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옹동면 노탱이 당산나무 1000년 역사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에는 수령 1000년의 노탱이 당산나무가 있다
이곳은 백제시대 옹산성 대산성 그리고 후백제시대 능성(能城)이라는 이름은 이곳 능향(能鄕)이 후백제 왕족 능환(能奐) 능애(能哀) 능예(能乂)의 고향으로 호족을 위한 능성(能城)산성으로 이어왔다
능(能)은 세발 자라(거북)으로 비를 내리는 옛 요순시대 우(禹)임금의 부친이름 농사신으로 지금의 비석밑의 거북으로 변하였다
일본에서는 “능”을 “노”라고 발음하며 우리 두례농악을 노가꾸(能樂)라고 읽는다
정읍 산성리 산성 밑을 능성굴 그아래를 성골이라하는데 성골을 속골 소골로 잘못 일본인이 해석하여 소우자 우(牛)동마을로 부르고 있고 남쪽은 행정마을 구성(舊城)터라고 부른다
당산아래는 두 개의 고인돌이 자라거북 하늘 별자리 표시가 있는 신앙체로 위에 자라섬이 있는 방죽 못이 있었으나 없애고 96년에 논을 만들었다
능성산성은 478년 일본서기 대산성 반란사건 기록이 있어 마한족. 가야. 일본.
그러나 후백제 신검왕과 항복한 능환(能奐) 능애(能哀) 능예(能乂)를 죽이고 왕권의 딸을 이곳 태산태수 허사문의 부인으로 들여 태인허씨 능향시씨 소유 은신처로 내려오다가
고려 최충헌 무신정권이 최우 최항 들어서 태산군 주민이 모두 이 능성 안으로 들어가서 이 당산나무를 서낭나무 하늘새 천신 종교신당으로 항몽전투 군무신당으로 이어왔다
당산나무에서 능성산성까지 마차길 성터가 남아 있고 산성정상이 세갈레로 나누어저 있어 세발달린 자라모양으로 기우제 비나리는 농사겸 국방신 성으로 보인다
이처럼 왕족 공주 부마 귀족의 안전한 성터로 매년 성대한 생명보존 신앙으로 불교 유교가 아닌 매년 설날에 하늘님을 토탬(동물신앙) 비들기(백제) 꾀꼬리(고구려) 닭. 말. 까치(신라)소리 서열순서로 이어 부르는 수천년 종교행사였다
그 신굿(찬송가) 소리가 정읍사곡 아리랑 각설이타령 민요로 변하여 왔다
각설이타령은 비들기소리(얼시구 들어간다) 꾀꼬리소리(절시구 들어간다) 작년에왔던(닭소리) 아니도죽고 또왓네 (말소리) 품바 품바 잘한다(까치소리)
이퇴계는 당산을, 흥선대원군은 사찰을, 치우고 집과 묘지로 사용하여 출세하는 ‘명당신앙종교’유행으로 1863년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1912년경 한일합방으로 동학군 활동자 소유 가룻재 밑과 우동 친일의 세력가 Y 문중이 이곳 노탱이 동학군 신앙터 당산을 소유하였다
동학군은 당산앞 새양골과 배미골우물에 동학군 갑옷을 묻었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신성한 종교터 당산은 Y묘지로 만들어 줄을 당산에 감지못 하고 줄이 없어서 1945 해방후에는 산성터에서는 기우제 농악을 울렷고 당산아래에서 난장굿을 하엿다
이들이 당산굿을 페지하여 이마을 신동팔등이 비봉산 수약마을로 이주하여 지금은 김상섭 박동식이 이어 전승되고 있다
태인의 피향정 남원의 강활루 서울 경희루 거북섬 연못은 명절날에 능성산성에서 모셔온 신상깃발 신상(神像)을 가정방문 神方굿 (농악)하고 밤에는 청결한 못의 섬 지각(池閣)에 모시는 백제풍속인데 조선 태종이 경희루 지각 섬 지신을 중국사신으로 모시자 이곳 출신 권우가 거절한 이유는 환웅당산신을 중국사신으로 아부하는 태종을 막으려다 유배되었다
-모화루(慕華樓) 남지(南池)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여 열흘이 넘어도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역도(役徒)들은 피로하여 지쳤다. 사헌 집의(司憲執義) 권우(權遇) 등이 이를 탄핵하고자-( 태종 8년(1408년) )
1950년 6.25 전쟁 북한이 남침하자 공산당이 김일성 어머니가 산성봉에서 낳고 내려와 우동 한씨(당시 90세)의 집에서 첫국밥을 먹고 이당산 앞으로 지나가니 첨성대 같은 당산나무가 터저서 갈라젔다고 증언을 시켜 김일성 우상화로 매일밤 소년단을 모아 유포 시켰다
항일 동학군 터에 정치는 이처럼 이용하고 도청문화재과에 이마을 사람이 근무하여도 파손 버려진곳에 문화를 알고 아끼는 귀농 서울 성동고 출신 권정현의 문화애호의 신고마저 힘들고 있다
한류 문화 토탬신앙발상지 정읍사 전라도 노래 고증자료로이 보이는 살아있는 유일한 1000년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