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음악가의 대표적 인물인 체코의 자랑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소박함과 향토적 느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안토닌 드보르작은 184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은 마을 넬라호체베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질을 나타낸 드보르작은 특히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Organist로부터 레슨을 받았습니다. 외숙부와 안토닌 리만의 가르침으로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은 드보르작은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859년 졸업 당시 그는 2등상을 탔는데 그것은 그가 이론면에서 취약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이후 그는 작은교회의 Organist로 직업을 얻게됩니다.
드보르작은 브라암스(Johanes Brahms)로 만난 유명한 출판업자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예술 동호인의 자격을 얻었으며, 프라하 국민극장 관현악단 시절 역시 체코 국민음악가이자 '나의 조국(Mycountry)'의 작곡가인 스메타나로부터 작곡 지도를 받았습니다. 1873년 혼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찬가를 발표, 음악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자 작곡에만 전념하게 됩니다.그의 '슬라브무곡'은 그를 세계적인 명성을 갖게하였습니다. 이후 오페라나 심포니의 작품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프라하 음악학교에선 그를 초청 작곡에 관한 강의를 맏기었습니다.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한 그는 1892년 뉴욕에 있는 국민음악원에서 2년간 원장으로서 하루에 3시간 수업과 연 8번의 콘서트를 연다는 조건으로 연$1.500을 지불한다는 제안을 수락, 그는 미국에 건너가게 됩니다.뉴욕에서 3년 동안 지내면서 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984년 프라하로 돌아온 그는 이후 10년간 작곡을 계속하였습니다. 체코 국민들은 그를 문화의 원로거장으로 추대하였고,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그 나라의 종신의원 자격도 부여받는 등 영광스러운 말년을 보내다 1904년 5월 1일 신장병으로 별세했습니다. 죽기전엔 궁핍한 생활로 많은 작품을 팔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드보르작의 대표곡은 우리가 흔히 '신세계 교향곡'이라 부르는 '교향곡 제9번 E단조 작품 95 (신세계로부터/ Symphony No. 9 in e minor "From the New World" Op. 95, 4. Allegro con fuoco)'입니다. 1893년 5월 25일에 완성 1893년 12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습니다.
드보르작(A.DVORAK)의 교향곡으로 그가 1892년 미국에 초빙되어 뉴욕으로 건너가 국민 음악원 원장이 되었을 때, 그 기간중인 1892년 12월부터 다음 해 4,5월 사이에 작곡하기 시작하여 1893년 5월 25일에 완성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뉴욕에서 보낸 기간 동안 신대륙에서 받은 인상, 느낌과 원주민 혹은 흑인들의 노래에서 얻은 영감이 고향 보헤미아의 민요와 융합되어 있습니다. 이 곡에 대해서는 선율적으로 보나 리듬적으로 보나 미국적인 것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하는 쪽과 니그로와 아메리카 인디언 음악에 의거하여 착상했다고 하는 쪽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오늘에 와서 보면 이 곡은 미국 의 고유한 음악을 그대로 표현했다기보다 거의 민요에 가까운 미국 음악의 정신을 작곡자가 해석한 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결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흑인 영가와 보헤미아나 헝가리의 민요 사이에는 서로 유사성 도 있다는 점에서 이 곡을 살펴보면, 미국의 것과 보헤미아의 것을 작곡자가 절묘하게 혼합하여 어우러 놓은 것을 쉽게 느끼고,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곡은 1893년 12월 뉴욕 필하모니의 연주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향곡 제9번 E단조 작품 95 (신세계로부터)'는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미국 흑인 영가의 영향을 받은 부분으로 대체적으로 단순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2악장은 많이 알려져 있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 역시 흑인 영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화려한 관악기의 움직임이 돋보입니다. 제3악장은 보헤미아의 마자르 민속 노래의 영향을 받은 악장으로 소박한 리듬을 바탕으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제4악장은 가장 사랑받는 부분으로 행진곡풍의 발랄함이 그 특징입니다.
밀란꾼데라(Milan Kundera)(1929~ )
그는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동명소설의 영화(한국에선 '프라하의 봄')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명실공히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1987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작가로추천되고 있다. 밀란쿤데라는 1929년 4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브뢴에서 출생했다. 그는 야나체크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나중에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게 된다.1948-1951년까지 프라하 예술대학 영화학과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으며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1958-1968년 프라하 예술대학 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밀란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 뉴 웨이브 운동을 주도했다. 1962년 희곡<열쇠의 주인들>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희곡의 호평으로 '클레멘트 루케스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밀란쿤데라는 프라하의 영화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하면서 작품활동을 병행했다. 밀란쿤데라의 제자들은 체코 뉴 웨이브의 창시자들로서 1960년대 중반 체코 영화의 전성기를 창출한 장본인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밀로쉬 포르만 <뻐꾸기둥지위로 날아간 새>와<아마데우스>등의 감독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67년 역사를 유린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장편소설<농담Zert >을 출간했다.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로 '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상'을 수상했다. <농담Zert >은 이념과 사랑의 교직을 통해 소설의미를 확대시킨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루이 아라공은 이 소설에 대하여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 가운데 하나"라고 격찬 했다.
1968년 단편소설 모음집<우스꽝스러운 사랑>제 3집을 발표했다. '프라하의 봄'이 러시아의 침공으로 좌절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밀란 쿤데라의 저서가 서점과 도서관으로부터 압수 소각되었다. 이 시기의 밀란 쿤데라는 집필과 작가연맹의 참여를 통해 검열제도의 폐지, 체코문화의 부흥과 강화 그리고 체코 문화의 유럽문화로의편입과 동질성 확보를 주장했다. 1969년 장편소설<생은 다른 곳에>를 탈고했다. 하지만 국내 사정의 악화로 출판의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외부의 압력으로 프라하예술대학의 강사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문화와 정치적상의 대량 학살이라는 압력이 밀란 쿤데라에게 가해졌던 것이다. 1975-1979년 프랑스 렌느 대학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이 시기에 밀란 쿤데라는 교수로 활동하면서 시인,소설가, 희곡작가,평론가,번역가 등 거의 모든 문학 장르에서 왕성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8년 장편소설<천사:원제 이별의 왈츠The Farewell Party>를 출간했다. 이 책으로 이탈리아가 최우수 유럽작가에게 수여하는 '프레미오 레테라리오 몬델로' 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밀란쿤데라의 다른 소설에 비하여 역사적이지 않고 정치적이지 않으며, 가볍고 경쾌하고 희극적이다. 하지만 경쾌하고 가벼운 사랑 과 에로티시즘이 밀란 쿤데라 소설의 주조인 정치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 역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 거부된 사회에서 성적 유혹과 사랑의 행위 자체를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우화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1979년 연작소설집<웃음과 망각의 책>이 불어판으로 출간되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 책으로 인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민권을탈당했다. <웃음과 망각의 책The Book of Laughter and Forgetting>은 체코 시대의 밀란쿤데라 문학을 총결산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불멸L'Immortalite 의 기반이 되었다.
1980년 프랑스 파리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파리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뛰어난 작품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커먼 웰스 상'을 수상했다.1982년 유럽공동체에서 최우수 유럽 작가에게 수여하는 '유로파 상'을 수상했다.
1984년 장편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체코슬로바키아어로 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LA타임즈 상'을 수상했다.이 소설은 1968년 체코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을 그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87년 평론집<소설의기법>을 출간했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88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영화로 제작되었다.우리나라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1990년 장편소설<불멸>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밀란 쿤데라와 괴테가 장난스럽게 죽음과 사랑에 대하여 논하는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밀란 쿤데라 특유의 사랑관에 철학적 관념이 교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고 밀란 쿤데라 자신이 직접 작품 속에 들어가서 작중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2000년 12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이십년 후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보헤미아 연인들의 랩소디-'향수'가 출간되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1924)
1883년 7월 3일 프라하에서 상인 헤르만과 뢰비 가문의 아들로 태어남
1901-1906년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수학. 독문학과 법률학 전공
1906년 법학 박사 학위 취득.
1907년 보험회사 근무
1912-1913년 '관찰', '선고', '실종자' '변신'등 집필
1914년 '심판', '유형지에서' 집필 시작.
1916년 단편집 '시골의사' 집필
1917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집필
1922-1923년 '성', '단식수도자', '어떤 개의 탐구', '작은 여인', '건설' 집필
1924년 '가수 요제피네' 집필, 6월 3일 41세로 사망.
20세기 독일 문학에서 뛰어난 소설가 두 사람을 추린다면 토마스만(Tomas Mann)과 카프카(Franz Kafka)를 꼽는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작가로 가끔 혼돈되는 카프카는 체코가 자랑하는 작가이다.
실존주의 문학의 기수 카프카는 20세기 현대 작가 중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온 세계에서 무수한 카프카 관계의 연구서가 출판되고 있다. 또한, 가장 난해한 작가로 일반적으로, 사후 반세기가 지난 작가의 경우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에 일정한 정설이 성립하나 카프카의 경우는 아직도 주장들이 서로 심하게 대치한다. 카프카 연구는 계속되어왔으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1883년 7월 3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유태인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카프카는 아버지에 대해서 평생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열등감을 가졌었다고 한다. 독일어로 초, 중 교육을 마친 다음 프라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다. 이 시대에 그는 친구인 막스 브로트를 알게 되었고, 문학에 심취되어 창작을 시작하였다. 그는 카프카 사후(死後)에 유고(遺稿)를 발굴하고 지켜 전집을 출판하게 된다. 1906년 박사학위를 받고 1907년 한 보험회사에 근무하기 시작했으나 긴 근무 시간으로 글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1908년 프라하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보험회사라는 준국가기관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곳의 근무 시간은 2시까지였고, 카프카는 일을 마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펠리체라는 아가씨와 1914년 6월에 약혼했으나 결혼이 자기 창작 생활을 침해하리라는 우려 때문에 1개월 뒤 파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3년 뒤에 바로 그녀와 다시 약혼했으나 얼마 뒤 카프카는 최초의 각혈을 한다. 이것이 뒷날 그에게 죽음을 가져온 폐병의 시초였다 1920년 4월부터 7월까지 메라노에서 요양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밀레나 예젠스카를 알게되었다. 밀레나는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여성이었고 대한 교육을 받은 25세의 체코 여성이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었기에 두사람은 2년 동안 서신을 교환했고 열렬히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련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1924년 3월 카프카는 폐결핵이 후두까지 번져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증세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결국 그는 1924년 6월 3일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의 짧은 생애에서 중요한 점은 프라하에서 유대인의 혈통으로 태어나 독일어로 교육을 받은 서방적 유대인이었다는 카프카의 위치이다. 소수의 독일인이 지배하던 프라하에서 유대인은 경시되었다. 그 당시 민족 해방을 주장하던 체코인들도 독일 교육을 받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카프카는 자신의 정신적 토양이 비록 독일문학에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 문화권에 진입할 수 없고, 오히려 적대적인 그들의 언어로 자신의 진실을 담아내야 하는 아이러니를 감수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카프카는 조국이라든가 공동 사회라는 관념보다는 이방인, 국외자라는 관념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는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사고에 의해서는 결코 이해될수 없는 카프카 특유의 '형상세계' 로 그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특수한 표현세계에 익숙해 있어야만 한다. 카프카 문학은 전통적인 서술구조로서는 재현될 수 없는 현대인간의 내면 세계를 비유적, 우화적으로 펼침으로써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 카프카가 그의 고독한 작업속에서 그려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극한 상황에 놓인 현대인의 악몽이라고 표현할수 있다.
그는 생전에는 극히 제한된 일부에게만 인정되다가 사후 그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Max Brod, 표현주의 작가)에 의해 유고(遺稿)가 발표되자 실존주의의 유행과 발맞추어 실존주의 문학의 원류로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어권이 아닌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의 외국에서 문제가 되고 높이 평가되어 그의 문명이 일약 세계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다가 역수입이 되어 독일에서도 정당한 평가 받아 신진작가들에게 크게 어필되었다.
멘델 Mendel, Gregor Johann (1822-84)
학창시절에 배운 멘델의 법칙은 여러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체코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있을때 활동했던 멘델 역시 체코의 자랑이자 세계 생물학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이다. 그는 유전 ·진화의 문제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함으로써 유전학을 창시한 셈이다. 계획의 치밀성, 실험의 정확성, 자료처리의 탁월성, 논리의 명쾌성 등에서 뛰어났던 그의 실험은 다윈의 진화설을 설명하는데에도 적용될만큼 생물학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꼽힌다. 주요저서에는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 있다.
체코의 실레지아 지방 Hyncice 출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원예일을 도와 자연과 친숙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를 하면서 오르뮈츠의 철학연구소를 22세에 졸업, Brno의 Augustinian monastery 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 1851년 교회의 후원으로 빈대학에 유학, 1853년까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수학 등을 청강, 1854년 Brno국립종합학교 교사가 되었다.
교회의 정원에서 1856부터 1863까지 최소한 28,000여개의완두로 유전의 실험을 하여 7년 후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865년 Brno의 자연과학협회 정기회의에서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이것을 발표하였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이 대발견은 20세기까지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1868년 성토마스수도원 원장에 선출되었다. 1874년 교회과세법으로 정부와 대립, 그의 재산이 차압되는 등 불우한 가운데 Brno에서1884년 1월 6일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멘델의법칙’은 크게 각광을 받아, 1910년 Brno에는 동상이 서고 그곳을 멘델광장이라 일컫게 되었다.
체코의 제2도시 브르노( Brno)시엔 멘델이 살았고 연구를 했던 Augustinian monastery에 'Mendelianum'이라는박물관이 있다. 1965년에 문을열었고 때때로 멘델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움이 열리고 있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20세기는 프로이트 시대" 라고도 한다.
20세기에 있어 문화.예술.학문은 물론 일상 세계에서까지 프로이트가 끼친 영향은 광범하고 심대하다.
이 거대한 영향의 비밀은 그가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분과의 창시자라는 사실보다는 그의 정신분석, 더 정확히 '무의식' 이론이 근대 서구를 지배해온 데카르트적, 계몽철학적, 혹은 헤겔적 인간관을 뒤엎는 혁명적 전복의 담론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20세기의 사상가로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으며, 심리학 ·정신의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 ·교육학 ·범죄학 ·문예비평에도 큰 영향을 끼친 세계적인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였다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체코의 모라비아 지역에 있는 Pribor 에서 태어났다. 빈대학 의학부 졸업 후 얼마 동안 뇌의 해부학적 연구, 코카인의 마취작용 연구 등에 종사하였다. 1885년 파리의 사르베토리에르 정신병원에서 샤르코의 지도 아래 히스테리환자를 관찰하였고, 1889년 여름에는 낭시(프랑스)의 베르넴과 레보 밑에서 최면술을 보게 되어, 인간의 마음에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 즉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J.브로이어는 히스테리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 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그 치유의 방법을 연구, 1893년 카타르시스(Katharsis:淨化)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고, 1896년 이 치료법에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후에 그가 수립한 심리학의 체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900년 이후 그는 꿈 ·착각·해학과 같은 정상심리에도 연구를 확대하여 심층심리학을 확립하였고, 또 1905년에는 소아성욕론(小兒性慾論)을 수립하였다.
그의 학설은 처음에는 무시되었으나, 1902년경부터 점차 공명하는 사람들(슈테켈, 아들러, 칼 구스타프 융, 브로일러)이 나타났으며, 1908년에는 제1회 국제정신분석학회가 개최되어 잡지 《정신병리학 ·정신분석학연구연보》(1908∼1914) 《국제정신분석학잡지》(1913∼) 등이 간행되었다. 또 1909년 클라크대학 2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강연한 일은 정신분석을 미국에 보급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사변적 경향을 강화하여 이드(id) ·자아 ·상위자아(上位自我)와 같은 생각과, 생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라는 설을 내세웠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스에 쫓겨 런던으로 망명하고, 1939년 9월 23일 암으로 죽었다.
주요저서에는 《히스테리의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일상생활의 정신병리》(1904) 《성(性) 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논문》(1905) 《토템과 터부》(1913) 《정신분석입문》(1917) 《쾌감원칙의 피안(彼岸)》(1920) 《자아와 이드》(1923) 등이 있다.
마르티나 힝기스 (1980~ )
글: 이상혁
마르티나 힝기스의 간단한 소개글
(사는곳 : Trubbach, Switzerland)
태어난 날 : 1980년 9월 30일
태어난 곳 : Kosice, Czechoslovakia
키 : 5' 7" (170 cm)
몸무게 : 130 lbs. (59 kg)
게임 스타일 : 오른손 (백핸드-양손)
프로데뷔 : 1994년 10월 14일
세계랭킹 : 1위
WTA TOUR 싱글 타이틀 : 23
WTA TOUR 더블 타이틀 : 25
(그랜드 슬램 타이틀 : 싱글 5, 더블 7)
ITF Women's Circuit 싱글 타이틀 : 2
어머니 : Melanie Molitor
아버지 : Karol Hingis
새아버지 : Andreas Zogg
좋아하는거 : 말하고 관련된 거는 다 좋아하고 2마리의 말이
있는데, Montana 와 Sorrento 라는 말입니다.
힝기스는 Zorro 라는 이름을 가진 개도 참 귀여워한다고 해요.
그녀는 Bon Jovi 와 Mariah Carey 를 좋아해요.
좋아하는 나라 : Australia
좋아하는 영화 : Forest Gump/Titanic
좋아하는 음식 : Chicken Fajitas
힝기스에 대한 간단한 글
힝기스에게는 두 채의 집이 있다. 하나는 그녀가 이민왔을 때(7살때 체코에서 스위스로 이민)부터 살아온 보금자리이고, 다른하나는 그녀의 훈련을 위해서 새로지은 집이다. 새 집에서 그녀는 언제나 열심히 트레이닝을 한답니다. Melanie Monitor는 힝기스의 어머니. 늘 힝기스와 여행, 테니스경기에 같이 참여합니다. 두 모녀는 참으로 끈끈한 정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도 대단한 사람입니다.그녀가 처음으로 운동을 시작한 것은 2살 때였다고 합니다. 스키와 테니스였고 그녀의 이름도 세계적인 테니스선수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의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어머니께서 테니스선수로 키우기로 작정을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4살때부터 본격적으로 토너먼트에 참여했어요. 12살때가 되어서는 프랑스 오픈 주니어에서 우승!! 그밖에도 축구, 농구, 수영, 롤러블레이딩, 자전거타기, 말타기(그녀의 말이름은 Montana, Sorrenta, Velvet)등을 즐기며 못하는 운동이 없을정도로 활발하였습니다. 이미 세계적인 인사이고 엄청난 부를 거머쥔 그녀는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에서 쇼핑하는걸 즐긴답니다. 1994년 프로에 입문하여 처음으로 우승하기는 Filderstadt 1996 에서이고, 그랜드 슬램에서 우승하기는 1997년 오스트레일리안 오픈에서 입니다. 그녀에게는 습관이 있는 데, 그것은 테니스 코트 라인을 절대로 따라 걷지 않는데요. 뮤지컬도 자주 보러다니고(가장 좋아하는 극은 Miss Saigon 과 Lion King), 쇼핑도 잘 다닌답니다.
힝기스와 관련된 소식
"역시 힝기스..."(2000. 10. 28)
어제 모레스모하고 경기 1세트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1세트 상황 5:5 까지 몰렸었습니다. 5:5 상황이 이랬었습니다. 힝기스가 첨에 에러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5:2상황까지 몰렸었습니다. 그 다음에 힝기스 몸이 좀 풀려서리 5:5까지 만들었습니다. 제가 역시 힝기스라고 할만합니다. 오늘은 6:30분에 힝기스하고 쿠르니코바하고 결승을 합니다. 남자단식 결승후 힝기스 복식을 시작합니다. 힝기스의 우승을 살짝 점쳐볼수 있겠죠?
"힝기스-피에르스 패권다툼"(2000. 10. 10.)
마르티나힝기스(스위스)와 마리 피에르스(미국)가 99 포르세 그랑프리테니스대회에서 우승을 다툰다. 세계랭킹 1위의 힝기스는 10일(한국시간)독일 필더슈타트에서 열린 준결승에서 지난 대회 챔피언 산드린 테스튀(프랑스)에게 타이 브레이크 끝에 첫 세트를 내주는 등 고전했으나 2시간여의 접전끝에 2-1(6-7 6-2 6-4)로 역전승했다. 힝기스는 96년 이 대회에서 우승,WTA투어 첫 정상에 올랐고 이듬해에도 우승했으나 지난해에는 8강전에서 탈락했다. 또 93년대회 챔피언인 피에르스는 91,94년 대회 챔피언인 앙케 후버(독일)를 2-0(6-1 7-6)으로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다.
"힝기스 상금 1,000만$ 곧 돌파"(2000. 8. 14)
97년 이후 상금랭킹 1위 질주...현재 총 995만$
女 선수론 6번째 기록
세계 여자 테니스스타 마르티나 힝기스(스위스)가 18세의 어린 나이에 1천만달러 상금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힝기스는 지난 9일 TIG 클래식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1개월 만에 세계랭킹 1위에 복귀했고 지난 94년 프로데뷔 이후 5년 동안 상금으로만 총 9백94만5천6백76달러를 벌어들이게 됐다. 힝기스는 5만4천3백24달러의 상금만 추가하면 여자 선수로는 여섯번째로 1천만달러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지금까지 1천만달러 이상 상금수입을 올린 선수는 슈테피 그라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아란차 산체스, 모니카 셀레스, 야나 노보트나 등 5명뿐이다. 힝기스는 프로 전향 3년 뒤인 지난 97년 호주오픈, 윔블던, US Open등 3개 메이저대회 석권 등 37경기 연속 승리의 기염을 토하며 당시 16세의 나이로 세계랭킹 1위에 올라 세계 테니스계를 놀라게 했었다
[체코의 노벨상수상자들]
노벨상이나 아카데미영화상은 전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만큼 그 상을 받기도 어렵지만 받는다면 한 국가 더 나아가 세계의 인물로 역사속에 인정받는 듯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으로 우리도 노벨상을 수상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노벨상 역시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것입니다. 체코에선 문학,과학 분야에서 2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야로슬라프 헤이로프스키Jaroslav Heyrovsky (1890∼1967)
1959년 노벨 화학상수상자
환원 또는 산화할 수 있는 물질을 정성·정량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화학기기 분석법인 폴라로그래피를 발견·개발한 공로로 1959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 기기는 분석할 용액에 잠긴 2개의 전극에 미리 정한 전위를 걸어줄 때 흐르는 전류를 측정한다. 프라하의 까렐대학교와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한 후 런던에서 윌리엄 램지와 F. G. 도넌 밑에서 연구했다. 그는 까렐대학교에서 여러 자리를 거친 후 물리화학 교수와 학과장(1926∼54)이 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과학 아카데미 폴라로그래피 연구소 소장(1950, 1952∼63)을 지냈다. 폴라로그래피를 발견하게 된 연구는 런던에서 도넌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1924년에 첫 폴라로그래프를 설명한 지 10년 내에 이 방법은 널리 사용되었다. 1941년 그의 모노그래프인 〈폴라로그래피 Polarographie〉가 나왔다.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 (1901~1986)
1984년 노벨 문학상수상자
1950년까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이미 1920년 첫 시집 〈눈물의 도시 Masto v slzch〉를 출판했다. 초기 프롤레타리아 시에는 소련 공산주의의 미래에 대한 젊은이다운 기대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성숙함에 따라 정부체제에는 마음이 덜 끌리게 되었으며 시의 주제도 변모해 〈무선전파를 타고 Na vlna; ch T.S.F.〉(1925)·〈나이팅게일은 노래를 못한다 Slavik zpiva patn〉(1926)에서는 이른바 순수시의 서정적인 요소가 뚜렷이 나타났다. 1929년에는 공산당을 탈당했다.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사건과 상황은 그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가 되었다. 〈전등을 꺼라 Zhasnte svtla〉(1938)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를 독일에 합병시킨 뮌헨 조약에 관해 썼다. 〈빛에 감싸여 Svtlena odna〉(1940)의 주제는 프라하였으며 〈진흙투구 Pilba hliny〉(1945)에서는 1945년의 프라하 봉기를 다루었다. 그는 또한 30여 권의 시집에 관해 서평을 썼으며, 몇 편의 잡지에 기고하고 아동문학 작품도 썼다. 1966년 인민시인으로 추대되었으나,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비난했다 하여 침묵을 강요당했다. 1981년 체코어로 씌어진 회고록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