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제작노트를 통해 알게 된 대부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 작가는 이 작품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마리오 푸조는 파산 상태였다. 따라서 푸조는 자신이 정말 쓰고자 했던 책을 쓰기 전에 아무거나 돈이 될 만한 글을 먼저 써야만 했다.
1920년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모두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45살의 마리오 푸조는 도박 빛 2만 달러 때문에 10쪽 분량의 마피아라는 시놉시스를 8개의 출판사에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파라마운트의 부회장 피터 바트는 60쪽 분량에 불과했던 푸조의 작품을 읽어보고 그를 스튜디오로 채용했으며 당시 계약금 12,500달러에 영화화 시 8만 달러를 추가로 받기로 했다.
이후 소설 대부는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차트에서 무려 67주를 버틸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파라마운트는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 권리가 있음을 공표했고 푸조의 시나리오 작업 참여를 원했다.
이에 푸조는 추가로 10만 달러를 받고 모든 필요경비를 영화사가 부담하며, 흥행 이익의 일정 지분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시나리오 계약을 맺었다.
그는 446쪽(한글 번역본 696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150쪽짜리 시나리오 초고로 만든 다음, 한 부를 제본하여 비토 코롤레오네 역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배우 말론 브란도에게 보내기도 했다.
감독 코폴라는 원작 소성을 완전히 해부하고 분석해낸 다음 자신만의 시나리오 얼개를 작성했고 최종 원고는 158쪽에 이르렀으며 1971년 3월 29일 완성되었다.
2. 영화사는 이 작품을 제작하려 들지 않았다.
파라마운트는 대부 직전에 만든 갱스터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참패를 기록하자 더 이상 같은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 대부가 성공을 거두자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소설을 다른 영화사에게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3. 어떤 감독도 연출하려 들지 않았다.
대부는 무려 12명의 감독이 연출 제안을 거절했다.
제작자인 피터 바트는 코폴라에게 대부의 연출 제안을 하고 코폴라는 소설을 읽어보려 애썼지만 너무 추잡하다고 생각했다.
코폴라는 도서관으로 가서 마피아에 대한 책들을 광범위하게 읽기 시작했고 소설을 다시 읽으며 그 속에서 한 가족의 중심 테마를 재발견했다.
40년대 코를레오네 패밀리의 성장에서 미국자본주의 라는 메타포를 찾아내고 대부의 연출을 맡기로 했다.
시대 배경을 1970년에서 1940년대로 바꾸고, 뉴욕에서 촬영을 원했다.
뉴욕은 영화노동조합의 세력이 막강하여 제작비용이 급상승 우려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뉴욕에서 촬영하였다.
제작비는 200만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급상승했다.
제작 과정에서 스태프들의 상당수가 코폴라에게 협조적이지 않았고, 촬영감독 고든 윌리스와는 촬영 초반부터 충돌했다.
파라마운트 간부들은 걱정에 휩싸였고 또 다른 감독인 엘리아 카잔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기도 했다.
파라마운트는 촬영 도중 감독을 해고한다는 것은 영화의 홍보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판단과 말론 브란도는 그가 해고되면 나 역시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면서 스튜디오를 협박했다.
코폴라가 해고 직전까지 몰고 갔던 상황은 모두 5번이나 된다.
4. 무명의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말론 브란도였지만, 역시 박스오피스 기록에서는 일종의 '독약'처럼 취급되는 존재였다.
파라마운트는 말론 브란도 캐스팅이 대해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기본적으로 무료 출연의 원칙 따라야 하고, 선금은 없으며, 개봉 이후 이익이 날 경우에 한하여 지분을 받는다.
둘째. 100만 달러의 예치금을 내야 한다. 촬영 도중 그가 돌발 행동을 하여 스튜디오에 손해를 끼칠 것에 대비한 보험금 이었다.
셋째.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스크린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결국 브란도는 선금으로 5만 달러를 받고 촬영에 암했으며 개봉 이후의 이익에 대해서는 자신 몫의 지분을 받았지만 불행히도 단돈 10만 달러를 받고 스튜디오에 되팔아 버려 결과적으로 수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훗날 브란도는 그의 에이전트와 변호사 그리고 지분 매각 과정에 관계한 모든 사람들을 해고했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
마이클 코를레오네 역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놓고 파라마운트와 코폴라는 심각하게 격돌했는데 웨렌 비티, 잭 니콜슨,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유명 스타를 모두 퇴짜를 놓았다.
코폴라는 당시 31세였던 무명의 연극배우 알 파치노에게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역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파라마운트가 보기에 알 파치노는 영화배우의 얼굴이 아니었고, 너무 이탈리아적이었으며, 매력도 없었고, 너무 키가 작았다(173cm). 스튜디오 간부들은 그를 새우, 난쟁이 파치노라고 불러냈다.
알 파치노 역시 파라마운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스트린 테스트를 굳이 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다른 모든 계약들이 다 체결된 이후에 알 파치노 캐스팅이 마지막으로 확정됐다.
5.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영화가 크랭크인 되기도 전에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대부가 자신들의 문화를 왜곡시킬 수 있다면서 영화 제작을 중단하라고 압력을 행사했다.
6. 촬영 감독 고든 윌리스
대부의 촬영감독인 고든 윌리스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윌리스와 코폴라는 촬영 기간 내내 으르렁 거렸는데 두 사람 모두 완강하고 외골수적인 성격이어서 서로 소리를 질러대며 싸우곤 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작업한 결과 기존 할리우드 촬영 방식을 완전히 깨트리는 놀라운 작품이 태어났다.
돈 코를레오네를 촬영할 때 어두운 조명을 써서 브란도의 눈에 그늘이 지게 만든 것은 당시로서는 도전적인 시도였다.
어둠 속의 촬영을 계속한 덕분에 윌리스는 어둠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7년 동안 윌리스라 촬영한 7편의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무려 39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고 그중 19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코폴라에 따르면 대부에서 고든 윌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쇼트는 바로 시실리의 풍경을 위에서 내려찍는 것이었다고 했다.
7. 니노 로타의 음악
니노 로타는 전설적인 이탈리아 영화들의 음악감독이었지만 할리우드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반대하는 로버트 에반스(파라마운트사의 제작 수석 부회장)의 반대에 그의 음악을 넣어 편집을 하고 평가에 따라 결정하자고 했는데 관객들 대부분이 니노 로타의 음악을 좋아했다.
니노 로타의 영화 음악은 아카데미 음악상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그가 예전에 만들었던 이탈리아 영화의 러브 테마 일부를 재활용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철회되고 그래미상을 수상하는데 만족했다.
8. 로버트 드 니로
로버트 드 니로는 대부의 캐스팅 과정이 스크린 테스트에 참여했는데 코폴라는 그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단역으로라도 출연시키고 싶어 했으나 드 니로가 거부했는데 이 때문에 대부 2에 출연할 수 있었다.
9. 비토 코를레오네의 고양이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스튜디오에 살고 있던 것들 중 하나로 촬영 중 코폴라가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를 집어 들더니 말론 브란도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식의 즉흥적 연기가 피할 수 없는 기술적 문제를 일으켰는데 고양이의 가르릉 대는 소리 때문에 결국 녹음실에서 다시 더빙해야만 했다.
2부에 계속...
첫댓글 우와 잘봤습니다
직접 쓰신건가요?
대부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이며 이에 대한 수많은 관련 서적들이 있습니다.
이중 수백쪽에 달하는 대부 제작노트중 중요한 내용만 발췌해서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