상철(1946- ), ‘1973년 5월-C(1973 May-C)’,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45×145c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최상철(1946- ), ‘1973년 5월-K(1973 May-K)’,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45×145cm, 작가 소장./
최상철(1946- ), ‘71-양화(Painting-71)’, 1971년, 캔버스에 유채, 130×16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최상철(1946- ), ‘무더운 여름 Ⅱ(Hot Summer Ⅱ)’,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작가 소장.
최상철은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당시 실험미술과 추상미술을 주도했던 젊은 미술가 그룹들과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 나간다. 그리고 기존의 회화와 구분되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그리기 방식을 벗어나 면을 분할하고 큰 붓으로 분할된 면을 채색하는 방식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이 시기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 건설된 고속도로나 고층빌딩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작품의 제목에는 그림을 제작하던 시간, 그리고 그 당시 느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했다고 한다.
김한(1938-2008), ‘인테리어 10(Interior 10)’,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48×14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한(1938-2008), ‘인테리어 1(Interior 1)’,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63×131cm, 개인 소장.
김한(1938-2008), ‘인테리어 3(Interior 3)’,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62×1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한(1938-2008), ‘인테리어(Interior)’,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48×148cm, 유족 소장.
김환은 1938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홍익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인테리어› 연작은 1960년대에 제작된 그의 대표작인데, 이 연작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구분된니다. 우선, 점, 선, 면, 그리고 삼각형과 사각형 같은 기초적인 조형 요소와 기하학적인 구성을 강조하는 경향의 작품들이다. 다음으로는 색면의 대비를 강조해 옵티컬한 특성이 두드러지는 경향의 작품들이 있는데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인테리어 10›은 이 가운데 후자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마름모꼴의 사각 형태를 화면에 반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마치 화면이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는데,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건축과 디자인과의 관계성을 두드러지게 부각하고 있다. 이 두 요소는 1960년대 말 당시 한국 사회의 시각적 현실을 구성하는 주역으로서, 기하학적 추상미술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당시 김한이 미술계 안팎의 현실을 반영해 그림을 제작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기원(1927-2017), ‘일월(The Sun and Moon)’,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30.0×162.2cm, 유족 소장./
이기원(1927-2017), ‘간섭 81-1(Spannung 81-1)’, 1981년, 캔버스에 유채, 146×113cm, 유족 소장.
이기원(1927-2017), ‘작품 Q(Work Q)’,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유족 소장./
이기원(1927-2017), ‘투영 75-Q(Projection 75-Q)’,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60×130cm, 유족 소장.
이기원(1927-2017)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46년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술 대학에서 2년간 수학했다. 국전 추천작가를 역임하는 등 주로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일월>은 1967년 국전에서, <작품 Q>는 1968년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이기원은 1981년작 <간섭 81-1>의 영문 제목을 '슈파눙(Spannung)' 으로 붙였는데, 이는 칸딘스키가 즐겨 쓴 개념이다. 점과 선, 색채와 같은 조형 요소들이 화면 안에서 수축하고 팽창하면서 만들어내는 상호적인 긴장감을 뜻한다. 재야 작가로서 이기원의 작업에 대해선 비교적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슈파눙'을 통해 그가 칸딘스키의 작업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이 그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바탕을 형성하는 요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두(蘇斗) 김인환(金仁煥, 1941- ), ‘단청시리즈(Danchong-series)’,
1970년, 캔버스에 유채, 93.3×75cm,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김인환, ‘단청시리즈(Danchong)’, 1972년, 캔버스에 유채, 161×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인환, ‘단청시리즈(Danchong-series)’, 1970년, 캔버스에 유채, 93.3×75cm,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김인환(金仁煥)은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다니면서 강국진, 정찬승 등과 함께 신전동인이라는 실험적인 미술 단체를 결성한다. 전위적인 오브제 작업을 지향했던 이들은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하는데, 전시 참여 작가들은 전시 개막일 오전, 세종로 일대를 행진하며 전시를 알리는 가두 행진 겸 시위를 벌인다. 이 행진에 마름모꼴 패턴이 그려진 추상회화를 들고 참여한 김인환은, 이 작품을 비롯해 기하학적 조형에 기반한 ‹ㄱ,ㄴ,ㄷ,ㄹ,ㅁ,ㅂ› 연작을 전시에 출품했다.
서양적인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당시의 한국현대미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진정한 나의 것, 우리의 것은 무엇인지 고민했던 그의 작업은 이 전시 이후, ‹단청 시리즈›로 이어진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하학적인 조형과 오방색에 기반한 단청의 색조를 연계한 작업인데,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한국 건축물의 특성을 조형적으로 분석하고, 건축물의 구성요소를 해체해 재배치하고 반복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추상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부분적으로 거칠고 두터운 질감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건축물에 사용된 황토 같은 재료의 본질까지 표현해내고 있다. 이 연작을 통해 그는 한국의 전통과 기하학적인 추상의 접점을 모색해나간다.
윤명로(1936- ), ‘자 Ⅴ-ⅡⅩⅤⅠ(Ruler Ⅴ-ⅡⅩⅤⅠ)’, 1968년, 리넨에 아크릴과 혼합 매체, 130×130cm, 개인 소장./ 윤명로(1936- ), ‘자 Ⅴ-ⅢⅩⅤⅡ(Ruler Ⅴ-ⅢⅩⅤⅡ)’, 1968년, 리넨에 아크릴과 혼합 매체, 130×130cm, 개인 소장.
윤명로 (1936- )는 1936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1960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60년 국전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60년미술가협회, 악튀엘 등을 통해 앵포르멜 미술을 시도했다. 1962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외벽 모자이크 벽화를 제작했다. 1967년에 미술가와 건축가가 연대해 창설한 한국조형작가회의에 참여하는 등 건축가들과의 협업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1969년 록펠러 재단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뉴욕에서 판화를 학습했고, 이 시기부터 '자 (Ruler)'를 주제로 한 연작을 전개했다. 작가는 인간 사회의 규범 혹은 통치자를 자에 비유했는데, 당시 기하학적 추상을 '자로 그린 그림'으로 지칭했던 것과 연계 하면 자가 가지는 의미를 더욱 복합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 연작은 기하학 적이고 평면적인 요소와 물감의 균열이 이루는 대비적인 요소를 부각하기도 한다.
김충선(金忠善, 1925~1994), ‘무제(Untitled)’, 1959년, 캔버스에 유채, 43×58cm, 개인 소장.
김충선(金忠善, 1925~1994), ‘무제(Untitled)’, 1959년, 캔버스에 유채, 43×58cm, 개인 소장.
김충선(金忠善, 1925~1994)은 1956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서 함께 공부하던 젊은 미술가 4인방이 한국 화단에 한바탕 파란을 일으킨다. 당대 미술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이른바 ‘국전’에 반기를 내걸며 ‘반(反) 국전 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 박서보로 구성된 이들 4인방은 아카데미즘을 기반으로 한 구상적인 작품들을 선호했던 국전의 보수적인 성향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미술 운동을 기치로 ‘4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김충선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재구성된 대상을 다양한 색채로 표현하는 기하학적 추상 형식의 화풍을 선보였는데, 대상을 원색의 색면으로 분할하고 평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물감을 두껍게 발라 화면의 질감을 강조하는 것이 당시 그의 작품의 특징이었다.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이 전시가 열린 다음 해, 김충선은 국전과 거리를 둔 채 활동하던 재야 작가들이 주축이 된 신조형파에 가담하게 된다.
서승원(徐承元, 1941-현재), ‘동시성 77-53(Simultaneity 77-53)’, 1977년,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작가 소장./ 서승원(徐承元, 1941-현재), ‘동시성 77-360(Simultaneity 77-360)’, 1977년, 캔버스에 유채, 130×97cm, 작가 소장.
서승원(徐承元, 1941-현재), ‘Simultaneity 82-132’, 1982년, Ink, pencil on Korean paper, 63.5x94cm./
서승원(徐承元, 1941-현재), ‘Simultaneity 89-1123’, 1989, Acrylic on canvas, 130×162cm.
서승원(徐承元, 1941-현재), ‘Simultaneity 81-27’, 1981년, Acrylic on canvas, 36×70cm.
서승원(徐承元, 1941- ), ‘동시성 67-2(Simultaneity 67-2)’,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62.3×130.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승원(徐承元, 1941- ), ‘동시성 68-9(Simultaneity 68-9)’, 1968년, 캔버스에 유채, 162×112cm, 작가 소장.
서승원(徐承元, 1942-현재)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 재학 시절, 동양 미술과 한국 미술사를 배우며 한국의 전통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후, 그는 한옥에서 생활하면서 본 격자의 문창살이나 고가구가 지닌 전통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조형을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 작품에 반영하기도 하는데,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2년, 그는 이승조, 최명영 등과 함께 ‘오리진’이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우리의 근원과 뿌리를 미술 속에 표현하는 것을 예술적 기치로 내건 이들은, 1967년에 열린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 기하학적인 추상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서승원은 자신의 작품에 ‘동시성’이라는 제목을 일괄되게 붙이는데, 그가 말하는 동시성이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한 화면에 동시적으로 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격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된 초기의 동시성 그림들은 마치 자로 대고 그린 그림처럼 명확한 형태와 원색의 색조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는 그림의 양식이 변하는데, 은은한 색조의 바탕 위에 사각형의 형태들이 부유하는 듯 보이게 함으로써 화면 속의 공간감을 부각하는 작품으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동시성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와 정체성을 탐구했던 그는, 반세기에 걸친 시간 동안 일관되게 기하학적 추상을 지속해오고 있다.
문복철(1941-2003), ‘작품 67-102(Work 67-102)’, 1967년, 캔버스에 유채, 163×1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복철(1941-2003)은 1941년 전북 군산 출생으로 홍익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무동인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참여했고, 국전에도 여러 차례 출품해 입선한 바 있다. <작품 67-102>는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출품작이다. 이 전시는 청년 작가들이 앵포르멜 이후의 대안적 미술을 선보이는 장이었고, 해프닝과 오브제,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전시되었다. 이 중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주로 오리진 작가들의 전유물로 알려졌으나, <작품 67-102>는 무동인의 문복철도 이와 같은 작품을 제작했음을 알려준다 문복철은 이후 광주 에서 결성된 추상미술 단체 에포크에서 활동하면서 추상미술의 지역 확산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다섯 번째 “마름모-만화경”에서는 창작집단 다운라이트(Downlight)&오시선(Osisun)의 커미션(Commission) 작품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이 지닌 마름모와 같은 반복적 패턴에 주목하고 이를 디지털 만화경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그룹은 아티스트, 디자이너, 엔지니어로 구성되어 순수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탐색한다. 전시 기간 중 ‘전문가 강연 및 토론’과 ‘학예사 대담’ 등 전시 연계프로그램이 개최된다.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디자인>을 주제로 미술사,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학술적 의의를 심층적으로 논의한다.
● 윤형근 색면 추상 최초 공개
윤형근(1028-2007), ‘69-E8’. 면천에 유채, 165×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
윤형근(1028-2007), ‘제목 미상(No Title)’, 1970년, 리넨에 유채, 52.5×40.5cm, 개인 소장./ 윤형근(1028-2007), ‘제목 미상(No Title)’, 1970년, 리넨에 유채, 60×45cm, 개인 소장./ 윤형근(1028-2007), ‘청에 백색(White in Black)’, 1970년, 리넨에 유채, 33.5×24cm, 개인 소장.
윤형근(1028-2007)은 김중업이나 김수근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건축가들과 교류하며 미술과 건축의 관계성에 주목했던 작가이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69-E8›라는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출품하는데, 다수의 드로잉과 소품을 통해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모색해나가던 1960년대 그의 작품은 주로 밝은 색채의 추상화였다.
1970년대 이후, 그의 작업은 개인적인 고난과 함께 변화를 겪게 된다. 1973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청다색의 어두운 색조에 기반한 표현적인 추상 작품이 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말에 그려진 기하학적 추상 작품은 이후 그의 대표작이 등장하는 데 있어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선 윤형근(1928∼2007)이 196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하며 출품한 ‘69-E8’이 처음 공개된다. 이 작품은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만 확인됐을 뿐 그간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 유족이 재작년 작업실을 정리하며 발견했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다.
마직물이나 한지에 먹색을 번지게 한 무채색의 대표작과 달리 이 작품은 강한 색채가 눈에 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런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건축과 미술의 만남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윤형근도 김중업, 김수근 등 당대 대표적 건축가들과 교류했다”고 설명했다.
한영섭(韓永燮, 1941- ), ‘단청과 콘크리트 NO.9(Dancheong and Concerete NO.9)’,
1969년, 캔버스에 유채, 140×140cm, 작가 소장.
한영섭(1941- )은 1941년 평안남도 개천 출생으로 홍익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69 년에 열린 개인전을 통해 <단청과 콘크리트> 연작을 처음 선보였다. 이 연작은 단청의 색과 조형에서 발견한 기하학적이고 옵티컬한 요소를 당대의 기하학적 추상미술로 변주해 보여준다. 콘크리트가 상징하는 도시 혹은 건축이라는 요소를 덧붙여 전통과 현대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조합한 작품이기도 하다.
함섭(1942- ), ‘환원-71(Restoration-71)’, 1971년, 캔버스에 유채, 130×130cm(2), 작가 소장.
함섭(1942~)은 춘천 출생으로 1966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주로 제작했던 오리진 그룹에 참여해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환원> 연작을 전개했는데, '환원'은 '확산'이라는 개념과 함께 1970년대 미술계에서 자주 사용되던 용어다. 환원은 예술의 근원적인 속성, 특히 평면성의 강조를 의미했다. 확산은 해프닝이나 이벤트, 혹은 오브제와 같은 요소를 도입해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함섭의 <환원-71>은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으로도 보이는 두 가지 요소를 한 화면에 병치함으로써 환원과 확산이라는 요소를 동시에 실험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류경채(1920-1995), ‘날 ‘79-6(Day ’79-6)‘, 1979년,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류경채(1920-1995), ’축전 91-8(Celebration 91-8)‘, 1991년, 캔버스에 유채, 128.5×15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류경채(1920-1995), ‘날 ‘87-3(Day ’87-3)‘, 1987년, 캔버스에 유채, 162×130.5cm, 개인 소장./ 류경채(1920-1995), ‘’날 ‘87-4(Day ’87-4)‘, 1987년, 캔버스에 유채, 162×130.5cm, 개인 소장.
류경채(1920-1995)는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일본 녹음사화학교를 졸업한 1세대 추상 미술가이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자연 풍경을 비구상적으로 그린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자연을 주제로 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것이 작품의 특징이다. 1970년대에 자신의 기쁜 날들에 대한 기억을 소재로 <날>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원형을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하는 추상 작업으로 점차 나아갔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기하학적 추상과 디자인·건축 등의 분야가 서로 주고받은 영향을 짚는다. 첫 번째 섹션 ‘새로움과 혁신, 근대의 감각’에서는 미술과 디자인, 문학까지 확장된 기하학적 추상의 사례를 살펴본다. 김환기의 ‘론도’(1938년)와 유영국의 ‘작품1(L24-39.5)’(1939년)을 시작으로 1930년대 단성사와 조선극장에서 제작한 영화 주보, 시사 종합지의 표지를 함께 전시해 비교해볼 수 있게 했다.
특히 시인 이상(1910∼1937)이 기하학적 구성으로 디자인한 잡지 ‘조선과 건축’과 시집 ‘기상도’의 표지도 볼 수 있다. 총독부 건축과 기사였던 이상은 미쓰코시 백화점 내외부의 기하학적 모습을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라고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AU MAGASIN DE NOUVEAUTES’에 표현하기도 했다.
피터르 몬드리안(Pieter Mondriaan, 1872-1944), '빅토리 부기우기', 캔버스에 유화, 127×127cm, 헤이그 미술관./ 피터르 몬드리안(Pieter Mondriaan, 1872-1944), ‘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1930년.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추상구상 6', 1913년, 1132x745cm, Hermitage 박물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컴퍼지션 8', 1454x924cm.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노랑-빨강-파랑’, 1925년, 200.0x128.6cm.
한국에서 추상 미술(Abstract art, 抽象美術)이라고 하면 흔히 앵포르멜(1940, 50년대 유럽의 즉흥적 비정형 회화)이나 단색화가 떠오른다. 그러나 20세기 추상화의 출발로 여겨지는 피터르 몬드리안(Pieter Mondriaan, 1872-1944)과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그린 기하학적 추상화는 우리 미술계에도 1920, 30년대부터 영향을 끼쳤다. 기하학적 추상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16일 개막했다. 전시에 소개된 작가 가운데 유영국(1916∼2002)은 미국 뉴욕에서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출처 및 참고문헌: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정보, 동아일보 2023년 11월 17일(금) 김민기자,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