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1월입니다. 평소 산행을 함께 하는 류정선 교사(남대전고. 49)가 정암 선생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십수 년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류정선 교사의 안내를 받아 정암 선생를 찾아 뵙고 60년 이상 붓과 함께 정진하고 계신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0여개 서예 단체의 초대작가를 지낸 화려한 경력마저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글씨와 그림을 창조해낸 것입니다.
정암 선생의 작품이 미국 전 부시 대통령, 영국 토니 블레어 수상, 모로코 국왕 등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5차례 찾아뵈면서 들려주신 덕담만 하더라도 경전을 능가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아울러 60평생 써 온 글씨와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모은 서화첩을 보며 81세 되신 정암 선생의 예술향이 세상 밖에 널리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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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향 가득한 서실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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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병춘 |
| "글씨나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향기가 있는 법이야. 가만히 있어도 대중들에게 퍼지게 되어 있지. 그런데 이 늙은이는 워낙 소심해서 향기가 없는 모양이야. 사향 노루는 바람머리에서 자신의 향을 일부러 뿜어내지 않아. 가만히 있어도 그 향이 퍼지게 되어 있는 법이거든. 80평생 조용히 묵향만 맡고 살았어. 나는 애시당초 사향 노루가 못 되니까 내 향기가 제대로 퍼질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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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송기영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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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병춘 | 팔순 연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한 모습, 청아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먹을 갈며 붓을 들고 계신 정암 송기영 선생님(1925년생, 81세).
이 방 저 방 빼곡하게 들어찬 서화들이 세상 밖 전시를 꿈꾸며 은밀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정암 선생은 가업 4대째 한약업을 계승하며 젊은 시절부터 붓으로 처방전을 쓰게 된 것이 서예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첫째 아들이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정암 선생은 일제 시대 충남 서천 서림소학교 시절(1936년, 당시 11살에 입학) 그림 그리기에도 소질이 있어 소학생 신문 주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며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정암 선생은 20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서예에 돌입했는데, 한의사들에게 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의학서 제중신편(濟衆新編, 1799년-정조 23-에 강명길이 편찬한 의서)을 붓으로 직접 필사하면서 붓글씨 공부를 순전히 개인적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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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암 선생이 24세 때 직접 필사하여 제본한 의학서 <제중신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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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병춘 |
| 할아버지의 가르침 1 - "세인개탁아독청(世人皆濁我獨淸)"이라
'세상 사람이 다 혼탁해도 나 홀로만이라도 맑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바로 정암 선생 할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살면서 앞뒤나 좌우를 돌아다보지 않고 돈벌이를 하면 궁색을 면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돈이라고 하는 것은 정정당당할 때만이 가치가 있는 법이야. 부정한 방법의 결과는 똥만도 못한 것이지. 황금이 아니라 분토와 같은 것이거든.
내가 서화를 해서 돈벌이에 급급했다면 분토나 다름없는 부정한 것에 현혹되었을지도 몰라. 무엇보다도 실력이 중요한 법이야. 의술의 경우도 의학의 실력이 중요하지. 의술이 뛰어나면 그 실력이 퍼지게 되어 있는 법이야. 내 의술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력이라는 것이야."
"깨끗한 삶과 튼튼한 실력이 중요하다. 내가 예를 한 가지 들어볼까? 옛날에 '행림(杏林)'이라고 하는 '살구나무 숲' 이야기가 있어. 청나라때 송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의학 실력이 참으로 뛰어났던 사람이지. 어찌나 병을 잘 고치는지 병자들 발길이 끊이지를 않았어.
그런데 병을 고친 사람들이 송청에게 사례를 해야 하겠는데 절대로 사례를 받는 법이 없었지. 다만 결단코 사례를 하려거든 저기 저 산에 살구나무 한 그루만 심으면 된다고 해서 병을 고친 사람들이 살구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는데,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었는지 그 살구나무가 수풀을 이루어 봄이 되면 별천지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는 거야.
할아버지는 바로 그렇게 세상을 살라고 가르쳐 주셨어. 그래서 내가 24세 때 의서를 베끼며 공부한 것이 바로 <제중신편>이라는 책이야. 서화는 의술과 마찬가지로 실력이 중요한 것이라네.
글씨란 재주를 부리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거든. 마음을 안정시키고 덕성을 기르면서 정신을 수련하는 것이지. 올바른 정신으로 무난한 인간 생활을 위해 빠질 수 없는 것이 서예라고 할 수 있어."
스스로 '재야 서화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정암 선생은 "스승의 서체를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풍토는 문제가 있어. 다만 좋은 글씨는 글씨를 쓴 사람의 향기가 나는 것이야"라고 강조한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2 - '일본놈'들과 한통속이 되지 말라
정암 선생의 할아버지 존함은 송수정(92세로 작고). 충남 서천 군청 밑에서 '송수정 한의원'을 운영했다. 자식에 4형제가 있었는데, "너희들이 공부하면 일본 놈하고 한통속이 되어 민족 정기를 해칠 수 있다. 그러니 지게를 벗삼고 수수, 감자, 메밀을 심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며 충남 보령 미산면 도화담이라고 하는 산간벽지로 아들 3형제를 이주시켰다.
4형제 중 정암 선생의 셋째 큰아버지가 서천, 청주 등지를 오가며 한약상을 운영하다가 6·25 전쟁 통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서천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서천 서림소학교가 생겼다. 정암 선생은 착하게 성장했고, 1학년때부터 1등만 했다. 4학년, 5학년때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지는 법이 없어 '히틀러'라는 별명을 가졌다. 당시 소학교를 졸업하면 왜놈에게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정암 선생은 소학교 졸업을 하지 않았다.
당시 보령군 미산면에 사설 간이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 교사 중에 한 사람이 그만두게 되어 그때 18살인 정암 선생은 간이학교 교사로 발탁될 만큼 유능했다. 그 덕에 소방대라든지 일본 군대에 끌려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항일 정신이 아주 강했다. 일본을 이기려면 정신력이 중요하다며 잠시 최면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정암 선생은 최면술이란 오락에 불과하다고 느꼈고 일본을 이기기에는 터무니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향 근처 아미산에 동굴을 파고 신통력 수련을 했다. 그런데 수련 과정에서 잠을 이길 수가 없어서 군산 옆에 작은 섬에 가서 계속 수련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집에 돌아왔는데 예비소집 영장이 나왔다. 그래서 보령군 남포면에 군대 훈련을 받으러 갔지만 왜놈 총알받이를 피해 저녁에 산으로 도망했다. 산으로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을 먹으면서 지냈다. 비를 맞아 옷에 곰팡이가 났다. 몇 달을 산에서 지내다가 해방이 되어 하산했다. 정암 선생의 나이, 당시 19세였다.
이후 정암 선생은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의서를 공부했다. 한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 동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문교부장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란가는 통에 졸업을 하지 못했다.
정암체 - '힘이 있으면서도 바르게, 예쁘게 쓰자'
학업을 중도 포기한 이후 정암 선생은 본격적으로 서화 공부에 몰입했다. 독학만이 전부였다. 정암 선생은 지방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서화집을 찾아 서울에 가서 구입했다. 백노지나 신문지 이외에 '화선지'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글씨를 쓰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수양이야. 입선, 특선 등 초대작가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아. 그러다 보니 재주만 뒤떨어진 것 같아. 자기 개성을 충분히 발휘해서 그 사람의 향기와 취향과 특징을 지닌 글씨와 그림이 된다면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거지.
결국 글씨를 써 보니까 '체'는 기본을 닦는 데 필요한 것이야. 자신의 개성을 살린 글씨, 서예가로서 특징 있는 자기 '체'를 쓰는 것이 본분이지. 그래서 처음에는 구양순체니 왕희지체니 몇 분의 서체를 쓰다가 우연히 추사체를 보게 되었어. 그후 추사체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책을 사서 연구했지. 추사체가 나의 성정과 통합되었다고나 할까? 힘차고 특색 있고 하여 추사체에 정진하였지."
정암 선생은 10년 정도 추사체를 썼다. 그러나 추사체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정암 선생은 추사가 아니었다. 정암일 뿐이었다. 추사체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면 흉내내는 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암 선생은 나름대로의 글씨를 만들고 싶었다. 정암만의 특징을 지닌 서체를 갖고 싶었다.
"내 글씨를 언뜻 보면 추사체라고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추사 모방체에 불과하지. 보는 사람에 따라 잘 쓴다거나 건방지다거나 할 수도 있지. 그러나 내 글씨는 추사 냄새가 나면서도 정암체를 형성한 것이야."
정암 선생이 추사체를 선호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른 글씨는 다소 여성적이면서 힘이 좀 모자라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그러나 추사체는 힘이 불끈불끈 솟고 느낌이 좋았다.
정암 선생이 볼 때 추사체는 한 마디로 '괴(怪)체'였다. 그만큼 추사체는 독특한 서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추사체는 잘 쓴 것 같은데 보기 싫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정암 선생은 정암만의 '정암체'를 만들었다.
"힘이 있으면서도 바르게, 예쁘게 쓰자!"
이것이 바로 정암체가 추구하는 것이다. 정암 선생은 남을 찾아다니거나 누구를 따로 좋아하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다. 11개 서예 단체의 초대작가를 지냈지만 작가간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이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의 약점일지도 모른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정암 선생은 재야 서예가로서 애로는 결코 없다고 말한다. 개인전 욕심도 없다. "그저 정암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정암은 정암대로의 '정암체'를 추구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향 노루가 지닌 사향 대신에 묵향을 지닌 묵향 선비다.
"책이 곧 내 그림의 스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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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노지'라고 하는 종이에 소학교 시절 연습했던 그림들, 60년이 넘어 색채가 많이 바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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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병춘 |
| 정암 선생이 그림을 그린 것은 소학교 시절부터였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각종 대회마다 상을 받았다. 이후 한중일 유명 화가들의 화첩을 구해 본 후 구상하고 상상하면서 그림에 심취해 정암 선생 나름대로의 그림 세계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 민간에서 용은 복을 가져다주는 복신이지. 우리 인간을 위해 오복을 준다는 것이야. 범은 산중에서 살되 동물 중 가장 날쌔고 힘이 세어 사나이라고 칭하는 동물로서 예부터 산신하고 호랑이가 한몸처럼 서로 보호하며 인간 가정에 삼재나 팔난이 들면 그것을 쫓아서 평안하게 생활하게 하는 동물이지.
그래서 입춘을 맞아 입춘문을 쓸 때 한 쪽에는 범을, 한쪽에는 용을 써서 붙이거든. 그래서 우리 민속 신앙에서는 용은 복을 가져다 주고, 범은 모든 액운을 다 쫓아버리는 동물로 믿고 있지.
범은 맹수이기 때문에 무섭기는 하지만 영물인지라 충신과 효자, 효부 등을 알아보고 언제나 보호해 주었지. 월남 이상재 선생님도 서울과 청양을 왔다갔다 할 때에 범이 보호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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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축삼재팔난도(虎逐三災八難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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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암 송기영 |
| 호축삼재팔난도는 호랑이 주변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어나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상황을 그린 그림이다. 왼쪽 호랑이가 암컷이고 오른쪽 호랑이는 수컷. 가운데 호랑이는 겁을 먹고 바라보는 새끼 호랑이이다.
호축삼재팔난도는 아직 미완이다. 정암 선생은 소나무라든가 바위옷(이끼) 등을 좀더 입혀볼까 생각 중이다. 호랑이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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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 - 그림은 크고 사진 거리가 짧아 전경 중 일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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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암 송기영 |
| 1994년 갑술년에 백두산을 직접 보지 않고 시작하여 1999년 백두산에 직접 다녀온 후 약 5년여만에 완성한 백두산 천지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 쓴 화제를 설명하는 정암 선생의 목청에 힘이 솟는다.
"백두산은 곤륜산으로부터 산맥의 용이 수만 리를 달려 퍼져 나왔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퍼져 이 땅(대한민국)에 백두산을 이루었다. 백두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수천 봉우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천지의 푸른 물은 소화강, 압록강, 두만강으로 흐르나니 큰 산맥은 팔도로 퍼져 나갔다. 그 나머지 가느다란 지류는 여러 갈래가 이리저리 흩어져 수백 개 군소읍을 만들었느니라. 그런데 그 누가 이 나라를 두 동강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간절히 원컨대 어서 빨리 국토가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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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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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암 송기영 |
| 파도 그림은 지난해 11월에 시작하여 금년 1월에 완성한 역작이다. 그림 상단의 화제는 '바다 가운데 첩첩의 돌이 많이 쌓여 있다. 금강석 해변에 수많은 바위가 만들어졌느니라. 마치 눈이 부서진 것처럼 파도가 치고 있다. 천만억 개의 불신이 모여 눈꽃 설경이 이루어진 것 같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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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응도(雙鷹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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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정암 송기영 |
| 독수리 두 마리 사이에 한반도가 그려져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국조가 독수리인데, 그 사이에 한반도가 놓여져 있는 것이다. 두 나라의 옹위 속에서 대한민국 통일의 당위성을 그리고 싶었다는 정암 선생의 저 그림은 자유기고가 이원섭씨(72세)에 의해 미국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전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38선을 만들어 민족적 분열을 가져다 준 외세가 바로 미국과 소련이었어. 그러니 마땅히 통일 책임도 그들이 져야 하는 것이야. 저 그림은 분단의 불행을 통일로 승화하고픈 성정에서 그린 그림이야."
정암 선생은 을유년 새해를 맞아 특별히 <오마이뉴스>를 위해 글씨를 써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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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속보도, 정론편주 - <오마이뉴스>의 책무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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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병춘 |
| 신속보도(迅速報道), 정론편주(正論偏珠) - "언론은 모름지기 신속한 보도가 생명이거든. 그리고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것처럼 편집을 잘 해서 세상 사람을 깨우치고 뉘우치게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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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사달, 정청세명 - 기자, 언론의 책무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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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병춘 |
| 심청사달(心淸事達), 정청세명(政淸世明) - "누구든지 마음을 맑게 하면 그 사람의 일이 쉽게 통달할 수 있어. 부정없이 정치를 깨끗하게 하면 세상이 밝아지는 법이야. '심청사달'은 개인이 해야 할 일이고, '정청세명'은 단체나 국가가 해야 할 일이야. 모든 기자나 언론이 그렇게 깨어났으면 좋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