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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의 기도
<누가복음 10: 25~28>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지난 목요일 배우 윤정희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가까운 분의 부음을 듣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윤정희라는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그녀가 한 때 문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하면서 한 해에 50편에 가까운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던 유명한 여배우였다는 사실도 내게는 그저 한낱 정보일 뿐이다.
윤정희의 죽음은 내게 ‘미자 할머니’의 죽음으로 다가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주인공 말이다. ‘미자’는 사실 배우 윤정희의 본명(손미자)이기도 한데,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주인공의 이름을 ‘양미자’로 했을 때 그는 분명 배우 윤정희의 본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배우 윤정희와 <시>의 여주인공 미자는 결코 비슷하거나 가까울 수 없는 사회적 대척점에서 살았다는 점이다. 윤정희는 교수 딸로 태어나 23세에 데뷔한 이후 스크린의 여왕으로 살았으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상류층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바닥이라는 것을 모른다. 반면 미자 할머니는 “팔자가 드세”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감독 이창동은 이 불일치를 절묘하게 활용하여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뒤늦게 시에 관한 열정을 불태우는 철없는 멋쟁이 할머니 ‘미자’의 핍진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이런 불일치를 인간과 예술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녀가 쓰는 말은 dé-coïncidence, 정확히 탈합치라고 번역되지만 말이다. <탈합치: 예술과 실존의 근원>이라는 짧은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쓴다.
“탈합치라는 개념은 안착된 합치를 해체할 때 새로운 가능성들이 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사유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이는 단절, 창조, 나아가 혁명의 거대한 신화에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한 예술가는 예술로 인정된 예술로부터, 더욱이 자기 스스로 이미 작품으로서 창출한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때 비로소 예술가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상가는 이미 사유된 것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 이미 사유한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때 비로소 사상가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매우 많은 실천 영역에 적용됩니다. 역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를 다시 여는 것은 사회에 부과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확정성에 매몰되는 적합성과 조정의 형태를 해체할 때 가능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 배우 윤정희의 이미지를 그 자체와 탈합치시킴으로써, 즉 윤정희가 아닌 손미자를 이미지화 하는 시도를 함으로써 영화 속 인물 양미자를 생생하게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는 중층적인 관찰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 작업을 하던 당시 만 66세인 그녀는 이미 치매 초기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간직하고 있는 윤정희의, 좋게 말하면 어리고 순수한 모습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치한 공주병은 영화 속 인물 양미자를 생생하게 형상화하는데 결정적인 요소였다. 놀라운 사실은 영화인 윤정희와 영화 속 인물 양미자는 사회적인 위치상 결코 만날 수 없는 대척 지점에서 살아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창동은 윤정희의 이런 겉모습에서 영화 속 인물 양미자의 결정적인 캐릭터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사실 윤정희 자신의 바닥, 즉 세상 물정 모르는 할머니 공주의 모습이다.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는 자기 말로 “젊었을 때는 자기가 웃어주기만 하면 남자들이 뿅갈” 정도였지만 미인박명이라고 팔자 드센 삶을 살았다. 이미 노쇠한 그녀는 기초수급으로는 부족한 생활비를 파출부 일로 벌충하면서도 중학생인 손자를 맡아 기르고 있다. 알츠하이머, 즉 치매 초기인 그녀는 이제 말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시를 쓰고 싶어 한다. 동네 문화센터 시 쓰기 강좌에 등록해 시인으로부터 시작법을 배운다. 이와 같은 영화적 설정에 감독 이창동의 예술적 간지가 있다. 영화 <시>의 시학은 말을 잃어버리는 순간 시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술적 언어는 대타자의 욕망의 언어를 상실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영화의 위기를 구성하는 사건은 이 시학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미자의 손자가 공범이 된 장기간에 걸친 성폭행으로 인해 한 여학생이 자살한다. 악행을 저지른 아이들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사태를 수습하려는 모임을 갖는다. 그들은 자살한 아이의 어머니를 매수하여 범죄를 덮고자 한다. 이 일에 아이들의 부모는 물론 학교의 교장과 교감 그리고 선생들, 지역신문 기자와 경찰, 심지어 자살한 아이의 어머니까지 협력한다. 공적 절차, 즉 형사적 과정을 피하려는 이런 사적인 행위들이 공모하여 하나의 법적 현실을 구성한다. 대타자의 말은 법과 그 이면의 위반과 더불어 성립한다. 법과 이면의 위반이 공모하여 성립시키는 현실은 비현실, 즉 무질서이며, 현실을 무질서로 정립하는 대타자는 비존재이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한 살림에도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녀 멋쟁이 할머니로 불리며, 젊어서부터 꽃을 좋아하고 엉뚱한 말을 잘하던 미자에게 시를 써보는 도전은 사실 늘그막의 소박한 허영이었다. 당연히 이런 허영에서는 단 한마디의 시구도 떠오를 수 없다. 그러나 아름답고 멋진 말을 찾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그녀를 자신의 진실과 대면하게 만든다. 좀처럼 합의를 봐주지 않는 피해자의 엄마를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구슬리기 위해 찾아갔을 때, 그녀는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밭에서 고생하고 있는 가련한 여인에게 목가적인 삶의 아름다움만 떠벌리고 돌아선다. 고통에 빠진 인간에게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닫는 순간의 미자를 연기하는 배우 윤정희는 가희 압권이다. 그녀는 그 순간 자기가 써오던 텅 빈말이 타자의 고통에 무심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진실마저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녀는 ‘멋쟁이’ 이면의 공허한 자신을 대면한다.
이때부터 그녀가 말을 찾는 장소는 달라진다. 그녀는 죽은 아이의 좌절된 꿈과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과 고통이 사무쳤던 장소를 찾아다닌다. 그녀는 더 이상 텅 빈말로 뒤덮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죽은 아이의 말을 묻고 구한다. 미자는 궁극적으로 죽은 자, 그러니까 불가능한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미자의 타락 혹은 추락을 동반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그것은 허영으로부터의 타락이다. 사실 인간은 자기애에 빠진 존재로서 거의 모두 공주암 왕자암에 걸린 중증 환자라는 의미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계의 진실을 깨닫고 그곳에 가닿는 과정은 항상 타락을 동반한다. 폴링 인 러브(falling in love), 이는 ‘진리 혹은 사랑으로의 타락’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부분은 대단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녀는 다만 자신이 쓴 시 <아네스의 노래>를 낭송하는 목소리로서만 존재한다. 아마도 라캉의 아파니시스(aphanisis)가 정확히 이렇게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대타자의 말의 세계에 걸려들어간 존재는 사라짐으로써 나타난다. 우리의 욕망은 분명 타자의 욕망, 즉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이지만, 욕망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존재의 욕망, 즉 순수 욕망이 대타자의 영역에 찌꺼기로 남아 대타자의 언어의 장을 오염시킨다. 이 얼룩, 좋은 게 좋은 세계의 풍경을 교란시키는 응시야말로 진정한 주체의 절규라고 할 수 있다. <시>의 대단원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와 같은 풍경이다.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아버지들의 좋은 게 좋은 의도는 이 세계를 영원히 힘센 자, 가진 자, 목소리 큰 놈들의 불법이 판치는 세계로 폐쇄시킨다. 그런 세계에 아이들의 장래는 없다. 주체의 욕망은 바로 이 세계를 근거로부터 흔드는 절규, 존재의 함성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죽임의 완력에 억눌린 삶의 의지가 발하는 목소리다. 이는 또한 “빛이 있으라”라는 창조자 하나님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영화 <시>에서 하나님 사랑은 자신을 “회칠한 무덤”, 흰색으로 발라놓은 깔끔한 공간에서 썩어가는 주검, 즉 멋쟁이 할머니 이면에 있는 텅 빈 자신을 발견하는 사건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 사랑은 “존재했어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말, 즉 죽은 자 혹은 타자의 언어를 탐구하는 주체의 집요한 노력이다.
첫댓글 설교로 듣기도 했지만 글로 또 다시 읽어보니 새롭습니다. 윤정희+ 양미자님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를 성경말씀에 비유하여 전달해주셔서 잘 이해되었습니다. 오래전 봤던 '시'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네요. 얼마전 백건우 연주회를 다녀왔는데 피아노반주 실력이 힘차고 움직임이 대단했던 기억도 납니다. '아너스의 노래'도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천천히 말씀을 읽으며 영화 속 미자를 생각합니다. 미자 목소리에 덧입혀 제 목소리로 시도 읽어봅니다. 사랑하는 영화와 묵직하고 예리한 말씀이 하루를 꽉 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