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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춘고36 원문보기 글쓴이: 황원갑
바다의 왕자 장보고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2월 8일은 정월대보름이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마을 당제를 지낸다. 전남 완도읍 장좌리에서도 당제를 지내는데 주신이 산신령이나 해신이 아니다. 장보고(張保皐) 장군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반만년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숱한 사나이가 드넓은 바다에 도전해 삶과 죽음의 투쟁을 벌여왔고, 바다를 무대로 웅지를 펼쳐왔다.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한반도 남쪽 바다 다도해의 한 섬에서 때로는 바다처럼 너그럽고 때로는 바다처럼 무섭게 일렁거리던 한 용사가 일어났으니 그가 바로 장보고, 일명 궁복(弓福)이다. 장보고는 신라 후기에 무적함대를 만들어 바다를 개척하고 동북아의 제해권을 손아귀에 틀어잡은 위대한 바다의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변방의 섬사람으로 태어나 제 나라에서 이름을 날리기도 힘든데 그는 중국대륙으로 건너가 용명을 떨쳤으며, 신라에 돌아와서는 청해진(淸海鎭)을 세우고 왜와 당의 해적들을 쾌도난마처럼 소탕하여 안전한 뱃길을 열어 놓았다. 뿐만 아니었다. 장보고는 중국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해운을 개척한 데에 이어 멀리 동남아까지 교역권을 넓히고 바다를 호령하니 그 장한 기개는 해상 무역왕국의 군주(君主)와 다름없었다.
바다를 통한 해외진출이란 우리의 꿈을 1천여 년 앞서 펼쳐 보인 풍운아 장보고, 해양개척의 신기원을 세운 바다의 사나이 장보고, 그는 비록 추악한 정권쟁탈전에 말려든 끝에 자객의 마수에 걸려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이룬 위업은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 살아남아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1천여 년 전 동양 삼국의 무역항로를 지배하던 해상왕국 완도, 완도읍에서 5km 떨어진 장좌리는 옛날에 장보고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전에는 장재리(張在里)라고 불렀다. 장좌리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장보고장군제라는 당제를 베풀어 장보고의 위업을 기리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한다.
정월대보름 새벽 세 시. 울긋불긋한 고깔과 바지저고리에 드림을 받쳐 맨 마을 굿중패가 매귀(埋鬼)굿을 시작한다. ‘청해장군 장보고’와 ‘영(令)’자 기를 앞세우고 상쇠의 인도에 따라 꽹과리 징 북 장구 등 풍물을 흥겹게 두드려대며 갈짓자걸음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썰물로 바다가 갈라진 170미터의 갯벌을 걸어 장군섬으로 건너간다. 장군산 정상부 사당에 쇠머리와 밥과 떡, 술과 과일 등 갖가지 제물을 차려 놓고 당제를 베푸는 것이다. 동녘 하늘이 부옇게 밝아오고 당제가 끝나면 밀물이 들어 배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굿중패가 여러 척의 고깃배에 나누어 타고 본섬으로 돌아오며 쾡쾡 쿵더꿍 쿵덕 신나게 사물을 두드리고 덩실덩실 어깨춤 궁둥이춤을 추면서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다.
장보고는 이렇게 죽어서 신장(神將)이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왕조 중심의 이른바 정사(正史)에서는 중앙정계 진출이나 꾀하다 몰락당한 시골 장수쯤으로 무시당한 장보고였지만, 그가 바다를 호령하던 곳, 그 옛날 청해진의 향토사 속에서는 그의 위대한 기상이 살아남아 오늘도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 교토 북쪽 히에이산(比睿山)의 적산선원에서 장보고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16세기 전국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은 장보고를 가문의 수호신인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었다. 또 장보고가 산동반도 등주에 세웠던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 산동성 영성에 복원되어 그의 위업을 흠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장보고는 신라 변방 이름 없는 한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 섬이 뒷날 그가 청해진을 세우고 무적함대의 해군기지인 동시에 해상교역의 중심지로 삼은 오늘의 전남 완도다. 그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지 않지만 신라 제38대 임금 원성왕(785~798) 때로 추정된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한 해가 제42대 임금 흥덕왕 3년(828), 그로부터 13년째가 되는 제46대 임금 문성왕 3년(841)에 암살당했으므로 30대에 귀국해 40대에 죽었든, 40대에 귀국해 50대에 죽었든 출생시기가 그 무렵으로 역산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섬마을, 걸핏하면 왜와 당의 해적들이 떼 지어 몰려와 노략질을 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는 바닷가에서 자라며 소년 장보고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점점이 떠 있는 섬들, 훨훨 날아 섬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소년은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을까.
장좌리 주민의 구전에 따르면 장보고는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마을 앞 조금섬(將島 : 將軍島) 앞바다에서 고기잡이와 무술을 익혔다. 나이 15세가 되자 키가 6척에 기골이 위괴(偉魁)하고 성품이 강직해 의로운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도 아끼지 않아 사람들이 장수감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장보고에게는 정연(鄭年 : 鄭連)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잠수한 채 50리를 헤엄쳐가도 끄떡없을 만큼 물에 익숙했고 무술에도 뛰어났지만, 나이는 장보고가 몇 살 위였으므로 장보고를 형이라 부르며 함께 붙어 다녔다.
두목의 전기에 따르면 ‘장보고가 서주(徐州)에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은 30세 때’라고 했으므로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그가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시기는 20세 안팎, 즉 서기 810년께로 추측된다. 고국을 떠나 당으로 건너간 장보고와 정연이 처음 머문 곳은 지금의 강소성 금산현인 서주 땅이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취직(?)을 한 곳이 무령군(武寧軍)이란 서주절도사의 아군(牙軍 : 本軍). 아마도 처음엔 외국인이니 졸병으로 입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남보다 뛰어난 힘과 기예로 미루어볼 때 금세 부대 안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이란 높은 벼슬까지 한 장보고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828년 이전의 일이었다.
당시 당나라 동해안에는 여러 곳에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했으며, 산동반도 등주 문등현, 강소성 초주․사주․양주 등의 신라방이 그것이다. 신라방에는 거류민들의 자치기구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있었고, 그 책임자는 압아(押衙)로서 역시 같은 신라인이 맡고 있었다. 장보고는 군복을 벗자 급격히 거류민이 늘어나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산동반도 문등현에 자리잡아 신라인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하니 곧 신라방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라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친 이유는 그의 사람됨이 워낙 출중하고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가 본래 섬사람으로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바다를 잘 안다는 점과, 무령군 소장으로 쌓아올린 장수로서의 경력 또한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신라방 사람들이 주로 종사한 사업은 해상교역 활동이었는데, 당이나 신라나 왕권이 약화되니 변경의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바다를 휩쓸고 다니는 해적들의 횡포 때문에 뱃길은 늘 위험했다. 군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장보고는 항해교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사설함대를 조직하여 무역선단을 보호했다. 눈길을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국제항로로 돌렸던 것이다.
장보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신라 사람들의 무역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고 번창하게 되었고, 장보고의 명성도 자꾸만 높아져갔다. 사람들은 장보고를 ‘장대사(張大使)’라고 높여 불렀으니, 대사란 중국에서 절도사를 가리키는 칭호였다. 뒷날 그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역시 대사라는 신라 관등직급에는 전무후무한 관직을 받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보고가 이토록 지위를 굳히고 위명을 떨치게 되었음에도 굳이 신라로 귀국한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이유 또한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해적이라면 왜구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 해적, 즉 당구(唐寇)의 횡포가 더욱 심해 신라나 당이나 큰 골칫거리였다. 더구나 장보고는 당구들이 신라의 해안지방을 습격하고 어린이들을 약탈하여 이른바 신라노(新羅奴)란 이름으로 마구 팔아넘기는 참담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장보고는 자신의 힘으로 바다를 휩쓰는 해적들을 소탕하고 동포들이 짐승처럼 노예로 팔려가는 참상을 뿌리 뽑고자 결심했다. 이를 위해서 신라 ․ 당 ․ 왜 삼국 항로의 중간지점을 확보, 해상무역의 거점을 삼는 동시에 해적들을 쓸어 없애는 기지로 만들고자 작정했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곳이 고향인 완도였다. 장보고는 고향 친구 정연을 불러 그런 계획을 털어놓고 함께 돌아가기를 권했다. 하지만 정연은 거절했다. 심복 부하들과 가족을 거느리고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완도에 자리 잡고 세력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완도를 거점삼아 기지를 건설한 이유는 자신의 고향으로 지형지세에 익숙한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완도가 신라 ․ 당 ․ 왜를 잇는 삼각항로의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기본적인 시설을 한 다음 장보고는 임금을 만나러 금성(金城), 서라벌로 향했다. 그때 임금은 흥덕왕. 후사 없이 죽은 형 헌덕왕의 부군(副君 : 왕태제)으로 뒤를 이어 즉위한 지 3년째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렇게 나온다.
- 흥덕왕 3년 4월, 청해진 대사로 궁복(성은 장씨로 일명 보고)을 삼았다. 그는 먼저 당의 서주로 들어가서 군중소장이 되었다가 뒤에 귀국하여 왕을 배알하므로, 왕은 군사 1만 명으로 청해를 진수(鎭守)하게 했다. -
완도가 생겨난 이래 최초의 대역사(大役事)를 일으킨 것이다. 기지의 틀을 갖춘 다음 장보고는 장정들로 하여금 지리산과 남해안 일대에서 아름드리 통나무를 베어 날라서 방주선(方舟船)이란 전함을 건조했다. 장보고는 바다의 왕자답게 탁월한 항해술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선박 역시 종래의 신라선이나 중국 배와는 달리 성능과 규모가 더 한층 뛰어났다. 장보고는 장도의 청해진성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고, 170m 떨어진 맞은편 본섬의 장좌리에는 본영을 설치해 주력부대를 배치한 뒤 본격적인 해상활동에 나섰다.
‘삼국사기’는 흥덕왕이 군사 1만을 주어 청해를 진수토록 했다고 썼지만 이는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당시 신라는 3년간에 걸친 김헌창(金憲昌) ․ 범문(梵文) 부자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끝이어서 1만은커녕 100명의 군사라도 변방 수비군으로 내주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1만 명이란 군사는 장보고가 재물을 풀어 모집한 군사로 보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막강한 장보고의 무적함대가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헤쳐 나가면 감히 상대할 적이 없었다. 해적선이 보이기만 하면 그대로 쫓아가 박살을 내고 모조리 수장(水葬)시키니 그로부터 해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바다의 청소작업이 끝나 해상항로를 장악한 장보고는 전부터 구상해 온 사업에 착수했다. 바로 해상무역의 독점이었다. 물론 청해진이 본점 격이었고 당나라 산동반도 등주 적산포가 지점 격이었는데, 중국에 파견하는 무역선단은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가 인솔하는 교관선(交關船)이요, 일본에 파견하는 무역선단은 회역사(廻易使)가 인솔하는 교관선단이었다.
장보고는 신라 조정으로부터도 정치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국왕의 신하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이며 독자적 방법으로 자신의 해상왕국을 이끌어나갔다. 거기에는 장보고의 탁월한 군사적 자질과 아울러 폭넓은 도량, 뜨거운 의협심,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인간미가 크게 작용했다.
836년 12월 흥덕왕이 재위 11년 만에 죽었는데 그때 왕자 김의종(金義琮)은 당나라에 가 있었다. 후계자가 없이 왕이 죽자 그 틈을 노린 왕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흥덕왕의 종제 균정(均貞)과 다른 종제 헌정(憲貞)의 아들 제륭(悌隆) 숙질간의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양파는 각자 족병(族兵 : 私兵)을 이끌고 궁중에서 한바탕 피바람을 몰아치며 무력충돌을 일으켰고, 그 결과 균정은 칼에 맞아 죽고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후손 김양(金陽)은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균정의 아들 우징(祐徵)은 가까스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43대 임금 희강왕이다. 희강왕은 즉위한 이듬해(837) 정월 죽을 죄 외에는 모든 죄수를 용서해주고 자기를 지지해준 흥덕왕의 조카 시중 김명(金明)을 상대등에, 이홍(利弘)을 아찬에서 시중으로 승진시켰다.
한편 우징은 일단 목숨은 구했지만 아비를 잃었으므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쳐 원수를 갚겠노라고 이를 갈았는데, 그 이가는 소리를 들은 김명 ․ 이홍 일파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우징은 그해 5월 가족을 이끌고 서라벌을 탈출, 청해진으로 들어갔다. 장보고는 9년 전 흥덕왕 때 시중으로 있으면서 편들어 준 우징인지라 두말 않고 선선히 그를 받아들여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희강왕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 이듬해인 838년 정월, 야심만만한 김명이 이홍과 합세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의 측근들을 마구 학살하니 실권 없는 허수아비 임금은 왕위를 보전할 수 없어서 궁중에서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명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제44대 임금 민애왕이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당나라에서 함께 고생하던 정연이 돌아온 것이 그 무렵. 장보고는 너그러운 사람, 의리의 사나이였다. 다투고 절연하다시피 헤어졌던 정연이었지만 반겨 맞아들인 데다 부장(副將)을 삼아 수하에 거느렸다.
김양은 김해에 숨어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가 김명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장보고와 우징 등을 만나 거사를 권유했다.
“이제 들은 바와 같이 김명은 임금을 시해하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고, 김이홍 또한 임금을 해친 자이니 함께 하늘을 볼 수 없소이다. 원컨대 장군의 힘에 의지해 이 원수를 갚고자 하니 군사를 빌려 주시기 바라오.”
장보고가 대답했다.
“옛사람의 말에 의로운 일을 보고 따르지 않으면 어찌 용맹하다 하랴 하였소. 내 비록 용렬하나 힘을 다해 도우리다.”
그리하여 부장 정연에게 군사 5천 명을 주고 “이 일은 네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하며 출전시켰다. 청해진을 떠나 육지에 오른 장보고의 군대는 관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몰아 금성으로 쳐들어가 국왕을 찾아내 목을 쳐 죽여 버렸다.
이에 김우징이 즉위하니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은덕과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 2천 호를 내렸는데, 천신만고 끝에 임금이 된 신무왕도 그해 7월 23일 등창이 나 죽고, 태자 경응(慶應)이 왕위에 오르니 문성왕이다. 문성왕도 아비 신무왕과 함께 청해진에서 난을 피하며 장보고의 신세를 진 바라 그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을 제수하고 많은 선물을 보냈다. 감의군사니 진해장군이니 하는 직함 역시 대사와 마찬가지로 신라 관직에서는 전무후무한 명예직이었고, 장보고가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해서 받아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일단 왕위를 굳히고 정권을 안정시킨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청해진과 장보고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 막강한 군사력과 재력으로 혹시 딴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정권은 원래 의심이 많은 게 속성이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가 양측 사이에 걸려 있었으니 그것은 신무왕이 청해진에서 군사를 얻을 때 장보고에게 “이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장군의 딸을 맞아 며느리를 삼으리다.”고 한 약속이었다.
비록 약속을 한 아비는 죽었지만 그 일이 마음에 걸려 매듭을 짓고자 문성왕은 신하들과 의논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만고에 없다고 모두 반대했다. 진골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녀도 6두품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출신성분을 중시하는 신라에서 근본도 모르는 섬 촌놈의 딸이 왕비라니 말도 안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왕은 이미 박씨 부인이 왕비로 있어서 차비(次妃)로라도 맞아들이려던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소문이 장보고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급할 때는 쫓아와서 통사정을 하고, 원하지도 않은 약속까지 먼저 해놓고는 부귀영화를 다시 누리게 되니까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해? 그만둬라 그만둬! 썩어빠진 놈들! 장보고가 내뱉은 소리가 발 없는 말이 되어 금성으로 달려갔다. 왕과 대신들은 전전긍긍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장보고가 홧김에 군사들을 몰아 쳐들어오면 꼼짝없이 어육이 될 판이었다. 장보고를 누가 무슨 힘으로 막는단 말인가….
이때 나선 자가 염장. 그는 본래 무주(광주) 사람으로 김양이 무주도독으로 있을 때부터 거느리던 심복이었다. 이 자가 장보고를 없애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암살이란 비열한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만일 성사된다면 청해진의 지휘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염장을 파견했다. 청해진으로 달려간 염장은 그럴듯한 거짓말로 장보고의 비위를 맞추었다. 장보고는 대범한 인물인지라 별 의심 없이 염장을 맞아 잔치를 베풀어 주고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장보고가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염장은 칼을 뽑아 장보고의 가슴을 힘껏 찔렀다. 일세의 쾌남아, 바다의 풍운아 장보고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으니 841년 11월이었다. 장보고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모반을 일으켰다면 진작 군사를 일으켜 풍우처럼 휩쓸어 버렸지 우유부단하게 해를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뜻은 드넓은 바다에 있었지 속 좁은 소인배의 추악한 음모가 난무하는 육지에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청해진의 활발하던 교역활동은 이내 마비상태에 빠져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문성왕 13년(851) 2월 청해진 혁파로 찬란하던 해상왕국은 영화의 막을 내리고 그 주민들은 내륙 깊숙한 벽골제(碧骨堤), 지금의 전북 김제로 강제 집단이주를 당하고 말았다.
일세의 풍운아 장보고의 암살은 장보고 개인의 비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 우리나라는 해양진출, 해상제패의 원대한 꿈을 꾸어보기는커녕 비좁은 국토 안에서 집안싸움을 하거나 몽골족․여진족․왜구들에게 침범과 노략질을 연거푸 당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통렬한 역사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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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바다의 왕자 장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