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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효공부방。 스크랩 유득공『경도잡지』윷점의 易哲學的 해석
학선 추천 0 조회 164 15.04.26 0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東方學志 제157집(2012년 3월),

 

유득공『경도잡지』윷점의 易哲學的 해석*

 

임 채 우**

 

 

<차 례>

1. 서론
2. 조선시대 윷에 대한 이중적 인식
3. 유득공 ?경도잡지?에 보이는 윷점
   1) 세시풍속으로서의 윷점
   2) 64 윷 점괘와 점사
4. 윷점의 역학적 의미

   1) 끗수의 數理와 확률 문제
   2) 주역 卦와의 관계 문제
   3) 주역 卦爻辭와의 관계
   4) 풍흉점에서 신수점으로의 변화
5. 결론: 윷점에 담긴 한국 고유 역학의 의미

 

 

<국문요약>

 

Stewart Culin은 윷의 본래 목적이 占術에 있으며 고대의 종교사상과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윷은 단순한 민속놀이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 본질적으로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점의 성격이 내재되어 있으며 심오한 철학과 역사가 결합되어 있다. 18세기말에 활동했던 柳得恭의『京都雜誌』에서는 윷과 그 점법에 관한 체계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Stewart Culin이 말한 윷의 본질로서의 점술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본고에서는『경도잡지』에 수록된 윷점을 주역철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윷점은 주역의 64卦와 결합한 占辭를 독자적으로 체계화하고 있으며, 중국과 관계없이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하나의 民間역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이외에도 원래 윷점은 元旦에 한해의 풍흉을 점치던 민족 고유의 점법이었지만,『경도잡지』의 윷점에서는 개인의 1년 신수점을 보는 것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분석 고찰하였다. 또한 윷점사를 분석해보면 윷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閨房으로 들어가면서 점사에도 여성주의적 관점이 개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윷점은 그 점치는 시기나 방법등에 우리 민족 고유의 점법이 간직되어 있으며, 그 점사의 내용은 민간에서 길흉을 점치는 점서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경도잡지』에 실린 64괘 윷점은 우리 고유의 윷점에 주역의 64괘를 결합시켜 만들어낸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民間역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핵심어: 점술, 역학, 주역, 민간역학, 身數占, 64卦, 스튜어트 컬린StewartCulin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332-A00029).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조교수, 동양철학.

 

 

1. 서론

 

조선시대 윷은 대중적인 놀이였지만, 지배층들에겐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남녀노소가 신명나게 어우러지는 윷놀이판은 엄숙한 봉건질서를 유지하고 싶어하던 지배층들에게는 위험스럽고도 불경스런 놀이였을 것이다. 오히려 조선의 윷에 가장 주목한 이는 먼 이방에 있던 학자였다.

미국의 저명한 민속인류학자 Stewart Culin(1858~1929)은 1895년에 출간된 그의 명저『한국의 놀이-유사한 중국·일본 놀이와 관련해』(Korean Games-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에서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95가지의 놀이를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인류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1)

특히 윷놀이에 대해 음양오행과 우주의 심오한 원리를 담은 세계적 놀이이며, 판위에서 도구를 갖고 하는 전세계의 모든 놀이의 원형이라고 평가했다. 또 한국의 윷놀이가 고대의 점술체계에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고대의 우주원리와 주술성이 포함된 심오한 놀이였다고 하면서 심오한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극찬했다.2)

 

Stewart Culin은 조선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전세계의 민속놀이를 수집해서 비교 분석한 다음 그 귀납적 결론으로서, 한국의 윷놀이에 대해 위와 같은 평가를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왜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방의 미개국에서 행해지던 윷놀이가 세계 놀이의 원형이자 가장 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극찬했던 것일까? 도대체 식민지로 몰락해가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천민과 아녀자들의 雜技라
고 천시받던 윷놀이의 어떤 점을 보고 그는 그렇게 평가했던 것일까?

 

이 점이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Stewart Culin의 평가에 대해 엄밀하게 검증해보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윷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못하다. 조선시대를 압도했던 도학적 이데올로기와 어울리지 않던 민중의 민속놀이였던 윷에 관해서는 참고할만한 기록이 그다지 남아있지 못한 형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시 조선시대 식자층의 윷에 대한 멸시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던 윷과 윷점의 전모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柳得恭(1748~1807)3)의 『京都雜誌』는 주목을 끈다.

이 책은 실학자 유득공이 조선시대 서울의 생활과 풍속을 기록한 책으로, 민간에서 전해오던 윷점의 占辭 전체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으로는 6종의 필사 이본이 있고, 이를 토대로 일제강점기때에 2종의 인쇄본이 있다.4)

 

1) 이 책은 1895년 당시 컬린이 고고학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펜실베이니아대 출판부에서 500부 한정판으로 발행됐다.
2) Stewart Culin(1858~1929), Korean Games-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 펜실베이니아대 출판부, 1895(500부 한정판). Stewart Culin 저, 윤원봉 역, 『한국의 놀이-유사한 중국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열화당, 2003, 15쪽 참조. 그는 말판의 4곳의 포스트는 동서남북 방위를 나타내며, 도 개 걸 윷 모의 조합에 따라 말을 움직이는 것은 오행의 우주 원리와 상통한다고 평가했다.

3) 柳得恭은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로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1779년(정조 3) 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제천·양근 등의 군수를 역임하고 만년에 풍천부사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李德懋·朴齊家·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또 발해사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여『渤海考』를 짓는 등 우리의 고대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는 소론의 북방지역에 대한 오랜 관심과도 연관을 갖는 것이었다. 유득공은 엄격히 볼 때 小北이었으나, 그의 조부 유한상이 소론계 이정섭의 사위였고, 이광사와 종유했다는 점과 그의 가문이 소론계 인사들과 교유가 깊었던 사실들을 고려해볼 때 소북·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齋集』·『古芸堂筆記』·『?葉記』·『四郡志』등이 있다. 조성산, 조선후기 소론계의 고대사연구와 중화주의의 변용 ,『역사학보』 202, 2009, 75~76쪽 참조.
4)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윤조, 경도잡지 연구-저술과정과 이본 검토 ,『동양한문학연구』32, 2011. 참조.

 

『京都雜誌』의 완성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이 책에서 인용한 내용에 근거해볼 때 대략 정조 때에 씌어 진 것으로 보이는데, 필자는 대략 1800년 경으로 추정한다.5)『京都雜誌』의 내용은 한양의 세시풍속에 대해 주로 기술하고 있다. 1권은 당시의 여러 문물제도를, 2권은 당시 한양의 세시를 元日, 亥日, 子日, 巳日, 人日, 立春 등 19항목으로 나누어 많은 문헌을 인용하면서 기록했고, 그 연원과 유래를 고증적으로 밝히고 있어서, 조선시대의 풍속과 세시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같은 종류의 조선시대의 세시기인『洌陽歲時記』와 『東國歲時記』보다 먼저 집필되었고, 특히『동국세시기』의 모태가 되었다.6)

 

『경도잡지』가 세시풍속에 관한 선구적인 기록으로『열양세시기』,『동국세시기』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학술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다지 연구되지 못한 실정이다. 『경도잡지』에 대한 번역 및 해제는 여러 차례 이뤄졌으나, 이 책을 주제로 삼아 본격적으로 연구한 논문으로는 최근 5년 사이의 3편 정도가 나와 있는 실정이다.7) 그러나 윷점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와 문제제기가 있었으므로, 본고에서는 윷점이란 주제에 해당되는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최대한 참고하여 논의하도록 할 것이다.

 

본 논문은『경도잡지』에 실린 윷점의 구조와 철학적 의미에 관해 고찰하려고 한다. 먼저 기존의 연구들에 대해 비판 검토하고, 특히 윷점에 주역의 64괘를 배당시킨 점에 주목하여 주역철학의 문제와 비교해가면서, 윷점에 담긴 고유 역학으로서의 의의를 분석하려고 한다.

 

5) 본문 가운데 1792년에 만들어진 壯勇營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92년에서 유득공의 졸년인 1807년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승모, 조선시대 세시기 국역의 성과와 의의 ,『조선시대세시기Ⅲ』, 국립민속박물관, 2007, 19쪽 참조.
6) 『경도잡지』나『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활자로 간행되지않은 필사본으로 전해내려 오다가 1913년에 최남선이 주관하던 조선광문회에서 연활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정승모, 앞의 글, 2007, 18쪽 참조.

7) 나경수, 영재 유득공 경도잡지의 민속문화론적 가치 ,『대동한문학』26, 2007; 정의록, 유득공 경도잡지 세시편에서 윷점 괘사와 주역 괘사간 관련성 연구 ,『백악논총』3, 2010; 김윤조, 앞의 글, 2011.

 

 

2. 조선시대 윷에 대한 이중적 인식

 

조선시대 윷은 가장 대중적인 오락으로 널리 유행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배층이나 식자층들은 이를 천시하거나 금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 성리학자나 양반계층에서는 윷이 천민이나 부녀자들의
잡기로 백안시되었다. 조선시대 보수적인 유학자를 대표하는 송시열(1607~1689)은 시집가는 딸에게 써준 계녀서 에서 “마음속에 놀지말자 생각하면 諺文古談을 어느 겨를에 보며 쌍륙치고 윷놀기를 어느 겨를에 하리요?”라고 경계하고 있다.8)

8) 이훈석,『한국의 여훈』, 대원사, 1990, 24쪽 참조.

 

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에도 윷놀이는 군자가 손댈 만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 雜技 따위란 君子로서는 꼭 할 짓이 아닌 것이다. 董越의『朝鮮賦』에, “집안에 내기하는 기구는 일체 갖지 못하도록 하였다.”하고, 自注를 달았는데, ‘바둑ㆍ장기ㆍ쌍륙 따위는 민간 자제들까지도 배워 익히지 못하도록 했으니, 대개 당시 풍습이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나도 아이들에게, 비록 末技인 윷놀이일지라도 결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손을 위해 경계하기 때문이다.9)"

9) 이익,『성호사설』 2, 제4권 萬物門 柶圖, 민족문화추진회, 1977, 13~15쪽.

 

 

사대부가의 유교 예절을 다룬 이덕무(1741~1793)의『사소절』에도 “여자가 윷놀이를 하고 쌍륙치기를 하는 것은 뜻을 해치고 위의를 거칠게 만드는 일이니, 이것은 나쁜 습속이다. 종형제와 내외종형제, 이종형제의 남녀가 둘러앉아서 대국을 하고 점수를 계산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말판의 길을 다투고 손길이 부딪치면서 다섯이니 여섯이니 소리를 질러대어 그 소리가 주렴밖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은 참으로 음란의 근본
이다”라고 해서,10) 윷놀이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윷놀이의 폐단을 비판한다.

 

10) 이훈석, 위의 책, 1990, 24~33쪽 및 100쪽 참조. 李德懋,『靑莊館全書』, 민족문화추진회, 2000. 卷之三十, 士小節[下] 婦儀: 女子擲柶雙陸 敗志荒儀 已是惡習 從兄弟,中表兄弟,姨兄弟男女?坐 對局點籌 叫?爭道 手勢相觸 呼五呼六 聲出簾? 此誠淫亂之本也.

 

 

"장기(象?)ㆍ바둑(圍棋)ㆍ쌍륙(雙陸)ㆍ골패(骨牌)ㆍ지패(紙牌)ㆍ윷놀이(擲柶)ㆍ의전(意錢)ㆍ종정도(從政圖)놀이ㆍ돌공던지기(擲石毬)ㆍ팔도행성(八道行成)등을 모두 환히 알면, 부형과 벗들은 재주가 있다고 그를 칭찬하고 잘하지 못하면 모두 그를 조소하니 어찌 그리도 고질스러울까?

이런 놀이들은 정신을 소모하고 뜻을 어지럽히며 공부를 해치고 품행을 망치며 경쟁을 조장하고 사기(邪氣)를 기른다. 심지어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형벌까지도 받게 된다.

그러니 부형된 자는 엄금하여 오락기구를 혹 숨겨 두는 일이 있으면 불태우거나 부숴 버리고 매를 쳐야 한다.11)"

11) 李德懋,『靑莊館全書』卷之三十, 士小節八:

象戱,圍碁,雙陸,骨牌,紙牌,擲柶,意錢,從政圖,擲石毬,八道行成 皆曉解 則父兄?友 嘉奬才智 如或不能焉 則人皆嘲笑 何其痼也

凡耗精神亂志氣 廢工業薄行檢 資爭競養譎詐 甚至溺於賭錢 蕩敗財産 ?陷刑?

故爲父兄者 嚴截呵禁 或潛置技具 焚裂而楚撻之可也.

 

 

성리학의 기본교재였던『논어집주』에 博奕에 대해 경시한 언급이 나오지만,12)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경시되는 정도를 넘어서 조선의 일부 식자층들에게는 윷이 금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시대의 식자층들은 대부분 윷놀이를 매우 경계했지만, 일부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중기 金文豹(1568∼1608)는 <柶圖說>이란 윷의 기원과 철학적 의미에 대해 자세히 분석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沈翼雲(1734~1782 이후)은 윷놀이에 대해 柶戱經이란 詩賦를 남기기도 했다.13) 또 윷을 엄금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이덕무의 손자 李圭景(1788∼1863)은 조부와는 달리 윷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윷을 연구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12)『논어』양화편 22장,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朱熹註, 博 局戱也 奕 圍?也 已 止也 季氏曰 聖人非敎人博奕也 所以甚言無所用心之不可爾 참조.
13) 신원봉 등은 沈翼雲(1734~1782 이후)의 柶戱經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윷에 관한 기본 경전으로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았지만, 사실 사희경은 현재『江天閣銷夏錄』에 전문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윷에 관한 시문이다.

 

 

"옛사람은 일에 따라서 자세하게 살폈으니, 비록 작은 놀이기구라도 기록해서 빠뜨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司馬光(1019~1086)14)은『 ?古局象棋圖?를 지었으니, 어찌 노름꾼을 위해 끗수를 부르고 주사위를 던지라고 그리 했겠는가? 진실로 말할 만한 이치가 있다면 그만 둘 수가 없는 법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요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丹朱를 가르쳤고 주무왕이 장기를 만들어 상나라 주임금을 깨뜨렸다고 하니 이는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내가 윷놀이에 대해 어찌 변증할 만 하겠는가마는, 이미 해석할 만한 이치가 있다면 자
잘한 것일망정 잠깐 이를 위해 변증해보려는 것이다.15)"

 

14) 원문의 군실(君實)은 사마광의 字이다. 그의 시호는 문정(文正), 보통 사마온공(司馬溫公)으로 부른다. 주희는 그를 주돈이(周敦?) 장재 이정(二程) 소옹(邵雍) 등과 함께 북송 6선생(先生)으로 일컬었다. 저술로 『사마씨서의(司馬氏書儀)』 『거가잡의(居家雜儀)』,『온공가범(溫公家範)』이 전해지고 있다.
15)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人事篇 技藝類 雜技 柶?辨證說:

古人隨事詳密 雖?玩小器 莫不有記而不遺之. 如司馬君實大儒 有《古局象棋圖》豈爲雜技輩呼盧奪采而然
乎? 苟有可語之理 則不獲已也. 世傳唐堯作圍棋 以敎丹朱 周武製象? 以破商紂 則齊東語也. 予於柶? 何足辨哉 旣有可解之理 則不顧?屑 第爲之辨證之.

 

이규경은 중국의 놀이기구인 바둑과 장기를 연구한 사마광의 경우를 들어서, 노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치가 있어서 연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는 윷놀이보다 윷점에 대해서 보다 개방적이었던 듯하다. 조선 중기 李舜臣(1545~1598)장군의『난중일기』를 위시해서 『묵재일기』등에도 윷을 가지고 점을 친 기록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무렵까지는 사대부의 윷점이 유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擲字占으로 불리워지기도 했으나 유득공의 윷점과 내용이 거의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같은 점법으로 보인다. 또 조선후기에 들어오면『경도잡지』를 위시한 歲時記등에서 자주 기록되는 것을 보면 윷점이 대중적인 민속으로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유득공『경도잡지』에 보이는 윷점

 

1) 세시풍속으로서의 윷점

 

설날 혹은 대보름날의 윷점의 풍습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초의 세시풍속으로 바로 이 윷놀이와 더불어 윷점이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도 정월대보름 각 마을 단위의 擲柶대회가 전국에서 열리는 풍습이 있는데, 정초의 윷놀이 풍습은 남아 있지만, 윷점의 풍습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말기에서부터 일제강점기때에 크게 유행했던 萬方吉凶·家庭寶鑑 류의 民間雜占類의 책을 보면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정초의 풍습으로 윷점과 오행점16)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 오행점은 나무로 5개의 윷가락 혹은 장기알처럼 만들어 뒷면에 금·목·수·화·토를 새겨 넣은 다음 나무가 엎어지는 상황을 보고 점괘를 얻는 점법인데, 이는 윷점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설날에 윷을 가지고 길흉을 점치는 풍속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바로『경도잡지』이다. 이를 보면 元日 즉 설날 풍속을 소개하면서 특히 이날 노는 윷에 대해 그 구조와 방법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붉은 싸리나무 두 토막을 각각 반으로 쪼개어 네 쪽으로 만든다.
길이는 3치가량이고 혹 작기로는 콩 반쪽(콩윷)같이도 한다. 이를 던지는 놀이를 윷놀이(柶戱)라고 한다. 윷을 던져서 네 쪽이 다 엎어지면 모(牡), 네 쪽이 다 잦혀지면 윷(?), 세 쪽이 엎어지고 한쪽이 잦혀지면 도(徒), 두 쪽 엎어지고 두 쪽이 잦혀지면 개(?), 한쪽이 엎어지고 세 쪽이 잦혀지면 걸(傑)이라고 한다.

윷판에는 29개의 권역을 그리는데, 권역 중에는 멀리 돌아가는 길과 질러가는 길이 있어 말이 빨리 가는가 늦게 가는가를 가지고 승부를 결정한다.
설날에 이 놀이가 가장 성행한다.『說文解字』에 柶는 匕라고 하였는데, 특히 네 개의 나무라는 뜻을 취하여 ‘柶戱’라고 했다. 李?光의『芝峯類說』에서는 윷은 놀음(?戱)이니 즉 樗蒲라고 했으나 윷놀이는 즉 저포의 일종이나 저포라고 할 수는 없다.17)"

17) 赤荊二條 剖作四隻

長可三寸許 或小如半菽 擲之號爲柶戱 四俯曰牡 四仰曰? 三俯一仰曰徒二俯二仰曰? 一俯三仰曰傑. 局畵二十九圈 圈有迂捷 馬有遲疾 以決輸?-元日 此戱最盛. 按柶 說文云匕也 特取四木之義謂之柶戱-李?光芝峯類說 以爲?卽樗蒲也 柶戱者樗蒲之類也 而不可便謂樗蒲也.

 

 

유득공은 윷놀이의 방법과 절차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면서,『설문해자』에서 匕의 뜻으로 쓰이는 柶자와 윷놀이 擲柶에서의 柶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유득공은 고대중국에서 제사지낼 때의 수저의 뜻으로 쓰는 柶와는 용법이 전연 다르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중국의 예법에서와 한국의 윷놀이에서의 柶자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지봉유설』을 인용해서 이수광이 윷을 저포라고 했지만, 저포와 다르다는 점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유득공이 이전의 학자들처럼 우리 풍속의 근거나 원류를 중국에 끌어다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시각을 가지고 비교 분석을 통해서 풍속의 원형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밝힌 것으로서, 그의 고증학적 특징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18)

18) 김윤조, 앞의 글, 2011, 183쪽 및 194쪽 참조.

 

 

이어서 유득공은 정초에 윷점을 치는 풍속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세속에서는 설날에 또 윷을 던져서 새해의 길흉을 점치는데, 세번 던져서 64괘에 맞춘 주사(繇辭19))가 있다.20)"

19) 繇辭를 대부분 요사라고 읽는데, 점사를 의미할 때는 주사로 읽는 것이 옳다.『한어대사전』[ 繇: zh?u ???][《廣韻》直祐切, 去宥, 澄]?와 통한다. 古?占卜的文?.《左?·?公二年》:“ 成風 聞 成季 之繇,乃事之而屬 僖公 焉.” 杜? 注:“繇, 卦兆之占辭” 참조.『 조선대세시기Ⅲ』, 국립민속박물관, 2007. 62쪽 참조.
20) 世俗元日又擲柶占新歲休咎 凡三擲配以六十四卦有繇辭.

 

이는 유득공보다 한세대 후배인 李圭景(1788∼1863)의『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정월 초하루날 부녀자들이 윷을 던져 길흉을 점쳤는데, 3번 던져서 大易의 64괘를 모방한 계사가 있었다.”21)고 해서 거의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척사점의 풍속에 대해서는 洪錫謨(1781~1857)의『동국세시기』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세 번 던지는 시점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윷은 묵은해 두 번째는 새해 설날에 세 번째는 정월대보름에 던져 합산해서 윷괘를 얻는다는 것이다.22) 이상에서 보면 설날을 중심으로 섣달그믐이나 대보름까지의 정초 세시풍속으로 윷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21) 이규경,『五洲衍文長箋散稿』권10 柶戱辨證說 “元朝婦孺. 擲占休咎. 凡三擲之. 倣《大易》六十四卦. 而有繇辭.” 참조. 이규경의 조부 이덕무는 유득공과 정조때 규장각에서 검서로 같이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서 윷습속에 관해 깊은 관심을 공유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덕무도 유득공과 함께 같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교열하면서 서로 윷에 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가, 이규졍이 그의 조부로부터 윷에 관한 관심을 물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22) 이석호 외,『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경도잡지/동경잡기』, 대양서적, 1972, 115쪽.

 

2) 64 윷 점괘와 점사

 

『경도잡지』에서의 윷을 던져서 치는 척사점은 윷을 3번 던져서 나온 끗수를 주역의 64괘와 연결하고 각각의 괘에 점사가 있어서 이를 가지고 점을 치도록 되어 있다. 유득공은『경도잡지』에 64조에 달하는 윷점
의 점사를 모두 수록하고 있어서, 그 내용을 전부 확인할 수 있다.

 

 

도·도·도(건괘):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났다(兒見慈母)
도·도·개(이괘): 쥐가 창고에 들었다(鼠入倉中)
도·도·걸(동인괘): 어두운 밤에 촛불을 얻었다(昏夜得燭)
도·도·모(무망괘): (윷과 모는 같이 쓴다) 파리가 봄을 만났다(蒼蠅遇春)
도·개·도(구괘): 큰 물이 거슬러 흐른다(大水逆流)
도·개·개(송괘): 죄 있는 가운데 공을 세웠다(罪中立功
도·개·걸(둔괘): 나비가 등잔을 쳤다(飛蛾撲燈)
도·개·모(비괘): 쇠가 불을 만났다(金鐵遇火)
도·걸·도(쾌괘): 학이 깃을 잃었다(鶴失羽翼)
도·걸·개(태괘): 주린 이가 먹을 것을 얻었다(飢者得食)
도·걸·걸(혁괘): 용이 큰 바다에 들었다(龍入大海)
도·걸·모(수괘): 거북이가 대밭에 들었다(龜入筍中)
도·모·도(대과괘): 나무 뿌리가 없다(樹木無根)
도·모·개(곤괘): 죽은 이가 다시 살았다(死者復生)
도·모·걸(함괘): 추운 이가 옷을 얻었다(寒者得衣)
도·모·모(췌괘):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었다(貧入得寶)
개·도·도(대유괘): 해가 구름 속에 들었다(日入雲中)
개·도·개(규괘): 장마 때에 해를 보았다(霖天見日)
개·도·걸(이괘): 활이 살을 잃었다(弓失翼箭)
개·도·모(서합괘): 새가 날개가 없다(鳥無羽翰)
개·개·도(정괘): 약한 말이 짐이 무겁다(弱馬?重)
개·개·개(미제괘): 학이 하늘에 올랐다(鶴登于天)

개·개·걸(여괘): 주린 매가 고기를 얻었다(飢鷹得肉)
개·개·모(진괘): 수레에 두 바퀴가 없다(車無兩輪)
개·걸·도(대장괘): 어린아이가 젖을 얻었다(?兒得乳)
개·걸·개(귀매괘): 중한 병에 약을 얻었다(重病得藥)
개·걸·걸(풍괘): 나비가 꽃을 얻었다(蝴蝶得花)
개·걸·모(진괘): 활이 살을 얻었다(弓得翼箭)
개·모·도(항괘): 소원했던 손님에게 절을 하여 뵈었다(拜見疎賓)
개·모·개(해괘): 물고기가 물을 잃었다(河魚失水)
개·모·걸(소과괘): 물 위에 문채가 났다(水上生紋)
개·모·모(예괘): 용이 여의주를 얻었다(龍得如意)
걸·도·도(소축괘): 큰 고기가 물에 들었다(大魚入水)
걸·도·개(중부괘): 더위에 부채를 얻었다(炎天贈扇)
걸·도·걸(가인괘): 놀란 매가 발톱이 없다(驚鷹無爪)
걸·도·모(익괘): 강 속에 구슬을 던졌다(擲珠江中)
걸·개·도(손괘): 용 머리에 뿔이 났다(龍頭生角)
걸·개·개(환괘): 가난하고 천하다(貧而且賤)
걸·개·걸(점괘): 가난한 선비가 녹을 얻었다(貧士得祿)
걸·개·모(관괘): 고양이가 쥐를 만났다(猫兒逢鼠)
걸·걸·도(수괘):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었다(魚變成龍)
걸·걸·개(절괘): 소가 꼴과 콩을 얻었다(牛得草豆)
걸·걸·걸(기제괘): 나무 꽃이 열매를 맺었다(樹花成實)
걸·걸·모(둔괘): 중이 속인이 되었다(沙門還俗)
걸·모·도(정괘): 행인이 집을 생각한다(行人思家)
걸·모·개(감괘): 말이 채찍이 없다(馬無鞭策)
걸·모·걸(건괘): 행인이 길을 얻었다(行人得路)
걸·모·모(비괘): 해가 이슬에 비쳤다(日照草露)
모·도·도(대축괘): 부모가 아들을 얻었다(父母得子)
모·도·개(손괘): 공이 있으나 상이 없다(有功無賞)
모·도·걸(비괘): 용이 깊은 못에 들었다(龍入深淵)
모·도·모(이괘): 소경이 문에 바로 들어 갔다(盲人直門)
모·개·도(고괘): 어두운 곳에서 불을 보았다(暗中見火)

모·개·개(몽괘): 사람이 손과 팔이 없다(人無手臂)
모·개·걸(간괘):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
모·개·모(박괘): 각궁이 시위가 없다(角弓無弦)
모·걸·도(태괘): 귓 가에 바람이 난다(耳邊生風)
모·걸·개(임괘): 어린아이가 보배를 얻었다(稚兒得寶)
모·걸·걸(명이괘): 사람을 얻었다가 도로 잃었다(得人還失)
모·걸·모(복괘): 어지러워 길하지 않다(亂而不吉)
모·모·도(승괘): 살 길이 아득하다(生事茫然)
모·모·개(사괘): 고기가 낚시를 물었다(魚呑釣鉤)
모·모·걸(겸괘): 나는 새가 사람을 만났다(飛鳥遇人)
모·모·모(곤괘): 형이 아우를 얻었다(哥哥得弟)

 

 

위 점사를 가지고 한해의 개인 신수에 관해 길흉점을 친다. 가령 윷을 던져서 도가 세 번 나오면 ‘어린 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다’라는 점사를 얻게되니, 당사자의 한해 신수는 마치 자신을 보살펴주는 어머니를 만난 격으로 길하다는 것이다.

 

이 윷점은 ‘擲柶占’ ‘擲字占’ ‘윷괘점’ ‘윷점’ ‘柶占’ 등으로 불리면서, 해방이전까지 민간에서 정초의 점속으로 크게 유행되었다. 그런데 유득공의 이 윷점사는 이후에 다소 다른 형태로도 나타난다. 가령 도, 개, 걸, 모 대신에 숫자 1, 2, 3, 4로 표기하거나, 점사에 쓰이던 4언체가 3언체로 준다거나, 또 다른 글자나 내용으로 바뀌는 등이다. 이는 필사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글자로 뒤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때로는 아주 정반대의 의미로 변질되기도 한다. 가령『경도잡지』에서의 도도도 乾괘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났다(兒見慈母)’가 『경도잡지』보다 100년 뒤인 1916년 활자본으로 발간된『가뎡보감(家庭寶鑑)』에는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격이다(如兒失母)’로 바뀌어 있다.23) 이렇게 되면 점사가 반대의 뜻으로 변한다. 이런 문제는 윷점책이 필사되어 전해지는 과정속에서 혹은 민간에서 유전되는 과정에서 생긴 오자나 오류로 보이는데, 윷점에 관한 다른 판본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이전에도 윷점의 점사가 일부 기록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윷점을 치는 방법과 64점사의 전모가 기록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유득공의 기록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상의 점사는 유득공의 창안은 아니고, 당시에 전해지던 것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유득공보다 2백년 앞선 이순신(1545~1598)의 난중일기에 수록된 -‘뱀이 독을 토한다(蛇吐毒)’란 구절을 제외하고는- 8개조의 척자점사와24)『경도잡지』의 점사가 대체로 비슷한 것을 보면 아마도 조선전기에는 윷점이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득공보다 한세대 뒤인 홍석모의『동국세시기』에도 점사가 2개 실려있는데, ‘어린아이가 젖을 얻었다(兒得乳)’, ‘쥐가 창고에 들었다(鼠入倉)’로『경도잡지』와 약간 다르다.25)

 

어떤 이는 유득공이 윷점을 주역의 64괘와 연관시켜 作卦했다고 추정했는데,26) 윷점을 주역의 64괘와 연관시킨 것이 유득공이 창안한 것인지 아니면 예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기록들과의 비교 등을 통해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23) 박건회,『증보언문가뎡보감』, 신구서림, 大正5年(1916) 참조.

24) 김성욱,『이순신장군의 윷으로 얻는 괘』, 삼행원, 2006. 65~78쪽 참조.
25) 이석호 외, 앞의 책, 1972, 115쪽.
26) 정의록, 앞의 글, 2010, 429쪽.

 

 

4. 척사점의 역학적 의미

 

1) 끗수의 數理와 확률 문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윷에는 본래 <도, 개, 걸, 윷, 모>의 5가지 끗수가 있어서, 이를 3번 던지면 그 경우의 수는 順列permutation문제가 된다. 그래서 5³=125가지의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는 음효와 양효라는 2종의 원소를 6중 순열한(2?=64) 주역의 64괘와는 수학적으로 공통분모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윷점법에서는 주역의 64괘 체제와 결합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윷의 끗수 중 윷과 모를 같은 것으로 묶어서4가지 경우로 축약한 것이다.『경도잡지』에는 “윷과 모는 같이 쓴다(?與牡同用)”라고 해서 윷과 모는 동일시한다고 했다. 이외에 조선후기에 간행된『직성행년편람』에도 “도는 一이요 개는 二요 걸은 三이요 윳과 모는 四로 보게 하고 이름을 육괘점이라 하니 이 법이 경편하고 또한 신통하니라”고 윷점법을 설명한 것도 이와 같은 내용이다. 이와같이 윷점에서는 윷의 끗수를 4종으로 축약해서 윷을 3번 던지면 4×4×4=64가지 경우의 수가 나오니 이를 주역의 64괘와 연관시켜 作卦하고, 여기에 점사를 붙인 것이다. 그래서 윷점은 윷을 세 번 던져서 그 결과에 따라 64괘중 하나의 괘가 정해지게 되었다.

*? = <? + 丑>

 

그런데 민속학자 임재해는 윷과 모를 동일시한 것에 대해 윷을 점수화하지 않고 제외시킨 것으로, 윷을 영점화하는 무리를 범했으며 윷괘의 점수 환산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27) 『윷경』의 저자 신원봉도 역시 윷과 모를 동일시 한 것은 억지이며 전혀 수학적이지 않다고 했다.
그는 5개의 끗수를 가진 윷점은 본래 125개의 점사이어야 하는데『靈棋經』이란 중국의 점서가 125개의 점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서, 우리의『윷경』이 중국으로 들어가 변용되어 『영기경』으로 改作되었으리라 추정했다.28)

 

27) 임재해, 『한국민속과 오늘의 문화』, 지식산업사, 1994, 301쪽 인용.

28) 신원봉,『윷경』, 정신세계사, 2002, 52~53쪽 참조.『영기경』이 윷경이라는 신원봉의 견해에 대해 정의록도 동의하고 있다. 정의록, 앞의 글, 2010 참조

 

 

물론 윷점은 64괘와 맞춘 것으로, 본래 윷놀이의 作法과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윷은 5개의 끗수가 나오게 되어 있지만, 윷점에서는 64괘와 맞추기 위해 윷과 모를 합산해서 4개의 끗수로 축약 수정해서 사용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윷점법의 끗수 계산법을 잘못한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이를 근거로 윷점이 억지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일단 5개의 끗수 중에서 다른 끗수와는 달리 윷과 모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해서 본다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윷가락은 주사위처럼 5개의 끗수가 나올 확률이 동일한 것이 아니란 점에 주의해야 한다. 주사위처럼 각각 동일한 확률이라면 윷점의 축약법은 문제가 된다. 왜냐면 2개의 끗수를 합산하면 확률도 2배가 되어 다른 끗수와 형평이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률이 각기 다르다면 형평성 문제는 따져봐야만 한다. 윷이 엎어지거나 뒤집어질 확률이 똑같이 50% 씩이라면, 개가 제일 자주 나오게 된다. 다음은 도와 걸의 확률이 같고, 그 다음으로 윷과 모의 확률
이 똑같다. 그러나 실제 경험 상으로 볼 때 윷은 엎어지기보다 뒤집어지는 경우가 많다. 윷을 깎은 모양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무게중심 등을 고려해 물리학적으로 계산하면, 윷가락 하나가 뒤집어질 확률은 대략 60%이고, 엎어질 확률은 40% 정도이다. 이 때는 걸과 개가 비슷하게 제일 많이 나오고, 다음은 도, 윷, 모의 순이 된다고 한다.29)

 

29) 박경미,『생활속의 수학: 윷놀이와 확률』, 한국수학교육학회 뉴스레터 19-2, 2003, 27쪽 참조.

 

이와 같이 도, 개, 걸의 확률이 뒤바뀌는 이 윷의 확률문제도 사실은 윷가락 뒷면의 절단율 및 앞면의 곡선율에 따라 각기 수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간단하게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서 윷놀이란 그 윷과 모의 희귀성을 말이 가는 거리로 보상해줌으로서 공평하게 균형을 맞추는 확률게임인 것이다.

 

만일 위에서 지적한 대로 윷모합산법을 쓰지 않고서 윷점을 쳤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윷과 모의 희귀성을 어떻게 보상받을 방법이 없게되어, 오히려 확률적 불공평성이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윷점에서는 말판을 쓰지 않으므로, 희귀성을 말이 가는 거리로 보상받지 못하고 윷과 모가 도, 개, 걸 등과 등가로 취급된다면, 점괘들이 나올 확률상 편차가 너무 심해지게 된다. 물론 점에서의 확률이 주사위처럼 균등한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균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윷을 던져 개가 연속으로 3번 나올 확률과 모가 연속으로 3번 나올 확률은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윷놀이식의 확률게임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윷점에서는 나올 확률이 아주 적은 너무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윷과 모는 다른 끗수보다 나올 확률이 현저하게 적으므로 이 둘을 같은 범주로 묶어두는 것이 오히려 불공평한 편차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윷과 모를 합산해서 同用하는 윷점에는 묘한 이치가 숨어있다. 그 결과로 첫째는 윷점을 64괘의 주역체계와 맞출 수 있게 되고, 둘째로 더 공평하고 합리적인 점법이 된다는 것이다. 만일 확률이라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윷과 모를 동일시하는 것은 보다 확률적으로 공평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확률상 보다 공평해진다고 한다면 윷모 합산에 대해 그렇게 단순하게 ‘전혀 수학적이지 않은’ ‘무리한’ 점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우리 고유의 놀이를 활용한(혹은 접목시킨) 새로운 점법의 개발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2) 주역 卦와의 배합 문제

 

『경도잡지』에 수록된 ?점과 주역 괘의 배합은 어떤 원칙 혹은 원리에 의해 구성된 것일까? 먼저 알기쉽게 윷점법에서 각 끗수에 배합된 64괘를 간결하게 정리해보자.

 

도도도乾     도도개履     도도걸同人   도도모无妄
도개도?     도개개訟     도개걸遯      도개모否
도걸도?     도걸개兌     도걸걸革      도걸모隨
도모도大過  도모개困     도모걸咸      도모모萃
개도도大有  개도개?     개도걸離      개도모??
개개도鼎     개개개未濟  개개걸旅      개개모晋
개걸도大壯  개걸개歸妹  개걸걸豊      개걸모震
개모도恒     개모개解     개모걸小過   개모모豫
걸도도小畜  걸도개中孚  걸도걸家人   걸도모益
걸개도巽     걸개개渙     걸개걸漸      걸개모觀
걸걸도需     걸걸개節     걸걸걸旣濟   걸걸모屯
걸모도井     걸모개坎     걸모걸蹇      걸모모比
모도도大畜  모도개損     모도걸賁      모도모?
모개도蠱     모개개蒙     모개걸艮      모개모剝
모걸도泰     모걸개臨     모걸걸明夷   모걸모復
모모도升     모모개師     모모걸謙      모모모坤

 

도개걸모는 판본에 따라 1, 2, 3, 4의 수자로도 환원해서 쓰이기도 한다. 윷 끗수의 배열은 낮은 끗수인 도(1)로부터 개(2), 걸(3), 윷 모(4)의 순서대로 3번을 중첩한 조합으로, 이를 보다 알기쉽게 숫자와 괘를 표기해보면 아래와 같다.

 

111乾     112履     113同人     114无妄     121?     122訟     123遯      124否
131?     132兌     133革        134隨        141大過  142困     143咸      144萃
211大有  212?     213離        214??     221鼎     222未濟   223旅     224晋
231大壯  232歸妹  233豊        234震        241恒     242解      243小過  244豫
311小畜  312中孚  313家人     314益        321巽     322渙      323漸     324觀
331需     332節     333旣濟     334屯        341井     342坎      343蹇     344比
411大畜  412損     413賁        414?        421蠱     422蒙      423艮     424剝
431泰     432臨     433明夷     434復        441升     442師      443謙     444坤

 

 

위 도표에서처럼 숫자로만 표기해보면 111 112 113 114 121 122 123 124 131 132 133 134 141...444까지의 아주 규칙적인 수학적인 5진법의 배열이 된다. 주역의 괘는 6획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는 얼핏 보면 윷을 3번 던져 얻은 3개의 끗수 자체가 바로 괘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윷점의 “방법은 윷을 세 번 던져 괘를 얻는다. 첫 번째 던져 나오는 말을 상괘로, 두 번째 던져 나오는 말을 중괘로, 세 번째 던져 나오는 말을 하괘로 삼아 모두 64괘로 되
어 있는 괘를 찾아 占辭를 읽어 길흉을 판단한다”30)고 했다. 그러나 윷을 3번 던져 나온 끗수를 상괘 중괘 하괘로 삼아 하나의 주역 괘를 만든다는 견해는 잘못이다.

주역의 괘는 6획으로 이뤄져있으나, 3획괘 두개를 상하로 겹쳐서 하나의 괘를 구성하지, 상괘 중괘 하괘로 이뤄지는것이 아니다. 이는 3번 던져 나온 윷의 끗수를 2획으로 이뤄진 3개의 괘로 착각한 것이다.

 

또 역학자 최동환도 윷괘점의 도는 태양 개는 소양 걸은 소음, 모는 태음으로 놓고, 윷을 던져 수가 나온 순서대로 四象을 그린다음, 각 세효씩 상하괘를 綜卦로 만들어 괘가 나왔다고 했다.31)

또 이 뒤를 이어 신원봉도 도는 태양 개는 소양 걸은 소음 모는 태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윷점에서의 1(도) 2(개) 3(걸) 4(윷 모)를 각각 주역점에서의 太陽 少陽 少陰 太陰으로 간주해서 도도개는 ?卦나 同人卦가 되어야 하는데, 履卦로 되어있어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32)

 

1 2 3 4의 끗수는 윷가락이 잦혀지고 엎어진 모양으로만 본다면 아주 질서정연하게 설명이 된다.

도는 1개만 엎어졌으니 1에 해당하고, 개는2에, 걸은 3에 윷과 모는 4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를 주역의 四象체계에 대입해서 1은 노양이라고 하면, 2는 태양 1을 이어받은 소양에 해당되고, 3은 음으로 변화된 시초로서 소음이고, 4는 음의 극에 이른 노음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은 아주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설명처럼 보인다. 만일 신원봉의 말대로라면 윷점은 자기 규칙을 지키지도 못하고 있는 셈이니, ‘전혀 수학적이지 않은’ 무질서한 잡점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64괘와 윷말의 배열논리를 오해한 것이다. 그것은 척전법에서 동전
을 던져서 얻은 하나하나의 결과를 6, 7, 8, 9의 태음 소양 소음 태양으로 해석해서 효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그대로 가져다가 윷점법에 적용시키려한 데에서 빚어진 오해이다.

 

윷점의 1(도), 2(개), 3(걸), 4(윷 모)는 태양 소양 소음 태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윷점에서 1(도), 2(개), 3(걸), 4(윷모)의 낮은 끗수부터 높은 끗수대로 5진법적으로 배열해놓고서, 여기에 이와는 전연 다른 2진법의 규칙으로 배열된 64괘를 기계적으로 대응시켜 배합한 것이다.

 

31) 최동환, 『한역』, 강천, 1992, 98~100쪽 참조.
32) 신원봉, 앞의 책, 2002, 52~53쪽 참조.

 

다시 말해『경도잡지』의 윷점 순서는 주역 64괘를 이루는 음양의 加一倍法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도·개·걸·모의 차례로 5진법에 의거한 順列permutation을 만든 것이다. 순열의 방법에 의거해서 윷괘를 배열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주역의 四象개념에 의거한 척전법의 방식을 윷점에 끼워 맞추려한데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이는 윷점의 독특한 배열논리와 점법을 무시한 채 주역적인 선입관에 의해 성급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위 도표의 첫줄에서 괘를 나타내면 1(도)1(도)1(도)乾卦?? 1(도)1(도)2(개)履卦?? 1(도)1(도)3(걸)同人卦?? 1(도)1(도)4(모)无妄卦?? 1(도)2(개)1(도)?卦?? 1(도)2(개)2(개)訟卦?? 1(도)2(개)3(걸)遯卦
??1(도)2(개)4(모)否卦??가 된다.

알기 쉽게 괘만을 가지고 배열해 보면 乾卦?? 履卦?? 同人卦?? 无妄卦?? ?卦?? 訟卦l?? 遯卦?? 否卦??의 순서이다.

 

이 8개의 괘는 상괘인 乾卦?를 공통으로 하고, 하괘는 乾? 兌? 離? 震? 巽? 坎?艮? 坤?의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다. 도표의 모든 가로 줄은 이 8괘의 순서대로 맞춰져있다.

 

또 도표의 첫 번째 세로 열도

건괘?? 쾌괘?? 대유괘?? 대장괘?? 소축괘?? 수괘?? 대축괘?? 태괘?? 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 열도 상괘가 乾? 兌? 離? 震? 巽? 坎?艮? 坤?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세로 열에서의 순서도 마찬가지로 乾? 兌? 離? 震? 巽? 坎?艮? 坤?의 순서에 의거해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순서는 바로 伏犧八卦圖 혹은 先天八卦圖라고 하는 순서이다.33)

이와같이 윷점 64괘의 배열은 乾? 兌? 離? 震? 巽? 坎?艮? 坤?의 복희선천팔괘도의 순서를 상괘 하괘에 적용해서 64괘의 체제를 이룬 것이다.

 

33) 胡廣,『周易傳義大全』, 伏犧八卦方位之圖, 보경문화사(영인본), 1983. 19~20쪽 참조.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득공이『경도잡지』에서 수록한 윷점의 64괘배열은 별도의 두가지 체제를 결합시
켜 만든 것이다. 하나는 윷을 던져 얻은 낮은 끗수부터 순차적으로 쌓아올려 배열한 64조를 만든 다음,
여기에 다시 복희선천팔괘도를 원리로 상괘와 하괘를 쌓아나간 조합을 서로 배합한 것이다.

 

다만 한가지 남는 문제는, 윷점법에서 일반적으로 易術書에서 사용하는 文王後天八卦圖나 京房의 八宮卦次를 쓰지 않고서, 하필 복희선천팔 괘도를 쓴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이 유득공의 개인적인 창작인지 아니면 민간에서 전래된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3) 주역 卦爻辭와의 관계 및 여성적 관점

 

앞 절에서 본 바와 같이『경도잡지』에는 “도·도·도(乾卦): 어린아이가 자비로운 어머니를 만났다(兒見慈母)”를 비롯해서 “모·모·모(坤卦): 형이 아우를 얻었다(哥哥得弟)”에 이르기 까지 64조의 윷점사를 주역의 64괘와 체계적으로 연관시켜 수록하고 있다. 이렇게 윷점사가 주역의 64괘 체제로 체계화되었다는 점에 주의한다면, 일단 64조의 윷점사는 주역 64괘와의 관련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 주역의 윷점사의 주역 64괘와의 관련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가 한편 나와있다. 기존 연구를 보면 “윷점괘사의 64괘사 중에 36괘가 호괘(好卦)이며, 9개가 중괘(中卦)이고, 비관적인 악괘(惡卦)는 19개”라고 하면서 윷점의 점사를 길과 흉 그리고 중간의 3종으로 나누면서 주역의 卦辭와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점사의 길흉 판단이나 내용해석이 자의적이고, 점사의 내용해석도 오직 괘사에만 연관시켜 해석한 점도 근거없는 주관에 의존하고 있다.

가령 “『주역』의 乾爲天(건위천)괘도 물질적보다 정신적으로 길하다고 했다”든지, 天風?卦에 대해서도 “주역괘사는 뜻밖의 화가 있다 이다. 특히 우연히 만난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는데, 이들이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전연 출처나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또 “쥐가 창고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사는 “집안의 재물이 조금씩 빠져 나갈 징조이다”라고 해서 흉하다고 판단했으나, 이는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일단 조심조심 창고안에만 들어가면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길한 점사로 판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용이 깊은 연못 속에 들어간다”는 점사에 대해서는 흉이라고 판단하면서, 바로 그 뒤에서는 “자신이 뜻한 바가 이루어질 징조”라고 길하게 뜻풀이를 한다든지, “매에 발톱이 없다”는 점사는 길하다고 하면서, 바로 뒤에서는 “뜻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징조이다”라고 흉한 뜻으로 풀이하고 있는데,34) 앞 뒤 내용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어서 신뢰하기가 어렵다.

34) 정의록, 앞의 글, 2010 참조.

 

윷점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신원봉은 유득공의 윷점사와 주역괘의 관계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64괘와 거기에 해당하는 占辭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상기 기록에서는 모걸모를 64괘 중에 復괘와 연계시키고, 여기에 ‘혼란하고 불길하다(亂而不吉)’는 점사를 연결시켰는데, 64괘 중 復괘에는 ‘혼란하고 불길한’ 뉘앙스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상기 기록은 윷과 64괘를 牽强附會식으로 끌어 붙인 것인 듯합니다. 윷과 64괘 및 占辭사이에 아무런 의미 있는 연관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이 초래된 근본 원인은 윷과『주역』이 성격이 다른 이질적 사상체계라는 데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35)라고 비판했다.

 

주역의 복괘를 찾아보면 “어지러워 길하지 않다(亂而不吉)”라는 점사와 똑같은 말은 없다. 그러나 복괘에 혼란하고 불길하다는 점사가 주역의 북괘중에는 들어있지 않다고 했는데, 이와 똑같은 구절은 없지만 주역 복괘의 六三 爻辭에서는 ‘위태롭다’고 했고, 上六 爻辭에는 ‘재앙’ 과 ‘흉함’이 나타나고 있다.36)

 

가령 “도·도·도(乾卦):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났다(兒見慈母)”나 “모·모·모(坤卦): 형이 아우를 얻었다(哥哥得弟)”에서 도도건괘와 곤괘의 괘효사와 일치되거나 관련된 부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견강부회’라든지 ‘혼란’을 범한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윷점과 주역의 어떤 괘의 卦爻辭가 직접 관련된 내용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간단하게 연관관계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
다. 왜냐면 본래 占辭란 상징적으로 해석되고, 또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37)

64괘에 배당한 유득공의 윷점사를 견강부회라고 말한다면,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주역의 괘효사나 점사가 갖는 상징성과 넓은 해석의 폭을 부정하고, 易과 占을 문자상의 형식적 의미에만 닫아버리는 결과에 빠진다.

 

35) 신원봉, 앞의 책, 2002, 52~53쪽.
36) 六三 頻復 ? 无咎 및 上六 迷復. 凶 有災? 用行師 終有大敗 以其國 君凶 至于十年不克征 참조. 임채우 역, 『주역 왕필주』, 도서출판 길, 2000, 199~201쪽 참조.
37) 『임채우, 역경의 수사법-상징을 중심으로』 ,『 온지논총』 6, 2001, 229쪽 및 241쪽 참조

 

이런 맥락에서 위의 乾坤卦와 연관된 점사를 다시 분석해보자. 주역에서 坤卦를 땅이나 母의 상에 비유한다는 점에서 보면 곤괘는 어머니나 모성적인 덕과 연관된다. 그래서 윷점에서의 ‘형이 아우를 얻었다’는 곤괘의 점사에서 동생을 낳으려면 어머니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면, 어머니의 따뜻하고 넉넉한 품을 암시하고 있는 윷점사는 주역의 곤괘 논리와 맥락이 잘 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주역에서는 乾卦를 하늘이나 父의 象에 비유한다. 엄밀히 말하면 주역에서는 엄격한 아버지를 말한 것이지, 위 건괘 윷점과 연결시킨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아니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乾坤을 짝지워 함께 父母의 상으로 본다.38) 그래서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다’는 건괘 윷점사의 의미를 아이가 부모를 만나는 것이라고 유추해석해볼 수 있다면, 이는 주역의 건곤논리와 맥락이 통한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아버지에는 어머니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니, 아이의 입장에서는 엄격한 아버지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 품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솔직하게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38)『주역』계사상전: 天尊地卑 乾坤定矣 및『주역』坤卦 程? 注:

乾旣稱大 故坤稱至 至義差緩 不若大之盛也. 聖人 於尊卑之辨 謹嚴如此. 萬物資乾以始 資坤以生 父母之道也 참조.

 

 

이 대목에서 조선시대에 행해지던 윷놀이나 윷점은 상당부분 조선시대 규방에서 부녀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규방의 여성들에 의해 건괘의 象을 嚴父가 아닌 慈母로 새롭게 해석한 점사로 볼 가능성은 없을까? 다시 말해 ‘자애로운 어머니’라고한 윷점의 건괘 점사는, 규방의 여성들에 의해 건괘를 엄한 아버지의 상에 한정하지 않고 이를 여성들 자신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결과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필자는 본다.

 

아무튼 조선시대 규방의 여성들에 의해 전승되어온 윷점사에는 이런 여성적 관점이 게재되어있거나,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 “개·걸·도(대장괘): 어린아이가 젖을 얻었다(?兒得乳)”와 “모·도·도(대축괘): 부모가 아들을 얻었다(父母得子)”라든지 “모·걸·개(임괘): 어린아이가 보배를 얻었다(稚兒得寶)”는 등의 윷점사에도 조선시대 여성의 관점과 삶의 방식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 “걸·걸·모(屯卦): 중이 속인이 되었다(沙門還俗)”는 점사같은 경우는 조선시대의 抑佛정책을 연상시킨다. 이런 점사에는 세속을 버리고 산중에 출가했던 중이 다시 속인으로 환속할 수 밖에 없는 조선시대의 艱難한 생활상이 屯難한 괘의를 가진39) 屯卦 점사에 배어있음을 볼 수있다. 이 역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볼 때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는 점사라 할 것이다.

그래서 64조의 윷점사는 -그것이 주역의 본의와 다소 동떨어진 것이든 아니든 간에- 주역의 괘명으로 연결된 이상 일단 64괘와의 관련 속에서 그 의미를 탐색해볼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속에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혹은 민중들의 새로운 주역 해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음미해 볼 만한 연구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39) 屯難의 개념에 대해서는 둔괘 왕필주 초구 육이 구오 효사등 참조. 임채우, 앞의 책,2000, 54~60쪽 참조.

 

 

4) 풍흉점에서 신수점으로의 변화

 

조선시대 윷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연구결과를 남긴 조선 중기의 金文豹(1568∼1608)는40) 다음과 같이 윷점에 대해 말한다.

 

 

"두 사람이 마주 대하고 내기를 하면서 던지는데, 高農이 이기면 산간의 밭 농사가 잘되고, 汚農이 이기면 강가의 논 농사가 잘 된다.

반드시 歲時에 윷놀이를 하는 것은 天時를 점치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치기 위해서이니, 어찌 신기하지 아니한가? …… 윷을 만든 사람은 道를 알고 있다고 하겠다.41)"

41)『中京誌』卷10 부록:

兩人爲? 賽而擲之 高農勝者 山田熟也 汚農勝者 海田熟也

必於歲時而爲戱者 所以占天時 而卜一歲之豊?也 不曰奇乎 語其小也 …… 作柶者 其知道乎.

 

40) 김문표에 대해서는 임채우, 『윷에 담긴 한국의 역학사상』 , 『한국전통문화정립을 위한 음양오행적 해석』, 201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학술회의자료집 참조.

 

여기에서는 윷점의 풍속과 그 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정초에 윷을 놀아서 이긴 사람에 따라서 그 해의 논이나 밭의 농사가 풍년이 들지를 점쳐보았다는 것이다. 김문표와 유득공의 사이에 활동했던 李瀷
(1681~1763)도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내기를 하면서 던지는데, 高農勝이란 산협 농사가 잘 된다는 것이고, 汚農勝이란 물가의 농사가 잘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歲時에 윷놀이를 하는 것은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징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42)라고 해서 세시에 윷을 가지고 내기를 하면서 산전과 수답의 풍흉점을 쳤음을 말하고 있다.

42) 이익,『성호사설』2, 제4권 萬物門 柶圖, 22~23쪽 인용.

 

Johan Huizinga(1872~1945)도『호모 루덴스』(Homo Ludens,1938)에서 인류의 놀이를 연구하면서 놀이의 주술성을 언급하였던 바 있는데, 윷놀이가 바로 이런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짝을 이뤄 한해의 풍흉을 빌면서 윷을 놀거나 점을 치는 우리의 윷놀이 습속은,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놀이가 아니라 주술성이 내재되어 있는 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득공이 기록한 윷점은 김문표와 이익이 말한 한해의 풍흉을 점치던 기존의 습속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월에 한해의 길흉을 점친다는 측면에서는 김문표나 이익이 말한 윷점의 점속과 일치하지만, 유득공은 개인의 한해 길흉을 점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다.

 

첫째 풍흉점은 마을 단위로서 행해진 공동체의 점이라면 신수점은 개인적인 점으로서 점치는 주체가 다르다.

둘째 풍흉점은 윷놀이의 승패로서 결정하지만, 신수점은 윷놀이가 아니라 윷가락을 3번 던진 끗수를 가지고서 점을 친다는 점에서 방법이 다르다.

셋째 풍흉점은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데 비해 신수점은 개인의 길흉을 점친다는 점에서 목적이 다르다. 넷째 풍흉점은 점친 결과가 풍년 아니면 흉년이라는 이분법으로 나타나는데 반해, 신수점은 길흉의 형태가 -64종의- 다양한 상황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점의 질과 양이란 측면에서도 구별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윷점’에 대해 “정초에 윷을 가지고 그 해의 운수를 점치는 점법. ‘사점(柶占)’이라고도 한다”고 정의하면서, 이를 “하나는 집단으로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여 그 승부로써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 농촌에서 여러 가지로 농사 점을 하던 점년법(占年法)의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이와 달리 일반적인 오락으로서 윷을 던져서 나오는 말로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것이다”43)라고 해서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한 바 있다. 이는 윷점에는 본래 2가지 점법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 일정기간 풍흉점과 신수점이 병존했을 수 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윷점은 개인의 신수점이 우세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변해갔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는 윷점 혹은 윷놀이가 본래의 마을전체의 행사였던 것에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반층의 멸시를 받으면서 민중과 부녀자들의 놀이로 변화된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윷점이 사회지도층인 양반층의 멸시로 인해 풍흉점이란 마을 전체의 대동적 민속놀이로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개인의 신수점으로 파편화내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유득공보다 백여년후인 최남선(1890~1957)은 윷이 본래의 풍흉점년법에서 점차 오락화되었는데, 점복의 의미가 부인의 윷괘와 함경도 지방의 달윷에 남아있게 되었다고 했다.44)

최남선도 한 해의 풍흉점이나 신수점을 치던 습속이 규방에서의 오락거리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보건대 -다소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도 있지만- 본래 마을 농사의 풍흉점을 치던 윷점이 점차 조선후기로 가면서 개인의 신수점을 치는 것으로 변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정초의 오락거리로 변질되어갔다고 판단한다.45)

 

43)『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윷점’ 항 인용.
44)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제4 풍속 , 윷 38쪽 척사,

45) 윷점을 수록한 책자는 조선말에 점차 나타나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에 극성을 이루고, 해방후에 점차 사라지기 시작해서 7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윷점을 기록하고 있는 간행본들을 대략 수록해보면 다음과 같다.

저자미상,『直星行年便覽』, 光武 7年(1903);

신구영 編,『家庭百科要覽』, 京城: 博文書館, 1918;

姜義永編, 『(最新諺文)無雙家庭寶鑑』, 京城: 永昌書館, 大正15(1926);

金東縉 編,『(家庭)百方吉凶秘訣』, 京成: 德興書林, 大正14(1925);

三省社編輯部 編, 『(最新)家庭百科辭典』, 三省社, 1953;

鄕民社編輯部 編, 『家庭百事吉凶寶鑑』, 鄕民社, 1962;

『 (最新)家庭편지투』, 百忍社, 1962; 『(現代模範)家庭寶鑑』, 성경도서출판사, 1962.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申龜永 저, 『윳과?책』(박문서관, 1918)이란 윷점 전문서적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5. 결론: 윷점에 담긴 한국 고유 역학의 의미

 

윷을 가지고 한해의 풍흉과 길흉을 점치는 습속은 윷의 본질적 기능이다. Stewart Culin(1858~1929)도 말했다시피 윷을 위시한 한국의 놀이가 주술적 의식에서 시작된 원시사회의 잔존물이며,46) 특히 윷의 본래 목적이 점술에 있었다고 한바 있다.47) 이익의 제자 安鼎福(1712~1791)이, “윷은 길흉의 다른 쓰임이 되는 것인데 지금은 이를 놀이로 빌려쓰고 있다”고 한 것은48) 윷이 본래 점을 치던 일종의 占具인데, 놀이 도구로 변질되었음을 언급한 것이다. 유득공보다 2백년 앞선 이순신이나 김문표도 윷점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윷은 단순한 민속놀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점으로서의 본질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도 개 걸 윷 모의 5종의 끗수를 가진 윷놀이가 음양이라는 주역점의 2진법과 완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득공의 윷점과 같은 64괘 점사체제로 체계화된 것도 양자에 함축되어있는 占으로서의 본질적 친연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윷을 멸시하던 조선시대에도 윷점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점이라는 윷의 고유한 본질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천시받던 윷과 그 점법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담긴『경도잡지』는 Stewart Culin도 말했던 윷이 담고 있는 우리의 점술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조선시대의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이 존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윷점의 占辭가 한문으로 쓰여진 데다가, 주역의 64괘와 연관되어 있던 관계로 조선시대의 일부 지식인층들 사이에 일종의 주역점으로 받아들여진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또 한가지는 조선후기에 들어서서 기존에 理氣論의 관념적 거대담론에 경도되던 데에서부터 벗어나, 조선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려는 實事求是의 인식론적 변환이 있었기 때문이다.49)

 

유득공은 윷이 중국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란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윷을 중국의 저포라고 보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저포와 다르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윷놀이가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속에서 독자적으로 자생한 것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달라진 현실관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6) Stewart Culin 저, 윤원봉 역, 앞의 책, 2003, 9쪽 참조.
47) Stewart Culin 저, 윤원봉 역, 앞의 책, 2003, 15쪽, 143쪽 참조.
48) 安鼎福,『星湖僿說類選』 卷5下 人事篇8 技藝門 柶戱條 참조.

49) 조선중기까지의 성리학적 관점이 조선사회를 지배했지만, 명청 교체기에 들어서 소론 계열을 중심으로 중화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이전과는 다른 민족주의적인 시각과 현실 문제에서의 경세치용을 중시하는 실학적 관점이 대두되었다. 소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유득공이 우리의 고대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발해고』를 저술한 것도 이런 인식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조성산, 앞의 글, 2009, 75~77
쪽 참조.

 

 

윷점은 중국과 다른 우리의 역학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 우선 윷을 이용해서 주역점을 친다는 것 자체가 중국과 다른 우리의 독자적인 점법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왜냐면 중국에는 윷이란 놀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우리 고유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설령 윷점이 擲錢法처럼 주역점을 간이화하려는 시도로 개발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윷의 구조와 특성을 잘 이용한 독특한 점법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다음으로 윷점사의 내용은 앞에서도 보았다시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 점사에 주역의 64괘를 배당한 것은 중국의 주역점의 영향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각 괘에 배당된 점사는 주역의 괘효사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윷점사에 나오는 원문이나 주역의 괘효사에 관한 새로운 이해는 주역의 경전에 나오는 원문과 전연 다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중국의 術數 別傳類 및 민간의 雜占類의 책에서는『경도잡지』에 실린 64조의 윷점사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속에는 程朱의 주역해석에 경도되어있던 조선성리학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민간에서 해석된 역학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윷을 즐기던 조선시대의 생활상과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50)

결론적으로 필자는 윷점을 ‘조선시대 민간에서 고유의 윷점과 주역점을 결합시켜 우리식으로 발전시킨 새로운 점법’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유득공이『경도잡지』에 그 전모를 수록해둔 윷점법은 程朱易學과 다른 우리나라에서 생성된 민간 역학의 성과로서 앞으로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50) 윷점과 비슷한 내용과 형식을 가진 점법으로 근자에 새해 운세를 점치는 데 쓰는『토정비결』이 있다. 이는 토정 이지함의 명성에 가탁한 점서로서, 『경도잡지』를 위시한『동국세시기』나『열양세시기』,등의 조선후기의 세시기에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책은 빨라야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토정비결』은 점자의 年月日時의 사주 가운데 時를 뺀 年, 月, 日의 간지를 사용해서 3개의 숫자를 얻어 하나의 卦로 만들고 여기에 총평과 함께 12달에 해당하는 점사를 붙인 것이다. 윷점에는 주역의 체계를 따라 총 6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괘의 변화를 통해 144개의 괘를 만들어서 윷점보다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해방후 윷점이 쇠퇴하면서 이보다는 12달 별로 자세한 내용을 가진 토정비결이 선호되었고 그 지위를 대체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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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2. 1. 19 심사일: 2011. 2. 20 게재확정일: 2012. 3. 10

 

 

<Abstract>

 

Yut-divination in Yu Deuk-gong's KyungDoJapJi (京都雜志),

as interpreted by I-Ching philosophical contexts

 

Lim, Chae-Woo*

 

Stewart Culin once argued that Yut was made for fortunetelling and had the religious idea and profound philosophy of the ancient. In other words, Yut was not just a folk game, and the fortune telling of the ancient indwelled it. In addition, a profound history and philosophy were combined in it. Due to the systematic data about Yut and fortunetelling from KyungDoJapJi of the Yu Deuk-gong, who lived in the late 18th century, this book can be an invaluable material in studying this essence of Yut.

In this article, we analyzed Yut-divination recorded in KyungDoJapJi according to the view of I-Ching philosophy. The analysis showed us that the Yut-divination of Korea systematized a unique method of interpreting hexagrams that adopted 64 hexagrams of I-Ching, which is one of many indigenous folk-theories. In addition, Yut-divination was the endemic fortunetelling method of Korea that was utilized to determine whether one would have a good harvest or not on the first day of the year; by extension, it was used in order to know whether one would have a good year or not (shinsoojom) in KyungDoJapJi. Furthermore, as women got to play Yut in the Joseon Dynasty, the hexagrams of Yut ended up taking a feministic view.

Yut-divination inherited the unique fortunetelling techniques of our nation, for instance when and how to do something, and the hexagrams of Yut-divination are what folks utilized to tell one’s fortune. In conclusion, the 64 hexagrams of KyungDoJapJi are the indigenous folk theory of Korea that adopted the 64 hexagrams of I-Ching philosophy in Yut-divination.

 

* Professor of Oriental Philosophy, Department of Korean Studies, UBE, Jeon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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