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군대 이야기
渤 海 人
(2010. 12. 20.)
저는 머리를 깍지 않고 계급장 없는 특수부대 출신이고, 동생은 1960년대말 주월(駐越)군수지원단에서 대형트럭으로 사이공에서 나트랑까지 컨테이너 트럭을 몰고 (대물지뢰 폭파를 피하기 위해) 시속 80km이상을 달려야만 되는 수송업무를 수행한 운전병 출신이고, 여동생은 여군통신병 출신입니다.
1994년 제 아들 녀석이 육군 306 보충대로 징집영장이 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성남에 있는 육군행정학교 경제학 교수로 출강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입대 3일전, 직보반(제대를 6개월 앞둔 장교들에게 일반 사회교육을 가르치는 특별교육) 강의실 실장을 맡은 향도에게 “어이! 내가 군대생활 할 때는 101보충대와 103보충대만 있었는데 306보충대는 어디 있노?”라고 물으니, 향도인 許중령은 “제가 여기 오기 전에 그곳에 대대장을 했다”라면서 입대요령과 가는 길을 자세히 가리켜 주었습니다.
아들의 입대당일, 저는 아들에게 “대한민국 남자들은 모두가 국방의무를 반드시 수행해야 하고 군대 갔다 온 남자만이 진정한 남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영 장정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기분으로 간다. 너는 해병대의 자원입대자처럼 큰 소리치고 기분 좋은 마음가짐으로 입대하거라. 아버지는 생사를 가름하는 비무장지대에서 너의 작은 아버지는 월남 참전용사이고, 고모는 여군전사였다. 무엇이 두려우냐? 훈련소에서 타의가 아닌 자진하여 솔선수범하면 반드시 1등 한다. 그때 만나자!”라면서 창문으로 목을 내밀고 배웅하면서 큰 소리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제 집사람이 의정부 306보충대까지 자기 차로 태워주고 온 후 한 주일 동안 딴 방에서 말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집 사람 왈 “어느 세상에서 자기 자식이 군에 입대하는데 마당에도 나오지 않고 문만 빠꼼히 열고 잘 다녀오라고 고함만 치는 매정한 아버지가 있느냐?”고 친구들을 불러놓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아들은 인천근교 17사단 신병훈련소에서 1등을 했고, 교육연대장은 사단내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고 하여 저와 아들은 사단내 선임연대중 1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 1번 소총병을 원한다고 하니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습니다. 3일 동안 포상휴가후 제가 직접 부대에 태워주었고 아들은 1번 소총수로 착실히 근무했습니다. 저는 소주생각이 나면 주말에 돼지삼겹살을 마련하여 아들 면회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아들은 어느덧 상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삼겹살을 사들고 면회실로 가는데 빨간 별판을 단 짚차가 지나가다가 멈추면서 부관이 뛰어와 “혹시 아무개氏가 아니냐”고 물었고, 그날 제 친구가 사단장으로 부임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얼마 후 아들은 전화로 “갑자기 부관실에 전출되어 높은 사람 전투화나 닦고 양파껍질이나 까면서 매일 놀고 있다시피 한다”는 말에, 저는 사단장에게 전화로 “야 이 OO야. 당장 우리 아들 원대복귀 시켜라”고 소리소리 질렀더니 병기중대 화학반으로 보내주었습니다.
훗날 어떤 모임에서 친구인 사단장은 “아무개 그OO, 부자간에 똑 같은 골통이더라. 유학공부 하라고 편한 곳에 보내주었더니 욕만 실컷 들었다”라고 했답니다.
아들은 군대덕분에 지병이었던 위장병을 치료하였고, 화학반 근무경력은 이후 러시아에 있으면서 한국과의 무기체계 비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제 동생 아들 2명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큰 조카가 입대하는 날 제가 강원도 3사단 백골부대 신병교육연대까지 태워주면서 제 아들에게 입대 당일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똑 같이 해주었습니다. 큰 조카 녀석은 “그까짓 것 나도 1등 하지요 뭐!”라고 대꾸했고, 조카는 당당히 1등을 하였습니다. 신병훈련소 수료식에 참석하여 아들처럼 소총병으로 보내달라고는 못하고 신병훈련소 연대장에게 “서강대 장학생 출신이고 컴퓨터 귀신이니 이들 참작하여 알아서 배치해 달라”고 부탁하고 포상휴가를 받아 나왔습니다. 이후 조카 녀석은 사단 G-3에서 근무한다고 알려왔습니다.
둘째 조카는 사촌형과 친형이 들려주는 뻥이 엄청 가미된 군대 무용담에 자기도 신병훈련소에서 1등하여 포상휴가 올 것이라고 큰소리 치곤 했는데, 평발이라 군입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징병검사관에게 몇 차례 사정하여 겨우 징집영장을 받고 파주지역 1사단 신병교육연대에 입소했습니다. 훈련소 체력검사에서 구보가 전혀 불가능하여 정상적인 군대생활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조카는 막무가내로 하겠다고 하여 훈련이 시작되었고, 수료식날 교육연대 창설이래 최고의 성적평가가 나왔으나 평발이라 행군과 구보에 점수가 없어 5등 밖에 못되었고, 발바닥이 무려 0.8cm 깊이로 갈라져 7일간 치료후 복귀를 허락 받았습니다. 어쨌든 형들보다 긴 휴가를 다녀갔습니다.
작은 조카 역시 연세대 전자제어학과 장학생 출신임이 참작되어 사단내 2명뿐인 전자관측병으로 근무를 충실히 하고 제대를 하였습니다.
연평도 사건이후 해병도 자원입대자 경쟁이 치열하다는 언론 보도에 고무되어 우리 집 군대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자랑스러운 군대 이야기 잘 보았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