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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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2] ~ 1979년 10월 26일,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는 대한민국의 군인·교육인·정치가이며 제 5·6·7·8·9대 대통령이다.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이후 만주국 장교였다.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에 입당했다. 호(號)는 중수(中樹),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그리고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집권기간동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을 수립하며 산업화를 일궈냈으며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을 시도하였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으로 야당 및 민주화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하였고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으로 다양하게 나뉘고 있다. 전쟁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 경제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특히 도시화와 다르게 새마을운동은 농촌발전에 대한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3][4]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평가 등에 대해서 1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5][6][7] 한편 친일파 행적 의혹, [8] 남로당과 관련된 공산주의 활동 전력 등과 [9] 5.16 군사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초헌법적 인권 탄압, 노동운동 및 야당탄압 등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10][11]가 존재한다. 별도로 독도밀약을 체결하면서까지 한일협정을 타결 한 것과[12][13] 월남전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14][15] 그의 핵개발[16]추진과 암살당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혹으로 남아있다.
생애 [편집]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편집]
유년시절과 가정 배경 (1917 ~ 1926) [편집]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1978년~현재: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경명왕의 왕자였던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言成)의 후손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效力副尉)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 박씨 박성빈(朴成彬, 당시 46세)과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白南義, 당시 45세)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위로는 박동희(22세), 박무희(19세), 박귀희(15세), 박상희(11세), 박한생(7세), 박재희(5세)가 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두 형 박동희와 박무희는 결혼하여 자녀가 있었고, 은씨 집안으로 시집간 큰누이 귀희는 임신중이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1892년,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였고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하자 연좌되어 이후에는 외가의 선산인 상모동의 약 1600평짜리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여 상모동으로 이사를 하였다.[17]
어머니 백남의는 45세의 나이로 박정희를 임신하였기 때문에 박정희는 백남의에게 있어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누나인 박귀희에 의하면 당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있었던데다가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기,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넘어져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 등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18] 그리하여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낙태를 포기했다고 한다.[18] 그의 어머니는 맏딸 박귀희에게 임신사실을 비밀리에 말하였고 귀희는 어머니의 낙태를 돕기도 하였다.[18]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으나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노산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죽을 먹고 자랐으며, 큰누나 귀희의 젖을 먹기도 했다 한다.[19] 또한 변비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18] 영아기에 박정희는 집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밑에 놓은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흙을 짓이겨서 갓난 아들에게 발라주었고,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18] 이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도 한다.[18]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20] 훗날 입학하는 구미보통학교의 입학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입되어 있으며[20]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20]
소년 시절 (1926~1934) [편집]
박정희는 1926년 4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21]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19] 한편 그의 담임 선생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21] 반 학생들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21]
수업시간에 박정희는 남보다 먼저 손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21]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겨했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 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며[22]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22]
소년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23]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24]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24]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박정희는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뒤 생가로 이동했다.이 사건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자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24] 한다. 1972년 이준상은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으나[24] 그는 53세에 사망했다.
1932년 3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21]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25]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선생님들과 교장선생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님을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이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합격하였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25]
교육 활동 (1932 ~ 1940) [편집]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 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25] 대구사범고등학교 진학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27]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기간에는 비공개로 공개금지가 되기도 하였다.[27]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였고 1937년 4월 1일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28]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는데[29]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박정희는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교육청에 대기발령 받았다가 4월 문경공립보통소학교 담임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40년까지 문경소학교에 근무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고 주장하였다.[30][31]
박정희의 셋째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30][31][32]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한다고 판결을 내린 동시에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며 무죄를 판결했다.[30][31]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33]
청년기 [편집]
만주군 장교 활동 (1940 ~ 1945) [편집]
박정희는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11일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하였다.[34] 그러나 혈서의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수단체와 보수언론들을 중심으로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35]
[36]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37]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8]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39]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한다. 그리고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40]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보병 제8사단의 주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군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41] 정설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의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서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되었다.[42][43] 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에도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44] 한편 박정희와 같이 만주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45]
군관시절 박정희는 집안을 따라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46]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토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40]
한편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일본어: 岡本實)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47]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47]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48]《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혔다.[46][49]
또한 이때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50]
박정희는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51]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북경으로 건너가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1945년 8월 해방 직전에 만주 싱릉에서 중국 국민당의 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견해도 있다.[52] 이후 해방조선으로 질서정연한 귀국을 하기 위해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귀국하였다.[53]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였다.[52]
광복 직후(1945 ~ 1950) [편집]
해방 이후 박정희는 한국 광복군에 입대하였는데 만주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된 내용이 주된 이유로 알려진다.[54]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6년,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55]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55]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면전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욕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이피스트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55]
그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는다. 한국군 내의 남로당 프락치의 상부였던 그는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프락치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정희는 그해 11월 11일 체포 되었다. 그후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 되어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내 남로당원의 이름을 군 특무대에 실토하면서[56] 실형은 면하고 다음해 1월 강제 예편되었다[57]. 이때 군부내 김창룡 등 숙군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이나 백선엽, 원용덕 등 만주군 선배들은 박정희가 좌익 명단을 죄다 불었고,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기 때문에 좌익들이 박정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기로 마음먹는다.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 숙군에 직접 참여해 박정희를 수사한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란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줘도 안심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58] 그 이후, 그는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59]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중에 북한군이 38도선에 총집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바로 국방부에 보고서를 올렸으나 이승만 대통령 이하 당시 초대정부 구성원들은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사반란을 시도하지만 북한군과 전투상황이였기에 그의 상급자들이 박정희를 무마시켜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 앙금을 계속 갖고 있던 박정희는 그로부터 10년 후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1950 ~ 1959) [편집]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은 박정희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광역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하였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예비장인 대신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 김영기가 임석하였다.[59]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게 된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60]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쿠데타를 계획하였다.[60][61]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62]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62],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62]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60] 쿠데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60]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63]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63]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조치로 대기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64]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 때의 일로 박정희는 곽영주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품게 되었고,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64]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63]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63]
이승만 정권 말기에도 박정희는 쿠데타계획을 세웠으나 1960년 5월 이승만이 자진 하야함으로서 실패하였다. 그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64]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64]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64]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63]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64]
5·16 군사정변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5·16 군사정변입니다.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당시 군수사령부 사령관 소장이었던 김종필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해병대, 6군단 포병대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박정희는 정변 거사 도중에 참여했으며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군사 정변 초기 [편집]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군사정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4.19 혁명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친미·구악 일소·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여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정변 당시 박정희는 유원식(兪原植)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은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고 올것이 왔다고 하여 정변을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65]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정변을 주도한 군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하였으나 윤보선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며”사실상 정변을 방관하였다.[65]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에게 보내는 5월 17일자 전문에서 “미군 방첩대(CIC)가 거리의 행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10명 중 4명은 쿠데타를 지지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반대했다”고 보고했다.
정변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정변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66]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67]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 복권시켰다.[68]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68]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하였다.[68] 이후 박정희는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69]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69] 한편 이 무렵, 박정희는 이후 자신의 최측근으로서 자신의 죽음과 연관성을 갖게 된 차지철과 처음 조우하게 된다. 정변 초기 기자들 사이에서 박곰보, 박코프 라는 별명이 돌기도 했다.[70]
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1961 ~ 1962) [편집]
박정희가 초창기부터 군사정변의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당일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도영을 의장으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하였다. 거사 3일째인 5월 18일 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이자 동시에 국민 감시 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군 일부 반혁명사건'(알래스카 토벌작전)을 일으켜 군부 내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7월 3일에는 장도영마저 이에 관련시켜 의장직에서 추방하고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9월 9일 수출조합법을 공포하였고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하여 수출과 공업화에 대한 준비를 한다. 보리와 밀 품종개발을 시도하여 1963년 1월에 성공을 거두었다.[23]
1961년 10월 17일에는 장면 정권 때 날림으로 만들어진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의 대상을 개정·확대하여 대한제국 황족의 범위를 축소하였고 일본 마쓰사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덕혜옹주를 귀국시킨 뒤 1962년 4월 10일 재개정을 통해 그 범위에 덕혜옹주를 포함시켰다. 대한제국 황실에 동정심을 품었던 박정희는 옛 황족들에게 꾸준히 생활비와 치료비를 지급하였으며 매달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는 50만환, 의친왕비(妃) 김씨에게는 30만환, 고종의 후비인 광화당 귀인 이씨와 삼축당 귀인 김씨에게는 각각 10만환 등 모두 100만환을 지급하였다.[71] 1962년 9월 26일에는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의민태자와 비 이방자에게 1945달러의 치료비를 지원하였고 1963년에는 의민태자의 환국을 추진하여 그 해 11월, 의민태자는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박정희를 승인하지 않고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표현하였으나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72] 한편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하버드대학교에서 만났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73]
1961년 11월에는 독도의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측량팀이 약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였다.
한편 12월 학사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23]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 ~ 1963) [편집]
1962년 3월 17일 수출진흥법 등 16개 법령을 공포하여 수출진흥정책을 수립하였고, 제2공화국 정부가 기획 중이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 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한다. 또한 그해 3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구(舊) 정치인을 정죄하는 ‘구 정치인 정화법’을 발표하자 이에 대해 대통령 윤보선이 이에 반발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활동하였고 같은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을 역임하였다.
그 해, 3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훈장 추서가 미뤄지던 김구, 안중근, 이승훈, 안창호, 김좌진, 한용운, 최익현, 조만식, 윤봉길, 신익희, 이시영, 강우규, 민영환 등 독립운동가 285명에게 건국훈장을 비롯한 독립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사재를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23]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강제적으로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 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핵심인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으로 조사되었다.[74] [75]
이에 대해 김지태의 차남인 김영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의 재산 등을 빼앗았지만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장학회를 45년 동안 관리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며 “박 전 대표만 결단을 내린다면 ‘자명(김지태의 호)·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꿔 함께 운영하고 싶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76]
1962년 10월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하여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울릉도를 방문하였고 이후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77]
1962년 6월 10일 통화개혁을 단행하여 구 환율을 10대 1로 축소시켰다.[78] 통화개혁 단행의 이유로는 거액의 자금을 숨겨둔 부정축재자들의 자금세탁 방지와 당시 아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화교 세력의 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실제로 화폐개혁 이후 화교들의 자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며 상당수의 화교들은 한국을 떠났고 자연히 외식업에 진출하는 화교가 늘어났으나 대통령 취임 뒤인 1976년에는 화교에 대한 교육권과 재산권을 박탈하여 한국 내에서의 외국인과 외국 자본의 경제 장악력을 억제하기도 하였다.[79]
실제로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1만 8000평의 차이나타운에는 한때 5000여명의 화교가 거주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 화교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미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현재는 500여명만이 남아있다.[80]
제3공화국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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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초기(1963 ~ 1964) [편집]
1963년 3월 16일 군정연장과 함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하는 3.16 성명을 발표하다.[81]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전 대통령 윤보선, 전 국무총리 장택상,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등과 면담하였다.[82] 김희덕(金熙德) 최고재건회의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82]
4월 8일 국민투표를 보류한다는 4·8 선언을 하다.[83]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공표를 지시했다.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비행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정계에 참여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구 정치인 정치정화법이 일부 해제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구 정치인들은 군정연장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이후 박정희의 정치참여를 비롯한 군정연장과 군정반대를 놓고 야당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야당통합의 명분을 걸고 국민의 당이 창당되었으나 윤보선과 허정, 이범석 등의 갈등으로 야당내 대립은 격화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혹과 함께 일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문이 확산되었고[84], 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당하였고, 이후 6대 대선에서도 사상 공세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농촌지역을 찾아다니며 유세에 총력전을 벌였다.
영남지구 유세에는 전 동아일보 기자 이만섭(李萬燮) 등이 참여하였다.[85] 대구지역 유세에는 이만섭의 연설에 이어 민관식(閔寬植)의 정치학 강의식과 백남억(白南億)의 시낭독 같은 찬조 연설이 있었다.[86] 대구지역 유세에서 박정희는 '모씨가 나를 빨갱이라고 모는가 하면, 일본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허무맹랑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으나 저는 여러분들이 저만큼은 알고 있으리라 믿고 구태여 해명을 않겠다' 고 하였다.[87]
1963년 9월 윤보선은 공화당과 박정희 후보 측으로부터 피소당하였다. 공화당 측으로부터 고발당하자 윤보선 후보는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해명하곤 "하지만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덧붙이기도 했다.[88] 이어 윤보선은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을 의심했다.
박 의장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것을 보면 '구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러셀을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 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과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89]
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9월 28일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용공주의 세력을 혁명으로 일소하여 대한민국의 공산화[90]를 막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반박했다.[89]
1963년 10월 15일,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700여표(유효투표의 약 46.7%)를 얻어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91]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빈농이미지로 도시보다 농촌에서 월등한 것(여촌야도)으로 드러났다. 이후에는 지역감정으로 인해 호남의 지지율이 떨어졌다.[92]
1963년 9월 25일 직업훈련기관인 직업재활원을 개원하였고[23] 12월 21일 서독 광부 1진 123명을 파견하는 것[23]을 시작으로 기술근로자 파견을 통한 일자리 창출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는 1960년 여름, 정부가(군사정변 전) 독일의 경제부 노동국장을 만나 차관을 빌리는 조건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93] 이후 프랑스, 독일 등지에 광부, 의사, 간호원이 파견되었고 서남아시아 에는 건설기술자들이 파견되었다. 한국 간호사와 광부들의 숨은 노력으로 1961년 말 독일 언론에서는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을 ‘살아있는 천사’로 묘사되었다. 그해 12월 독일로부터 국빈방문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할 때, 그는 박정희의 손을 잡고 한국에 지원을 약속했다.[93] 또한 에르하르트는 ‘라인강의 기적’을 예로 들며 고속도로와 제철산업, 자동차산업, 정유산업, 조선산업 등을 할 것과‘한·일협정’을 맺을 것도 자문하였다.[93]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91]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을 면담하였는데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참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94] 1963년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23] (→한월 관계)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23]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1966년에는 미국이 원조한 1000만 달러로 한국과학기술원(KIST)를 설립하였고 한달에 한 두번씩 연구소를 찾아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연구동 신축현장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지급하기도 하였으며 해외에서 뽑아온 박사들에겐 집과 대통령 자신의 몇배 봉급을 제공하고 당시 국내엔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회사와 계약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95]
한일협정 전후(1965 ~ 1966) [편집]
1966년의 세계 정상들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3번째)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96]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이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96]
다음해인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96]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96]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미국 대통령 존슨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97] 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97]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을 한 뒤 5월 18일 미국 순방을 하였다.[97] 1965년 5월 22일 아침 피츠버그의 존스 앤드 로린 철강회사를 방문하여 군정 시절에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그는 공장내부를 돌아보았다.[97]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97]
최근 기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363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기간동안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독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98] 그러나 미국은 같은 해 6월 15일에도 한국과 일본 간의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독도 문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였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며 역시 거절하였다.[99]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됬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대일청구권 포기말고도 '독도'도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란 주장이 있다.[100] 문서에 의하면 박 정권은 '독도를 제3국이 거중조정하는 남의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만만한 태도'를 간파한 일본 정부는 아예 '독도를 폭파하자'고 협박까지하며 '독도'를 협상안건으로 넣으려 했다. 또한 한일어업협상을 대선에 활용 전략하고 대일본 배상관련 개인청구권을 무시한 채 정권 유지 비용으로 쓴 점도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존의 40마일 전관수역입장에서 후퇴, 일본 정부가 주장한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으나 여론악화를 우려해 공개시기를 늦추고 언론 플레이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101]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정권이 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 받았다고 덧붙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인맥이었다.[102][103] 전병헌 의원은 "한일회담과 관련 그동안 잘못 알려지거나 왜곡된 사실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 숨겨졌던 사실들의 전모가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진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고 밝혔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104] 신용하 교수는 "박 정권이 6,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독도영유권 포기, 문화재포기, 징용·정신대등의 강제저축금반환포기 등의 국익을 팔아먹었다"고 평했다. 배상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 장면 정부는 일본에 약 30억달러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단 3억 달러만을 요구한 것도 밝혀졌다.
2007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당시 일본의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성북동 소재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폭로했다. 내용에 의하면 일본이 독도를 자국영토라는 주장과 상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게 독도밀약 때문이라고 평했다.[105] 노대니얼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전두환 씨가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시끄러운 문제가 될 것 같아 사본 하나 없는 독도밀약 문건을 태워 버렸다”면서 ”거기에는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쉬지 않고 정서한 기록들도 포함돼 있어 안타깝다”고 실토했다. 이 밀약때문에 이후로 맺어진 한일어업협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독도밀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이 사망하였다.[106]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정희는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106]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106]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106] 박정희는 정부가 국민장으로 양해했으면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개인장으로 지내겠다면 내버려두라며 역정을 냈다.[106] 1967년 9월 20일 김학규가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와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68]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 ~ 1971) [편집]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107]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에 신민당의 윤보선은 쿠테타 이후에 추진된 경제개발의 폭력성과 독재성을 규탄했다.[108] 그러나 이때에도 공산주의자 경력과 남로당 경력이 문제시 되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님으로 모셔서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 하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108],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108]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108]
그러나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 만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농촌지역의 지지를 얻은 한편 윤보선은 도시와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았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23]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로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109]
같은 해 9월에는 구미에 외국인의 투자 100%를 허용하고 5년 동안 100% 외국인 투자에 대해 법인세, 소득세, 취득세를 면제해주는 사항을 포함한 전자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구미 전자공업단지는 최종적으로 1973년 10월에 1,874천 평 규모로 완공되었다.
이후 8월 22일 미국 순방 때는 미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만났으나 닉슨 독트린에 의거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110]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한다.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23]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23]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국내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8월 3일 기업사채 동결 등 긴급 명령을 발표하였다.[23]
제4공화국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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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직후 (1972 ~ 1973)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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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23]
유신의 실시 배경에 대해 조갑제는 1964년 6·3 사태를 원인으로 제기하기도 한다. 64년 당시의 신문을 읽던 조갑제는 민정 출범 후에 박대통령은 민주적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윤보선과 야당 계열에서 선수를 쳐서 선동하고, 거짓 폭로전을 벌이니까 이런 것들이 박정희의 생각을 경직시켜 독재의 길로 가도록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내리기도 한다.[111]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23]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북한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112]
육영수 피격 사건 [편집]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체육관에 참석하여 광복절 30주년 기념사를 하였다. 그러나 관객을 가장한 문세광 등이 난입,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격하였고 박정희는 재빨리 연단 아래로 숨었다.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육영수는 문세광이 쏜 권총 두발에 피격, 사망했다.
연단아래 숨었던 박정희는 다시 나타나 광복절 30주년 기념사를 계속하였다. 언론에는 대통령의 무사함이 집중부각되었다. 연설 내내 박정희는 침착을 잃지 않고 축사를 마쳤다. 범인인 재일교포 문세광은 현장인 장충동 체육관에서 체포되었고, 문세광의 한국 입국과 총기입수를 도운 일본인 전직 여경찰관이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새마을 운동 [편집]
1967년 12월 1일 농어촌개발공사를 설치하다.[23] 1973년부터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113] 유신 선포후인 1973년 1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령 6458호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4개의 과를 두었으며 3월 7일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113] 이후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교육을 강화했다.[113] 72년 3월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의 마을을 순방하며 새마을운동을 시찰하였고 이후 현장을 직접 시찰하며 새마을운동을 관리 감독하였다.[23] 1973년 5월 31일 경기도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신설 건립하여, 이전까지 농협 대학에서 개설하여 운영하는 독농가연구원에서 실시해 오던 새마을 운동을 위한 농촌 지도자 교육과 양성 등을 맡게 하였다. 1972년 1490명, 1973년 4354명으로 피교육자 수가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로 매년 6천 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113] 1973년부터 지원금을 대폭 늘려 71년 41억원, 72년 33억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1974년 308억원, 1979년에는 4252억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을 늘렸다. 또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원에서 1979년 2032억원의 지원금이 들어왔다. 박정희가 만든 '새마을노래'는 방송매체를 통해 아침, 저녁에 방영되었고 국민운동화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 사례는 일간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114] 1973년 9월 21일 경제 4단체는 새마을운동을 생산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공장에 도입하는 방안을 토의하였으며 11월 21일 제1차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려,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하는 등의 노력이 지속되었다.[114]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 ~ 1978) [편집]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다.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 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115]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한 지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시(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 ‘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116]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 |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앉은자리 밟던자국 모래마다 밟던자국 / 저도섬 백사장에 체온마저 따스해라 파도소리 예와같네 짝을 잃은 저기러기 / 나와함께 놀다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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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또한 독도와 간도의 영유권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1975년 9월에는 국회에서 발간한 《간도 영유권 관계 발췌문서》에 특별예산을 지원하였으며 1978년에는 독도를 종합 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이후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 동안 연구하여 박정희 사후인 1984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1975년 10월 8일 신민당의 김옥선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장에서 그가 안보논리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고 비난하였고 이는 여야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려다가, 공화당과 유정회에 의해 김옥선이 의원직에서 제명당하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된다.
국방력 증강 정책 추진 [편집]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117] 1962년 5월 5일 해양경찰을 발족하고 1968년 1월에는 기동타격대를 창설 1968년 4월 향토 예비군, 1975년 전투상비군부대를 창설하였다. 1965년 4월 3일 초음속 전투기를 도입하였으며, 동해안 등에 기지를 설치하였다. 1969년 1월 7개 시군의 고교생과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를 시범적으로 정하였고, 71년 12월 전국에서 첫 민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병기 개발에도 노력을 들였으며[23] 1975년 11월 함대함미사일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케트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23] 박정희는 1970년대에 핵개발 추진을 시도하였다. 일부의 의견으로는 박정희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던 강대국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정희는 핵개발 시도는 내외부적인 상황 때문에 좌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으므로 지금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118][119]
박정희 정권은 안정적인 세원확보와 거래의 투명화를 통한 소비세의 증가를 위해 부가가치세법을 추진하였는데 이 법은 1971년, 세제 심의회에서 장기세제 방향으로 종합소득세 도입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결정하면서 준비가 진행되었고 1976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되어 다음 해 7월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법의 시행으로 인해 비자금 마련이 어려워진 대기업들과 박정희 정권의 지지기반인 서민 자영업자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1978년 12월, 시행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 신민당과 통일당을 비롯한 야당에게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은 흔들리게 되었다.[120]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원인을 부가가치세에서 찾기도 한다.[121]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부가가치세 도입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정부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세입확보를 할 수 있어 결국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응할 수 있는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122]
코리아 게이트 사건 [편집]
대한민국의 인권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123] 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비밀리에 로비를 했다.
1977년 10월 15일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에 발각되었고,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정희에게 박동선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박정희는 1977년 청와대에 도청장치가 발견된 것을 들어, 미국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절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과 조율을 거쳐 1977년 12월 31일 한,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 2월 23일 박동선은 미국으로 건너가 2월 23일과 4월에 미 국무부와 상하원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몇명의 미국 민주당의원 몇명만 징계를 받고 사건은 유야무야 흘러갔다.
박정희가 미국의 정치인을 상대로 로비를 하게 된 배경은 지미 카터와의 갈등이었다. 박정희의 인권탄압이 지미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한미갈등의 원인이었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서 한국의 인권문제 때문에 군사원조를 중단해야 하는 사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일 때도 한국 정부는 인권문제 때문이라는 단서만 빼준다면 더 많은 군사원조 삭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123]
말년 [편집]
한편 육영수를 피격으로 잃은 직후 박정희는 스스로 무너져내려갔다고 한다. 인의 장막을 쳐놓고 소수의 인사들과만 접촉하였고, 간혹 유흥을 즐겼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관제 반미 시위를 암암리에 조장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건 12월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조치를 취했으며 전임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인이 방한하였고[124] 글라이스틴 미 대사 등 국내외 3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하였다.[125]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며[126]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다고 한다.[127]
1979년 10월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방문, 점거 농성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신민당사에 들어가 여공들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1명이 추락해 사망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민당 당수 김영삼 등과 마찰을 빚었다. 김영삼은 미국을 향해 박정희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가 국회 내에서 제명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영삼 제명사건은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준다며 미국의 세계전략에도 불리한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도 갈등을 빚었다.[128] 임기 말에는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지미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79년 6월 29일에 성사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도쿄에서 선진 7개국 경제정상회담을 마치고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방한 이후 영빈관에 머물러 달라는 박 대통령의 성의를 무시하고 주한 미군 내에 숙소를 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45분간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카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강의’했다. 결국 이로 인해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군의 감축 규모를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129]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은 박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의 방한 기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130] 박정희가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지미 카터는 한국 내에 있던 CIA 요원과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 일부를 소환하였다.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증언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유신 말기에 이르러 개헌을 통한 하야를 고려했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이 집권 18년 정도 됐을 때인데 ‘1∼2년 뒤에는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하였고, 이와 함께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 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 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 자료를 폐기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박 전 대통령은 1~2년 뒤에 하야하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131][132]
사망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건입니다. 부마 항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133], 싱가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134]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8시 ~ 10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1세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10.26 사건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박정희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유신 개헌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김재규가 10·26 사건 며칠전에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만난 것이 확인되면서 제기되기 시작했다.[135] 김재규는 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개입은 부정했다.[135] 그러나 김재규의 증언을 입수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135]
김재규의 진술에 불구하고 당시에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설이 있었으나, 부마 항쟁을 두고 박정권의 내부에서 김재규가 강경파 차지철과 정치적갈등으로 빚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외에는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는 인권문제로 미국과 갈등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인권보다 박정희의 핵개발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13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은 이 설을 전체 스토리의 뼈대로 잡고 '한반도'라는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의 방한 때 같이 왔던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250명은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김영삼의 제명에 미국은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135] 미국은 늦어도 1976년부터 한국의 상류층과 사회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박정희가 없는 한국 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미국은 박정희의 통치를 더이상 원치 않는다' 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135] 박정희는 사무라이 마니아였다고 한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136][137][138]
최규하 추도사 [편집]
최규하의 국장 추도사 전문 위키문헌 참고
암살 관련 의혹 [편집]
박정희의 암살 배경에 관해서는 미국이 사주했다 는 의혹이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없다.
1979년 10월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39]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140] 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고 있다.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박정희의 죽음이 미국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141] 지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입을 열면 미국에게서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141]
약력 [편집]
1917년 11월 14일 - 박성빈과 백남의의 5남 2녀 중 일곱째(아들로는 5남)로 출생
1926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
1932년 -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1936년 - 3년 연하의 김호남과 결혼
1937년 -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보통학교 교사 부임
1937년 - 장녀 재옥 출생
1938년 - 부친 박성빈 사망
1940년 -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입학
1942년 - 신경군관학교를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로 편입학
1944년 -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관동군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만주군 보병 제8단에 소위로 임관
1945년 -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
1946년 -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 사관학교의 전신)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 소위 임관
1946년 - 10월 대구폭동 중 셋째 형 박상희 사망
1948년 -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남로당 가입 등 좌익 활동 혐의로 체포
1949년 -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142]
1949년 - 모친 백남의 사망
1950년 -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소령으로 복직
1950년 - 김호남과 이혼
1955년 - 제5사단 사단장
1957년 - 육군대학교 졸업,제7사단 사단장
1959년 - 육군 제6관구 사령관을 지냄
1960년 - 1월에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12월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둘째 형 박무희 사망
1961년 5월 16일 -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킴
1961년 5월 18일 -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
1961년 7월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2년 - 3월 22일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권한대행, 7월 겸임 내각 수반
1963년 - 윤보선을 15만 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취임
1963년 - 제2대 민주공화당 총재,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 수립
1965년 -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한일협정 타결
1967년 - 윤보선을 다시 누르고 6대 대통령으로 재선, 산림청 개청
1968년 - 여운형 추모회 고문.[142]
1969년 - 3선 개헌을 통과시킨 후 1971년 김대중을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 파병
1970년 - 경부 고속도로 준공식, 수출 10억 달러 달성,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새마을 운동 제창
1972년 10월 17일 - 국회 해산 및 계엄령 선포,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10월 유신),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3년 8월 8일 -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 시도로 영부인 육영수 사망(육영수 저격사건)
1975년 4월 9일 - 인혁당 재건 사건
1976년 8월 - 칠백의총 주변 기념관, 주차장, 관리사무소 등 기타시설 건립 지시[143]
1977년 -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수출 100억달러 달성, 부가가치세 시행
1977년 12월 - 78년부터 서울을 제외한 전국 국민학교 학생에게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제도를 확정
1978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관(68년 박종홍의 건의를 받아들여 추진)
1978년 12월 27일 - 9대 대통령에 선출, 세계에서 7번째로 국산장거리 지대지유도탄 및 중거리유도탄,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 성공
1979년 10월 -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관련자 검거, 크리스찬아카데미 관련자 검거
1979년 10월 26일 오후 8시경 -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10·26 사건)을 받고 병원에 옮겨졌으나 사망
사상 [편집]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144][145][146]
공산주의 활동 [편집]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147] 당시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65]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으로 이에따랐다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로 나뉘어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남한내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148], 광복 직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하면서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사상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147]
대통령 재임 시 [편집]
경제 정책 [편집]
식량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정책을 추진했고, 벼의 품종을 개량하여 바람에 불면 날아가는 점과 수확량이 낮은 것을 개선케 하여 통일벼 품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기불황으로 대학 졸업후 미취직자들의 구제를 위한 국토 건설 개발을 추진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미취직자의 취업과 근로여건 개선을 위한 직업훈련원 개설을 추진․지원하였고, 후처 육영수가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한 것을 필두로 직업훈련원을 확산 장려시켰다.
1972년부터는 각 회사의 회장,사장단에게 회사 내에 야간학교를 설치할 것을 권고하였다. 경제불황이 지속되면서 1972년 8월 3일에는 8.3 조치를 발표하여 각 기업체를 재정지원하고 채무를 탕감해주기도 했다.
1974년 초 한일합섬 회장 김한수(金翰壽)가 회사 내에 한일여자고등실업학교를 설립했고, 이는 76년 9월 7일 경제 각단체장의 월간경제동향 보고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한 사례로 보고되었다. 여기에 고무받은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저소득층으로 미취학, 미진학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 결성을 지시하여, 야학 설립을 추진하고, 각 기업체 회장 등을 면담 설득하여 공장단지 내에 야간학교 설립, 국공립 학교 내 야간반 설립 등을 실시하게 했다. 1977년 7월 22일 박정희는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 중 배움에 뜻이 있는 근로자들이 중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할 수 있도록 야간학교 개설 방안을 강구하고, 기능직·기술직 근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부동산 정책 [편집]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했다. 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아직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에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체비지를 구입한 재산가들과 원래 사유지 소유자들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것이 제 1차 부동산 투기 붐이다.
이렇게 부동산 붐이 조성되자 정부는 1967년 11월 29일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서울, 부산 및 그 인접 지역의 토지에 한하여 토지양도 및 보유로 인해 발생하는 소득의 50%를 과세하며, 공지로서 2년 이상 방치하면 과세 대상이 되도록 했다. 건물이 정착된 토지 면적이 건축물 면적의 10배를 넘는 경우에도 과세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런 높은 과세에도 불구하고 땅값이 몇 배로 오르는 상황에서 부동산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정부의 엇박자 행보도 한 몫 했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전철 수요가 많았던 강북을 제치고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한 것은 물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로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 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63~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부동산 규제책이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8.8 부동산 투기억제와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한국은행[149]에 따르면 이 대책은 “부동산투기를 효율적으로 규제하고 장기적으로 지가의 안정을 도모하여 토지이용의 적정화를 기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는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의 도입, 기준지가 고사, 부동산소개업 허가제, 양도 소득세 강화, 토지개발공사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강력한 규제 정책 덕분에 78년 135%에 달하던 서울의 지가변동률은 79~82년 동안 3~13%로 진정됐다. 70년대 말의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역시 지가 하락에 기여했다. [150]
외교관계 [편집]
통일관 [편집]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先) 개발 후(後) 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한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51]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정책으로 베트남전쟁포기와 중국과의 관계개선,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을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의 대한 경직된관계에 개선하여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뀌어 현재까지도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사회주의의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152]
대미국 관계 [편집]
박정희는 집권 초부터 미국과 원만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했다. 군사 쿠데타 초기부터 공산주의자 라는 의혹을 받았고 이 의혹은 1960년대 내내 박정희를 국내외에서 괴롭혔다. 1961년 11월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하여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고, 12월에도 거절당하였다. 1962년 11월에 가서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를 만날 수 있었다.
1968년 초부터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군사지원에 계속 의존 한계를 인식하여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협상요청을 완강히 거부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까지는 주한미군 전력이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닉슨 행정부는 한국군 현대화 지원을 조건으로 1971년 6월까지 주한미군 지상군 1개 사단 병력 약 2만명을 철수시켰고 이후 인권정책을 도덕외교의 핵심으로 내세운 카터 행정부는 이를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시키면서 박정희 정부를 압박했다.[153]
1977년 1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을 포함한 한반도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안보관련 부서에 지시[154]했고,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정책에 초기에는 반발하다가 뒤에는 할테면 하라는 투로 응대하였다. 1977년 1월 말 지미 카터는 월터 먼데일(Walter F. Mondale) 미국 부통령을 일본에 파견하여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직접통보하는 성의를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직접통보하는 성의를 보였다.[154] 그러나 먼데일은 한국을 방문하지도 않았다. 그와 같은 외교적 무례는 박정희와 한국정부를 심히 분노하게 만들었다.[154] 2월 15일 지미 카터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지미 카터는 스나이더 대사와 존 베시(John W. Vessey) 주한미군사령관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재확인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를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인권정책의 개선도 함께 촉구했다.[154]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굴욕이나 하대로 간주하고 응하지 않았고, 한미관계는 1970년대 말에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대일본 관계 [편집]
1961년 겨울 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이는 경제개발을 하는 데 지원자금을 충당하는 의미도 있었으나, 미국에서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압력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가 없이 한일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에 대개 1965년 야당에서는 굴욕외교라 주장하였고, 장택상, 윤보선, 허정, 박순천, 함석헌 등 야당 지도자들은 굴욕외교 반대라는 명목으로 시위를 하였다.
1965년 6월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를 6.3 사태라 부른다. 6.3 사태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던 인물 중에는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자 17대 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이명박 등도 있었다. 각계의 반발이 있었으나 박정희는 한일 외교를 재개해 나갔다. 한일협정 과정에서도 보상금 8억 달러라는 보상금을 놓고도 적은 액수라는 비판이 있었다.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를 요구했고, 장면은 28억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핵개발 추진과 실패 [편집]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 사이에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가 핵무기개발계획을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닉슨 미 대통령이 1969년에 괌(Guam) 독트린을 선언하고 1년 뒤인 1970년 7월 초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정부에 주한미군 2만 명의 철수를 통고한 직후였다.[155][156] 예정대로 미국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결정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155][156]
이때부터 그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핵무기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의 핵개발계획은 1971년에 설립된 청와대 제2경제수석실이 총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에서 실제적인 개발을 담당하였다.[155][156][157] 그리고 [158][159]
1970년 당시의 박정희는 한국의 군수산업 발전에 몰두했다. 1970년 무기개발위원회(WEC)를 창설했다. 박정희가 1970년에 창설한 무기개발위원회(WEC)는 70년대 초반에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을 결정하고 박정희에게 진언했다. 박정희는 1971년 말이나 72년 초에 그 권고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160][161]
1970년초 미국 대통령 닉슨은 데탕트를 추진, 1972년에는 중국의 광둥을 방문하여 냉전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동시에 아시아 문제에 대한 군사개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여 각국의 반발을 샀는데, 박정희는 핵개발의 정당화를 찾으려 고심하였다. 1974년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박정희는 자신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박정희는 1973년 11월 24일 한국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 건설계획을 확정짓고 사흘 뒤인 11월 27일 원자로 구매의 향서를 캐나다에 발송했다.[162][161] 그가 캐나다에서 도입하려는 캔두형 원자로는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중수로이다. 중수로에서 타고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시설에서 재처리하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박정희가 프랑스에서는 재처리시설을, 캐나다에서는 중수형 원자로를 도입하려 한 것은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161]
박정희는 캐나다로부터 중수로와 함께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NRX)를 도입하려고 하였으나, 플루토늄의 군사적 이용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연구용 원자로 도입은 실패했다.[163][161] 75년 3월 미국은 직접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대해서 핵개발 계획을 중지하도록 강요했다. 키신저는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을 고집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을 중지한다고 하였다.[163][161]
이후 박정희는 비밀리에 이란, 프랑스, 캐나다로부터 플루토늄 중수로 도입을 추진했다.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응한 결정이다. 한국에는 미국의 제2보병사단이 주둔하고 600에서 700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 결정은 내려졌다.[164][161]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역시 아시아 문제 불개입과 미군 감축, 철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 개발 첩보가 CIA를 통해 미국내에 전해지면서 미국에서는 한반도의 상공위성사진 촬영 등을 시도했고, 핵시설을 찾아내지 못한 미국은 박정희에게 핵개발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계속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미군 철수를 시사하며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지미 카터 정권 아래서도 미국과 한국은 핵무기 문제에 관한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카터가 제창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뒤집어엎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철수하면 한국은 핵개발로 나아간다는 것이 한국정부의 입장이었고, 박정희는 [165]핵개발을 추진하던 것이다.[166]
미국은 인도가 1974년에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핵무장 계획을 경계하게 되었다.[164][161] 1978년 11원 4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974년 인도정부의 충격적인 핵폭발 실험을 계기로 여타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탐지해내기 위해 특별정보반을 설치했다"고 한다.[164][161] 이 특별 정보반의 운영과정에서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구입하려는 교섭은 1972년부터 계속되었다.[164][161]
1975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ㆍ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함병춘(咸秉春) 주미한국대사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핵무기 관련 계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154] 이는 박정희에게 보고되었고, 박정희는 물론 거절했다. 미국은 계약을 취소할 경우, 한미과학기술협정의 체결을 통한 미국의 추가 기술 제공 등 여러 가지 대가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154]
포드 행정부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고 하비브와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Sneider)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만약 한국이 핵무기개발을 계속 진행할 경우 전반적인 한·미 안보관계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최후통첩을 보내는 것이었다.[154]
결국 박정희는 1975년 8월 25일부터 8월 28일까지 미 국방장관 슐레진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핵무기 포기각서를 써주었다.[161]
1975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핵개발 추진 포기를 선언하였으나, 비밀리에 프랑스와 이란으로부터 플루토늄 구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프랑스는 1975년 말에 재처리시설 계약 취소를 요구하였다. 197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H. Rumsfeld) 미 국방장관도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일 한국이 핵무기개발을 계속 고집한다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협력관계들을 포함한 한미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위협했다.[154]
미국의 강력하고도 끈질긴 반대와 위협에 직면한 박정희는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154] 자존심이 상한 박정희는 몹시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인한 군인정신만으로 끝까지 밀어붙일 수도 없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속성에 익숙한 이상 그것은 약소국과 그 지도자가 함께 겪어야만 하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비애였다.[154] 박정희는 프랑스와 체결한 플루토늄 수입과 원자로 도입계약을 취소했다. 박정희는 프랑스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154], 결국 76년 1월 23일 계약은 취소되었다.[161]
1977년 1월 28일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154] 이것은 한국의 핵무기개발이 미국의 강압에 의해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핵무기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의 조속한 달성으로 대한민국을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로 당당하게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박정희의 웅대한 꿈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집요한 집념,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현실적으로 포기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54]
1978년에는 미국이 대한민국 청와대를 도감청하다가 박정희 측에 의해 발각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1972년을 전후하여 박정희의 핵개발에 자극받은 북한의 김일성도 핵 미사일 개발을 추진한다. 이 와중에 대한민국 국내에 체류중이던 학자가 갑자기 실종, 공황상태가 되어 미국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물리학자인 김희규, 진영선, 이휘소 등이 연이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핵개발에 관련된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정희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은 70년대 말 한미관계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분명히 반미적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반미는 미국에 저항해서 민족 자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차원의 반미가 아니다. 70년대 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논쟁은 미국측의 철군 주장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측이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166]
핵무기 개발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반미는 지미 카터의 인권정책과 철군 정책에 쐐기를 박기 위한 대응수단이었다.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에서 비롯되는 박정희의 반미주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미국에 대한 반발이었을 뿐이[166]라는 의견도 있다.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 역시 그의 자주국방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미국의 정책전환을 이끌어내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려는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166]는 것이다.
미국의 압력으로 70년대 중반에 핵개발이 취소되었지만, 박정희는 핵보유국들의 압력 속에서 이후에도 집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했다. 박정희는 핵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캐나다로부터 9백 메가와트급 캔두형 중수로 4기를 신설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한국과 캐나다가 합작해서 9백 메가 와트급 원자로 4기를 짓는다는 뜻에서 KC-49 사업으로 불렸다.[161] [167] 이후에도 박정희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했고, 1979년 2월 박정희는 1979년 현재 핵개발이 88% 이상 완성되었다며 1983년에는 미사일의 완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나 그도 그해 10월에 김재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백지계획 [편집]
1977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 백지(白紙 ) 상태에서 계획을 수립하겠다”며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첫 구상을 밝혔다. 당시 충남 공주군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백지계획’은 1979년 10월 초 완성됐지만 10·26사태로 백지화됐다.[168]
정적 탄압 [편집]
제3공화국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발생된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과 1967년에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의 지원유세를 하던 장준하가 박정희를 친일파, 밀수 왕초로 비판했다가 구속수감되기도 했다.
한편 윤보선 암살 의혹[169] 역시 제기되고 있다.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현역 육군중령을 시켜 그를 저격하려 하였으나, 박정희가 승리를 거둠으로서 윤보선암살계획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169]
1972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1975년 10월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비난했던 김옥선의원에 대한 공화당 등의 국회 강제축출(김옥선 파동), 1979년의 김영삼의 의원제명 파동 사건 등이 있었다.
사후 영향력 [편집]
박정희 정권 때 산업화 노력에 주력한 세대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오늘날에는 '개발독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170]국가주도의 산업화정책으로 한국사회에는 재벌 계층이 등장했으며, IMF 구제금융사건이후 재벌, 관치금융,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등장했다. [171] 한일회담의 과거사문제등으로 민주화이후에도 한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172]그린벨트 정비와 새마을운동 정책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인구집중을 방지하는 한편 환경보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나았다. 이후 신자유주의 정권을 들어섬에 따라 그린벨트가 해체되거나 농촌 발전이 후퇴하기 시작했다.[173]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는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민주주의 대한 기대로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당시에 박정희 정권의 부하인 전두환이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여 박정희를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 1972년, 여의도에 조성한 5·16 광장의 명칭을 여의도 광장(지금의 여의도 공원)으로 바꾼 것 또한 이 때의 일이다. [174] 백지계획은 10·26사태로 백지화되었으며, 전두환 정부는 '핵개발 포기선언', 노태우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다.
월남전 파병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국군현대화의 긍정적 평가도 있는 반면 미국의 패배로 끝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개발을 대가로 피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는 비판도 존재한다.[175]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전두환 정권이 축출한 공화당 출신 세력들이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0년 3당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탄생되었으나, 당내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계 정치인들과의 갈등으로 탈당하여, 또 다시 공화계 주축으로 독립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그후 ‘DJP연합’으로 국민의 정부을 탄생시킨 여당이 되었으나, 2006년 자유민주연합은 해체되었고 일부는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역시 박정희 사후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써 정치계의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후 친이명박계와의 갈등으로 친박연대를 창당했다.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직선거법위반,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지난 2009년 7월 출소했다.[176]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학기술입국을 과학기술강국의 시대로 이끌어내겠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외에도 "박 전 대통령이 독재하고 억압했지만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고민했던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이 씨뿌리고 가꾼 것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177][178] 노무현 정부는 지방분권정책을 추진하면서 신행정수도 이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70년대 후반에 박 대통령이 계획하고 입안했던 것을 이제와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행정도시에 관한 한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제가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좀 묘하다”고 발언하였다. [179]
정당 외에는 뉴라이트 계열 정치운동단체들이 박정희 집권기를 일부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짙은 현행 국사 교과서 대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수록된 자신들의 교과서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180]
평가 [편집]
현재 다방면에서 박정희와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이 존재하므로 명확한 평가가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긍정적 평가 [편집]
월간조선 전 대표인 조갑제는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고 보았다. 또한 봉건적 잔재와 싸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51] 또한 조갑제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라며 “박정희 급장의 통솔 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181]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며 초당 박제가의 ‘상업국가론’이며 이를 꽃 피워 국가발전의 틀을 닦은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설명하였으며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182]
1999년, 조갑제와 대담한 노태우 전대통령에 의하면 박정희 주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인용,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꼈으며 박정희가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11]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민주화 운동시에는 박 전대통령의 한쪽 측면만을 보고 비판을 했었다”면서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니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功)을 알게 됐다”고 말하였으며 이어 “근대화와 민주화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된 나라가 없다. 그래서 사고의 균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183]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박 전 대통령은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분이자 기초를 닦은 분이다. 그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장기집권이 문제였지만 박 전 대통령은 굉장히 소탈하고 청렴했다. 부정부패에 대해 철두철미했고 가족과 측근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엄격했다. 그런 점이 재평가를 받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하였다.[184]
자주국방 정책을 통한 국방력 강화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형 전차 흑표의 개발자인 조남태는 박 대통령의 전력증강 8개년 계획으로 "소총, 미사일, 전차 등이 국산회 되었고 해상, 해중 전력을 강화했다. 획기적인 자주국방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185]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하였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풀려서 상공부에 넥타이에 대한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되어 결국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고 한다.[115]
김성진 전 대통령 보좌관은 자신의 저서에서 미국 맥도널드사의 중역 데이빗 심슨이 월남전당시 청와대를 방문하여 M-16을 수입하기로 결정한데 대한 보답으로 100만 달러의 뇌물을 건냈으나 박정희는 거부하고 그 돈만큼의 소총을 더 달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데이빗 심슨은 "나는 그의 얼굴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다고 한다.[186][187] 이때 수입된 소총들을 모델로 하여 국산소총 K2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경제 정책 [편집]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정희는 통일의 길을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이후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을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한국 전쟁를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188]
경영인인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 대통령이) 독재자라지만 이 시대(당시)에 열심히 엔진을 돌려놓았기 때문에 엔진이 꺼진 지금도 관성에 따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며“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배 이상 늘어났는데 이런 수치를 두고 어떻게 박 대통령 시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박 대통령은 어느 정도 규모의 공장이면 준공식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기업활동과 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며 여타 대통령들과의 차별성을 지적했다. 윤 부회장은 또 “산업화의 기틀이 된 새마을운동을 ‘정치적 목적이 있다’며 이후 정권에서 없애버린 것도 개인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189]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당선자 워크숍에서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이 오히려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며 의원 당선자들에게 “여러분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열린우리당의 청산 대상인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소신발언을 토해냈다.[190]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베트남, 네팔, 라오스등의 개발 도상 국가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어 호평을 받고 있다.[191]개발지상주의자로 평가받는 박정희 정부의 그린벨트 정책과 조림사업은 양대 환경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192]
특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3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빈곤ㆍ질병 퇴치를 위한 `새천년개발목표` 아프리카 주도그룹 회의 후 기자회견을 열어 경제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 접근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인 한국에서 배울 점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이 성공한 데는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유엔 일부 직원들에게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 성공사례를 배울 것이 없는지에 관해 얘기해왔다"며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193]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194]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194]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며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덧붙였다.[195]
노회찬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독재를 빗대어 사회주의정책이라 평가하기도 했다.[196] 한나라당 홍준표“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체제를 선택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도 좌파정책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197]
부정적 평가 [편집]
최상천은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 라고 주장하였으며[198][199], 진중권은 자신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전반에 걸쳐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를 파시즘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한편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을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200]
또한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도 꾸준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 수록 인물에 등재시며 그 근거로 박정희의 만주군 1929년 만주군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작성하였다는 신문기사를 공개하였다.[37] [201] 이에 반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 보고서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박정희가 쓴 혈서를 보도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으나,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 라고 밝혔다.[202]
민주주의 탄압 관련 [편집]
강준만, 서중석, 진중권, 한홍구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10월 유신,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치적 측면에서는 민주주의 탄압에 관련된 비판이 있다.
정치적 경쟁자이자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바로 볼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203] 김영삼은 미화가 심하고 제대로 된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도 평가하였다.[203]'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을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중정(중앙정보부)을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어요. 이 사실을 국민들이 잘 모릅니다. 미화가 심해요. 공과를 따져야 합니다.'[203]라 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박정희는 나를 제명해서 죽은 겁니다. 내가 박 정권으로부터 제명당하고 했던 말이 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하였다. 또한 김영삼은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203]"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김영삼은 개인적으로 박정희에게 '멀쩡한 총재를 총재가 아니라고 해서 내쫒고, 나를 죽이려 백주 대낮에 염산으로 테러를 가하고 내 측근들을 연행해 얼마나 탄압하고 죽이지 못해 온갖 짓을 다하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했지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나는 이미 다 풀었다.'고 말하기도 했다.[203]
경제정책 비판 [편집]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는 경제학자 김수행이 있다. 그는 공저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토건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204]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과 구 소련을 모방한 관료주의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 형식의 정실자본주의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194]는 비판이 있다.
2000년 이후의 평가 [편집]
국내 [편집]
2000년대에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지도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혹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세계주의와 국수주의 등을 가르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이해관계에 의한 상반된 평가가 상존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친일 의혹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보면 상당히 평등지향적인 것들이 있다. 흔히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에만 관심을 쏟은 지도자라고 평가되지만, 당시 정책 가운데 국가사회주의적인 요소들이 꽤 있었다”다고 평가하였으며 “예컨대 의료보험 정책에서 시장지향적이 아닌 국가주도적 체제를 도입했으며, 교육분야에서 중·고등학교 평준화를 시행한 것은 대표적인 국가사회주의적인 시도였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대학 류석춘 교수는 “‘박정희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며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는 도덕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류 교수는 “당시의 리더십은 “‘잘 살기 위해 부정부패 안 하고 열심히 할테니, 국민도 잘 따라오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전반적으로 국가와 기업의 유착도 있었지만,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는 측면에서 동의를 얻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205]
명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는 “당시 근대화 과정에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점은 인정해야 한다”면서도‘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우리 국민에게 자신감을 줬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 때문에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가 생긴 측면도 있다”고 다른 해석을 내놨다. “민주주의는 과정이 중심인데도, 결과 위주의 정치·사회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IMF 사태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206]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207]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고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부조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은 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208]
이에 대해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 식의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를 강조하였다. [209][210]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211][212]
한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단지 내에 KIST의 설립자인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업적에 대한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213][214] 한편 김영삼은 박정희를 역사의 죄인이다.[215]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장면 정권으로도 가능했으며 5.16 군사정변이 없었으면 장면이 나라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라고 평가했다.[216]
한나라당 친이계에서는“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부과천청사를 만든 것은 잘못“이라며 비판했다.[217]
여론조사 [편집]
2009년 8월,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서 국가발전에 가장 높게 기여한 대통령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1위로 박정희 전 대통령(53.4%), 김대중 전 대통령(25.4%), 3위엔 노무현 전 대통령(12.4%)이 올랐다. 이어 전두환(2.2%), 윤보선(1.8%), 이승만(1.6%), 노태우(1.3%), 김영삼(1.3%), 최규하(0.5%) 전 대통령 순으로 집계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경북(64.0%)과 대전충청(64.5%) 지역에서 많은 응답을 얻었다. 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50대 이상에서 65.5%, 40대 59.4%, 30대 44.8%, 20대 36.7% 등 응답자의 연령이 높을수록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18]
2009년 영남대학교에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6%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답했으며 이어 김대중(12.9%), 노무현(4.4%), 이승만(0.6%), 전두환(0.6%), 김영삼(0.5%) 전 대통령 순으로 나타났으며 응답자 중에서 72.8%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답해 ‘아직 때가 아니다’(16.8%)를 크게 앞섰다. [219]
2008년, 현대 경제연구원에서는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153.6%를 기록한 박정희 정부를 대한민국 선진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정권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정권초 선진화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정권 말에는 253.6를 달성했다는 의미로서 박정희 정부에 이허 , 이어 전두환 정부 44.3%, 김영삼 정부 42.7%, 노태우 정부 36.5%, 김대중 정부 28.1%, 노무현 정부 23.8% 순이었다. [220]
외국 [편집]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과 쑨원, 일본의 히로히토와 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과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221]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222]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223]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박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국부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그가 추진한 ‘동방정책’ 또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을 벤치마킹한 결과였다고 한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2009년 6월,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캄보디아 경제발전을 위해 여러 사례를 연구했는데 박 전 대통령 모델을 가장 많이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224]
2004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225]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226]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227] 2006년,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당시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전 대표와 면담하며“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을 깊이 공부했다”고 발언하였다. [228]
이밖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199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대 총장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가 대기업을 키우고 경제발전을 주도했던 한국 경제의 발전 방식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 외교관을 통해 “한국어 책이든 외국어 책이든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있는 대로 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229][230]
기타 의혹 [편집]
지역감정 의혹 [편집]
대한민국의 지역 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지역감정 조장에 관해 그가 정적인 김대중 후보와 경쟁 도중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한 지역감정을 조장한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31] 1971년 대선 때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전단지가 나돌았다. [232] 김영삼은 지역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233]
여성편력 의혹 [편집]
한 중정부 직원은 박정희의 시중을 들기 위한 '마담'이 200명가량 있었다고 증언했다. 안가에서 술자리 모임이 생기면 이 중에서 면접을 통해 접대 여성을 선발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의 여인' 중 수십 명이 1980년대에도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고 주장했다. 박선호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박손호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고 평했다.[234]
김재규 중정부장의 변호사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접대하기 위한 여성의 수가 200명을 넘었으며, 그 중 가수 심수봉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육영수는 주색에 빠져 항락에 젖은 박정희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얼굴에 심한 멍이 들었다고 한다. [235] [236][237]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고 하는데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등이며,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라고 하며 박선호와 한 중앙정보부 직원 등 이 같이 증언하였다. [238] [239][240]
독립군 토벌설 [편집]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들은 증언을 근거로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을 제기한다.[241][242]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241][242] 그러나 한홍구는 그런 주장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 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한홍구는 박정희의 친일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라 말한다.[241] 그러나 한홍구는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지적했다.[243][244]
기타 [편집]
박정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으로부터 증금강산 선녀도와 동봉된 김일성 친필 명함, 청자목문(靑磁牧文) 항아리를 선물로 받았다.[245] 박정희는 이를 애장품의 하나로 소장하였고 2009년 1월 공개되었다.
가족 [편집]
증조부 박이찬
조부 박영규(朴永奎, 1840년 음력 1월 8일 ~ 1914년 양력 2월 24일, 호는 일부당(一斧當))
조모 성산이씨(星山李氏)[246]
부친 박성빈(朴成彬, 1871년 ~ 1938년 9월 4일)[29]
모친 백남의(白南義, 1872년 ~ 1949년), 본관은 수원
형 박동희(朴東熙, 1895년 ~ 1967년) - 형수 김동금(1894~1962), 여산송씨(1911~?, 1남 1녀는 여산송씨생)
조카 박재홍, 박재선
형 박무희(朴武熙, 1898년 ~ 1960년)
- 조카 2남 1녀 : 박재석(1922~?, 국제전기 회장 역임), 박재호 등
누나 박귀희(朴貴熙, 1902년 ~ 1974년) - 매형 은용표(殷龍杓)
조카 3남 2녀 : 은봉남(殷鳳男, 1918~1994), 은희만(殷熙萬, 은지원의 부친)
형 박상희(朴相熙, 1906년 ~ 1946년)
조카 박준홍, 박영옥(김종필의 부인), 박계옥, 박금자, 박설자
형 박한생(朴漢生, 또는 박한희(朴漢熙) 1910년 ~ 1928년?)[247]
누나 박재희(朴在熙, 1913~1996) : 매형 한정봉(1892~?)
조카며느리 선우민숙
숙부 박용빈(朴龍彬)
숙부 박일빈(朴日彬)
아내 김호남 (1920년 ~ 1990년[248], 1949년 이혼)
딸 박재옥(1937년 ~) : 사위 한병기 전 민주공화당 8대 국회의원
아내 육영수(1925년 ~ 1974년)
딸 박근혜(朴槿惠, 1952년생) - 전 한나라당 대표. 현 4선 국회의원 - 미혼
딸 박서영(朴書永, 1954년 ~. 본명은 박근령) - 사위 신동욱, 백석문화대학 교수
아들 박지만(朴志晩, 1958년 ~) - 며느리 서향희
손자 박세현(朴世現, 2005년 ~)
문화에 나타난 박정희 [편집]
문학 [편집]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대기 형식[249]
이인화, 《인간의 길》 [250]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2》
백무현, 《만화 박정희》, 박정희에 대한 만화
드라마 [편집]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1987년 - 《욕망의 문》, KBS2 (이진수)
1989년 - <무풍지대>, KBS2 (신종섭)
1989년 - 《제2공화국》, MBC (이진수)
1990년 - 《야망의 세월》, KBS (정욱)
1990년 - 《여명의 그날》, KBS(백준기)
1993년 - 《제3공화국》, MBC, 김상민 - 소년 박정희 역
1993년 - 《제3공화국》, MBC, 홍경인 - 청소년 박정희 역
1993년 - 《제3공화국》, MBC, 이창환 - 청년 박정희 역
1993년 - 《제3공화국》, MBC, 이진수 - 장년 박정희 역
1995년 - 《전쟁과 사랑》, MBC, 이진수
1995년 - 《제4공화국》, MBC (이창환)
1995년 - 《코리아 게이트》, SBS (독고영재)
1998년 - 《삼김시대》, SBS (이창환)
1998년 - 《야망의 전설》, KBS (정욱)
2002년 - 《야인시대》, SBS (이창환)
2004년 - 《영웅시대》, MBC (독고영재)
2005년 - 《제5공화국》, MBC (이창환)
2009년 -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 평화방송 드라마 (이창환)
영화 [편집]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1995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균식)[251]
2004년 - 효자동 이발사, (조영진[252])
2005년 - 그때 그 사람들, (송재호)
2006년 - 잘 살아보세, (이창환)
민족과 운명[253] (김윤홍)
같이 보기 [편집]
주요 저서 [편집]
-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 《민족의 저력》
- 《민족중흥의 길》
- 《국가와 혁명과 나》
- 《조국 근대화의 지표》
- 《지도자의 길》
- 《한국 국민에게 고함》
- 《연설문집》
- 《수기집-나의 어린 시절》[21]
참고 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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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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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정권 "독도도 사실상 포기"
- ↑ 한일문서로 밝혀진 박정희 정권 비화 ‘전모’
- ↑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 ↑ "한일협정 뒷거래 박 정권은 매국정권 5년간 일본기업에 6600만불 제공받아"
- ↑ ‘독도문제’, 밀약파기가 유일한 해결책이다
- ↑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 `독도밀약` 있었다
- ↑ 가 나 다 라 마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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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 ↑ 박정희 거쳐간 '궁정동 여성'은 200여 명
- ↑ 법원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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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00)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 인간의 길
- ↑ 단역이었다.
- ↑ 조영진이 맡은 배역은 '통치자'였다. 이 통치자의 이름은 영화 안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으나, 영화 내용상으로 볼 때, 통치자는 박정희를 나타낸다.
- ↑ 북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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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전자도서관
박정희 전 대통령 전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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