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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초 지금의 동대문구 중화동에 있는 한독자동차운전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약 한달간의 학과실습과 실기실습을 끝내고 삼성동 면허시험장에 1종보통
운전면허시험을 접수하게된다.
당시 차종은 1.4톤의 타이탄트럭! 당시엔 한남동(주로2종보통면허시험)과
삼성동(1종보통,대형,특수,기타면허)두곳에서 면허시험을 많이 보았다.
신체검사 통과, 학과시험 통과, 아!!그러나!! 그만 실기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만다.
지금은 모든게 전자시험방식으로 치르지만 그당시엔 모든게 수기식이었다.
다시 또 실기시험 접수를 하니 한달후에 시험을 보라는 접수증.
다시 한달후에 삼성동 면허시험장을 들어서니 넓은벌판에 소복히 쌓인눈
들!!!,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바람, 오늘 과연 내가 잘할수 있을까? 하는두려움이
절반이 넘는다. 코스시험장은 눈이 치워져있는데 주행시험장은 눈이쌓인
그대로다. 드디어 코스시험시작, 수없이 많은 탈락자가 나온다.
드디어 내차례! 앞뒤좌우를 살피며 차분히 코스를 돌았다. 일단 코스는
합격이다. 절반의 합격! 오후엔 주행시험장으로 오란다.
아침에 보았던 눈덮힌 주행시험장이 떠올라 자꾸만 내게 심적 부담감이
압박을 해온다. 드디어 시험감독 경찰관이 탑승을 하더니 한바퀴 돌아보
란다. "더블클러치로 기어변속"하길래 그것은 제대로 하였다.
"급브레이크"를 주문하는데 미끄러운 노면에 제대로 작동할리가 없다.
다행히 "합격"이라고 하는데 마치 세상을 다 얻은것처럼 너무 기뻐서 뛰고
또 뛰었다. 합격증을 제출하니 한달뒤에 면허증을 교부한단다.
한달후에 면허증을 받으러 가니(1980년 1월 20일) 마치 주민등록증 두개
를 포개어 놓은듯한 접는면허증(서울80-335498-20) 좌우간 화려하다.
이어서 교통안전교육을 이수하고 나니 이제는 차를 직접 운전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평소 잘 아는 지인의 소개로 영등포의 중소기업회사에
운전기사로 취직을 하게된다. 기분이 좋았다. 당시 그회사엔 1.4톤, 2톤반
,4톤반,8톤 반, 사장님승용차등 여러대의 차가 있었다. 처음에는 어느 동료
가 "어이 초보자"하고 놀리기도 했으나 열심히 닥치는대로 어떤차를 맡기
든 성실하게 일했다. 일부동료중 술한잔 먹고 운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크게 법적처벌 대상은 아니었고 계몽.지도하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81년1월 눈내린겨울 어느날 앞에 정차해 있던 차를
피하려다 옆에오는 택시를 미처 보지못하고 접촉 사고를 내고만다. 곧바로
교통경찰이 오고, 영등포경찰서로 연행되고, 조서받고, 현장검증하고, 법원
에서 즉결심판을 받고, 벌금물고, 면허가 정지되고, 참으로 처리과정,처벌
과정도 복잡하다. 면허증을 반납하라고 하더니 한달후에 찾아가란다.
머지않아 닥쳐올 군대 의무복무가 자꾸 나의 머리속을 맴돌며 괴롭힌다.
"그래 일찌감치 군대나 가자"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운전교육을 받았던
한독자동차 운전 학원에 군차량운전병특기로 지원서를 접수하였다. 소집영
장은 의외로 빨리 나왔다. 81년2월27일까지 논산훈련소로 입영하라는 통
지서를 받았다. 절반만 자유스러운 수용연대에서의 1주일, 날카로운 눈초
리와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를 맞이하던 교육연대 백테화이바의 사나이들!
교육연대(28연대)에서 4주간의 기본군사훈련을 받고 야간에 군용열차로
이동을 하는데 자꾸만 북쪽을 향해서 가는것만 같 았다. 새벽녘에 도착한
의정부의 모부대(보충대), 여기서 약 이틀간의 편한생활을 하고나니 다시
또 이동을 하는데 또다시 북쪽으로 이동을 한다. 불안감이 몰려온다. 생전
안피던 담배, 화랑담배 한갑을 동료와 둘이서 모두 피워댔다.
목은 타올라 갈증은 심해지고 불안,초조감은 더해만 갔다.
최종적으로 도착한곳이 전방 모부대 수송장비중대! 도열해있는 차들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사회에서 보던 아늑한 분위기는 전혀없고 그저 무식
하고 덩치도크며 집채만한 크기로 보인다. 선임병들의 덩치 또한 만만찮다.
이고참 저고참한테 정신없이 전입신고 인사를 하는데 어떤 고참 왈 "여기가
너희 집이라 생각하고 마음 푹놓고 편히 쉬거라 잉!!!!" 말이 그렇지 가뜩이나
주눅이들어 한쪽 구석에 서있는데 그말이 귀에 들어올리 만무하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잘 헤쳐나갈수 있을까 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앞선다.
6.25때 쓰던 휘발유로 움직이는 차도 보인다. 문짝엔 하얀 별판이 그려진
흔적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 이등병!! 약 한달간의 호강한 생활을
마치고 나니 수송장비검열이 끝났다고 하며 차량을 한대씩 배정한다고
하는데 사회주특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차량배정을 한다고 한다. 나를 포
함한 10명의 동기생들은 모두가 긴장이 되었다.
나에게는 5톤트럭이 배정되었다. 사회로 보면 중대형급 장비다.
첫운행이 시작되었다. 옆에 고참 선임병이타고 머지않은 길을 반복 시험운
행을 가르친다. 무척이나 살벌하게 다그친다. 수시로 욕이 날라오고 공포
분위기의 연속이다. 무조건 천천히 운행을 하였다. 한달정도 지나니 돌아
가는 이치가 조금이나마 머리속에 들어온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할일이
많아진다. 주간에는 차량운행,세차,정비,청소,교육! 야간에는 외곽경비보초,
내무반불침번등으로 자고나도 또 졸립고 먹어도 먹어도 배가고프다.
살벌했던 일조,일석점호와 내무사열, 수시로불려다니는 사역병,
야간에 수시로 벌어지는 고참들의 구타행위, 이등병때는 구타나 기합때도
열외가 많았지만 작대기가 하나가 더 붙고나니 구타과목도 하나 더 생겨났다. 왜 내가 군대를 일찍왔나 하며 후회가 막급했다.
저놈의 인간 사회에서 만나면 그냥두지 않겠다 라고 몇번을 되새기며
복수를 다짐하고 이를 악물었다. 나만 잘하면 뭘해! 옆의 동료가 사소한
사고라도 치고 들어오면 그날은 땀이 범벅이 되도록 기합과 구타가 동반
되었다. 한번은 나도 피치못할 사고를 내고말았다. 인명사고가 아닌게
다행! 5톤 추레라(일명,피엠)를 운행하다가 어두컴컴한 시각, 방향전환을
하다가 민가의 과수원 원두막을 들이받아 그만 원두막이 무너져내리고
만것이다. 쉬쉬하고 조마조마하며 부대로 들어왔는데 수송선임하사 왈,
오늘 있었던 과정을 솔직히 보고하란다. 사실대로 얘기하고나니 즉석에서
쪼인트(앞무릎)가 날라온다.
완전군장에 연병장을 돌란다. 땀은 비오듯하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차량
운행, 날카로운 눈빛으로 야단치던 선임하사와 수송관은 그야말로 하늘같
이 높아만 보였다.날로 더해만가는 고참병들의 구타와 얼차례, 몸은 천근
만근이고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는 날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드디어 첫휴가! 무진장 변해있을줄 알았던 서울의 거리는 그대로이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 고향을 찾으니 막바지 가을추수가 한창이고 말그대로
버선발로 나오신 어머님을 뵙는순간 서러움과 감정이 순간적으로 북받쳐
올라 어머님을 붙들고 한없이 눈물을 토해냈다.
달콤한 첫휴가를 끝내고 자대로 복귀하는 그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
럼, 죽기보다 싫었다.
특히 겨울이 오는게 제일 두렵고 싫었다. 차량검열에다 훈련까지 받아야되
고 눈내린 산악비포장도로를 병력을 태우고 운행할때는 식은땀이 절로난
다. 특히 끝없는 제설작업, 혹한기훈련, 타부대위탁훈련, 최전방철책선 실
습경계근무, 한미연합훈련, 완전군장행군등은 겨울철의 연례행사로서 잊혀
지지않는 일이다.
늦게 운행을 끝내고 오는 날엔 밥 대신 건빵으로 끼니를 대신하곤했다.
눈코뜰새 없는 일과의 연속, 제대 이틀전까지도 차량운행을 해야했던 야속
하고 속상했던 기억!!!!! 이 모든게 나의 나의 일생중 커다란 시련과 또
다른 인생의 참맛을 일깨워준 계기가 된지도 모른다.
대형차량부터 소형 지프차까지 모든차량은 전부 다 경험을 해봤다.
지프차를 운전할 당시 악덕,똥물상관을 만나는 바람에 역시 고통과 눈물로
보낸 세월이었다. 한번은 헌병대에서 소원수리를 접수한다고 나왔는데
모두가 백지로 제출해야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저 충실히 잘 복
무한다고 써야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일반 보병이나 방위병들이 한없이
부럽고 좋아보였다. 참아라!참아라! 참고 또 참아야한다! 몇몇 동기생들은
모이면 고참들 흉을보고 욕을하며 우리가 고참되면 그러지 말고 인간적으
로 대하자고 몇번을 다짐하고 결심을 하였으나 막상 병장이 되고보니 졸
병시절은 까맣게 잊은채 나를 포함한 몇몇 동기들이 악덕 똥물고참으로
불리워졌다. 당시 왜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충남지역 00농협 이**상무,
경기도지역 **중학교 박**교감, 경남 마산지역 전화국 안**부장,
철도청 고위간부 이**씨, 경기 안성 **농장 정**대표 등등 몇몇 후배기수
들한테 이 지면을 빌어서 심심한 위로와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당시에는 편지도 개봉상태로 제출하여 검열을 받은후 보내졌고 첫휴가를
가기전까지는 어느부대에서 복무하는지 모르게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옆의 동기 한사람이 부대전입이 얼마 안되어 휴가나가는 선임병에게 복무
지를 가족들에게 알려주자 부모님들이 면회를 왔고 면회가 끝난후 호된
곤혹을 치르는것을 보고 그후로는 어느누구도 감히 면회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편지를써도 그저 '잘있습니다'. '몸건강히 복무 잘하고 있습니다'
라고 써야했다. 사실대로 쓰자면 '괴롭습니다. 죽겠습니다. 탈영하고 싶습
니다. 돈을 써서라도 다른 편한보직으로 빼주십시요' 이렇게 써야 맞는것
이었다. 드디어 개구리빛 예비군복이 입혀지고 제대가 되는데 뛸듯이 기
쁘고 날아갈것만 같다.
삼년에서 약 삼개월반이 빠진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하면서 속으로 굳
게 다짐한다. 장차 내 자식은 결코 군대에 보내지 않겠노라고,,,,,,,,,
전역후에도 군복무중 인것으로 꿈을 꾸곤한다. 지금까지도 군복무시절을
집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써본다. 결코 좋은기억은 아니었으
므로,,,,,,,
제대후 면허증을 업그레이드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삼성동 면허시험
장을 찾아 1종 대형면허시험을 접수시켰다. 다시 또 똑같은 추운 겨울!
학과시험은 면제되고 코스와 주행시험만 거치면 된단다. 시험당일 많은
도전자들이 모였다. 결과는 낙방, 다음 시험을 접수시키고 시험전날 면허
시험장 주변에있는 유료 코스연습장에서 코스와 주행을 한시간정도 교육
을 받았다. 이젠 자신감이 생겼다. 두번째 도전당일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응시를 하는데 열이면 열명 모두다 불합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편으로 불안하다. 차분히 코스와 주행을 마쳤는데 저쪽 응시대기자 몇명
이 환호성과 박수를 쳐준다. 합격인것이다! 백여명 응시자중 대여섯명
정도가 합격을 했는데 그중에 내가 된것이다. 뭐라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비록 죽을고비를 여러번 넘기기는 했으나 군에서의 경험이 상당히
도움이 된것 같다. 그후로 대한통운, 두산그룹 같은곳에 운전직으로 지원
서를 내보기도 하였으나 번번히 좌절되고 방황의 날은 지속되고, 군에서
배운 술담배 로 세월을 보내니 서러운 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동네의
가전제품 대리점에서 운전을 하다가 인사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만두고 또
다시 전전긍긍 하다가 박스테이프 제조회사에서 일반직으로 채용되기는
했으나 차량운전을 병행하는 직책이 주어졌다. 한번 발들여놓은 주특기
어디가나 표가나는 법인가보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과함께 나의 평생
직장을 구하고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간절한 소망이 생긴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치르던 그해, 집안 친인척분중 한분이 00은행 입사지원서를
얻어다 주는데 반신반의하며 자신감이 없어했다. 하루종일 고심하고 나서
가만히 지원서 작성안내문을 보니, 각종 우대항목이 열거되는데 군경력과
운전면허도 우대 가산점이 주어진다는 내 용이 분명 보였다. 부랴부랴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틈나는대로 안보던 책을 들여다 봤다. 부모님
께서는 웬이이냐 하신다. 필기시험 당일, 수백,수천명의 응시자들이 몰린
기분이다. 아!! 내가 여기서 되면 기적이다! 기적이야! 천지가 개벽할지도
모른다. 2차 면접시험까지도 모두 끝났다. 발표는 한달이후에 한단다.
더구나 상업계열이 아닌 인문계열을 나온 내가 막상 된다한들 은행일을
제대로 할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른다. 시험 발표당일, 아예
기대조차 안했다. 그러나 이게 꿈이냐! 생시냐! 분명 내이름이 적혀있다.
45명 선발에 내이름이, 그것도 앞에서 네번째 칸에 적혀있다.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너무 기쁜 나머지 술과 담배가 저절로
땡긴다. 밤새도록 술을 마셔댔다. 며칠후 신체검사와 신원조회가 마무리되
고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겸 직무교육이 시작되었다. 동기생 중 운전면허
소지자는 나를 포함한 단 두명뿐이었다. 속으로 자부심을 가졌다.
인사이동이 시작되고 신규직원도 부서별로 지역별로 배치가 되는데 나도
모지역으로 배속이 되 었다. 모두가 낯설은환경, 수습기간의 서러움, 갈수
록 더해가는 과중한업무, 이 모두가 신규직원을 대변하는 환경이었다.
수십명의 직원가운데 운전면허소지자는 단 세명뿐, 운전 전문직원이 있기
는 하나 그도 바쁜상황은 마찬가지이고 자연히 대직의 화살은 나 한테로
오고만다. 업무처리하랴 차량 운전하며 자금수송하랴 또다시 바쁜 나날의
연속이다. 어딜가나 수반되는 차량운전! 지금이야 면허소지자들이 많지만
나의 신규직원때는 면허소지자가 드물었다. 일하면서도 즐거움과 자부심은
뒷전이고 짜증과 싫증만 났다 중견직원이 되어갈 무렵 업무용버스가 도입
되더니 공휴일과 운전기사가 비번인 경우에는 항상 나를 찾곤하며 집안내
에서도 큰 행사가 있으면 항상 불려다니곤하니 휴일을 휴일답게 쉬어본적
이 별로없고 자연히 소중한 가정을 소홀히 하게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내마음은 그게 아닌데!! 대체로 중견직원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거리에 나서면 똑같은 나이인데도 유난히 내가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괜히 서럽게스리,,,,,,,,, 그 와중에도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으로는 열심히 피가 터지도록 공부하여 책임자 승진시험에 합격
을하고 00대학원 00과정도 졸업을 하 여 지금은 00지점 부지점장으로
재직중이며 차후 지점장으로 나갈일만 남았습니다. 몇년전 가요제에서
입상을하여 얻은 가수인증서를 바탕으로 트로트음악을 취미삼아 다루며,
가끔 지인들에게 가요와 서예지도를 하기도 하지요! 이제와 생각건대
특기,취미가 완전히 바뀐셈이지요. 수없이 많은 위험고비와 인고의 세월을
보냈고 지금도 어떤종류의 차라도 운전을 할수 있지만 출퇴근시에는 대중
교통을 이용한답니다. 남이 운전을 하여주니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제 인생의 일부인 운전면허와 관련된 일을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우와! 30년전의 일을 생생하게 쓰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