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톤의 얇은 원피스. 흙먼지를 뒤짚어쓴 피부. 푸석푸석한 푸른머리.
기운없는 붉은눈동자. 부자연스러운 입모양
전신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다. 마치 거지를 연상시키는 지금의 모습.
씁쓸함이 밀려와야 당연했으나 어쩐지 이 모습이 당연하고 마냥 편안
한 이유는 뭘까..
"너 여기서 뭐하는거야?! 내가 하라고 한거 했어 안했어?!"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던 내 등뒤로 싸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가느다란 손이 내 머리채를 움켜 쥐며 거칠게 자기쪽으로
잡아 당겼다.
앙칼진 목소리에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 표독스런 표정과 삐뚜룸히 올라간
입술사이로 언제나 들어왔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답안해?!"
검은머리에 검은눈동자. 작은 얼굴과 살짝 그을린 피부. 크고 땡그란 눈
과 잘 다듬어진 눈썹. 분홍색이 은은히 감도는 매혹적인 입술
날카롭게 쏘아보는 그녀를 쳐다보며 이런 말도안되는 감상에 젖어있는 자신
이 어이없고 한심스러웠지만 저런 모습마져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그녀
의 외모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죄.. 죄송해요 아직..."
"뭐어? 아직? 아직이라고?! 이따위 못생긴얼굴이나 비추는 거울은 들여다볼
시간은 있고 내가 해라한일은 아직이라고?! 너 뭐 잘못먹은거 아니니?"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와 당연한듯 들리는 그녀의 말들. 나보다 높은 신분
이기에 감히 올려다볼 생각조차 하지못하는 자신의 모습. 얌전히 그녀의 말을
듣다보면 금방 끝날 잔소리임에 오늘도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다.
"알겠어?"
"네.."
"알았으면 당장 일어나서 내가 시킨일이나 다 해놔.. 완벽하게 처리하면 오늘
의 불손한 행동... 못본셈 쳐줄테니깐말야.."
"감사합니다.. 당장 하겠습니다."
꿇었던 무릎에 힘을주어 세우며 뒤를 돌아 그녀가 하라고 한 드레스룸 정리 및
청소 그밖에 설거지 빨래.. 정원의 잡초뽑기를 하기위해 등을 돌렸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승리에찬 시선.
알고있다. 설사 내가 완벽하게 그녀의 일을 마무리 지어도 그녀는 절대 이번일을
덮어둘 위인이 못된다는 사실을.. 그래... 그녀가 귀족집안의 영애이며 내가 평민
의 신분을 벋어날수 없는것처럼 말이다.
정원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언제나 답답한 저택안에서
이제 18살이된 어여쁜 소녀의 곁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바깥의 따사로운 햇살과
마주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마침 지금 향하는 정원엔 잡초가 무성해질 정도의
햇살이 대지를 대우고 있을것이였다.
아름다운 문향이 세공된 은색의 문을 열고 정원을 향하자 보기만해도 한숨이 쉬어질
무성한 잡초가 반갑게 날 반기고 있었다.
'별로 반갑지 않아...'
하루종일 욕만듣다보니 감정을 드러내거나 거짓된 미소를 짓는것이 자연히 사라져
버린 얼굴에서 왠일로 짜증스럽다는듯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아주
순간적인 변화였으며 그녀를 가까이서 관심있게 쳐다봐오던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
체지 못했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햇살을 등지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후 자세를 잡고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점점
서쪽으로 향하던 태양이 작별을 고할때쯤 그녀의 바쁜 손이 정지했고 정원에 보기
싫게 나있던 잡초는 어느새 다리옆에 놓인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듯 그대로 잡초를 치운후 곧바로 손을 씻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고
적어도 200벌이상은 되어보이는 룸가득 채워진 옷들을 보기좋게 정리해 다시 걸어
두는 수고스러운 작업을 시작했다.
팔에 힘이 없고 어깨가 저려올때쯤 마지막 드레스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고 곱게
잡혀진 주름을 다시 재정검한후 드레스를 걸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땀을
손등으로 닦은후 부엌으로 향했다.
아가씨의 드레스룸에서 부엌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타박타박 느긋한 걸음
걸이를 일관해오던 그녀의 다리가 어느순간 서서히 속력을 붙이고 있었다.
"아르메른.. 어딜그렇게 바쁘게 가는거죠?"
바쁘게 움직이던 그녀를 멈춰세운 목소리가 있었으니 평소 깐깐하기로 소문난 아가씨의
유모였다.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모양은 어느 각도로 보나 일정한 모양을 자랑했고 깔끔한
검은색의 원피스는 주름하나하나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그 모습하나만으로도 눈앞의 이제 막 주름이 하나둘 얼굴면적의 일부를 차지하는 중년
여성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알수 있겠금 하였다.
"샤셀리온 아가씨께서 부엌일을 도와라 하셔서 급히 가는 중이였습니다."
굳은 표정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아르메른의 입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던 유모는 뒤돌아
작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쏘아봤다.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군요.. 부엌에 간다는 사람이 옷모양부터 그모양이니...."
유모의 말에 아르메른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헑어진 낡은 원피스로 시선을 내리깔았고
확실히 흙먼지가 잔득 묻어 더러워진 원피스를 보자 유모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아가씨의 식사를 담당하는곳에 그런 비위생적인 복장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지금 생각이 있는겁니까 없는겁니까?!"
씹어내뱉는듯한 목소리가 아르메른을 향해 쏟아졌고 전적으로 그녀의 말에 수긍중이였던
아르메른은 그녀의 잔소리가 시작됨가 동시에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아르메른.. 이집에 온지가 몇년짼데 그런 모습으로 그것도 아가씨의 식사를 준비하는
곳으로향할수 있단말입니까? 곧있으면 공작님께서도 돌아오실것인데...."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져 보통시녀라면 몸을 움츠렸을지도 모를 시선에도
아르메른은 머리카락 한올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고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이
아니꼬왔던 것일까 유모의 눈썹사이가 좁아졌고 몇마디 더 하기위해 입을 달작거렸다.
"유모, 뭐하는거죠?"
그때 살짝 당돌한 목소리였으나 듣기좋은 목소리가 유모의 귓가를 울렸고 어릴적부터
들어왔던 사람의 목소리라 유모는 그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짐작할수 있었다.
"샤셀리온 아가씨..."
특별한 장신구가 달려있지 않은 소박한 바이올렛 색상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샤셀리온이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유모를 쳐다보고있었다. 허나 그 시선은 유모에게 오래 머물이 않고
고개를 숙인채 마치 정지된 화면인양 서있는 아르메른에게로 향했다.
"내가 왔는데 인사는 커녕 고개조차 들지 않다니... 반항이라도 하겠단것이냐?"
샤셀리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르메른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고 샤셀리온의 검은
눈동자를 피해 눈을 내리깐 아르메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크나큰 실수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가씨.."
어떤 하녀이건 이런상황이면 당연히 나오는 패턴의 대사였으나 그 대사를 읇은 사람이
누구냐에따라 큰 차이는 있는법이다. 샤셀리온에게 그런사람은 바로 눈앞의 아르메른이였다.
보통은 주인의 이런 화난표정에 조금이라도 당황한 기색이나 두려움에 차오른 눈빛이 읽혔으나
아르메른은 언제나 같았다. 어떤상황이든 어떤상태든 그녀의 저 무표정한 얼굴 외엔 아무표정도
주인인 그녀조차 본적이 없다. 그 점이 샤셀리온은 정말 마음에 들이 않았다.
그녀의 하얗고 매끄러운 손이 서서히 올라갔고 눈을 내리깐채 서있는 눈앞의 하녀를 향해
내려쳐졌다. 짜--악 하는 강렬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고 아르메른의 고개가 돌아가자 사셀리온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건방진것... 오늘은 이쯤에서 보내주지만.... 또다시 내 기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경우...
각오하는것이 좋은 것이다... 아.. 내가 시킨 일.. 아직 다 못했을텐데...."
사락.. 하는 옷자락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올라간 손을 그녀의 턱에 가져갔고 고민에 빠진듯한
자세로 고개가 돌아간채 서있는 시녀를 경멸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곤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곧있으면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니... 너의 오늘일..... 각... 오해 두거라"
천천히 말을 늘이며 간간히 들려오는 웃음소리..
멍하니 서있는 유모에게 따라오라는 시선을 보내곤 샤셀리온은 멀어져갔다.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때 빨갛게 달아오른 아르메른의 볼위로 그녀의 손이 올라갔고
고개를 바로하며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샤셀리온을 향해 목례를 하였다.
'설거지....'
설거지를 하기위해 걸음을 돌리는데 몇발 떨어지지 않은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할수 있었다.
"아르메른.."
양갈래로 땋은 갈색머리에 귀여움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이제 갓 16정도 되어보이는 소녀가
아르메른을 향해 달려오더니 그녀의 품에 안겼다.
"루넬.."
"헤헤... 너 그 얼굴 뭐니? 또 아가씨께 혼난거지?"
"아..."
그제야 아직도 얼굴에 가있는 손을 내리는 아르메른. 루넬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생긋
웃고는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좀있으면 밥먹을 시간인데 여기서 뭐하는거야? 내가 얼마나 찾은줄 알아?"
짐칫 뾰루퉁한 표정을 내비추고 있긴 했지만 그것이 장난일 뿐이란건 누구나 알수 있었다.
보통 이런말이 나오면 상대방도 웃으며 농담이라도 던질터인데 아르메른의 입에선 사람 김빠지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 못한일이 있어..."
루넬은 당황스럽다기보단 이런대답밖에 할줄 모르는 눈앞의 이 소녀가 가여워 보였다.
"뭔데 할일이?"
둘이서 가능한 일이면 일손을 빌려줄 생각으로 물었으나 아르메른은 말없이 길을 재촉했다.
"금방 밥먹으러 갈테니 기다리고 있어."
멀어져가는 아르메른을 보며 루넬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오는건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해보였다.
첫댓글 오.. 처음에는 하녀로 시작하는군요.
하지만 뭔가 다음편에 나올 복선정도는 깔아주시면 좋았을텐데요... 아쉽습니다만 필체랑은 모두 좋은것 같습니다.
힘내십쇼.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쓰다보니 주인공이 조금 늦게 힘든 일을 맡게 되겠지만.... 열심히 쓰겠습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여주인가요? 큭 ... 잘읽지는 않지만 왠지 '아가씨' 때문에 보게될것같네요. 그리고 '빨레' -> '빨래'오타있네요 헤헷
하하..;; 수정하겠습니다..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