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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 감옥, 그 생지옥에서 만난 하나님
♣ 역적이 되어 고문당하다
뜨거운 젊은 날에 노련하기는 쉽지 않다. 천재 이승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양 학문의 정수를 맛보고 6개월 만에 영어를 마스터하고 뛰어난 글과 말과 용감한 행동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는 여전히 이십대 초반이었다.
야쪽이 첨예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노련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너무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쪽이 우세한 상황이라면, 방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더군다나 상대가 '나랏님'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였다면, 더욱 조심해야 했다. 세상 사람 모두를 아랫것으로 보는 황제가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요청을 들어주는 상황은 더더욱 위험했다. 노여움에 찬 황제가 언제 반격을 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그 정도의 노련함까지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다. 물불 가리지 않는 이승만은 결국 위험한 선을 넘었다.
1898년이 저물어가던 12월 말, 이승만은 당시로선 '하늘을 거역하는' 엄청난 거사에 가담한다. '유약(柔弱)하고 몽매(蒙昧)한' 고종 황제를 폐위시키고 그 대신 의화군 이강을 새 황제로 추대하면서 박영효 중심의 강력한 개혁정부를 수립하려던 쿠데타 음모에 참여한 것이다. 이승만은 일본에서 밀입국한 이규완, 황철 등 박영효 지지 세력과 접촉하였다. 하지만 음모가 사전에 누설되면서 지명수배 되었다.
이승만은 급히 배재학당으로 도피했다. 서양 선교사가 세운 곳이어서 일종의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잠복 18일째인 1899년 1월 9일, 미국인 의사 셔먼(Hany C. Sheerman)이 왕진에 나섰다. 한국인을 치료하러 가는 길에 통역이 없다는 말을 듣고 도피 생활에 좀이 쑤시던 이승만이 따라나섰다.
나름대로 순검의 눈을 피한다고 했겠지만,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1898년, 파란만장한 한 해였다. 드라마와도 같은 이승만의 대중 운동은 불꽃처럼 일어났다가 연기처럼 소멸했다.
서양 의사를 돕다가 체포되었으니, 선교사들은 미안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승만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미국 공사와 경무처의 고문관은 고문이나 부당한 형벌을 막기 위해 매일 같이 면회를 왔다.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이승만이 심각하지 않은 정도의 처벌을 받고 풀려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독립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감옥 밖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자신의 연설을 듣고 지도를 받기 위해 기다린다고 믿었다. 젊은이다운 자존심과 독립심, 공명심의 발로였다. 함께 투옥된 최정식, 서상대도 탈옥을 부추겼다. 이때 배재학당의 절친한 동료였던 주시경이 육혈포(권총) 2정을 감옥에 밀반입시켰다.
영화 같은 장면으로 전개된 탈옥 작전은 허무하게 끝났다. 1월 30일, 이승만 일당의 탈옥은 실패했다. 역적에다가 탈옥까지 시도했으니, 이제 이승만은 악형(惡刑)을 피할 수 없었다. 다시 붙잡혀혼 이승만을 맞이한 것은 무시무시한 고문과 악명 높은 한성 감옥이었다.
이승만을 고문한 자는 박달북이었다. 그와의 만남을 담은 기록이다. "그는 왕당파로 나와 가장 원한이 사무치는 원수였다. 박은 나를 잡아다 놓은 후에 황실에 연락을 해서 황제로부터 고문을 하라는 지시를 전화로 받았다. 그들은 나를 캄캄한 방에 눕혀놓았는데, 나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를 못했다.
그리고 나는 또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때 나는 그 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죽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나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풀어대는 그들은 격분한 동물들 같았다."
이승만이 끌려간 방은 감옥 안쪽의 취조실이었다. 그곳을 둘러싼 두터운 돌벽은 일종의 방음 장치였다. 고문당하는 죄수의 비명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승만은 받았던 고문은 여러 가지였다.
화젓가락에 불을 빨갛게 달구어 팔다리를 지지는 것, 두 팔을 뒤로 틀어서 공중에 오래 매달아 두는 것, 살갗을 파고드는 포승줄에 두 팔이 묶인 상태에서 양다리에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로 대나무 가지를 넣어 살점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비트는 것 등등이다.
고문의 후유증은 그후로도 오래 남아있었다. 손이 망가진 이승만은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었다. 고문당하기 이전의 서예 실력을 되찾은 것은 무려 40년이 지난 뒤였다. 훗날 이승만은 감정이 격해질 때면 아플 때의 버릇이 살아나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끝을 입으로 불었다.
고문의 흔적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 세계에도 깊이 박혀 있었다. 오십 년이 더 지난 뒤인 77세 때에도 그는 가끔씩 꿈속에서 감방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때의 일을 물으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잊어버리게 좀 놔둘 수는 없나 ... "하고 말하기도 했다.
♣ '생지옥'에서 회심하다
한성 감옥은 끔찍했다. 이승만은 면회하러 갔던 미국 선교사 에디(Eddy)의 기록이다. "그들의 감옥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자백을 받아 내거나 남을 연루시키기 위해 자주 고문을 가하고 죄수들을 축사(畜舍)에 가둔 소떼처럼 이리저리 몰아붙인다.
쥐수들은 위생 상태가 형편없고 해충이 우글거리는 흙바닥 위에서 숨막히게 답답한 분위기를 참아가며 잠시도 방을 비우지 못한 채 생활한다. 정치범들은 흉악범, 무뢰한들과 함께 어울려있다.
답답한 감방 안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재빨리 칼을 쓰고 준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겹쳐 앉지 않는 한 제대로 앉을 수조차 없다. 그들은 간수들고 동료 잡범들에 의해 잔인하게 취급받는다.
구역질나고 때로는 부패한 급식이지만, 약한 자의 몫을 강한 자가 빼앗아 먹는다. 정치범들이 겪는 고문은 죽음의 고통이다. 김모 씨는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이승만과 2년여를 함께 지냈던 감옥 동료 가운데 김형섭이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의 육군 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던 사나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성 감옥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 칸의 방만한 곳에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진흙 속의 뱀장어'같이 벌것벗은 채로 앉아서 잠을 잤다. 감옥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한 데다 체취와 땀냄새 그리고 대소변의 악취가 지독해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가는 사람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문틈 쪽으로 코를 돌려야 한다.
감옥의 급식 상태는 팥밥과 콩나물, 소금국이 전부인데 음식을 담은 그릇이 불결하여 보기만 해도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옥리들이 자기들 배를 채우기 위해 나쁜 살에다 팥을 섞어 밥을 짓기 때문에 돌이나 겨껍질 그리고 다른 잡물들이 너무 많이 섞여있어 감옥에 오래 있으면 누구나 이가 상하고 위를 버리게 된다. 이처럼 조악한 음식이지만 하루 두 끼밖에 배식을 하지 않는데다 그 양이 적었다.
... 해충, 빈대의 공격이 여러 가지 고통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2-3일이 지나면 빈대가 빨아먹은 피 때문에 옷이 빨갛게 물들어 세탁을 해야만 했다.
김형섭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빈대였다. 빈대들은 발끝에서 목까지 온몸에 기어올라, 살갗이 빨갛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피를 빨았다. 칼을 쓰고 족쇄에 묶인 죄수들에게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유영익의 치밀한 연구에 의하면, 한성 감옥에서 죄수 일인당 차지할 수 있는 면적은 불과 0.23평(0.76 제곱미터)이었다. 눕기는 커녕 여유 있게 앉기에도 부족한 공간이다. 더군다나 목에 칼을 쓰고 있는 대역 죄인에게는 숨쉬기도 비좁았다. 한성 감옥의 실태는 한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이승만의 목에는 무게 10킬로그램의 칼이 씌어졌다. 손에는 움직일 수 없도록 수갑이 채워졌다. 발에는 꼼짝 못하도록 족쇄가 물려졌다. 칼을 벗고 손발이 풀리는 시간은 하루 스물 네 시간 가운데 단 5분 뿐이었다. 온몸은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되었다. 감옥에는 바닥조차 없었다. 살인범과 같은 중죄인들은 널빤지도 깔지 않은 흙바닥에 던져졌다.
인간의 곤경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떨치며 일어나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달려갔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비로소 신(神)을 찾는다. 몸부림 쳐도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곳, 몸부림 치고 발버둥 칠 힘조차 없는 상황, 그럴만한 물리적인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성경을 찾았다. 성경을 구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나는 그후 성경을 구하려고 했으나, 옥중에서는 종교 서적이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선물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 방법을 통해 셔우드 에디(S. Eddy)박사가 조그마한 <신약성서>를 보내왔는데, 그것을 받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머리에 칼을 쓰고 손에는 수갑을 차고 있으니 한 장을 읽고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다. 누군가 옆에서 넘겨주어야 한다. 동료 죄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성경을 읽는데, 예전과는 새롭게 읽혀졌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배재학당에 다닐 때는 그 책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나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느날 나는 학교에서 어느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성경을 읽다가 설교가 떠오른 결정적인 순간을 이승만은 회고한다.
"내가 품고 있는 질문은 꼭 한 가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예배실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하고 목에 씌운 형틀에 머리를 숙이고 평생 처음으로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날, 완전히 변한 것은 이승만 뿐이 아니었다. 먼저 이 나라의 선교 역사가 바뀌었다. 이승만은 조선의 양반, 왕족, 상류층 출신으로는 국내에서 개종한 첫 번째 개신교 신자였다. 영향력 있는 정치인, 언론인, 연설가들 중에서도 국내파로는 첫 번째였다.
이승만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양반 지식인으로는 1883년 동경에서 개종한 이수정 과 1885년 샌프란시스코의 서재필, 1887년 상해의 윤치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국내외를 통틀어 양반 개종자 자체가 몇 사람 안 되었고, 이승만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해외 체류 시절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유교 문화와 전통이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던 조선 분위기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첫 스타트를 이승만이 끊었다.
그 영향력은 선교와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요 건국 대통령으로 성장해 간 그의 발자취와 함께, 기독교는 이 나라 역사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 '복당동지'(福堂同志) 결성
1899년 겨울, 영혼을 묶었던 사슬에서 풀려난 이승만은 그해 여름인 7월에 팔다리와 목을 옥죄었던 사슬에서도 풀려났다. 7월 11일의 선고에서 무기형으로 감형(減刑)된 것이다.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며 신앙에 매달리고 있던 그에게 감형은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이었다. 무기수가 되면서부터 이승만은 칼과 족쇄, 수갑으로부터 벗어나서 보다 자유로운 수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899년 12월에는 두 차례 감형이 더해져서 징역은 10년으로 단축되었다. 거듭된 단축은 선교사들의 노력, 왕족이라는 신분에서 오는 특혜, 이승만 가족들의 필사적인 구명 활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00년 전후로 한성 감옥에는 350명의 죄수가 갇혀있었다. 죄목으로 분류하면 사기범, 절도범, 흉악범, 정치범 등 다양했다. 특이하게도 정치범들은 대부분 같은 성향이었다. 갑오경장이 실패한 뒤에 일본에 망명하여 고종 황제 폐위, 국체 개혁을 추진했던 박영효, 유길준 계열의 역적들이거나, 정부 시책에 반대했던 인물들이었다. 주로 개화파 계열에 속했던 관료, 군인, 경찰관, 언론인, 학생회 회장, 독립협회 회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서구 지향적인 개혁파 애국자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이승만이 기독교 개종의 첫 열매였다. 이승만은 감옥에 정기적으로 찾아와 성경 공부를 인도한 아펜젤러, 언더우드, 벙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전도에 열을 올렸다.
이승만에게는 뛰어난 설득력과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일찍부터 연설과 리더십에 두각을 나타냈고 평생 리더로 살아갔다. 하나님은 한성 감옥에서 그의 감화력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열정적으로 전도한 이승만은 감옥에서 40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또 한번 '최초'의 수식어가 붙었으니, 한국 최초의 전도왕이다. 그 당시 한반도에 와있던 어느 선교사도 그만큼의 한국인들을 개종시킨 사례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40여명이 개혁파 지식인이요 훗날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건국 세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승만과 회심한 지식인들은 1902년 12월 28일, 감옥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죄수들의 예배에 간수들도 참여했다. 이승만의 영향력이 간수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지옥 같던 감옥이었지만, 예배를 마친 그들의 영혼에는 감격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감옥을 '복당'(福堂)이라고 불렀다. 형벌과 치욕이 내려진 생지옥이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기쁨으로 가득 찬, 축복의 집이 된 것이다. 죄수 이원긍의 아들 이능화는 감격적으로 표현했다. "지옥과 같은 감옥이 천당으로 변했다."
복당 동지들은 성경 읽기에 몰두했다. 이승만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저버린데 있다. 어두운 감방 안에서 일부 죄수들은 죽음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기다리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교수대로 끌려갔고, 또 다른 이들은 마치 사탄 자신이 영원히 옥좌에서 군림하고 있는 듯, 희망의 빛줄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끝없이 고통 받고 있었다.
그런 시간과 그런 상황에서 우리 각자는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받았다고 믿었고, 예수가 당한 무고와 불의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참된 것이어서 우리 각자가 이상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가 회심하던 날, 로마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일기에 썼다. 훗날 감리교인이 된 이승만도 같은 기록을 남겼다.
시대는 달랐고 상황도 달랐으며 인종과 배경도 달랐지만, 그들을 뜨겁게 만든 것은 동일한 복음이었다. 고난 받고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시대를 변혁하는 성령의 뜨거움이 역사의 주인공들에게 임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 이승만과 동료들은 서로를 '복당동지'(福堂同志)라고 불렀다. 복당 동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엄청난 이름들이다.
이승만 : 박영효 대통령 옹립 사건으로 투옥, 훗날 독립 운동가,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
신흥우 : 이승만의 도동 서당, 배재학당 동료. 박영효와 관련되어 투옥. 훗날 정치가로 활약했다.
이상재 :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유길준과 관련되어 투옥. 훗날 YMCA 운동에 전념했던 위대한 기독교 교육자였다. 한국의 톨스토이로 존경받았다.
이원긍 : 조선 선비의 최고 명예인 대제학 출신.
유성준 : 내무 협판(차관)을 지낸 유길준의 동생. 훗날 보성전문 교장, 물산 장려회 이사장으로 활약했다.
이동녕 : 진사시에 급제한 재사(才士). 훗날 임시 정부 요인으로 활약한 독립 운동가이다.
이종일 : 제국신문 사장으로 훗날 3. 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다.
이 준 : 한성 재판소 검사보를 지냈으며 훗날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다.
안국선 :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로 애국 계몽 운동가로 활약했다.
양의종 : 협성회 간부와 배재학당, 언론 활동에 이승만과 함께 참여했다.
정순만 : 훗날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다.
박용만 : 미국과 하와이에서 무장 투쟁에 의한 독립 운동을 추진했다.
김정식 : 경무 국장 출신으로 후에 동경 YMCA의 창설자가 되었다.
이승만의 전도를 받아서 회심한 이상재는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동기를 훗날,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걷잡을 수 없는 나라의 비운이 드디어 창상(滄桑)의 변 - 나라가 몰락할 임박에 처했음 - 까지 몰아왔음을 몸소 겪으면서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나라 구원의 길을 찾아보려는 일념(一念)이 기독교의 믿음을 갖게 한 것이며, 또 나라의 장래를 기약하기 위해서는 낡은 세대를 제쳐놓고 젊은 세대를 길러야 되겠다는 또 하나의 믿음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글에서 뚜렷이 발견되는 것은 기독교적 애국심이다.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나라 구원의 길을 찾으려는 일념'이 기독교로 그의 발길을 이끌어간 것이다. 다른 옥중 동료들도 비슷했다. 이승만의 글이다.
"우리들 생각에는 기독교가 자유의 종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믿었다. 같이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우리 국민들의 갱생(更生)을 위해 기독교 교육을 전파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자고 결의했다."
필자는 '복당동지'들의 명단을 정리하면서 이승만이 고백한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을 느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 이들을 한꺼번에 몰아넣은 것은 누구의 역사인가. 더군다나 예사로운 회합이 아니요 생지옥과 같은 감옥이라는, 더할 수 없이 심령이 가난해지게 만드는 그곳으로 밀어 넣은 것은 누구의 조화인가. 이승만에게 불씨를 심고 옥중 동료들에게 불꽃을 튀게 해서 마침내 민족의 심성으로 번져간 불길은 누가 시작한것인가.
교회사가(敎會史家) 서정민의 논평을 인용한다.
"이런 사회 선교의 결실은 곧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창출이라는 귀중한 결실을 맺었던 것인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활동이 한국 기독교사에서 차지한 비중은 지대한 것이며, 그들의 회심과 개종을 불러일으켰던 당시 한성 감옥의 역사는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