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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관계의 또 다른 모델을 구축하다
에리티에(Françoise Héritier, 1933-), in Hommes et femmes, la construction de la différence (pp. 79-89). Paris, Le Pommier.) 배영란, 알마, 2009. pp.155-169(P.175)
- 프랑스와 에리티에(Françoise Héritier, 1933-), 인류학자
에리띠에 (Françoise Héritier, 1933-)가 남녀 성별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것을 해체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로서는 구시대의 모델이 존속하는 것은 어쩌면 철학적으로 상층 우위의 사고가, 또는 논리를 통한 언어의 사고가, 나아가 과학과 지식이란 이름으로 기술의 전승에서 남성으로 이어지는 아버지 신앙이, 지배적인 데 있지 않을까 한다. 팔루스 신앙에 빠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이 사실 또는 현존의 상태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 신앙자들은 자기의 투사를 상징에 맡기고, 상징이 사실로서 인정하여 거꾸로 그 상징에게 갈구하고 기원하며 구원뿐만이 아니라 이익까지도 요구한다. 박근혜 최순실은 그러한 일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없는 것에 투사하여 빌고 이익을 추구한 집단은 양대 호란이후 명나라를 들먹였던 노론들에서부터 였다. 이들이 일제 부역하면서 작위 수여자들의 수의 절반이라는 것은 그것이고 이자들의 후손이 미국에게 빌붙었다. 권력의 마름들은 인민을 착취한다.
평등은 권력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데 있다. 국회에서 미술 전시에서 “...”라는 벌거벗은 권력을, 요강 공주를 빗대었다고 난리다. 프랑스 대혁명 전야에 루소가 있었던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거의 매일 파리 시내에 왕비를 빗댄 풍자화가 뿌려졌고, 다른 하나는 보마르셰의 금지된 “희극”의 조각편들이 인민들의 웃음거리로 거리극으로 돌아 다녔다. 내가 인민의 성립이라고 하는 것은 인민이 권력과 권위에 두려워하지 않고 풍자하는 것 그리고 허수아비(좀비) 같은 권력자들을 조롱거리로 삼고 웃음을 터트린다는 것이다. 21세기 이땅에서 이런 일이 거의 매일 일어난다. 요강공주는 난 연애 안했다고 인터뷰를 하는가 하면, 순시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며’ 큰소리 치는데 옆에 있던 청소부 노동자는 “염병이네”라고 한다. 이 웃음거리를 생산하는 여성이 여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이들은 젠더 상으로 권력우성이다. 이 우성에게 청소 아줌마는 열성이다. 열성의 “염병이네”란 분노가 서려있고, 그리고 연애 안했다거나 이상한 약물한 적 없다고 말하는 요강공주는 웃음거리이다. 벩송이 말하듯 이것은 희극이 아니라 웃음거리이다. 인민은 그 우성에게 그런 것 묻지 않는다. 왜 남들도 다하는 일하는 시간에, 그것도 중요한 세월호가 잠기는 시간에 권력우성은 어디서 뭘하고 있었냐고 묻는 거다. 빈대떡 먹으로 종사거리 시장에 가지 않았다, 비행기 안탔다, 오줌 싸고 키 덮어쓰고 동네 돌지 않았다 등등 하지 않는 일들을 하루 종일 또는 몇날 며칠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거 이야기하는 게 3류 소설가이다. 그래도 소설이라면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세상 바꾸기 위해 법률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법을 만드는 자가 요강공주 또는 국회의원이었다. 인민에게 법률제정권이 없다니, 프랑스에서 인민과 달리 여기 반도 남쪽에서는 아직 인민이 성립하지 않은 것 같다. 21세기 혁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인민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이기리라. 이 세로운 기반위에 여남 평등의 새로운 모델도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 아메리카 혁명군 사령관 윤구병의 강령처럼 모든 위원회는 여남 동수로 한다. 위원장은 여자로 한다. (50L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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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성별 관계의 또 다른 모델을 구축하다 155-169
프랑스와 에리티에(Françoise Héritier, 1933-), 인류학자
제1장에서 나는 인류의 초창기에 성별 관계가 나타나는 모델이 수립되는 시나리오를 그려 보았다. 인류 역사에서 성별관계는 그 어떤 경쟁 상대도 없었으며, 평등을 향해 나아가는 여자들의 행보가 가장 두드러진 선진죽 사회 및 서구 사회를 포함하여 이 모델은 인간 사회에서 쉽게 인정되며 항상 통용된다. 나는 놀랍도록 효율적인 이 이데올로기, 성별관계에 있어 ‘지배적인 구시대 모델’의 성립에 대해 환기시켜보고자 한다. 이 모델을 해체할 수 있겠는가? 해체가 가능하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155)
지배적인 구시대 모델의 기본 전제 156
지배적인 원시 모델의 기본 전제는 성별의 관계가 순전히 유기체적 요구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을 주관하는 자연적 차이라고 보는 것이다. (156)
[기본전제로서] 언어 내에서의 상징적 요구에 관한 해석은 오로지 성적 충동에만 종속된 남자를 모성적 충동에 종속된 여자와 대비시킨다. [성적충동과 모성충동의 대비가 남자와 여자의 대비로 만든 것은 심리학적이지 않을까?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자손의 보존 충동은 여성에만 있을까? 남성에게는 후손의 보존이 없을까? 고행자와 수도자들은 왜 남성 위주일까?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별 소용이 없다는 의미는 아닐까? 이것은 단지 XX 염색체의 등장으로 사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후손의 잔존이란 어쩌면 인류(생명성)가 자연적 생명의 지속에 대한 내밀한 비밀(불가사의)을 간직한 것이 아닐까? (50LMF)]
한 젠더에 대한 다른 젠더의 우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근거에 관한 신체 및 뇌의 기능 연구는 바로 이같은 자연적 시각의 가능성으로 설명된다. (157) [구시대 모델은 자연적이란 이름 아래 생물학적 또는 생리학적 근거를 찾으려 하는 것 같다. 즉 신체와 두뇌가 그 자료였다. - 이것은 이미 무너졌지만 그래도 이데올로기로 지배하고 있다. (50LMF)]
관찰 환경은 더 이상 같지 않다. 157
모델을 바꾸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객관적인 이유가 있으면 그 모델을 가정할 수 있다. (157)
우리는 현미경을 통해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18세기 말 이후로 우리는 세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20세기 이후로는 염색체의 이중 배열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이가 아버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초자연적 힘이 내려주신 선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158)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이와 같은 현실 세계의 이해 환경 변화라는 토대 위에 일상 속에서의 운동 및 정치적 투쟁에 대한 개인 및 집단의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아울러 얻어내기 가장 어려운 조건인 교육분야의 경계 강화 또한 이루어야 한다. (158) [성평등 뿐만 아닐 삶의 평등에서 투쟁을 거쳐야만 하는데, 교육이 중요하다. - 사실 신석기 시대에는 평등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자연 속에서 삶이 투쟁이었기에 상보관계가 더 중요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해 환경의 변화는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이익우선이 지배적일 때 생긴 것이 아닐까? (50LMF)]
제도적 경험 및 법의 역할 158
서구 사회에서 이와같은 핵심적인 행동들 가운데 몇몇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이는 주로 20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아직은 남자들과 동등하게 모든 직업 분야에 까지 휩쓸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식의 영역을 여자들이 점하고 나선 것이다. .. 실효를 거두진 못했으나 남녀동수법 또한 인정이 되고 있는 상태고, 최근 프랑스에서는 급여의 평등이 법에 의해 허용되었다. (158-159) [평등의 문제는 법을 통한 제도화가 우선이다. (가칭) 아메리리카 혁명군 사령관 윤구병은 모든 위원회는 여남 동수로 하고 위원장은 여성으로 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은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기 위하여 더 이상 싸워야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중대한 오류가 생기는 환상[착각]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법은 폐기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위력이 큰 정신적 보루는 언제나 근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법이 무력화되는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에서 보아왔다. 게다가 어제 최순실이 민주투사가 되는 것처럼 특검에 들어서면서 소리치는 것은 상층의 신앙이 어느 나라에서든 꼴보수의 보루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층의 착각과 허구 그리고 환타지를 우스개로 만드는 것은 법제보다 예술이 먼저 할 것 같다. 국회에서 전시된 권력을 비꼰 그림 한 점을 두고 여성비하라고 하는 것에 한 정당이 휘둘린다는 것을 보면, 착각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천동설을 믿는 것 이상의 착각이 아직도 과거의 모델 속에 살고 있다는 증명일 것이다. (50LMF)]
피임할 권리 160
제도적으로 얻어진 것들 가운데 피임할 권리의 중요성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피임권은(제1장에서 제시된 가설들이 적절하다는 가정하에) 지배적인 구시대 모델에서 여자의 의존도를 증명해줄 정도로 크게 개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 같다. (160) [피임권, 그리고 낙태, 그리고 사후 피임약 등의 제도화가 점점 이루어 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논쟁을 거쳤던가...]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 자신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선택은 거부할 권리, 자신이 선택한 배우자와 사이에서 낳을 아이의 수를 선택할 권리, 이혼할 권리,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지 않을 권리, 재산 없이 쫓겨나지 않을 권리, 원하는 아니가 되기 전에 결혼하지 않을 권리 등이 생긴 것이다. (160)
주요 반발지점 161 [구시대 모델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아래 둘이다.]
이 모델[위의 권리들]은 변화될 소지가 많고 벽에 부딪힐 지점들을 대거 제공하고 있다. 첫째 반발 지점은 남자의 성적 충동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 매춘의 존재의 필요성이 인정 (161-162) [성적 충동이라기보다 공격성에 관한 것인데.. 마초들의 성적 충동을 왜 여성이 감당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매춘 그보다 심한 것은 정신대 문제다. 공격성에 대해 애써 무시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팔루스를 신앙으로 받들고 있다는 점이 아니겠는가? / 성은 n 성이라는 점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
반대로 이 모델에서 여성들은 가장 방탕한 욕구를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비난을 해도 마땅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모성적 충동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지는데, 여기서 말하는 모성적 충동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가지며 외부 세계의 필요성과는 무관하다. (162) [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것은 팔루스 신앙에 역(반동)작용으로 여성의 방탕한 욕구, 또는 모성 충동을 들먹인다. 이 모성 충동은 남성이 지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여성의 비하와 여성의 희생 위에 어쩌면 남자들의 안락의 삶이 유지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사실 직장에서 채용을 할 때나, 번번이 여자들이 희생양이 되는 진급에서나, 직장 내에서의 차별은 대낮에도 버젓이 이뤄지지 않던가. 미혼이어도 아이가 없어도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이요, 유부남이든 미혼남이든 차별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는 건 늘 남성이다. (162-163)
생물학적 비대칭성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대우 163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여자는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예속 상태에 놓여 있고 또한 일하기 힘든 시간에 급여 수준도 낮은 파트타임 비정규직은 프랑스에서 혼자 사는 여자나 아이 딸린 여자의 전유물인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여자의 일생은 고달프기 그지 없다. 하지만 여자의 몸을 아들, 딸 제조기로 만드는 생물학적 비대칭성을 여자의 예속 상태와 고달픈 삶을 정당화하는 자연적 논거로 받아들이는 건 옳지 않다. 이런 생물학적 비대칭성을 정치제도 및 사회제도의 중심에 놓고 업무 분담 및 ‘보상’ 배분에 있어 남녀 평등을 겨냥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163)
프랑스에서 가정 폭력으로 인하여 매일 한명의 여자가 죽어가고 있으며, 파키스탄에서는 매일 여섯명의 여자들이 목숨을 읽는다.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ETA: 바스크 조국과 자유)의 테러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간 이 가정 폭력에 대한 인식과 처벌에 있어 얼마전 스페인은 크게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64)
가사 및 육아의 활동이 가치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활동이 한편으로는 여자의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벌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벌이가 된다는 이유로 남자들이 하는 바깥일에 가치를 부여해주는 시스템 속에서 여성성 및 영리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가치가 폄하되고 있다. (165)
경제적인 측면에서 해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 가사 분담이나 공동 명의의 연금 전환, 장기간 부계 출산휴가 도입(실질적인 가족 생계비와 함께 최소 1년), 같은 조건의 산모 출산휴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산모의 출산휴가는 추후 고용이 보장되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서는 연금 수당 수령은 두배로 계산되어야 한다. (165)
평등의 즐거움 166
새로운 성별 관계 모델은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남녀가 동등하게 가져야 할 권리가 여자에게는 침해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피임의 제도화라는 보상이 주어진 것처럼 이 새로운 모델에서 남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무언가의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로써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보상이라면 무슨 보상이겠는가? 남자답게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에서의 해방이라든가, 지배 및 강압으로 대변되는 성별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자아실현을 이루거나 스스로가 기대했던 방향으로 내면의 성찰을 해본다든가, 그 자신도 속박에서 벗어나 여성에 대하여 자유롭게 합의된 즐거움을 확신하는 게 아니겠는가? 사전에 합의된 두 성인 남녀 사이에서는 그 무엇도 불가능한 게 없어야 한다. 이러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새로운 방식으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일 것이다. 유가적 관계나 요란한 지배 관계의 불투명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성을 누리는 것이다. (166-167)
시어도어 젤딘(Theodore Zeldin)은 이렇게 썼다. “부부 사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을 동등하게 다루고, 그가 하는 말을 자주 깊게 들어주는 것을 성공할 때마다 아주 미약할지라도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존중 속에서의 평등은 경제적인 평등을 대체하는 즉각적인 목표가 되었다.”(<르몽드 북섹션(Le Monde des livres)> 2003년 1월 24일> (167)
인류의 절반에게 수천 년 간 누려온 특권을 버리고 평등 속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길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남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러한 가능성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으며 어떤 대가를 부담해야 하는지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다. (167)
방법은 협력과 동맹이다. 관점의 변화는 수많은 개인적 차원에서 행동 덕분에 이미 혁명의 제1국면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168)
우리는 새로운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존중 속의 평등에다가 불공평한 관계의 인습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서 부부 사이에서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이끌림’에 대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도 덧붙일 수 있다. ... ‘이끌림’은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정치적 행동이나 개관적 논리만으로는 그 동안 인류가 익숙해져 있던 성별 관계의 서열화된 시각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없다. 적어도 인류의 나머지 절반은 이와 같은 과거의 성별관계에 너무나 편하게 물들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머리로 생각할 수 있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영향이 실현 가능한 방식이 될 거라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68-169) [‘이끌림’ 매력 또는 유혹과 같은 것인데, 살면서 협력하거나 동맹을 맺는다는 점에는 매력 또는 유혹이 필요하고, 계속적인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성장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상대에 대한 배려와 매력 발산의 노력이 필요하다. - 어떤 이가 피곤하다고 한다. - 피곤하지 않는 자가 구경꾼이거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 자연에서 새가 스스로 살기 위해 깃털을 가다듬고, 동물들이 털 갈기를 관리하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숙명이듯이, 자기 관리를 잘하며 살아가는 것이 숙명이다. 자기 성찰과 관리로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유혹이며 매력일 것이다. 선승은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50LME)]
# 인명
프랑수아즈 에리티에(Françoise Héritier / Françoise Izard, Françoise Augé-Héritier, Françoise Héritier-Augé, 1933-), 프랑스 인류학자, 인종학자, 여성학자.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를 이어서 꼴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교수.
시어도어 젤딘(Theodore Zeldin, 1933-) 팔레스타인 유태인 가계 출신으로 영국 역사가, 사회학자, 철학자. Émile Ollivier and the Liberal Empire of Napoleon III (1963), The French (1982), An Intimate History of Humanity (1994)
(50L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