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동남쪽에 위치한 여주는 임금님께 진상했던 쌀과 도자기, 참외로 이름난 고장이다.
동쪽은 강원도 원주시, 서쪽은 이천시와 광주시, 남쪽은 충북 음성군과 충주시, 북쪽은 양평군과 접하고 있다.
남한강은 여주군을 남동에서 북서로 거쳐 흐른다.
태백산맥, 차령산맥, 광주산맥의 3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주평야가 한강을 끼고 펼쳐져 있다.
역사와 문화의 도시 여주 곳곳에서 국보와 보물, 문화재와 사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이곳에 재실을 짓지 말고 근처에 있는 개울에는 다리를 놓지 말라."
우의정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지관이 이르는 말이었다.
지관이 잡아준 그 명당에 이인손을 모셨다.
그 지관의 말대로 명당발복이 된 탓인지 그 후로도 정승, 판서,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온다.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인손은 슬하에는 이른바 오극자손(五克子孫)을 두었다.
극배(克培), 극감(克堪), 극증(克增), 극돈(克墩), 극균(克均)의 다섯 아들이다.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가 영의정 둘째 극감이 형조판서 셋째 극증이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이 되어 세칭 오군(五君)집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손들이 그렇게 고관대작이 되다보니 아버님의 묘소에 갈때마다 신발을 벗고 물을건너야 했다.
성묘시 비라도 올라치면 비 피할곳이 없는지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다.
지관의 간곡한 부탁을 잊고 형제들이 의논하여 앞 냇가에 다리를 놓았고 제실(祭室)도 큼지막하게 지었다.
2006년 6월 24일 조선일보의 <조용헌 살롱>은 '팔극조선(八克朝廷)'이라는 흥미있는 글을 싣고 있다.
조선 세조에서 예종을 거쳐 성종 대에 이르는 기간에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이 한때 떠돌았었다.
조정 회의에 무려 8명의 ‘극(克)’자 들어가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 형제들이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장·차관 자리를 광주이씨 형제들이 거의 차지했다는 뜻이다.
‘극’자는 집안 항렬이었다. 제일 큰형인 이극배(李克培)는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이극감(李克堪)은 형조판서,
셋째인 이극증(李克增)은 병조판서, 넷째인 이극돈(李克墩)은 병조·호조판서, 다섯째인 이극균(李克均)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여기까지가 ‘오극(五克)’이고, 나머지 삼극(三克)은 사촌형제들이 차지하였다.
사촌형제인 이극규(李克圭)는 이조참판, 이극기(李克基)는 공조참판, 이극견(李克堅)은 좌통례를 지내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8명이다. 이 ‘팔극조정’은 보학(譜學)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광주이씨들의 성세(盛世)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집안은 이후에 벌어지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온 인물이 둘째인 이극감의 후손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 1572)이다.
흔히 ‘동고 대감’으로 불리는 이준경은 인재를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발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원대 이사장인 이종욱씨가 동고 대감의 후손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왔던
이수성씨는 이극견의 후손이다.현재 사법부의 수장인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도 ‘팔극’가운데 한 명인 이극돈의 16대 후손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 득량면 강골(江洞)마을은 16세기 후반부터 광주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광주고검장을 지낸 이용식(李容植) 검사도 같은 ‘용(容)’자 항렬이다.
민주당 5선 의원을 지낸 이중재(李重載) 의원은 용자 다음의 ‘재(載)’자 항렬로서 강골 출신이다.
이중재의 장남인 이종구(李鍾九)는 현재 한나라당 서울 강남갑구 국회의원이고, 둘째인 이종욱(李鍾旭)은 외국어대 학장을 지냈고, 셋째인 이종호(李鍾鎬)는 광주지법 부장판사로 있다. 보학을 연구하다 보면 이처럼 ‘왕대밭에서 왕대 나오고 쑥대밭에서 쑥대 나오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지관 안효례는 예종의 명으로 여주와 이천 쪽으로 세종의 천장 자리를 보러 나섰다.
그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산자락 아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전해에 세운 재실이었다. 그는 그곳을 향해 달렸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
때문에 냇물이 불어 섣불리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낙담해 두리번거리던 그는 아래쪽에서 돌다리를 발견하고 냇물을 건너
재실에서 소낙비를 피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것이었다.
정승을 지낸 분의 묘택으로서 훌륭한 대명당(大明堂)임에는 분명하였으나 그 자리는 군왕(君王)이 들어설 자리이지
정승(政丞)이 들어 갈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연신 탄성을 내지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명당 터는 조선에 다시 없다. 성스러운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묘택(墓宅)으로서는 여기가 최적지다.
그러나 이미 이인손(李仁孫)이 묘를 썻으니 어찌할꼬!"
산도(山圖)를 열심히 그려 궁궐로 돌아와 예종(睿宗)께 복명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지관들을 불러다 놓고 묻는다.
"경 등이 답사한 결과 명당이라 할 만한 곳이 과연 있었던고?"
안효례가 답한다.
"예, 두루 살펴본 결과 몇 군데 능산(陵山) 자리가 될 만한 터는 있었으나 천하 대명당 자리로 손꼽을 만한 곳은
딱 한자리가 있사옵니다. 여흥(驪興) 북쪽에 큰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산의 형세가 떡 벌어져서 주산(主山)과
무덤자리가 분명한 곳으로, 풍수법(風水法)에 이르기를 산이 멈추고 물이 구부러진 곳은 자손이 크게 번성하고
천만세 동안 승업(承業)을 이어간다고 하였는데, 즉 이곳이 그곳으로 사려 되오며, 신이 본 바로는 능을 모실 터가
이보다 나을 곳이 없을 듯합니다. (驪興之北. 有一大洞. 岡巒列勢. 主對燦然. 法曰山頓水曲子孫千億. 此臣等所相.
陵寢所安, 無右於此)."
예종은 그 후로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李克培 = 領議政. 廣陵府院君)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아무리 지존무상의 대왕이지만 사대부의 묘택을 함부로 어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종은 인간적인 호소를 하였다. 말하자면 그 명당 터를 양도해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우회적으로 구사하였던 것이다.
원래 왕은 용상(龍床)에 앉아서 말하는 것이 상례이거늘, 그 옆에 돗자리를 깔아 이극배를 앉게 하고 왕도 용상에서 내려와서
친히 그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극배공(克培公)의 손목을 잡으며,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서 선친의 산소를 그렇게 좋은 대명당에 모시었소? 짐은 삼천리 강산을 갖고 있으되
조부 세종대왕을 편히 쉬게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라에 극심한 한발과 폭풍우로 곤란을 겪는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그저 경들이 한량없이 부럽기만 할 따름이오."
하면서 수차에 걸쳐 애원하다시피 이를 되풀이하니 바로 명당 터를 양보해달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없이 극배공은 묘터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秘記)를 새겨 넣은 글귀가 나왔다.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연(鳶)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겨 모셔라."
장례를 할 때 벌써 이장의 운명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렇게 하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쯤 밖에 떨어졌다. 그곳에 가보니 대명당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늑한 터로써 자손이 번창할 만한 곳이었다.
이리하여 이인손의 묘는 현재의 영릉자리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졌으니, 그곳을 이름 하여 연이 떨어졌다 해서
연주리(延主里: 지금의 新池里)로 불렀다. 그 자리에 이장을 한 후에도 대명당(大明堂)은 못되더라도 아늑한 자리로서
자손이 번창하여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후손들의 제향(祭享)을 받는다. 또한 일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이인손의 묘를 파내려갈 때 신라 말의 풍수사인 도선(道詵)의 비기가 나왔다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상공삼년 권조지지. 단족대왕 영핍지지 = 相公三年 權操之地. 短足大王 永乏之地' 즉, 이곳은 나라의 재상이 3년 동안
임시로 묻혀 있을 곳이지만, 단족대왕은 영구히 쉴 자리라는 뜻이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단족대왕은 세종대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세종대왕은 한쪽다리가 짧아 절룩거렸기에 단족대왕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세종대왕릉은 멀리 한남정맥의 앵자지맥에서 갈라진 독조지맥의 마지막 산봉우리인
북성산(262m) 줄기에 있다. 영릉의 남쪽에 있는 북성산은 여주의 진산(鎭山)임과 동시에 영릉의 주산이다. 고종 때 제작한 지도에는 북성산의 위치에 영릉주산회룡고주(英陵主山 回龍顧主)’라고 표기하였다. 한남정맥에 속한 북성산을 주산으로 출발한 맥은 과협처인 42번 국도를 지나 북쪽의 지맥(지각)을 만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부모산(현무봉)을 기봉하였다.
이어서 부모산을 떠난 맥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출발한 북성산을 바라보니 영릉이라는 회룡고주 대혈지를 맺었다.
이를 회룡고조혈 (回龍顧祖穴)이라고도 하나, 엄격히 말하면 이 자리를 풍수 용어로 회룡고주혈 (回龍顧主穴)이라고 함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능 뒤에서 부모산까지의 맥이 특이하게도 길게 이어졌는데 중간에 이렇다 할 봉이 없으니 처음 출맥한 곳을 부모산으로,
그리고 북성산을 주산으로 보는 고지도의 기록도 바르다 하겠다. 용이 돌아본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회룡고조로 흘러온 맥은 왕후장상 지지와 같은 대혈지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