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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 安 씨 원문보기 글쓴이: 안재구
[제가 논문을 ebook으로 구입해서 여기에 첨부 파일로 올려두었는데 종인 여러 분께서 출력해서 읽기가 불편할 것 같애 여기에 택스트로 입력해서 직접 보실 수 있도록 이 글을 수정해서 게재합니다.
구한말에서 石荷 할아버지의 사상을 여러 후대들이 그리고 현대의 종인들에게 알리고 훌륭히 사신 어른들의 뜻을 기리시기 바랍니다.]
(石荷 할배의 학통과 사상을 잘 연구한 논문이 있어서 여기에 첨부파일로 올려두겠습니다.
파일이 pdf 파일이어서 adobe reader 가 있어야 읽을 수 있습니다. 아래아한글로 고쳐볼려고 해도 제 재주로는 그냥 다시 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아도베를 이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일가 여러분, 여름에 건승하시기를 빕니다.)
구한말 영남지방 성호학통 안종덕의 사상
-「시사책」을 중심으로-
강 세 구
(필자 한성대 강사)
I. 머리말 IV. 「시사책」에 나타나는 안종덕의 사상
II. 안종덕의 행적 V. 맺음말
III. 「시사책」의 주요 내용
I. 머 리 말
18세기 말엽 성호학파가 천주교 문제로 크게 安鼎福(1712~1791)系列과 權哲身(1736~1801)系列로 분열된 이후, 권철신계열은 정부의 천주교 박해로 학통의 전승을 방해받았으나, 안정복계열은 20세기 초엽까지도 師承을 통하여 활발하게 이어져왔다. 이 계열은 안정복 문인 黃德吉(1752~1827)의 제자로 性齊 許傳(1797~1886)의 등장과 함께 영남지방에서 크게 확산되었는데, 전통적으로 강한 배외사상을 견지해왔다.
19세기 이후 西勢의 문호개방 압력이 가중되었을 때에도 안정복계열 성호학통은 허전을 중심으로 ‘崇正學’을 부르짖으면서 守舊적인 입장을 보였고, 이른바 개화당의 적극적인 개혁운동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사실 이들도 전통적으로 개혁성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비교적 온건적이고 점진적이며 ‘自治’를 통한 개혁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지금까지 이들로부터 적극적인 대외개방이라든가 체제를 뒤엎는 혁신적인 개혁은 기대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아온 것이 사실이다. 다른 지방보다 영남출신 성호학통이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안정복계열의 성호학통의 대체적인 성격을 이상과 같이 평가해왔다.♣ 그런데 이처럼 영남출신 성호학통이 비교적 배외적인 성향이 강하고 대외개방정신이 미약하였지만, 모두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보아온 필자의 판단이 속단이 아닌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세기 말엽 국제하의 거센 물결 속에서 급변하는 내외정세가 이들 사고방식을 묶어 둘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하게 되고, 이들 가운데에서도 서서히 사상적 방향전환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石荷 安鍾悳(1841~1907)이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여겨진다.
♣ 졸저, 「성호학통연구」, 혜안, 1999.
이 기회에 그가 어떤 방향을 지닌 인물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1880년대 개화기에 즈음하여 격동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1882년 성균관의 대책시험에서 제시한 「時事策」을 고찰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안종덕의 행적을 고찰해보고, 이어 「시사책」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다음, 이를 토대로 그의 사상적 성격을 성호학통과 관련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II. 안종덕의 행적
石荷 安鍾悳(1841~1907)은 경상도 청송군 부동면 금곡리에서 아버지 溪广 安聞遠과 어머니 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廣州이고 처음 이름은 彦澤이며 자는 兌老이다. 性齋 許傳(1797~1886)이 1864년 3월부터 1866년 7월까지 김해도호부사로 있을 때 文藝試에 장원한 것이 인연이 되어 허전문인이 되었다. 「畢齋門人錄」 정리에 참여하면서 허전과 더욱 가까이 하여 문인록을 완성하였다. 42세에 進士시험에 합격하였고, 그해 8월 繕工監 假監役을 출발로 벼슬길에 올랐다가 10월 감원 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八道四都의 장관에게 孝廉才諝를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경상감사 尹滋承의 추천으로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時事策」 시험에 장원하여 會試에 나아갔다. 43세(1883) 때 宣惠廳 湖西郞廳 부임을 시작으로 다시 벼슬길에 들어섰고 , 5월 衣制變更之令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44세(1884) 3월 통훈대부로 승품되었다. 같은 해 10월 17일, 갑신정변이 일어나 堂上 閔台鎬가 살해되자 고종이 안종덕에게 선혜청 당상의 업무를 맡도록 하여 각 궁의 식량조달을 잘 처리하였고, 고종의 경복궁 환궁시 배종하여 이후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45세(1885) 8월 의금부 도사에 이어 掌樂院 主簿를 제수받았고, 이듬해(1886) 聞慶縣監으로 나아갔다가 12월 盈德縣監으로 전보되었다. 문경현감에 부임하여 치적이 많자 백성들이 去思碑를 세웠고, 49세(1889)에 梁山郡守, 51세(1891)에 大興郡守, 같은해 興海郡守에 부임하여 역시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이 많자 어사의 장계로 임금에게 보고되기도 하였다. 54세(1894)에 蔚山府使로 나아갔다가 이듬해(1895) 10월 국모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소식을 잡하자 상심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2년 뒤 57세(1897) 4월 眞殿營建所 別監蕫의 명을 받고 상경하였다가 같은 해 9월 中樞院 議官(정3품)에 임명되었다. 58세(1898) 8월에 조정관리 이외의 사사로운 궁궐 출입이 잦음으로써 궁궐의 기강이 문란하여지자 자제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내었다. 59세(1899) 7월 秘書院 丞에, 9월 分秘書 丞에 임명되었다. 서울에 치중하여 설립된 관립학교와 과다한 교육비가 들어가는 외국학교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鄕貢法을 통한 과거제도 실시를 주장하였다.
60세(1900) 5월 다시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가 이듬해(1901) 侍從院 分侍從에 임명되었고, 6월 平理院 檢事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수백인의 西學敎徒 살해사건을 무난히 처리하였다. 9월 다시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고, 12월 當五錢과 當百錢 발행의 폐단을 지적하며 폐지를 주장하는 ‘疏請矯錢弊’를 올렸다. 그리고 63세(1903)에는 典圜局에서 발행하는 白銅貨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1904년(64세) 1~2월에는 韓日協約議定書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李址鎔 등 주동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거듭 내었다. 같은 해 6월 종2품 嘉善大夫에 승품되었다. 8월 시흥과 직산 按覈使에 임명되어 의병에 의한 군수살해사건을 처리하였고, 이어 전라도 巡察使에 임명되어 탐관오리 색출에 앞장섰다. 65세(1905)에 靑松郡守에 나아갔다가 1907년 67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III 「시사책」의 주요 내용
안종덕은 1882년 고종의 명에 따라 8道와 4都에 1명씩 추천된 인재를 대상으로 성균관에서 실시한 對策 시험에 장원하였다. 여기에서는 그가 42세의 나이로 제시한 「시사책」을 분석하여 그가 벼슬길에 들어설 무렵 어떤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시사책」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變通의 필요성과 오늘날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인가를 요점만 제시하였고, 「시사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운데 부분에서는 「시사책」의 주요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끝부분에서는 「시사책」을 실천해야 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1. 변화에 대한 인식과 해결 과제의 제시
안종덕은 1880년대 전후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관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변화의 필요성을 말하였다.
변화한다는 것은 일이 궁하여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개 마땅히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해야 하는 것이라면 변화하는 것이 좋고, 마땅히 변화해서는 안 되는데 변화하는 것이라면 변화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나아가 ‘이른바 때가 이르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때는) 이른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른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不變]은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서 마땅히 벼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않은 것은 도리가 아니고, 마땅히 변화해서는 안 되는데 변화하는 것도 도리가 아닙니다. 요컨대 시기를 따라 도(道)를 좇아서 變易하는 것이 진실로 千古의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石荷集』 8, 雜著, 時事策(이하 時事策으로 약기한다.) 窮謂變者 事之窮而通者也 蓋當變而變者 變之善者也 不當變而變者 變之不善者也 向所謂時至 則變莫之致而至者 是當變而變者也 所謂不變者自如者 是不當變而 不變者也 當變而不變者 非道也 不當變而變者 非道也 明問中 隨時變易 以從道者 眞千古善變者之龜鑑也
앞의 사료에서 나타나 있듯이, 안종덕은 변화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변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면서, 시기를 따라 필요하면 변화해야 하되 반드시 도리를 좇아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는 곧 때에 따라 적절하게 법과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變法論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당시 시급히 변화를 가져와야 할 문제 여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財用⋅兵備⋅人才와 振國綱⋅交隣國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우선순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나라에 재용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혈기가 있는 것과 같고, 나라에 병비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수족이 있는 것과 같다.”♣1)고 하면서, 한편 “인재는 재용과 병비의 근본”♣2)이라 하였다. 즉 재용이나 병비 문제보다도 이를 운용해야 하는 인재를 더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다고 하겠다.
♣1) 時事策, “夫國之有財用 猶人之有血氣 國之有兵備 猶人之有手足”
♣2) 時事策, “人才一節 爲財與兵之本也”
더 나아가 그는 “인재가 많고 재용이 풍부하며 병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오히려 末에 속한다.”♣고 하면서,
♣ 時事策, “人才之多 財用之豊 兵備之强 猶屬於政事之末也
오늘의 急先務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듯 서둘러야 하는 것이 있으니 민심을 가라앉히고 기강을 떨치는 일입니다. 민심이 가라앉지 않고 나라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니 비록 인재가 있어도 누구를 얻어 쓸 것이고, 비록 재물이 있어도 누구를 얻어 먹이며, 비록 병사가 있어도 누구를 얻어 거느리게 하겠습니까. 민심이 진정되고 기강이 진작된 후에 논의하여 人才⋅財用⋅兵備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청컨대 鎭民心⋅振國綱 두 가지야말로 收人材⋅裕財用⋅壯兵備보다 우선입니다.♣
♣ 時事策, “爲今日之急先務 而汲汲乎若救焚 而拯溺者有二焉 曰鎭民心振國綱 民心不振 國綱不振 雖有人 誰得而用之 雖有財 誰得而食之 雖有兵 誰得而將之 民心鎭國綱振而後 可以議及於人材財用兵備矣 又請以鎭民心振國綱二節 冠之於收人材裕財用壯兵備之首”
라 하였듯이, 민심을 가라앉히고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이 인재를 얻고 재용을 여유 있게 하며 병ㅂ를 튼튼히 하는 것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외에 이웃나라와 화평하게 지내는 것, 즉 交隣國을 불가불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시사책」을 통하여 안종덕이 주장하는 변화를 가져와야 할 문제 여섯 가지를 우선순위로 다시 정리하면, ① 민심을 가라앉히고[鎭民心], ②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며[振國綱], ③ 인재를 얻고[收人材], ④ 재물을 여유있게 하며[裕財用], ⑤ 병비를 튼튼히 하고[壯兵備], ⑥ 이웃나라와 화평하게 지내는 것[交隣國]이라 하겠다. 이 여섯 개의 「시사책」에는 각각 3개씩의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2. 주요 내용
1) 鎭民心
그는 1882년 당시처럼 민심이 조용한 때가 없다 하였다. 마을이 소란스러워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고, 시가의 원망과 비난이 가요를 이루며, 국가가 명령을 내리면 군중들이 모여 조롱하고, 나라의 어떤 움직임이 있는 것을 보면 서로 쳐다보며 의심하는 상황이지만, 벼슬아치들은 이제 이러한 모습과 소란이 눈과 귀에 익숙하여 이상하게 보지도 않고, 크게 우려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해 6얼 壬午軍亂이 일어났을 때에도 서울사람들은 소요를 일으킨 군졸들을 도울 정도이고 시골사람들은 오히려 군란을 즐겼다 하면서, 그 까닭이 위에서 도를 잃자 백성들이 흩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만약 시급히 이를 진정시키지 않으면 순식간에 숨이 끊어지듯 나라를 보전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라 하면서, 민심을 진정시키는 방안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 時事策, “若不汲汲以鎭之 國家之不可保在於呼吸毫忽之間也 故曰鎭民心 爲今日之最急先務也”
첫째, 상하를 통하게 한다[通上下]. 백성들의 마음은 어지럽고 원망하고 비방하며 재앙을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은 위에서 성실치 모함으로써 아래에서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형세에서 백성들이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면서, 나라에서 부득불 개혁할 일이 생기면 백성들에게 먼저 알리고 성의를 다해 백성들의 감정을 달래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나라에서는 항상 백성들이 알까 두려워 몰래 일을 추진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의심하거나 괴이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정 관리들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니 자연히 정치는 소홀해진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更張을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국민들에게 알려 公議를 모으고, 조정 신하들에게는 구런 사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상하가 상통하면 소란을 피우고 원망이나 비방하던 행위가 충성과 애정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 時事策, “如是上下上通 騷訛者 變爲교義 怨謗者 化爲忠愛 亦一轉移間耳”
둘째, 옛 풍속을 따른다[因舊俗] 당시 조정에서 복장이나 軍制 등 각종 정부의 제도를 서구식으로 바꾸어 나아가는 데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정부의 무분별한 개혁에 대하여 형식에 얽매이거 실효성이 의심스럽다는 견해를 보이면서, “마땅히 실제에 힘쓰면서 名利를 버리고 옛 것을 그대로 두고 새로운 것에 의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리하여 新兵器를 마련하여 외적을 막고, 농기구, 수레, 배, 방직기 등 새로운 기구를 갖추어 열심히 익혀 利用厚生해야 하되, 시급하지 않는 것은 서둘지 말자는 의견과 함께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지 않아야 國勢도 스스로 굳어진다고 하였다.
♣ 時事策, “惟宜務實而棄名 存舊寓新”
셋째, 요역을 가볍게 한다[輕繇役]. 요역은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보상 없이 각종부역을 부담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종덕은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각종요역을 가볍게 하고 보상하는 데에는 인색하면서도, 각종 명목으로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국민의 원망이 깊어진다 하면서, 지금 개혁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것이다.♣1) 또 혹 국민의 부담을 가볍게 하려는 임금의 명령이 있더라도 목민관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각종 徵索을 먼저 혁파하되, 오랫동안 전해오는 잘못된 관례를 먼저 고친 뒤에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
♣1) 時事策, “近年以來 徵索之名目多端 民情之怨苦旣深 每聞更張之令欣然”
♣2) 時事策, “惟宜嚴飭各省 凡係無名徵索 一切革罷 其爲謬例之傳久者 先講矯捄之方 而後革之”
민심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시사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부 정치인들이 君權强化를 주장하자, 안종덕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 민심이 마치 끓는 철판 위의 개미 떼와 같고, 外患이 급박함이 마치 호랑이가 먹이싸움을 하는 형상과 같다 하면서, 국왕에게 민심의 동요와 신하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라는 소를 내기도 하였다.♣
♣ 『石荷集』 卷4, 上疏(代贊政作)
2) 振國綱
그는 나라에 기강이 있는 것은 몸에 맥이 있는 것과 같다 하면서, 맥이 끊어지면 몸이 망가지고 기강이 해이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강이라는 것이 손으로 부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끈으로 묶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法만이 기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하였다.♣ 기강을 지킬 수 있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 時事策, “國之有綱 有身之有脈 脈絶則身斃 綱弛則國亡 … 夫綱也者 非可以手扶也 非可以繩繫也 惟法可以維持之也”
첫째, 상벌을 신중하게 한다[愼賞罰]. 상을 남발하면 善을 행하는 자가 없어지고, 惡을 징계하지 않으면 악을 행하는 자가 방자하게 되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상을 남발하면서 벌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 벼슬아치들이 자행하는 뇌물수수를 비롯하여 각종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 없기 때문에 기강이 해이해지는데, 임오군란도 이 기강이 해이해져 일어났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군란 시 직무를 팽개치고 달아난 관리를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강이 더욱 풀어져 임금의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따라서 “마땅히 상은 공에 합당하고 벌은 죄에 합당하게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고, “상벌이 신중하면 법의 기강이 서고 법의 기강이 서면 나라의 기강도 진작된다고 하였다.”♣
♣ 時事策, “惟宜賞則當功 罰則當罪 弗以無功而取 弗以貴勢而免 … 賞罰愼 則法紀立 則國綱振矣”
둘째, 정령을 한결같이 한다[壹政令]. “정령이 한결같이 아니하면 백성이 믿지 아니하고 백성이 믿지 아니하면 법이 행해지지 못하며, 법이 행해지지 못하면 나라의 기강이 진작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령은 임금으로부터 나와 백성의 수족을 움직이게 하는 것인데, 당시처럼 정령이 한경같이 않은 때가 없다고 하였다. 특히 각종 범죄자들의 형벌을 받고도 곧 물려난다든가, 벼슬아치의 임명과 퇴출이 수시로 바뀌는 등 愛惡가 갑자기 달라진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 時事策, “政令不壹 則民不信 民不信 則法不行 法不行 則國綱無所振矣”
그리하여 그는 “정령에서 한마디 말과 한마디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 의당 四時처럼 믿게 하고 金石과 같이 견고하게 하며 천지와 같이 사사로움이 없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들이 신임하게 되고 나라의 기강이 진작될 것”♣이라 하였다.
♣ 時事策, “凡一言一動之發於政令者 宜其信如四時 堅如金石 無私如天地 庶幾民之信之 而國綱從以振矣”
셋째, 탐관오리를 징계한다[懲貪墨]. 탐관오리는 나라의 해충이요, 백성의 원수인데, 현재 나라에서는 탐관오리에 대한 처벌이 약하고, 오히려 이들을 눈감아주기 때문에 청렴결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탐관오리가 받은 뇌물을 압수하여 청백리의 자손을 돕는 한편, 탐관오리의 자손에게는 불이익을 주어 법의 기강을 세우고 나라의 기강을 진작시키자고 주장하였다.
3) 收人材
안종덕은 군주의 총명함에는 한계가 있고 국가의 할 일은 끝이 없기 때문에 나라는 인재를 얻으면 일어나고 인재를 잃으면 무너지고 만다고 하였다.♣ 역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 時事策, “人主之聰明有限 國家之事爲無窮 … 得人者興 失人者崩”
첫째, 당의를 혁파한다[破黨議]. 당쟁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해를 끼치고 인재를 묶어두는 것으로써 우리나라처럼 심한 나라가 없다고 하였다. 조정에서 인재를 뽑을 때 먼저 당색을 묻고, 벗할 때에도 편을 가르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당 가운데 또 당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특히 1880년대 개화당을 겨냥하여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다. 즉 개화를 내세우는 자는 수구를 추종하는 자는 완고하다고 지적하지남, 時勢를 논하는 자가 모두 시세에 통달한 것이 아니고 옛 것을 지키려는 자가 모두 완고한 것이 아니라 하면서, 마땅히 黨習을 타파하여 자신의 분수를 따라 나가야 한다는 견해를 폈다.♣ 안종덕은 문호개방 이후 개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개화당과 개화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수구당 내지 기존 배외세력의 알력에서 빚어지는 조정의 혼란을 일종의 당파싸움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 時事策, “惟宜破其黨習 隨其人分而取之也”
둘째, 벼슬길을 넓힌다[廣仕路]. 우리나라는 門閥괴 地閥을 숭상하여 한미한 집안의 자제는 才德이 있어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귀천을 없애고 오로지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사사로운 길을 막는다[杜私逕]. 그는 당시 정부에서 사사롭게 길을 열어 쓰는 인재등용 방법에 대해 매우 불만이 많았다. 특별한 재능도 없으면서 이익만 탐내는 무리들이 궁중의 내관들과 친교를 맺거나 장사치들이 궁궐을 드나들며 爵祿을 얻어 정치에 관여하고 私利를 꽤하는가 하면, 어떤 무리들은 혹 부적을 나누어주고 수령직이나 작록을 거듭 얻으니 진흙탕과 같이 잡스럽다고 하였다.♣1) 그리하여 그는 “만약 인재를 얻으려면 반드시 내부의 사사로운 길부터 막고, 인사담당 기구[選部]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들어서는 자를 일체 배격한다면 사사로운 길이 막혀 인재를 얻을 수 있다”♣2)고 하였다.
♣1) 時事策, “挽近 國家之用人 別開私逕 不學無術 忘恥嗜利之徒 締交婦寺 買䝮小數 一人禁中 輒縻爵祿 或王政而營私 或分符而專城名器之褺 進塗之雜 未有甚於此也
♣2) 時事策, “如欲得在外之人材 必先杜自內之私逕 凡不由選部而進者 一切斥之 則私逕杜 人材得矣”
4) 裕財用
안종덕은 당시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가 財用에 여유가 없는 거시라 하였다. 물가는 오르고 병사들의 양식은 이미 떨어진데다가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일어나도 백성들을 진휼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역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쓸데없는 경비를 줄인다[省冗費].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물산이 부족한데 쓸데없는 경비의 지출이 많고 놀고먹는 백성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필요 없는 관리가 너무 많고 없어도 될 업무 때문에 경비지출이 심하여 절약이 이루어지지 못한데다가, 국민들 역시 귀천을 막론하고 사치가 심하고 관혼상제에 낭비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생산하는 자는 검소한데 쓰는 자는 사치하고 만드는 자는 적은데 먹는 자가 많으니 백성들이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안종덕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마땅히 절실하게 절약하고 일시적인 안일함에 빠지지 않으며, 급하지 않은 일고 관직은 버리고 쓸데없는 지출로 이어지는 일체 없애는 것이 재정을 여유롭게 하는 급선무”♣라 하였다. 일종의 작은 정부를 주장하였다고 하겠다.
♣ 時事策, “惟宜痛加節約 毋安姑息 捐不急之務 罷不緊之官 凡係冗費 一切省之 是爲裕財之先務也”
둘째, 農政을 독려한다[課農政]. 우리나라는 농업정책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농업을 관장하는 관서가 없기 때문에 농사를 권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器用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土産物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하고, 누에치기를 소홀히 하고 햅마다 가뭄을 겪으면서도 水車를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재용을 여유롭게 하는 근본을,
농업을 관장하는 관서를 세우고 권농에 관한 책을 퍼뜨리되, 힘은 적게 들고 곡식이 많이 생산되는 것을 널리 장려하고 잘 가르치게 하는데,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고찰하여 인사에서 승진과 강등을 적용하고 多少를 헤아려 賞罰을 행합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重農의 뜻을 알게 하고, 농업을 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본다면 백성들도 스스로 농업을 권할 것입니다. 이것이 재용을 여유롭게 하는 근본입니다.♣
♣ 時事策, “惟宜立司農之官 布勸農之書 凡所以用力少 而得穀多者 廣購而善敎 考勤惰而黜陟施焉 計多少而賞罰行焉 使民知重農之意 而見爲農之利 則民自勤矣 是爲裕財之本也”
라 하였다. 예부터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지만 사실상 농업을 전담하는 부서가 없기 때문에 농업정책이 소홀하였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셋째, 漕運을 엄중하게 한다[嚴漕運]. 본시 조선 조정의 경상비는 거의 三南지방의 조운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조운과 관련한 위반행위는 매우 엄한 법적용을 하였다는 것이 안종덕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시사책」을 쓸 무렵, 기강이 해이해짐에 따라 官穀의 운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京倉의 창고지기와 船主가 묵계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고, 폐읍이 된 고을의 서리들은 온갖 뇌물로 백성들을 착취하는데 이들이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모했다 하면서, 법의 기강이 이래서야 상하가 모두 곤궁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옛법을 밝혀 더욱 엄하게 하고 점차 씀씀이가 여유롭기를 기다렸다가 운반선을 구입하여 운반비를 줄이고 화물이 썩는 걱정에 대비할 수 있으니, 역시 재정을 여유롭게 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라 하였다.
♣ 時事策, “惟宜申明舊法 倍加嚴截 稍待用裕 構造輸船 以省輸運之費 以備臭載之患 亦爲裕財之一道也”
5) 壯兵備
안종덕은 천하가 다사다난할 때에는 경쟁적으로 전쟁에 이기기 위한 기술을 익히는데, 지금처럼 쇠잔하고 늙은 병사에 병기가 썩어 있기 때문에 우국지사를 걱정하게 하고 이웃나라에 부꾸럽다고 하였다.♣역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 時事策, “當此 天下多事 競尙兵技 殘兵老卒 朽槍敗弧 誠爲志士之憂 而隣國之羞矣”
첫째, 재능 있는 장수를 뽑아 쓴다[擇將材]. 지금 우리나라는 지닌 재능과는 관계없이 등용과 관직을 위해 사람을 뽑는 형편이라 하면서, 더욱이 나라의 존망이 장수의 손에 달려있는데 귀한 집 응석받이나 어설픈 유생에게 장수를 맡겨서는 군대의 엄한 규율이나 정밀한 兵備를 갖추기는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오로지 재능 있는 장수를 뽑아 한 나라의 권한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 時事策, “況將帥之任 三軍之死生 一國之存亡 繫焉 是何委之於綺紈驕子白面迂儒者也 如此而亡 師律之嚴 兵備之精蘭難矣”
둘째, 필요 없는 병사를 없앤다[汰冗兵]. 병사는 많은 것보다 그 쓰임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 안종덕의 생각이었다.♣1) 우리나라의 軍籍이 이미 무너져 징집할 길이 막혀 있고, 군영에는 군인들이 먹을 양식이 소진되었으며 징집된 군인마저 노약병이라 하면서, “비록 孫吳兵法과 名將의 전법을 가르치더라도 어디에 드러낼 것입니까?”♣2)라고 반문하였다. 그리하여,
♣1) 時事策, “兵不在多 惟其用”
♣2) 時事策, “雖敎之以孫吳之法頗之戰 亦何所施牧”
오로지 과감하게 없애 모두 퇴거해야 합니다.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精兵 한 명을 모아 병사 두 사람의 몫을 겸하게 하여, 법대로 가르치면 오래지 않아 효과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 時事策, “惟以嚴木節 而幷汰之 不貴其多 惟取其精一兵 兼二兵之食 敎演如法 不久而 效可責矣”
라 하여, 정병위주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셋째, 화포의 기술을 익힌다[練鎗砲]. 이제 모든 用兵之家들이 총포를 써서 적을 제압한다 하면서 우리나라처럼 화살로써는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軍艦을 구입하고 해군을 증강하고, 客主들로부터 海稅⋅船稅를 받아 해군을 운영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 『石荷集』 卷5, 疏, 辭職言疏(代軍部大臣作)
6) 交隣國
안종덕은 개화기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매우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위치가 중국 동쪽 중간에 있어 강한 이웃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분쟁지역이 된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보고 있었다.♣1) 이러한 인식 아래 “문을 굳게 닫고 외국과 통상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자는 천하의 형세를 모르는 자”♣2)라고 비판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교린을 한결같이 하되 이해의 얕고 깊음을 따지지 않는다면 위태하기가 울타리를 치우고 호랑이에게 지키도록 하자는 것과 같다”♣3)고 하면서, 신중해야 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각 국과 고르게 조약을 맺어 강한 적아 엿보지 못하게 하고, 혹 수교에 실패하면 나라 사이에 시기와 의심이 일어나 틈이 생기므로 도리어 문을 열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것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수교하는 방법 세 사지를 제안하였다.
♣1) 時事策, “顧我國之地 處於中東之間 逼於强大之隣 爲人之所必爭者也”
♣2) 時事策, “膠守閉關之論 力主鎖港之議者 不知宇內之勢者也”
♣3) 時事策, “若一於交 而不論利害之淺深 則殆近於自撤藩籬 使虎自衛者也”
첫째, 국가 간의 교제를 신중히 한다[愼交際]. 상대국이 우리나라와 왜 수교하려는가를 먼저 알아낸 다음에 수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수교를 원하는 나라는 모두 자기 나라를 위하는 것이지 우리나라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나타내었다.
♣ 時事策, “夫先知彼之所以交我 然後我亦可以交彼 … 彼皆自爲也 非爲我也”
우리나라는 청나라와 일본과 접경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저들이 倂呑하려 한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한번 잃는다면 중국 동쪽의 형세가 고립되고, 아시아를 보존치 못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歐美가 뚫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五洲의 輕重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 時事策, “惟我與淸日與之接界 而我居其中 彼欲呑倂 則必自我土 始矣 我國一失 則中東之勢 孤矣 亞洲不保 則歐美之遠 亦當折而入矣 然則五洲之經重 懸於我矣”
요컨대 우리나라의 위치가 주변국인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영토확장을 마음먹는다면 먼저 우리나라를 침략하리라는 것이고, 동아시아가 고립되면 아시아가 서구의 침략을 받게 되니,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생각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일본은 물론이고 청나라도 列國의 하나로 보고 있었는데,♣ 중국과의 교제를 소홀이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후하게 대우하면 다른 나라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보호할 길을 잘 선택해서 다른 나라의 혐의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 時事策, “淸亦列國之一也”
둘째, 自治를 먼저 해야 한다[先自治]. 四庶朋友라하더라도 자치를 하지 않으면 교제가 불가능한데, 하물며 국가 간의 교제에 있어서 自强하는 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안종덕의 생각이다. 자치란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안종덕이 말하는 자치는 바로 ‘自强’을 뜻한다고 하겠다. 나라가 다른 나라의 침범을 당하거나 궁핍하여 구원을 청한다면 나라의 수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자치에 힘쓰고 富强의 實을 도모해야 할 것이고, 만일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그 힘을 족히 방어할 수 있어야 국가 간의 교제도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 時事策, “惟宜先務自治 以圖富國之實 萬一 有事 其力足以禦彼 然後其交可久”
內政과 外務에 대해 안종덕은,
무릇 내부를 닦는 것[修內]은 외부를 물리치려는 것입니다[攘外]. 內政을 우선하지 않고 外務를 말하는 자는 비록 그 말이 옳다 하더라도 나라를 위한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 時事策, “夫修內所以攘外也 不先內政 而能言外務者 雖其言皆是 己失爲國之道”
라 하였듯이, 외적을 물리치려면 먼저 내치에 힘써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안종덕 자신도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터에 이렇게 말한 것은 1880년 전후 국제정세의 흐름에서 自强만이 상길이라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셋째, 이권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다[塞漏扈]. 그는 국경지방의 통상에서 우리나라의 상품이 일방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과 외국과의 통상조약이 이루어지고 개항된 뒤 관세조항이 만들어지지 않아 稅收가 없는 것을 매우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무역에 관한 업무를 익혀 우리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 간의 稅則이 신속하게 만들어져 세수 이익을 올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1) 그 후 그는 평안도 용암포를 러시아에 租借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개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2)
♣1) 時事策, “惟宜亟定稅則 分彼之利 又講商務 興我之權 誠交隣之大計也”
♣2) 『石荷集』 卷4, 疏, 樞院聯名請龍岩開港疏
3. 「시사책」의 실천
이상과 같은 6개항 18개목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시사책」도 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實踐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아, 오늘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는 어리석은 저의 견해는 여기에 머무릅니다만, 그것을 해하는 것이 實일 뿐이요 實功과 實事이니, 거짓 꾸밈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上下⋅小大가 實心으로 정치하고 實心으로 전하의 뜻을 발현하여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遭難을 당한 것과 같이 하면, 內務가 서 있지 않았다 하여 무엇을 걱정하며 外務가 다스려지지 않는다 하여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 時事策, “嗚呼 愚見之所以捄今日之弊者 止於此矣 而其所以行之者 實而已 實功實事 悲可以虛僞文飾而致也 惟願上下小大 實心爲政 實心對揚 恐懼惕厲 常如遭難之日 則內務何憂乎不立 外務何憂乎不理哉”
IV 「시사책」에 나타나는 안종덕의 사상
1. 민본사상
「시사책」은 철저하게 민본에 입각하여 쓰였다. 여섯 기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면서 ‘鎭民心’을 가장 시급한 것으로 언급한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사실 나머지 다섯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도 종국적으로는 백성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라 하겠다. 그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 또한 편안하고, 민심이 조용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위태롭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 時事策,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 故民心不靜 而國不危者 自古及今 未之聞也
그리고 개혁에 착수할 때에는 널리 公議를 모으고 백성들이 개혁에 관한 것을 알게 해야 하며, 부득이하게 백성들의 뜻에 반하여 개혁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에도 백성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알려 백성들이 따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계해야 한다는 것도 백성들의 삶을 위해서이고, 요역을 줄이는 것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2. 대외 개방사상
앞서 보았듯이, 그는 나라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외국과 통상을 하지 말자고 짱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천하의 형세를 모르는 자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反外勢를 부르짖으면서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펴는 보수주의사상에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許傳門人 星湖學統으로서 다른 허전문인과는 다르게 대외개방정책을 폈다는 사실은 주목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성호학통의 宗師였던 허전은 철저하게 反西學⋅反外勢를 주장하면서 대원군 편에 섰고, 영남출신을 중심으로 그 문인들 대다수다 이를 추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남출신이면서도 안종덕의 대외사상은 스승 허전과는 다른 면을 보였다고 하겠다. 물론 그의 대외개방사상은 매우 신중하여 당시 적극적인 개화당이 주장하던 전면 개방사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외사상으로 일관하던 다른 허전문인 성호학통에 비교하면 당시 정세의 흐름에서 국제적 안목이 남달랐고, 대외개방사상에 있어 매우 앞서가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여도 좋을 듯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위치가 이웃 강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고, 이들의 침략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나아가 우리나라가 잘못되면 아시아가 안정치 못하여 서구의 침략을 받게 된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도 다른 허전문인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외교에 신중을 기하면서 종국적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00년대 초 동물세계의 優勝劣敗와 弱肉强食, 그리고 適者生存의 법칙을 인간사회에 적용한 社會進化論이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지만, 이미 안종덕은 그러한 이론이 국내에 퍼지기 전에 이미 이 「시사책」을 통하여 국가 간의 경쟁 속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벽위노선을 고수하던 안정복계열 성호학통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개화기에 들어 성호학통 내에서도 대외인식에 점차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 안정복계열 성호학통이 대외문제에 있어 벽위 일관으로 나아간 것으로 언급한 필지의 기존 견해를 이 시점에서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3. 자강사상(自强思想)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단시 국제관계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은 원활한 수교를 맺으면서 우리의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안종덕의 생각이다. 외국과 수교를 할 때에 국력이 약해서는 국가간의 경쟁에서 밀린다는 견해라 하겠다.
비록 四庶朋友의 교제에 있어서도 자치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당당한 千乘之國이 다른 나라와 수교를 하는데 自强할 것은 생각지 않고 오히려 상대국의 歡心만 사려 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그들의 구원을 바라고 궁핍하면 그들의 원조를 바라며, 사건이 발생하면 그들의 계략을 기다리니 어찌 심한 수치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 마땅히 먼저 自治에 힘써 富强의 實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 時事策, “雖四庶朋友之交 不自治 則 不能交人 況以堂堂 千乘之國 與他國交 不思所以自强 而惟彼之歡心足罄 有寇則望彼之援 有匱則求彼之助 有事則待彼之謀 豈不可恥之甚哉 … 惟宜先務自治 以圖富强之實”
외국과 수교를 하면서 自强할 것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상대국의 환심만 사려한다거나 유사시 구원이나 원조를 바란다면 나라의 수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후반과 같은 열강의 침투와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自强 없는 수교는 위험하다는 견해라 하겠다. 그리하여 그는 이웃나라와 수교를 주장하면서[交隣國] 먼저 자치를 해야 할 것[先自治]을 주장하였고, 자치를 통하여 부강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내치와 외무를 본다면 先內治⋅後外務가 기본 입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內治를 잘하여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自强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그밖에 兵備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하면서 재능 있는 장수를 뽑아 쓰고, 비록 숫자는 적더라도 정예군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거나 근대화된 병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자강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변법사상(變法思想)
앞서 본 바와 같이, 실제에 힘쓰면서 형식을 버리고, 가능하면 옛것은 그대로 두되 새로운 것으로 보충하자는 것이 안종덕의 입장이었다. 이것은 守舊라기보다는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을 마구 바꾸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땅히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고, 마땅히 변화해서는 안 되는데 변화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시세에 다라 당연히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하지 않아 많은 폐단을 일으키기 때문에 안종덕은 「시사책」을 통하여 변화해야 될 내용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때에 따라 불변의 道를 좇아 바뀌어야 된다♣는 그의 주장은 변법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時事策, “隨時變易以從道者 眞千古善變者之龜鑑也
사실 그가 「시사책」을 통하여 변화를 강조한 6항 18목의 내용도 법과 제도를 고쳐서 시행하지 않으면 효과를 거둘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강조하는 변화에는 먼저 변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안종덕은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고 실천을 중시하면서도 당시 개화당이 보인 적극적인 행동양식보다는 온건 개혁을 선호하였다. 「시사책」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먼저 안정을 취하고 개혁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鎭民心⋅振國綱 두 가지야 말로 收人材⋅裕財用⋅壯兵備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고, 1880년대 개화당이 수구를 추종하는 자를 완고하다고 지적하면서 “임금의 뜻을 망령되이 흔들고 갑자기 옛 법을 고치며 時論에 부합되기를 바라 어긋난 견해를 굳게 지킨다”♣고 비판한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허전문인 성호학통이 온건적 개혁을 주장하였다는 사실과 견주어 볼 때, 안종덕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에게는 관립학교나 외국 유학을 부정적으로 보고 과거시험을 부활하자는 보수적 측면도 찾아볼 수 있으나, 당시 성호학통 가운데에서는 개방⋅개혁성향이 가장 큰 인물 속에 있었다고 보아야 좋지 않을까 싶다.
♣ 時事策, “目以開化守其舊見者 指爲頑固 又或妄揣上意 而忽變舊規 冀合時論 而膠守拗見”
V. 맺음말
지금까지 안종덕이 1882년에 제시한 「시사책」을 대상으로 제기된 내용과 거기에 나타난 안종덕의 사상을 대강 살펴보았다. 「시사책」은 크게 鎭民心⋅收人材⋅振國綱⋅裕財用⋅壯兵備⋅交隣國의 6개 항으로 구성되었고, 각 항은 다시 3개의 목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즉 鎭民心은 通上下⋅因舊俗⋅輕徭役, 振國綱은 愼賞罰⋅壹政令⋅懲貪墨, 收人材는 破黨議⋅廣仕路⋅杜私逕, 裕財用은 省冗費⋅課農政⋅嚴漕法, 壯兵備는 擇將材⋅汰冗兵⋅練鎗砲, 交隣國은 愼交際⋅先自治⋅塞漏扈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목에서는 제시한 이유와 실태, 그리고 개선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가 「시사책」을 통하여 제안한 것들은 모두 문호개방을 전후한 시기에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현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러 현안을 개혁⋅추진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민심을 가라앉히는 일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을 곱았다. 그밖에 국내 문제로 인재등용을 비롯하여 국가 재정의 확보 및 절약 문제, 근대 화기의 확보와 조련 문제 등이 제기되었는데,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빈번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각종 개혁 논의에는 기본적으로 民本思想이 깊고 넓게 깔려 있고, 그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變法의 필요성 또한 강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그의 주장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외국과의 수교 및 통상에 대한 필연성을 역설한 대외 개방사상이라 하겠다. 그는 외국과의 수교를 필연적인 추세로 보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여건과 현실에서 自强 없는 수교는 위험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서구의 움직임, 우리나라와 이웃한 중국⋅일본의 관계 등을 관찰한 결과에서 얻은 판단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그의 국제적 안목과 예리한 통찰력이 남달랐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영남 남인 성호학통은 許傳을 정점으로 그동안 줄기차게 지켜온 천주교 배척과 함께, 병인양요나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의 서구세력과 운양호사건 이후 일본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나타내면서 벽위사상을 고수하여 왔다. 그런데 안종덕은 허전문인이었지만 그의 개방사상은 다른 영남출신 성호학통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시사책」에 나타냈듯이, 그는 “시기에 따라 바꾼다[隨時變易]”는 변통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당시 국내외의 정세가 우리나라에 극히 불리한 상황으로 흐름에 따라,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록 체제 개편까지 요구하던 개화당의 개혁사상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기존 성호학통이 지켜온 사상에는 비할 바가 아니라 하겠다. 이로써 볼 때, 벽위 성향으로 일관하던 안정복계열 성호학통도 근대 개화기를 맞아 일부 학자들로부터 신중하게 개방으로의 사상적 노선 변경이 일기 시작하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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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thought of Ahn Jong-deok,
Seongho's school in Yeongnam province
in the end of Joseon dynasty
- Based on a measure of current events -
Kang, Sei-koo
Ahn Jong-deok(安鍾悳), one of Yeongnam-Namin(嶺南南人) which is in the academic people of Seongho's school, had suggested six reform plans through a measure of current events(時事策), in the later 19th century, the opening the new age. It contains the contents to calm down the public, to tighten discipline, to open the offices to talent, to fulfill governmental finance, to complete national defense, and to have a good relationship with near countries. In the background of his reform thought, there is the thought of democracy. Also, he asserted to carry out a reform as a trend of the age. Even though the most of students of Heo Jeon(許傳) which were in the academic people of Seongho's school, were conservative, he has very straightforward and reform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