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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다음까페 아이디 cjs5x5 / agemoneyplese@daum.net
들어가기에 앞서
이용수 할머님은 9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시민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당사자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두번의 기자회견을 통해 발언된 이용수 할머님의 말씀들은 부정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비영리단체의 회계, 해외 '위안부'운동 활동가들의 증언, 93년 할머님들의 증언을 채록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의 세개의 지점에서 할머님의 말씀과는 상반된 사실과 맥락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너무나도 슬픈일이지만 이용수 할머님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 신뢰성을 평가할 필요가 생긴것입니다.
비영리단체의 회계는 비영리단체 감사 분야에 30년간 종사한 최호윤 회계사분의 인터뷰를 통해 회계에 관한 논란에서 중요한 맥락을 소개하겠습니다.
기성언론들에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위안부'운동 활동가들의 증언도 소개하겠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은 제가 이글을 쓰게된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할머님께서 93년에 출간된 증언집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셨기 때문에, 증언집을 얼마나 신뢰할수 있는지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책은 예스24에서 구매하였고 한울에서 2019년 6월 25일에 펴낸 수정판 9쇄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조사한 바를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성-민족-계급-국가의 차원에서 소외받은끝에 정말 큰 트라우마를 겪으신 분에 대해 서술해야하기 때문에 이런 노력을 들여가면서까지 글을 쓸지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의연의 위축내지 몰락으로 인해 '위안부'운동 전반 또한 위축내지 몰락했을떄 우리가 감내하는 손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에 글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왜 우리가 감내할 손해가 큰지에 대해서는 말미에 이어서 말씀드리고, 본론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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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 단체의 회계
언론에서도 수많은 회계관련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용수 할머님께서도 2차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안성쉼터, 개인계좌 모금 등 의혹이 있따르고 있는 데 대해 "말도 못하게 나옵디다"라면서 "엄청나게 나오는데 그것은 다 검찰 측에서 밝힐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죄는 지은대로 간다"면서 "벌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회계 관련 의혹 외에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한 문제에 대해서도 "부정 아닌가, 이것도 또한 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이용수 할머니 "윤미향, 사리사욕 채우러 국회의원...죄 지었으면 벌 받아야", 경향신문, 2020.05.25, https://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251546001&code=940100
회계에 관해서는 저도 정의연이 100% 잘못한 것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세청의 공식입장 그리고 최호윤 회계사분의 의견을 들어보면 의도적인 부정이라기 보다는 의도적이지 않은 오류에 가까워 보입니다.
국세청은 정의연이 공시한 자료에 일부 오류가 있긴 하지만 탈세 등의 고의성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 관계자는 “이월 결손 등에서 일부 잘못 기재된 게 있지만, 재무제표 결산상으로는 정상적으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공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재공시를 요청할 계획이다. 추가 조사를 검토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세청은 통상적으로 매해 7월에 공익법인 결산 내용을 검토해 회계 처리에 문제가 있는 곳에 재공시를 요청한다. 국세청의 방침에 대해 정의연은 “국세청에서 재공시 요청이 오면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 정의연 해명에도 회계 오류…국세청 '고의성은 없다'판단, 한겨례, 2020.05.1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4702.html
비영리단체의 회계 역량은 단체 규모에 따라 차이가 큰 편이다. 회계사에게 맡기거나 아예 전문인력을 단체 내부에 두는 곳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작은 단체는 '아마추어' 수준의 구성원이 짬을 내 결산서류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숫자가 결산서에 표기되는 일도 있다. 정의연 등이 국세청 공시자료에서 기부금 수혜 인원을 '99명', '999명', '9천999명' 등으로 기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 회계사는 "국세청 양식의 문제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중략) 그는 "2017년 기획재정부에서 공익법인 회계기준이 나오기 전까지 비영리단체들은 '회계기준이 없으니 우리가 중구난방으로 회계를 한다'며 국가에 문제를 돌렸다"면서 "그런데 회계기준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현장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게 아니라 학자등 몇 사람이 모여 만들고는 '이렇게 하라'고 툭 던진것"이라고 말했다.
/ 비영리 회계전문가 "시민단체, 왜 후원자 안보고 국가만 보나", 연합뉴스, 2020.05.25, https://www.yna.co.kr/view/AKR20200524038700004
위 기사로는 설명이 불충분해 기사를 하나 더 소개합니다.
최 회계사는 먼저 '기타 항목 지출' 의혹과 '3천만 원 술집 사용' 의혹은 "언론이 정의연 결산서를 분석하지 않고, 간소화된 국세청 자체 양식의 결산서만 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정의연의 결산서는 사업별로 세부적으로 지출 내용을 쓸 수 있도록 돼 있는 반면, 국세청의 비영리법인 결산공시 양식은 인건비, 임차료, 기타 3가지 항목만 있습니다. 정의연 자체 결산서에서는 자세하고 정확하게 썼다고 하더라도 국세청에 신고할 때는 국세청 양식에 맞춰 인건비, 임차료를 제외한 지출은 모두 기타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중략) 기부금 수혜자를 99명, 999명 등 임의로 작성했다는 의혹도 '모든 비영리법인은 자선단체'라는 행정적 가정하에 수혜자 수를 명시하도록 만들어진 국세청 양식 떄문이라고 최 회계사는 밝혔습니다. 불우아동 돕기와 같은 자선사업은 기부금의 수혜자가 명확하지만 정의연처럼 인권, 인식 개선 활동을 하거나 환경 보호 운동을 하는 경우 수혜자는 불특정 다수가 됩니다. (중략) 최 회계사는 "정의연의 자체 결산서에서는 세부적으로 잘 돼 있다"며 "정확하지 않은 자료를 근거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지금까지 나온 자료 중에선 횡령, 유용의 근거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 "정의연 회계 논란, 근거없어...국세청 양식 맞춘 것뿐", TBS뉴스, 2020.05.28, http://tbs.seoul.kr/news/newsView.do?typ_800=1&idx_800=3389502&seq_800=20382079
현재 정의연에 대한 회계관련 의혹은 더 있습니다.
그것들에 관해서는 현재 검찰이 압수수색 및 관련자 수사중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소개된 기사들에서 다룬 부분만큼은 충분히 소명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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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위안부'운동 활동가들의 증언
일단 할머님의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할머니는 7일 대구 남구 한 찻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참가한 하생들이 낸 성금은 어디 쓰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 주부터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며 "집회가 학생들 고생시키고 푼돈만 없애고 교육도 제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할머니는 또 30년 가까이 위안부 대책 관련 단체에 이용만 당했다는 취지로도 주장했다. 그는 "현금 들어오는 거 알지도 못하지만, 성금·기금 등이 모이면 할머니들에게 써야 하는데 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략) 이 할머니는 "더는 어떤 단체와도 함꼐하지 않을 것"이라며 "수요집회도 참석 안 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혼자서라도 위안부 역사관을 세워 선생님들의 자원봉사 등을 통해 한국 학생들과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옳은 역사를 가르치는데 전념할 것"이라며 "옳은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이용수 할머니 "위안분 단체에 이용만 당해..수요집회 없애야", 연합뉴스, 2020.05.07, https://news.v.daum.net/v/20200507182219451
무언가 분쟁이 있을때 흔히들 '양쪽말을 다 들어보고 판단하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저는 8시뉴스를 기다려보았지만 정의연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이글을 쓴뒤 몇시간뒤에 29일 윤미향씨의 회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중 2개의 기사와 활동가분들이 직접 나오는 유튜브 영상을 발견하였습니다.
27일 뉴시스 취재 결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 등을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일부 활동가들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을 통해 "한국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에서 촉발된 정의연을 향한 일방적인 비난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략) 양씨는 "주변 사람들은 상처가 깊은 피해 할머니들의 '힘들다'는 말을 듣게 되면 우리한테 '너희는 왜 그러느냐'고 질문을 하는데, 우리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기 떄문에 '죄송하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윤 전 대표는 '이용수 할머니가 걱정'이라는 말을 항상 했다"고 강조했다. (중략) 미국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는 이모씨는 "예전에는 피해 할머니들이 더 많았지만 지금은 숫자가 줄어들면서 운동의 확대와 질적 변화를 위해서는 몇몇 할머니들이 앞장 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며 "이 할머니가 윤 전 대표를 '배신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면 안 된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느냐"고 했다. 이씨는 이 할머니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강조한 '한·일 학생 교류'와 '제대로 된 역사교육'도 정의연 차원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윤미향은 배신자 아냐"...해외활동가, 정의연 지원사격, 뉴시스, 2020.05.27,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527_0001038334
수술을 하면 우리는 후유증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병을 고쳐 살기위해선 어쩔수 없이 그 후유증을 감내해야합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이 30년이 넘고 생전에 해결될 기미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회의에 빠질수 밖에 없는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회의를 넘어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고자 하는 진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이 그 고통을 감내하시라 누군가는 말해야 할것입니다.
증언집에 담긴 할머님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건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사는 삶 또한 고통을 지고가는 길이니 신같은건 없나봅니다.
그리고 더 자세한 내용과 동영상은 아래와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래 기사의 출처와 작성자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검색해봐도 이 기사만큼 해외활동가분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 기사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기성언론이 이 지점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는걸 보여주는듯 하여 씁쓸합니다.
기성언론의 오보와 그에 대한 활동가분들의 대담형식으로 되어 있어 링크를 타고 본문을 보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할머니들 방문 떄 현지 모금 경비 지(출 / 원문의 오타로 인해 작성자가 입력) 없어...
모두 정대협 자체 비용, 이용수 할머니 주장하는 한일 청년학생 교류 이미 진행중
정의연 사태는 해외 위안부 운동에도 큰 타격... 매우 우려 중
방향성 유지하는 전제에서 사실 확인과 오류 수정 필요
<할머니 들의 미국 체류 및 활동비용 지원 문제> - 조현숙(미국 워싱턴) 워싱턴 희망나비 대표 등
LA의 경우, 정의연의 해외 활동을 위해 후원 모금행사를 한 적이 없으며, 항공권 발권이나 현금 지급 등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정의연 관계자는 모두 자비로 LA 방문했고, 금전적 문제 관련 불미스러운 일이 전혀 없었다. 워싱턴 DC의 경우, 김복동, 길원옥, 이용수 할머니 오셨지만, 그때마다 정대협(정의연)이 자비 부담했다. 현지에서도 이를 위해 따로 모금행사를 한 적 없다. 비행기나 호텔비 일체를 정대협이 부담했다. 다만 현지인들은 예의상 할머니께 식사 대접 정도를 한 적 있다. 오히려 '워싱턴 소녀상' 건립을 위해 길원옥 할머니 $300, 김복동 할머니 $300 등을 기부하고 가셨다.
<정의연 활동 방향에 대한 논의> - 양징자(일본 도쿄)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 공동대표
이용수 할머니가 한일 젊은이들의 교류를 말씀하셨는데, 이미 정의연은 한일 양국의 청년이 교류하는 프로그램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리(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와 정의연이 비용을 반씩 부담해 학생 청년들이 상호 방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용수 할머니께 오해 없게 전닳드리고 싶다. 최근 사태로 일본에서 이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청년들이 청년학생 성며을 준비했는데 하룻만에 80여명 참여했다. 그런데 한국 청년들이 더 많을 줄 알았는데 한국 31명, 일본 51명으로 일본 청년들이 더 많이 참여했다. 이것은 그동안 정의연이 청년학생 교류 활동을 통해 일본 학생들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꾸준히 알려왔기 때문이다.
<정의연 활동 방향에 대한 논의> - 정혜윤(미국 시카고) 여성핫라인, KAN-WIN 지역 옹호 및 교육 프로그램 담당자, Community Advocate
나는 지역에서 성폭력, 젠더폭력, 아동 성폭력에 대한 운동을 하다가 2012년부터 정의연과 연대를 시작했다. 그 동안 호텔비, 비행기값 보태드린 적 없다. 할머니들은 이곳에 오시면 늘 더 할 일 없나 고민하고 살피는 식이었다. 정의연과 연대한 후 모든 자료와 정보가 정의연이 중심이 됐다. 운동의 품질이 달라졌다. 위안부와 성폭력 운동에 대한 임팩트와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의연과 할머니들의 활동은 시카고 한인 커뮤니티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모든 분야의 인종을 떠난 젠더폭력의 문제의 가장 중심적인 툴(Tool)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방향성을 유지하는 전제에서 팩트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흥미 위주로 폄하돼서는 안된다.
/위안부 해외활동가들, "한국언론, 왜곡보도·편가르기 중단하라", 더브리핑, 2020.05.26, http://www.thebrief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3
아래는 이 기사에 같이 게시된 활동가분들의 유튜브 영상입니다.
영상 시작부터 '공동성명서를 써서 언론사에 보내도 보도되지를 않는다'라는 발언이 씁쓸합니다.
코멘트를 제가 하는 것보다는 활동가분들의 말을 직접 듣는것편이 나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스24를 통해 입수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의 신뢰성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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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
우선 이용수 할머니께서는 이 증언집에 대하여 이런 발언들을 하셨습니다.
93년도부터 책을 내놓고 그 책을 6500원에 파는 걸 봤습니다. 그래도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 책 낸 줄 모르고 그것이 당연한가 보다 하고 다니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제가 증언도 하고 또 정신대 대책협의회 박물관을 짓는 데 서대문 형무소에서 짓는다고 했습니다.
/[전문] 이용수 할머니 "윤미향, 용서한적 없어...벌 받아야", 뉴스핌, 2020.05.25, http://www.newspim.com/news/view/20200525000833
이 할머니는 또 30년 가까이 위안부 대책 관련 단체에 이용만 당했다는 취지로도 주장했다. 그는 "현금 들어오는 거 알지도 못하지만, 성금·기금 등이 모이면 할머니들에게 써야 하는데 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관련 단체에서 출판한 피해 할머니들의 사례를 엮은 책은 "내용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나와 판매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용수 할머니 "위안부 단체에 이용만 당해..수요집회 없애야", 연합뉴스, 2020.05.07, https://news.v.daum.net/v/20200507182219451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외에도 몇 가지 사안이 거론된다. 우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담긴 책이 판매되는 데 대한 불만인 컸다. 이용수 할머니는 "1993년부터 책이 나왔다"며 "거기 나온 증언은 잘못돼 있다"고 했다. 최근 이 할머니는 주변에 제대로 된 책을 하나 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정의연 논란]'30년 동행'이용수 할머니와 정의연은 왜 갈등하는가, 시사저널, 2020.05.18,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082
이에 대한 정의연측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연은 이 할머니가 '93년도부터 책을 7천500원에 파는 것을 봤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 "한국정신대연구회 연구원들이 참여해 증언 채록을 진행했고, 정대협과 한국정신대연구소 공동저작물로 증언집을 출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당시 증언집은 피해자의 존재를 알리고, '증거 문서 부재'를 이유로 불법성을 부인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자료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의연은 "가해자에 맞서며 피해자의 증언 일부가 변화하기도 했지만,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어야 했던 피해의 본질적 내용은 결코 변한 적이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의연 "이용수 할머니 회견 마음 아파"... 입장표명 삼가, TBS뉴스, 2020.05.25, http://tbs.seoul.kr/news/newsView.do?typ_800=6&idx_800=3389086&seq_800=20381663
이용수 할머님꼐서는 이 증언집의 신뢰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연 이 증언집이 제대로 쓰여진것이 맞는지 예스24를 통해 구입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총 19분의 증언이 채록되어있으며, 총 312페이지에 한분당 12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님의 경우 10페이지 였습니다.
이 증언집의 초판은 1997년 4월 30일에 발행되었으며, 제가 입수한 증언집은 2019년 6월 25일 한울에서 발행한 수정판 9쇄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발간에 참여한 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기할 점으로는 93년 당시 정대협 간사였던 윤미향씨와 현재는 뉴라이트로 분류되고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알려진 안병직씨가 있습니다.
당시 정대협 공동대표 윤정옥씨는 다음과 같이 이 증언집을 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이 시대를 우리가 공유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군위안부'라는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는 자유와 연결되는 문제로 당사자들이 주도적으로 풀지 않으면 진정한 자주와 자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 UN도 나섰으나, 제일 중요한 열쇠는 우리가 쥐고 있다. 우리 국민과 정부가 이 고통을 내것으로 깨닫고 진상을 알아야 한다. 군위안부 정책은 조선침략전쟁이 집약된 것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으나, 이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면 여자근로정신대, 징용, 징병, 지원병 등 피침략시대의 모든 문제가 풀려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상구명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진상을 구명하는 데에는 과거의 시문이나 공문서에서 발견되는 자료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군위안부 당사자들의 증언일 것이다. 이분들은 살아 있는 자료이다. 이들이 그 시대의 희생자로서 지금 살아 계신 것이다.
심신의 질병을 안고서……. (중략)
군위안부들에게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묻는 것이 잔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이기 전에 여성의 문제, 이 나라의 문제, 그리고 사람의 문제이다. 우리가 떳떳한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벗어 던져야 하는 역사의 멍에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이분들이 입을 열어서 우리가, 일본이, 온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어 이 아픔을 공유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에 기록을 남겨야 할 줄 안다. (pp. 6-7)
안병직씨는 93년 증언 채록 작업에서 특기할만한 사항들을 서술하였습니다.
이 증언집에서는 자세한 조사방법론까지는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어느정도 유추해볼만한 사항이 있어 길게 적었습니다.
기존의 연구와 자료만을 가지고는 양자의 관계를 밝히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자정신대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풍부하고 또 그것이 비밀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실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나, 군위안부는 기존의 연구와 자료만을 가지고는 그 실태가 명확치 못한 구석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군위안부의 실체를 조금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현재 생존해 있는 전군 위안부들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중략)
우선 조사요목과 군위안부·여자정신대의 연표를 작성하여 공동으로 검토하는 한편으로 연구·자료목록의 작성과 자료수집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이러한 작업이 미진하게 이루어진 점도 없진 않으나, 대체로 예정대로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작업의 덕분으로 각 조사자들은 군위안부와 그 시대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위에 조사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러한 사전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위안부와 같이 복잡한 문제를 조사하는 데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사전지식이 필수적이었기 떄문이다. (중략)
지금 돌이켜 보아도 조사자들은 꽤나 열심히 조사에 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저녁 6시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검토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사를 검토함에 있어서 매우 어려웠던 점은 증언자의 진술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은 경우가 흔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이미 근 50년 전의 일이므로 기억의 착오에서 올 수도 있었으며, 증언하고 싶지 않은 점을 생략한다거나 적당하게 얼버무리는 데서 올 수도 있었으며, 또 그 시대의 사정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올 수도 있었다.
이중에서도 조사자들을 매우 어렵게 한 것은 증언자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다고 느껴지는 경우였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대비하여 조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증언자에 인간적으로 밀착함으로써 그러한 곤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여 대부분의 경우에 의도했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어떤 경우에는 조사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다음 기회에 재조사할 것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즉, 진상의 구명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진실대로 파악하기 위하여 한 증언자에 대하여 대개 5, 6차이상의 면접조사를 행하였다. (pp.8-10)
조사방법론에서 가르치듯 안병직씨는 인터뷰전에 사전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전조사 내용을 통해 할머님들의 증언에서 논리적으로 부합하지 않는 점들은 정리를 하면서 보정하였는데, 그 정도는 p.76의 각주 2번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이 기억대로라면 1939년이나 1940년이 된다. 그런데 상해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아버지가 홧병으로 돌아갔다고도 하는데, 아버지가 죽는 해가 호적에 1937년 9월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상해로 간 해가 1937년 이전인 것으로 추측된다.(p.76. 각주 2번)
그 당시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들은 옛날 호적까지 대조해가며 증언의 신뢰성을 확보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대담자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항도 당시 기록을 대조하며 찾아내기도 합니다.
1) 라바울은 파푸아뉴기니아의 오른쪽, 뉴브리튼 섬의 중심지이다. 1942년 1월 23일 일본군이 점령한 후, 라바울은 남태평양의 최대 전략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1943년 10월 이후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비전투요원은 귀환 혹은 후퇴시켰다.
군인들이 쳐들어간 지 6개월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던 것으로 미루어, 박순애 씨 일행이 도착한 시기는 1942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p.244. 각주1번)
그외에도 93년 당시 정신대연구회 회장으로 기록되어있는 정진성씨도 채록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해설에서 간단하게 서술하였습니다.
생존해 있는 전위안부들은 나이가 많고 그간의 역경으로 인하여 스스로 겪은 고난의 많은 부분이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이들로부터 보다 명확한 기억을 끌어내기 위하여, 정신대연구회원들은 일본의 군대사, 전쟁사, 우리의 식민지사에 관한 자료를 참고하고, 그간에 발굴, 보고된 위안부 관계 군문서자료 및 증언들을 세밀하게 검토하면서 전위안부에 대한 면접을 진행시켰다. 이와 같이 증언내용에 정확을 기하려는 노력으로 연구회원들은 자신이 분담한 각각의 전위안부를 10회 이상면접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위안분의 경험에 관한 많은 단편적인 보고가 출판되었는데, 그중에는 조사의 수준이 높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신빙성이 문제되는 것도 잇었다. 정신대연구회는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신빙성에 자신이 설 떄까지 수차례 계속해서 재면접을 실시했던 것이다.(p.16)
면접조사에서 대담자와, 특히 할머님들과 같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분들과 채록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레포'라는 것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부분도 적혀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위위안부였던 할머니들과 면담을 하여 그 이야기를 정리해내는 일은 생각처럼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할머니들은 자신의 경험을 밝히려고 신고를 하기는 했으나 막상 자신의 가장 한스러운 가슴밑바닥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는 우선 면담자와 인간적인 신뢰의 끈이 필요했다. 우리들은 할머니들의 집을 찾아가고, 행사 때 참여하여 교통편 등을 돌봐드리고, 함께 잠을 자기도 하면서, 할머니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인간적인 신뢰감을 쌓아갔다. 그런데 이미 수십년이 지난 일들을 노인이 되어 기억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 동안 살아오면서 애써 감추려 하고, 잊으려 했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되살려 재현해내는 일이 할머니들에게는 또다른 고통이 되었다. 위안부 시절을 다시 떠올리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할머니들에게 세부사항을 재차 확인해야하는 일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중략)
거칠지만 할머니의 진술을 있는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 또한 위안부 시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가기 전의 생활과 다녀온 이후 지금까지의 삶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 증언집에서는 앞뒤의 부분을 대부분 생략하고, 위안부 시절을 중점적으로 실었다. 싣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은 아쉽지만 다른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pp.312-313)
할머님께서 오해하실 만한 부분을 찾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꼭 싣고 싶으신 증언이 있으나 군위안부에 대한 증언집이라는 포맷으로 인해 싣지 못하고 생략된 분량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때 일단 면접조사의 기본적인 사항들인 사전조사, 사료와의 대조작업, 레포형성을 통한 증언의 유도 등의 방법론은 갖추면서 채록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보입니다.
다만, 대담시의 분위기를 알수 없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만약에 트라우마로 인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느슨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담을 진행한것을, 이용수 할머님께서는 채록 작업이 불성실하게 이루어졌다 오해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용수 할머니를 담당하였던 고혜정씨(당시 정신대연구회 편집장)가 공개석상이나 언론을 통해 증언해주셔야 알수있는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방법론에 이상이 없다면, 디테일을 살펴보며 내용을 그 시대상과 대담자의 체험을 반영하며 채록되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이용수 할머님의 사례부터 살펴보았습니다.
전체 내용을 그대로 적을 순 없기 때문에 정리해보겠습니다.
1928년 대구 북구 고성동에서 아홉식구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어려워 어릴때부터 공장에 다녔고 열다섯 살떄는 동네의 칠성국민학교에서 정신대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4년 열여섯 가을에 친구와 같이 몰래 집을 나와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 위안소 주인을 따라(대만에 가서야 위안소 주인인것을 암) 기차를 타고 평안도 안주로 갔다 대련에서 1945년 설을 맞이하며 배를 타고 상하이에 들렀다가 대만(신죽新竹이라는 곳, 나중에야 지명을 알게 됨)에 도착함. 선상에서 일본군인들에게 처음으로 강간당함. 대만 위안소에서 전기고문을 당하고 자주 매질당함. '도시코'로 불리며 주로 독코타이(카미카제 대원)들을 상대함. 하루에 여러번 대피할정도로 공습이 심했는데 하루는 지하 방공호가 무너져 죽을뻔함. 성병에 걸리면 독한 606호 주사를 맞음. 병이 심해도 감시가 심해서 바깥으로 나갈수가 없었음.
어느날 조선 여자가 전쟁이 끝났다고 말했고 위안소 주인도 사라짐. 부둣가 수용소로 갔음.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감. 그 후로도 시집은 못가고 여러 일을 전전하다 보험판매원으로 일하다 그만둠. 89년에 연상 할아버지와 결혼했으나 의처증과 구박이 심해 93년 2월에 이혼. 보증급 없이 10개월에 90만원씩 내는 단칸방에서 거주. 생계는 동생들이 조금씩 보태주는것으로 생활.(pp.123-132).
특기할만한 사항은 톡코타이 한명이 가르쳐준 노래와 93년 당시 정대협에 대한 감정이었습니다.
노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용감하게 이륙한다. 신죽(新竹)을 떠나서
금파(金波), 은파의 구름을 넘어
같이 배웅해 주는 사람도 없고
울어주는 사람은 도시코뿐이다.
93년 당시 이용수 할머님은 "신고를 하고 이야기를 다하니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다. 이제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이렇게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느끼셨습니다.
다만, 이용수 할머님께서 93년에는 기억하지 못하시다가 새로이 기억하는 사항이 생겼다면, 그리고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증언집에 미쳐 싣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고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어떻게 지내고, 어떻게 부산까지 가는 배를 탔으며,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 증언집에 나와있지 않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까지 다시 채록 작업하여 개정 10쇄에 추가하거나, 이용수 할머님의 이야기를 실은 새로운 책을 발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외에도 직접 공들여 대담해야 알 수 있는 사항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할머님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소재는 성병에 걸렸을때 맞는 '606호' 주사입니다.
1호부터 6호까지 있다고 하는데 "군의가 와서 진료해보고 조금이라고 이상하면 누런 빛이 나는 606호 주사를 놓았다. 그것을 맞고 트림을 하면 코로 냄새가 올라와 아주 역겨웠다(p.39)"고 할정도로 독했다고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할머님들이 2000년대 이전 열악했던 여성에 대한 처우와 정부지원(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엄 등에 관한 법률)이 시작되기 이전 경제 및 사회적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여, 말그대로 '박복한 인생'을 살았던' 점을 공유하고 계셨습니다.
참고로 현재는 여성가족부에 의해 생활안정지원금(전액 국비지급인 일시금 4,300만원과 월지원금 1,474천원)과 생계급여 및 의료급여 등의 지원을 받고 계십니다 / http://www.mogef.go.kr/sp/hrp/sp_hrp_f008.do
그리고 정의연에서도 '피해자지원사업' 명목으로 자체 지원하고 있습니다. / http://womenandwar.net/kr/account/?uid=670&mod=document&pageid=1
그외에 채록으로만 획득가능한 디테일을 몇가지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위안소의 환경은 버려진 중국인의 집에 칸막이를 한곳, 칸마다 쇠창살이 쳐진곳, 천막 등 다양했습니다. 완전히 감금상태에 놓여있는 곳도 있었지만, 한가할땐 외출도 하고 놀러도 갈수 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사례에서는 다른 골목에 있는 위안소로 옮겨가기도 하고 포도주를 마시고 위안소의 주인여자를 폭행하고 헌병대에 하루들어갔다 나왔다고 하였습니다(p.68).
규정상 위안소에는 요금이 계급에 따라 책정되어있고 군표를 통해 지불토록 되어있으나 관리인이 가로채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이 용돈을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소를 이용한 군인과 '위안부'사이도 상황에 따라서는 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거칠게 다루는 군인은 당연히 증오하였지만, 그와중에서도 온정을 베푸는 군인에 대해서는 연민내지 "이즈미를 자주 만나면서 나는 이 사람을 아버지 겸 남편 겸, 한 식구처럼 생각하게 되었다.(p.54)"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말처럼 이 사실자체가 곧 진실은 아닙니다. '위안부'시기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셨고, 일본과 속인 조선인도 밉다고 말하셨고,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대협에 신고하기에 이르셨으니까요.
이렇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을 살펴보았습니다.
저의 결론은 이용수 할머님의 발언과 달리 검증되지 않은 증언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군위안부에 대한 증언집이라는 포맷상 할머님꼐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부분이라도 시기나 주제에서 벗어났다 판단되어 편집되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증언집의 신뢰성을 해치는 요소라기 보다는, 위안부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할머님의 생애사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 새로운 책을 내는 것으로 이 오해가 해소될 수 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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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지으며
이와 같이 저는 비영리단체의 회계, 해외 '위안부'운동 활동가들의 증언, 93년 할머님들의 증언을 채록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 세개의 지점에서 할머님의 말씀과는 상반된 사실과 맥락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밝히는 바이지만 이런 작업은 너무나도 슬픈 것입니다. 이러한 글을 쓰는데 드는 노력과 시간을 92세의 너무 큰 고초를 오랫동안 겪어온 어르신의 발언을 반박하는데 사용한 셈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정의연의 위축내지 몰락으로 인해 '위안부'운동 전반 또한 위축내지 몰락했을때 우리가 감내하는 손해가 너무나 클것이고, 그러한 결과는 결코 할머님께서도 바라지 않을것이라 생각하기에 글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 설명드리고 이 글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혹자는 과거사 문제가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는 종족주의라는 비합리적 경향성을 만들고 이를 사익추구에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과거사 문제를 사실 그대로 다루고, 알리고, 일본정부차원의 사과를 받는것이 한국과 일본이 관계를 재정립하고 진정한 화합의 길로 나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홍콩보안법으로 미국과 중국과의 대결이 두드러지게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둘의 격렬한 충돌로 세계정세라는 바다에는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파도 위에서 무사히 순항하기 위해서는 안보의 미국과 경제의 중국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파트너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정권의 신남방정책은 이것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도 이러한 파트너로 삼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과 일본은 좋든 싫든 경제와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국이라는 공통의 잠재적 위협요소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왜곡하여 지금 현재 양국 시민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극우파들의 행위와 관성적으로 방관하는 일본 시민들이 있기에 못할뿐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게도 손해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은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화학약품들의 수출을 일방적으로 제한하였다가 자국기업에게 피해만 끼쳤죠. 한국과 일본은 서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일본 내부의 자민당 그 중에서도 극우세력은 혐한 풍조를 생산하며 양국이 함께할때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시너지들을 차단하고 있는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된다고 해서 일본이 바뀔것이라 볼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일본이 부디 바뀌길 원하지만, 안바뀐다고 쪽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저는 우리는 좋든 싫든 한-미-일간의 협력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과 일본은 좋든 싫든 경제와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국이라는 공통의 잠재적 위협요소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점에 혐한코너가 버젓이 있고 TV와 신문에선 대놓고 한국을 비하하는 나라가 과연 갑자기 한국과 협력하겠다고 나설까요. 자민당 정권이 자기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꺼리'를 만들지 않을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이러한 성질을 가진 부정할 수 없는 상수로 상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초점을 바꿔야 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관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은 마치 장난감을 사달라 떼쓰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단호하게 진실을 말하며 끌려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혹자는 2차대전 당시 일본제국 군부에 의해 벌어진 조직적 성범죄를 그냥 돈으로 퉁치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과연 일본 극우들이 이제 한국이 달라졌다며 전향적 태도를 보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안부' 문제 다음에는 독도 영유권 문제가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독도가 문제가 되니 그냥 넘겨주거나 아니면 과거에 하려다 말았듯이 그깟 바위덩어리 폭파해버리면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들은 한-미-일 공조체제를 인질삼아 계속 '꺼리'를 만들어 도전해올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는 맞설줄 알아야 엄연한 주권국가라 할 수 있을것 입니다.
또한 비례의 차원에서도 과거사 문제를 위로금받고 종결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거래입니다.
물론 당사자분들 입장에서는, 특히 정부지원이 있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한 삶을 살았던 당사자분들께는 너무나도 큰돈이지만 일본의 경제력으로 위로금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일본정부차원의 사과는 그 어떤것으로도 대체해볼수가 없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도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위로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논란의 아시아 여성기금이 일본 정부 예산이 아닌 민간 모금을 통해 조성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국민이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있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라면, 그것을 해결할 책임은 우리정부에게 있지 외국정부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게 주권국가의 국민에 대한 책무Burden입니다.
지금 현재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상황이 곤궁하다 판단된다면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엄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더 지원하면 되는 일입니다.
다만 그에 소요되는 비용은 일단 우리 정부의 재원을 사용하되, 마치 민사에서 구상권을 청구하듯이 일본정부로 부터 정부차원의 사과와 함께 사후에 받아내면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곤궁함은 그냥 돈받고 끝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입법과 행정이 해결해야하는 지점입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 증언집 1> p.57에서 故 김덕진(본명 김순덕) 할머님을 비롯해 다른 할머님들도 증언하였듯이요.
그렇다면 남은 지점한 단 하나입니다.
그냥 국가가 '위안부' 문제를 관리하면 안될까요?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신설하여 문제를 다루면 깔끔할텐데요.
하지만 전시 '위안부'문제는 시간과 국적을 초월하는 문제이지만, 국가는 그 힘이 강력하여도 시간과 국적에 매여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은 일정한 주기마다 선거를 통해 바뀝니다. 그래서 특정 정책에 관한 초장기적인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지난 박근혜 정권은 기습적으로 이 문제를 "비가역적인 해결"로 종결지으려 시도했으니까요.
반면에 NGO는 참가자들의 물적, 심적 헌신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시간과 국경을 초월하여 활동할 수 있습니다. 국내법이나 국제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무엇을 추구하건 상관없습니다.
'위안부'문제의 인류공통에 기여하는 특성상 NGO의 형태로 그 활동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의연 논란이 어떻게 종결되건간에 조직과 활동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NGO는 국가에 비해서 힘이 미약합니다. 강제력이 없기 때문이죠.
비유하자면 국가는 방향값이 불안정한 벡터값이라면, NGO는 스칼라값이 약한 벡터값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안부'문제는 국가와 시민운동이 동시에 떠받치는 투트랙 전략을 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윤미향씨의 국회진출이 저지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윤미향씨에 대한 의혹과 이용수 할머님의 발언이 있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또다른 사실과 맥락들이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저는 정의연의 활동과 조직이 유지되어야 한다 생각하며, 윤미향씨의 국회입성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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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음까페 몇군데 외에 커뮤니티 활동이나 SNS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글을 직접 여러군데 게시하진 못합니다.
만약 하고싶으시다면 마음껏 스크랩하셔도 됩니다.
이토록 긴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시기에 부디 안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첫댓글 한 할머니 보호하려고 운동 전체랑 다른 할머니들 피해 감수하지 말고
정의연이 오늘 인터뷰에서, 언급하신 부분들 포함 제대로 반박했으면 합니다.
정성들여 쓰여진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잘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당시 증언집에 참여했던 위안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의 "학자적, 과학적"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논문 한편 읽은 듯 좋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 까페에서만 읽히기 아깝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냥 소주 한잔 삼킨 것 마냥 쓰디 쓰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