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시대 ‘이예’ 선정
이예의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1373년에 울산에서 출생, 1445년(세종27) 2월에 향년 73세로 별세하였다.
이예는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 송환과 계해조약(왜인에게 삼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 조건을 명시한 조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무엇보다 이예는 중인 계급인 아전에서 종2품 동지중추원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 지고 있다.
1396년 아전 신분이었던 이예는 일본 해적에게 붙잡혀간 군수를 구하기 위해 포로를 자청하고 대마도까지 따라갔으며, 이예의 충절과 예의에 감탄한 일본 해적은 군수를 죽이지 않고 대마도에 유치하였다. 후일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이예는 군수와 함께 무사히 귀환했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신분을 올려 주고 벼슬을 하사하였다.
이예는 또한 조선의 대일외교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쇼군)에게 파견된 사행은 모두 30회였는데 이예는 이 중 6회의 사행에 참여함으로써 가장 파견 빈도가 높은 통신사로 꼽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예는 1401-43년의 43년간 40여회 일본(대마도-일기도-유구 포함)에 정사 혹은 부사로 파견되었다. 그 중 왕조실록에 사행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일본 국왕에 6회,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7회). 실록에는 이예가 44년간의 사행에서 일본으로부터 귀환시킨 조선인은 모두 667명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세종 8년에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는 이예에게 세종이 갓과 신을 하사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모습이 나온다. 군신간의 신뢰를 엿보게 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이예는 대장경 및 불경의 보급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전파,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의 도입, 화폐의 광범위한 사용, 민간의 광물채취 허용과 이에 대한 과세,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한 바 있는 선각자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