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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0년 봄호
특별 좌담 : 전태일 열사 타계 50주기
일시 : 2020년 2월 4일, 2월 8일, 3월 6일
장소 : 푸른사상사 서울사무소(한국출판콘텐츠센터 402호)
대담 : 전태삼(전태일 열사 동생),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
사진 : 김이하 시인
맹문재 :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타계한 지 50년이 됩니다. 그리하여 전태삼 선생님을 모시고 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2015년 6월 5일(금) 오후 7시 대구에 있는 광개토병원 6층 강당(서구 내당동)에서 “전태일의 고향과 문학”으로 저와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대구의 시민들이 전태일 열사가 대구 출신이라는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우리의 대담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대담하기 전 낮 동안에 전태일 열사가 살던 집이며 학업의 열의를 불태웠던 청옥고등공민학교 등을 답사하는 행사도 가졌지요. 저는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을 위해 대구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차원에서 전태일 열사를 대구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때 나누었던 대담이 활자로 기록되지 않아 아쉬움이 많지만 고마움도 커요. ‘메르스 사태’로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고희림, 김용락, 김채원, 나문석, 민종덕(전 청계피복노조위원장), 백무산, 용석록(기자), 이창윤 등의 시인 및 시민들이 함께해주셨지요.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려요. 그러면 대담을 시작해볼게요. 전태일 열사가 태어난 때와 장소는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요?
전태삼 : 전태일 형은 1948년 8월 26일 중구 남산동 36번지에서 태어났어요. 우리가 2015년 11월 21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45주기 대구시민문화제 추진위원회’와 함께 중구 남산동 계산오거리에 세운 ‘전태일공원’ 자리가 바로 생가 터예요. 제가 호적등본을 떼어본 주소로 지금의 계산동 18번지예요.
맹문재 : 그때 행사에 권순진, 김용락, 김채원, 노태맹, 민종덕, 이유선, 정용태, 정중규, 조선남 시인 및 시민들 등도 함께했지요.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전태일 열사의 생가 주소지는 현재의 대구시 중구 남산동 50번지(출생 당시 중구 남산동 184)에요. 그런데 2016년 권상구 ‘시간과 공간’ 이사가 이의를 제기했지요. 그 주소가 현 서현교회 서편 골목길 모퉁이라서 맞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2016년 저와 함께 대구에 내려가 전영태 당숙 어른을 모시고 생가 터를 바로잡았잖아요. 그때 전영태 어른은 “아버님(전암회)과 형님(전상수), 그리고 제가 한 집에 살다 결혼한 형님과 형수님(이소선)이 분가를 해 48년 8월 26일에 태일이를 낳았어요. 저기 보이는 삼익피아노 가게(대구시 중구 달구벌대로 2026-1) 근처가 태일이가 태어난 곳입니다.”라고 증언했지요. 그래서 매듭지었던 사항인데, 다시 계산동 18번지라고 하니 혼란스럽네요.
전태삼 : 그때는 내가 확실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계산동 18번지가 맞아요. 삼익피아노 가게가 있는 뒷골목은 이모가 살던 집이었어요. 이소선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가실 때 하룻밤 머물고 가셨지요.
맹문재 : 박진관 영남일보 기자는 “전상수씨(전 열사의 부친) 제적원본에 따르면 전 열사의 출생지가 대구시 중구 남산동 36번지로 돼 있다. 이는 전상수씨가 1951년 7월 18일 출생신고를 함으로써 51년 당시 그가 살던 주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현재 동산약국 건너편이다.”라고 기사에서 보도하고 있어요. 전태일 열사의 출생지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네요.
전태삼 :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쓸 때 어떻게 남산동 50번지라고 했는지 알 수 없어요. 언제 이모님한테 여쭈어봐야겠어요.
맹문재 : 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갈게요. 이 대담에서 제가 기초 자료로 삼고 있는 조영래 변호사가 저술한 『전태일 평전』(이하에서는 평전으로 칭함)이나 민종덕 전(前) 청계피복노조위원장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이 기록한 『어머니의 길』에 따르면 대구에서 옷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부산으로 이사를 가요.(이하에서는 대화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전태일 열사의 존칭을 생략함) 전태일의 나이 3살 때 일입니다. 그 상황에 대해 말씀을 해주시지요.
전태삼 : 아버지가 부산으로 간 것은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때 할아버지가 대구 칠성시장에서 포목점을 하고 있었으므로 가정 형편이 어렵지 않았어요. 할아버지 존함은 전암회입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부산으로 피란시킨 것이었어요.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1946년 이른바 ‘9월 총파업’으로 불리는 파업이 전국에서 일어났지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이 총파업은 철도 부문을 시작으로 교통, 체신, 조선, 전기 등 산별 노조가 가담하지요.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해고 반대, 노동 운동 보장, 투옥 중인 민주 인사 석방 등을 요구했어요. 그 총파업에 아버지도 참가했던 것이지요.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22살이었어요. 아버지는 이듬해 결혼해 24살 때(1948년) 첫아들 전태일을 낳았어요.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지요. 할아버지는 아들 전상수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산으로 피란을 보낸 것이에요. 북한군이 서울을 사흘 만에 함락하자 아들이 총파업에 가담한 사실이 걱정되어 6월 28일 부랴부랴 부산으로 보냈어요.
맹문재 : 부산으로 간 아버지는 자갈치시장 맞춤집에서 일하지만 생활이 어려웠어요. 그 무렵 둘째아들 전태삼이 태어나지요. 아버지는 그 후 미군 부대의 일거리를 얻게 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아요. 어느 날 대구에서 할아버지가 찾아와 아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안쓰럽게 여겨 부산진역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주고 전태일 손자를 데려가지요. 그 후 아버지는 일에 매달리고, 전태일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지요.
전태삼 : 나는 1950년 7월 15일 자갈치시장 생선 구루마(수레)에서 태어나요. 아줌마들이 치마를 둘러 돌보아주었다고 해요. 아버지가 낮에 자갈치시장 맞춤집에서 일할 때 어머니는 어디 가 있을 때가 없으니 나를 업고 형을 데리고 영도다리 방파제를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시장의 공터에 가서 잠을 잤어요. 그때 영도다리에는 꼬두밥(고두밥)이 죽 널려 있었는데, 어머니가 손으로 뭉쳐 우리에게 쥐어주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영도다리 방파제 아래 해녀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아주머니가 큰 함지박에 멍게, 성게 등을 따서 어머니에게 담아주시던 모습도 생각나네요. 매일 어머니가 영도다리를 다니니까 서로 낯이 익어 선물로 준 것이겠지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셔서 그 상황을 보고 부산진역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주신 것이에요. 그곳에서 남동생 태이가 태어났고, 1955년 5월 5일 여동생 순옥이도 태어났어요. 두 살 터울이에요. 순옥이가 태어나자 외할머니가 나를 칠곡군 지천면 닥실로 데려갔어요. 데려간 집은 구 씨네 집이었어요. 그의 부인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겨 외할머니가 돌봐주고 있었어요. 구 씨네와 외할머니는 친척 관계였어요. 구 씨가 집에 올 때는 지프차에 건빵을 싣고 왔는데, 동네 사람들이 받으려고 줄을 서 있었어요. 그러면 외할머니가 나누어주었지요. 외삼촌이 썰매를 만들어 집 앞의 언 웅덩이에서 태워주던 모습도 생각나네요. 그러다가 외삼촌이 나를 부산으로 데려다주었어요. 아버지는 그곳에서 흰 천에 꽃무늬를 수놓은 보자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았어요. 그리고 고깔모자나 바지 등을 만들어 팔았어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제품을 뜯어 옷을 만들어 판 것이지요. 그런데 장마가 들어 쌓아둔 사지옷감이 다 삭고 말았어요. 그곳에 살 때 샘물을 향해 집들의 대문이 나 있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맹문재 : 그리하여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지요. 평전에 따르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고 되어 있네요. 그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전태삼 : 순옥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 서울에 올라왔어요.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실망했다기보다는 기술이 있으니 서울에 가면 취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요. 처음 올라와 지낸 곳은 염천교 철길 옆이었어요. 가마니를 거적으로 깔고 지냈어요.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남의 집 처마 밑 골목길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갔어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밤낮으로 일을 해 지금의 회현역 자리에 판잣집 마련했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는 태일 형과 나와 함께 팥죽을 끓여 팔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던 곳에 불이 났어요. 양동 지역을 철거하는 일이 더디게 진행되자 아예 불을 지른 것이지요. 불이 꺼지자 트럭들이 들이닥치고 빡빡머리를 한 사람들이 천막집들을 오함마(대형 망치)로 두드려 부수었어요. 우리는 화재민 임시 수용소로 실려 갔어요. 돈암동을 지나 아리랑 고개를 넘어 미아리 공동묘지 근처였어요. 그곳에서 아버지는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일자리 찾으러 다녔고, 어머니와 태일이 형과 나는 볏짚을 얻어다가 흙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붕을 루핑으로 덮어놓고 있었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어요. 아버지가 일한 집에서 돈을 받아 가지고 밤길을 걸어오다가 칼을 든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이에요. 그곳이 임시 수용소이다보니 사람들이 매일 싸울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대로 보따리를 싸서 남대문 쪽으로 옮겼어요. 지금의 힐튼호텔 자리인 남산광장에 축대가 있었는데 거기다가 각목을 대로 가마니를 깔고 천막을 쳤어요. 수챗물이 흐르는 위에 천막집을 만든 것이지요. 아버지는 거기에서 일하러 다니셨어요. 그러다가 도동 동네 한가운데로 이사를 가요. 거기에서 순덕 동생이 태어나요.
맹문재 : 평전에는 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 되어 있는데, 순옥이 1955년에 태어나 걸음을 아장아장 걸을 때 서울로 올라왔다고 하니 바로잡아야겠네요. 천막집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전태삼 : 아버지의 기술이 좋아 일이 잘 되었어요. 그래서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대도상가 2층에 가게를 장만해 미싱을 열 대 놓을 정도가 되었어요. 그러다가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배문중고등학교의 체육복을 단체로 주문 받았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사방에서 자금을 구해 옷을 만들어 납품했어요. 그런데 4·19혁명이 나면서 혼란한 틈을 타 브로커가 학교에서 받는 옷값을 가지고 도망을 친 것이에요. 그래서 원단집이며 부속집에서 몰려와 몸만 나올 수 있었어요.
남대문교회 담장 아래에의 판잣집으로 갔어요. 그러다가 대도상가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이태원 사격장과 미군부대 사이에 살고 있어 그 집 헛간에 가 살았어요. 서 씨네 집이었는데,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무척 싫어했어요. 나와 태일이 형은 담배꽁초를 주워 팔기도 하고 그 할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무척 좋아했어요. 그리고 미군부대에 시간 맞추어 가서 음식 찌꺼기를 양푼에 퍼와 꿀꿀이죽을 만들어 먹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업 실패로 심한 충격을 받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정신이상자가 되사시피 했어요. 저녁에 해가 질 때가 되면 미군부대며 사격장 근처를 막 돌아다니는데, 워낙 힘이 세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칠곡 닥실에 내려가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왔어요. 외할머니가 두 달 정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병을 고쳐주었어요. 그때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귀신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 부처님보다 큰 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세요. 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서 씨네 집 며느리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나 다시 대도상가에서 일했던 정 씨네 집과 한 씨네 집이 있는 용두동으로 옮겨요. 두 집 사이에 하수구 물이 내려갔는데 그 위에 각목을 대고 가마니를 깔고 해서 천막집을 만든 것이지요. 거기에서 태일이 형과 내가 삼발이 장사를 시작했어요.
맹문재 : 참으로 딱하게 되었네요. 평전에 따르면 8살이던 전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으로 편입해 처음으로 짧은 학교생활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마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네요.
전태삼 : 그때가 형의 나이 12살 때이지요. 남대문교회에서 운영하는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다니다가 남대문국민학교에 편입시험을 봐 합격했어요. 2학년이 아니라 3학년이에요.
맹문재 : 평전의 기록이 다소 다르네요. 나중에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네요. 삼발이 장사는 어떠했는지요?
전태삼 : 솔, 조리, 방비, 적쇠(석쇠) 등을 위탁 판매하는 곳이 청계천 영미다리(영도교) 밑 검정다리 가는 길에 있었어요. 물건을 가지고 와서 본전은 그곳에 내고 남는 이문을 챙기는 장사였어요. 그렇게 해서 밀가루도 사고 19공탄도 샀어요.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어 미수금이 좀 있었어요. 그러다가 태일이 형이 삼발이를 착안했어요. 박스 테두리에 쇠가 둘러진 것이 동대문시장 고물상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을 사서 벤치로 구부려 삼발이를 만들었어요. 별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잘 팔렸어요. 그렇지만 매일 재료를 구할 수 없어 삼발이를 만들어 파는데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태일이 형은 미수금이 늘어나자 포기하고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가출했어요. 위탁 판매소 주인이 몸이 아픈 어머니한테 미수금을 받으러 올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평전에 보면 전태일 열사는 대구로 가지요. 대구 큰집에서는 놀러온 줄 알고 며칠 묵게 한 다음 차비를 주고 되돌려 보내지요. 그런데 달리 갈 데가 없어 다시 서울로 올라와요. 그렇지만 집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남대문시장 일대를 다니며 구두닦이를 해요. 그러나 구두를 닦아도 한 몸 추스르기가 힘들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지요. 며칠을 굶어 영도다리 근처에서 떠내려 오는 양배추를 보고 건져 먹으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전태일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마음먹고 기차를 탔는데, 영천까지 가는 기차여서 할 수 없이 대구의 외갓집으로 가요. 거기에서 집안 식구들이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왔다는 얘기를 듣게 되지요.
전태삼 : 형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부산의 집이며 영도다리를 돌아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외할머니가 태일이 형을 데리고 집으로 왔어요. 외할머니가 효성여고와 명덕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배추밭길로 형을 데리고 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나는 형이 가출한 뒤 성동공고와 안암동 길 골목을 바라보며 많이 기다렸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해군 삼촌이 와서 우리 식구를 대구로 데려갔어요. 전홍만 삼촌을 해군 삼촌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해군을 막 제대하고 온 것 같아요. 아버지는 삼촌이 사준 미싱으로 일을 했어요. 부산에서 떠돌던 태일이 형이 돌아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지요. 그리고 공부를 하고 싶어 1963년(15세) 청옥고등공민학교 야간부에 입학해요. 가정 사정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였지요. 학교에서 실장이 되었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 열린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내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태일에게 학교에 가지 말고 집에서 일을 하라고 했어요. 얼른 집이라도 마련하려면 일손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여섯 식구가 누우면 꽉 찬 집에서 아버지는 말대가리 미싱(슈퍼 미싱)을 돌리고, 형은 딸딸이 미싱(15종 미싱)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태일이 형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었어요. 나는 그 무렵 내당동 주차장 옆에 있는 동광교회에 가서 한글 배웠어요.
맹문재 : 전태일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서울에서의 고학을 결심하고 가출하지요. 평전에 보면 아버지가 만든 잠바 8장을 들고 전태삼 동생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전태삼 : 서울에 도착해 동대문시장에 가서 잠바를 팔았는데 방을 얻을 수 없는 액수였지요. 그래서 사과 궤짝 12개를 사서 개집 같은 집을 지어 파고다공원 뒤 낙원시장 담 옆에서 잤습니다. 낮에는 신문을 파고 구두를 닦으며 버티었어요. 나도 껌과 성냥, 신문, 휴지 등을 다방에 다니며 팔았어요. 천규덕 레슬링 선수가 다방에서 몇 번 사주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그와 같은 생활로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욱이 내가 열이 나고 아프니까 형이 겁을 먹었어요. 태이 동생이 도동에 살 때 세상을 떠 남산 국립도서관 뒤쪽 계곡 언덕에 아버지가 묻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떠올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대구행 야간열차를 탔습니다. 평전에는 사흘 만에 낙향했다고 되어 있는데, 한 달은 못 되었지만 꽤 버티었어요. 대구에 도착했지만 집에 차마 들어갈 수 없어 배추밭과 무밭 고랑에 있었어요. 어머니가 우리를 보고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맹문재 : 집에 돌아온 뒤의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전태삼 : 아들 둘이 집을 가출하자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친척들이 알게 되어 자식들을 잘못 키웠다는 말을 듣고 속상하고 창피하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엄마한테 화풀이를 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않았어요.
맹문재 : 그래서 어머니가 식모살이를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지요. 평전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1964년 설날 아침에 서울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네요.
전태삼 : 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겠어요. 그해 겨울 아버지가 집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명시장 안에 있는 허 씨네 집 헛간으로 데려갔어요. 그래서 추우니까 가마니 깔고 비닐로 둘렀어요. 아버지는 우리를 데려다놓고 일을 보러 나가셨어요. 어머니는 그곳에서 서울로 가셨어요. 이모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셨어요.
맹문재 : 대명 시장 안에 있는 전홍관 작은아버지에서 밥을 얻어먹었지요.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964년 정월 대보름날 작은집에 가서 오곡밥을 얻어먹으면서 틈을 보아 작은아버지의 손목시계를 훔쳐서 팔아 100원을 장만해 막대동생 순덕이를 업고 서울로 떠난 어머니를 찾아 나서지요. 막내 동생을 데리고 간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한테 데려달라고 울면서 보채었기 때문이에요. 그 상황을 좀 더 들려주시길 부탁해요.
전태삼 : 태일이 형과 나는 앞산 쪽에 공장들이 있었는데, 그 공장에서 버리는 숯가루를 양푼에 담아가지고 와서 풍구를 돌려 불을 피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해가 질 무렵 숯가루를 피워놓고 불을 쬐다가 큰일 날 뻔 했어요. 눈을 떠보니 허 씨네 마당에 누워 있는 것이었어요. 추운 바닥에 누워 있자니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요. 허 씨 아주머니가 우리를 마당에 내놓고 동치미 국물을 떠먹이고 있었어요. 비닐을 쳐 통풍이 안 되는 곳에서 숯가루 불을 쬐다가 가스에 취한 것이지요. 아주머니는 우리를 집의 아랫목에다 들여다 놓고 노란 양푼 그릇에 수제비를 끓여 먹였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한 열흘이 지났을까요. 허 씨 아저씨가 연기를 모으려고 마당에 볏단을 세워놓고 가운데에는 허 씨 아주머니를 세워 놓은 채 불을 피운 연기를 몸에다 쓰는 것이었어요. 아주머니는 웃옷을 다 벗은 상태였는데 열꽃이 몸에 나 있어 아마 연기를 몸에 쓸어 치료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다음날 허 씨 아줌마가 돌아가셨어요. 상여가 마당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태일이 형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를 살려놓고 아줌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컸겠지요. 그래서 형은 순덕이를 업고 어머니를 찾으러 서울로 간 것이에요. 형이 떠나면서 나 보고 엄마를 찾으면 데리고 올 테니 순옥이를 잘 보고 있으라고 했어요.
맹문재 : 전태일 형이 서울로 떠난 다음 전태삼 동생은 어떻게 지냈는지요?
전태삼 : 허 씨 아주머니가 세상을 뜨고, 태일이 형이 서울로 가버리니 아버지가 마음이 많이 동했던가 봐요. 그래서 나하고 순옥이를 칠성시장 옆 자갈 마당의 빈집으로 데려갔어요. 철길 바로 옆이었어요. 거기에 아버지는 재단 판을 놓고 맞춤복 집에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옷 주문을 받으러 다녔어요. 집에는 미싱이 없어 재단만 했어요. 나하고 순옥이는 재단판 위에서 잠을 잤어요. 그곳에 있을 때 대구역에서 기적 소리가 들리면 형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때는 동대구역이 생기지 않았지요. 이전에 형이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다닐 수 없자 고학을 하겠다고 서울로 가출한 적이 있잖아요. 그 경험이 있어 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날 갑자기 대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어요. 1964년 겨울이 되겠네요. 순옥이를 남겨두고 혼자 올라갔어요.
서울역에 내려 남대문시장으로 가 형하고 다니던 골목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자유극장 앞에 있는 구루마(수레) 보관소에 가서 빈 구루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잤어요. 구루마꾼들이 낮에 일하고 밤에 보관하던 곳이 있었어요. 얼마나 추운지 몸이 굳을 지경이었어요. 거기에서 자고 나와 남산동으로 회현동으로 도동으로 밥을 얻어먹으려고 다녔어요. 깡통을 들고 간 집은 다시 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남대문 과일도매상 옆에 땅콩 굽는 가게가 있었는데, 저녁에는 그곳의 화덕으로 가서 잠을 잤어요. 낮에 땅콩을 구운 열기가 있어 밤에는 따뜻했지요. 나이든 사람들이 차지해 나는 그 옆자리에 끼어 잤어요. 남대문 과일도매상에서는 썩은 과일은 팔 수 없었기 때문에 버려요. 어느 날 그것을 주워 손톱으로 도려내고 먹고 있는데 형이 구두 통을 메고 지나다가 본 것이에요. 홍태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어요. 남대문시장이 떠나가도록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때가 초봄이었어요.
맹문재 :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어렸을 때 홍태라고 불렸다지요. 먼저 서울에 올라온 전태일의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전태삼 : 서울에 올라온 태일이 형은 도동 힐튼호텔 쪽으로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곳에 어머니의 외가 친척이 되는 구 씨네 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순덕이를 데리고 갔는데, 어머니가 그쪽으로 오지 않은 것이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순덕이를 고아원에 보낸 것이에요. 도동 쪽은 태일이 형에게 익숙한 장소이기도 했어요.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태일이 형은 남대문교회에서 운영하는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다니다가 시험을 쳐 남대문국민학교로 전학하잖아요. 그때는 아버지가 남대문시장 안에 있던 대도백화점 2층에서 가게를 장만할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았어요. 그렇지만 학교 체육복을 단체로 주문받아 납품까지 했는데 브로커가 옷값을 받아 도망가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지요. 태일이 형도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지요. 서울에 올라온 형은 어느 날 어머니의 옛 친구인 상필이네 집에 갔다가 어머니가 서울에 있다는 얘기를 들어요. 그래서 형은 어머니를 기다리며 상필이네 집 마루 밑에서 살고 있었어요.
맹문재 : 평전에는 상률이네 집으로 나오는데, 상필이는 누구인지요? 그리고 전태삼 동생은 남대문시장에서 전태일 형을 만난 뒤 어떻게 지냈는지요?
전태삼 : 상률이는 상필의 형이에요. 상필이와 함께 어울렸는데, 나중에 화재민들이 옮겨간 도봉동 천막에 살 때 물에 빠져 죽어요. 깨어나길 기다리며 사흘이나 천막에 놓아두었던 장면이 눈에 선하네요. 상률이는 우리보다 나이가 좀 많아 어울리지 않았어요.
태일이 형은 남대문시장에서 나를 만난 뒤 상필이네 집 마루 밑에 데려갔어요. 그 뒤 나는 형을 따라 구두 통을 메고 서울의 거리를 헤매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상필이네 집으로 왔어요. 서울에 올라온 어머니는 동대문 천일백화점 근처의 ‘도원’이라고 하는 요릿집의 주방 식모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일이 힘든데다가 정신적으로 불안해 일한 지 닷새째 되는 날부터 하혈을 시작했어요. 마침내 요릿집 주인 모르게 병원에 가서 열흘 정도 치료를 받고 돌아와 일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하혈을 했어요. 주인이 알게 되어 쫓겨나게 되었지요. 그래서 상필이네 집으로 몸조리를 하러 온 것이에요. 그때 상필이 어머니의 소개로 나는 어떤 무허가 하숙집에서 심부름을 해주며 밥을 얻어먹게 되어요. 심부름이라는 것은 산 아래에까지 내려가 물지게로 물을 길어 올리는 일과 온갖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상필이네 단칸방에서 같이 있기가 미안해 마루 밑에 가마니를 깔고 태일이 형과 나와 함께 잠을 잤어요. 어머니는 서울역 뒤 중앙시장 채소전에 가 화물차가 짐을 부려놓고 간 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우거지를 주워서 팔았고, 태일이 형은 낮에는 평화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서 시다나 미싱보조를 하고 밤에는 구두를 닦고 껌과 휴지를 팔러 다녔어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천막을 하나 사서 남산 중턱에 골격만 세워놓고 공사가 중단된 판자촌 아파트 형태의 건물에 들어가 살았어요. 집 없는 사람들이 합판으로 칸막이를 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었어요. 그곳이 남산동 50번지예요.
맹문재 : 그리고 얼마 있다가 가족을 만나게 되지요. 아버지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요?
전태삼 : 어느 날 태일이 형이 중부시장에 수제비를 사 먹으로 간 식당에서 순옥이를 만나게 되어요. 아버지가 순옥이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와 중부시장에서 재단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다시는 술을 안 먹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하고 가족이 함께 살아요. 천호동 보육원에 가 있던 순덕이도 데리고 왔어요.
맹문재 :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되어 정말 기쁘네요. 그 다음부터의 생활이 어떠했는지요?
전태삼 : 1966년 1월 18일 남산동 50번지의 판자촌 아파트에 화재가 나요. 누가 불을 질러 480가구가 전소되지요. 아마도 재개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에요. 우리집은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서 옷이고 신발이고 다 내버려두고 무조건 달려 나왔어요. 나오고 난 뒤 한 20초 정도 되었을까요, 판자촌 아파트가 폭삭 무너져 내렸어요. 그리하여 화재민들은 남산국민학교에 마련된 임시 수용소로 들어갔어요. 적십자사가 마련해주었어요. 그 다음에 도봉동 102부대인지, 군인들 부대가 있는 백사장으로 옮겨요. 저녁 무렵에 실려가 내리니 군용 천막을 쳐놓았는데 가마니 두 장씩을 펴놓고 한 세대씩 구분해 놓았어요. 그런데 그날 밤 강바람에 백사장의 천막이 다 쓰러졌어요. 그래서 우산대를 붙들 듯이 지지대를 붙들고 바람을 피했어요. 그 뒤에도 철거민들의 천막이 계속 들어찼어요. 주위에는 삼양라면, 미원공장, 삼양모방, 삼풍제지 등이 있었어요. 태일이 형과 나는 그곳에서 중앙시장의 형제사에 일하러 다녔어요. 형은 남산동 50번지 살 때 평화시장에 있는 삼일사의 시다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는 달달 봉사였어요. 남산국민학교의 임시 수용소에서도 앞을 못 보았어요. 이전에 걸린 백내장과 녹내장이 남산동 50번지의 판자촌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길에 더 심해졌던 것 같아요. 영양실조와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했겠지요. 그와 같은 상황인데 남산동 50번지의 쌀집 할머니가 도봉동 천막에 와서 앞을 못 보는 어먼니를 돌봐주셨어요. 그 분은 철원대한수도원에 다니시던 분이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교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창동 208번지로 옮겼을 때 천막교회도 생기는데, 어머니가 그곳에 정성스레 다녔어요.
그 백사장에 있던 철거민 내지 화재민들이 신림동, 봉천동, 상계동, 창동, 도봉동 등 다섯 군데로 분리되어 옮겨졌어요. 우리는 창동 208번지로 천막집을 지어 옮겼어요. 남산동 화재민촌이라는 이름을 지어가지고 들어갔어요. 연산군 묘지가 보이는 곳이었어요. 거기에서 식구들은 정부에서 시키는 취로 사업을 다녔어요. 그 대가로 밀가루를 받았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일거리를 찾아 나섰고, 어머니하고 태일이 형하고 나는 벽돌을 만들어 담장을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태일이 형은 평화시장의 통일사에 가서 미싱을 하고 나는 시다로 일해요. 형은 다시 재단을 배워 평화시장의 한미사로 자리를 옮겨요. 나는 역시 보조 일을 했어요. 그때는 재단사가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옷을 한 벌 만들면 얼마를 받는 ‘갯공’이었어요. 그러니 일거리가 없으면 돈도 벌 수 없었지요. 또 재단사나 미싱사가 시다를 고용해서 일했기 때문에 재단사나 미싱사가 시다의 노임을 주는 구조였어요. 형이 재단사가 된 것은 임금 문제를 비롯해 업주들의 부당함에 시다들의 사정을 잘 반영해주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맹문재 : 전태일 열사가 시다(시다바리, したばり. 보조원)들에게 풀빵을 사준 곳이 평화시장 2층에 있는 한미사였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해고당하는데 상황이 어떠했는지요?
전태삼 : 그때는 재단사가 모든 일을 책임졌어요. 그래서 형은 시다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시다들이 다 못한 일을 남아서 해주었어요. 장사가 잘되는 시기여서 밤에 만든 옷들이 아침이면 모두 팔릴 정도로 물건이 딸렸어요. 그래서 명절이나 대목이 되면 바쁘기 때문에 퇴근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어요. ‘타이밍’이라는 약을 먹고 졸음을 참으며 일했지요. 그런데 태일이 형은 시다들이 차를 탈 수 있게 퇴근 시간을 지켜주고 편리를 봐주니 업주가 좋아할 리 없었지요.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먹지 않고 담장 밑에 가 햇볕을 쬐는 여공들이 있었어요. 형이 그 사정을 알고 풀빵을 사준 것이지요. 버스를 타지 않고 고려대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창동까지 걸어 퇴근했어요. 또한 화장실 문제가 아주 심각했어요. 화장실 수가 적었기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더욱이 여자 화장실에서는 비명이 들리기도 했는데 회충이 몸에서 빠지지 않아서였어요. 그러면 밖에 있던 여성이 들어가 도와주고 그랬지요. 형하고 걸어서 퇴근할 때까지 어머니는 집에서 기다렸어요. 미리 수제비를 끓이면 불어터지니 시간을 맞추려고 포도나무가 있는 언덕까지 나와서 기다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면 19공탄에 노란 냄비를 올려놓고 수제비를 끓여주셨지요. 형이 해고당하는 상황을 보지는 못했어요. 아마도 업주가 형을 몰래 불러 그만 나오라고 했겠지요. 하루는 옷집에 안 나가는 거예요. 며칠 있다가 나간다고 하면서 나 보고 안 나가도 된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형이 해고당한 것을 눈치 챘지요.
맹문재 : 전태일이 해고당한 시기는 평전을 보니 1967년 연말 즈음 되네요. 그런데 이 해고당한 일은 매우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해고당하고 나서 근로기준법에 더욱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그 무렵 근로기준법을 아버지한테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전태삼 : 그 무렵 천막교회의 종을 우리 집에 두고 쳤어요. 1968년 박현숙 장로의 기념교회인 창현교회가 되지요. 김동환 목사님도 함께했어요. 지금의 갈릴리교회에요. 우리집 천막과 교회 천막이 나란히 있었어요. 어머니와 형과 내가 돌아가면서 새벽 4시 30분부터 시간을 맞추어 쳤어요. 천막집에서 종을 친 것은 종소리를 울린다는 의미이므로 어머니의 생애에서 굉장히 중요해요. 더욱이 어머니는 천막교회에 다니면서 앞을 보게 되어요.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고 했어요. 어머니는 그와 같은 일로 세상의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생활을 하면서 형이 아버지께 근로기준법에 대해 여쭈어보았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1946년 대구 총파업에 가담했던 얘기들을 들려주었어요. 아버지는 노동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들려줘 아들이 노동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막으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구 총파업의 상황을 자세하게 들려주었어요.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어요. 아버지는 그 옛날의 열기가 되살아난 것 같았어요. 그때 동네의 고물상 언덕 밑에 국수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아들인 이광식이라는 대학생이 있었어요. 형은 근로기준법 책의 한자를 물어보려고 그 집에 자주 다녔어요. 그 집에 가면 아주머니가 개떡이나 고구마나 감자를 꼭 내왔어요. 그래서 형을 따라가서 얻어먹은 기억이 나네요.
맹문재 : 자료를 찾아보니 창현교회란 이름이 창동의 ‘창’ 자와 박현숙 장로의 ‘현’ 자를 따서 지은 것이네요. 이때부터 전태일은 노동운동에 좀 더 구체적으로 행동을 시작하지요. 평전에 따르면 1968년 봄부터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인 ‘김개남’과 어울려요. 그리고 그해 말경 김개남에게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재단사들의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해요. 그 뒤 은하수다방 등에서 몇 차례 회합을 하고 1969년 6월 말경 ‘바보회’를 창립해요. 전태일이 설명한 바보회의 의미는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업주들에게 부당하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바른 소리 한 번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전태삼 :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형의 친구들이 몇씩 왔다 갔다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더 자주 왔어요. 어머니가 끓여주신 수제비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형은 들키기 않으려고 바보회 명함을 도봉산 바위틈에 끼워 놓았어요. 그 당시에도 김개남 얘기가 있었는데 누구인지는 몰라요. 김영문 형은 알고 있을 것 같아요.
맹문재 : 전태일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전태삼 동생을 의도적으로 배제시킨 것으로 보여요.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동생에게 피해가 갈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이네요.
전태삼 : 형이 하는 일에 내가 가까이 갈 수 없었어요. 평화시장에 있는 은하수다방에서 형이 친구들과 만날 때도 나를 의도적으로 빼돌렸어요. 나는 그때 평화시장에 있는 헌책방 아래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어요.
맹문재 : 그렇군요. 따라서 그 무렵의 증언을 듣기는 어렵겠네요. 그러면 시간을 건너뛰어서 전태일이 분신한 이후의 상황을 듣도록 할게요. 듣기 전에 전상수 아버지께서 이 무렵 세상을 뜨시는데 그 상황을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전태삼 : 아버지는 1969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나요. 태일이 형과 나는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수제를 끓여 놓고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께 저녁을 드시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깨웠는데, 일어나시다가 아이구 머리야 하고는 뒤로 넘어지셨어요.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지요. 어머니가 가위로 아버지의 귀밑을 자르니 피가 솟아올랐어요. 얼른 의사를 모셔오라고 해 창동역 가는 길에 있는 의원에 갔지만 사람이 없었어요. 그 옆에 있는 노해파출소에 가 부탁을 했지만 병원이 있는 쌍문동까지 나가야 하는데 혼자 파출소를 지키고 있으니 도와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운명하셨어요.
아버지는 삼양모방에 들어가 수선도 하고 맞춤복을 만들다가 기술이 좋아 사장에게 눈에 띄었어요. 사장과 같은 종씨였어요. 그래서 삼양모방 직원들 단체복을 만드는 일을 주문받아 집에서 15일부터 만들려고 준비를 다해놓았어요. 흙을 돋우고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물고랑도 만들어 놓았어요. 그런데 뜻밖에 돌아가신 것이에요. 수지에 있는 아미센터를 세우는데 삼양모방이 많이 도왔어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지극 정성으로 새벽 기도를 다니니까 나중에 함께 다니셨어요.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어요. 그 기간이 40일 정도 되어요. 태일이 형을 비롯해 자식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일은 태일이 형에게 노동 문제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문제에 큰 충격을 주었어요. 아버지의 장지를 의정부 교도소 근처에 마련했어요. 나중에 그곳이 전부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화장을 했어요.
맹문재 : 참으로 안타깝게 돌아가셨네요. 그러면 이야기를 다시 옮겨 전태일이 분신한 날 전태삼 동생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요?
전태삼 : 나는 한미사에서 형이 해고된 뒤부터 평화시장의 덕천상가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어요.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무렵(1970년 4월) 형이 삼각산으로 올라갔어요. 그곳에 임마뉴엘 수도원이 있었는데 신축공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형은 그곳에서 일을 하며 밥을 얻어먹었어요. 한 5개월 정도 되었지요. 형은 그곳에서 자신의 분신을 결단했다고 평전에 나와 있지요. 형은 가끔씩 효자동 구기터널로 리어카를 끌고 내려와 동대문 시장에 가서 생산 궤짝을 싣고 올라가면서 나한테 들러 집안 사정을 물어보곤 했어요. 그때마다 나는 형하고 다투었어요. 일하라고, 일을 해야 엄마와 동생들을 살릴 수 있지 않느냐고 한 것이지요. 어느 날은 형이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나서 내가 죄수 같다고 불평을 말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나는 1970년 초 배 권사의 권유로 김천에 있는 용문산에 고학을 하러 떠났어요. 깊은 산속이었어요. 사감이 정신부터 고쳐야 한다고 훈련을 강하게 시켰어요. 저녁에 성경하고 한문 구절을 외우라고 가르쳤어요. 그러다가 11월 13일 형의 분신 일이 실린 석간신문을 같이 있던 친구가 가지고 왔어요. 나는 형의 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그 다음날 대구 큰집에 갔다가 서울 성모병원으로 올라갔어요.
맹문재 : 충격이 아주 컸겠네요. 장례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전태삼 : 도착해서 보니 명동성당 성모병원 영안실 탁자 위에 형이 쓰던 노트와 방명록이 있었고, 동네의 집사들, 권사들, 이웃집 아주머니, 엄마가 빈소를 지키고 있었어요. 그리고 15일 저녁 어머니하고 내가 지금 전태일기념관 자리에 있던 센트리호텔로 납치되었어요. 박정희 정권이 선거를 앞두고 있었으니까 신경 쓰이는 일을 얼른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이겠지요. 들어가니까 목사님 두 분이 와 있었고, 중앙정보부에서 나와 있었어요. 목사님이 장례비로 1억인가를 주고 7천만 원짜리 통장을 만들어준다고 했어요. 또 서울극장 4층 건물에 있는 국밥집을 어머니 명의로 바꾸는 절차를 진행한다고 했어요.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준다는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목사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아들을 팔아서 어떻게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겠느냐고 동의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나는 아들을 팔지 않고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들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했어요. 아들의 뜻을 이루기 전에는 다른 어떤 이야기도 귀에 안 들어오니 없던 것으로 하자고 했어요. 목사님이 다시 강압적으로 얘기하자 어머니는 아들 장례식 걱정을 왜 당신들이 하느냐며 화를 내고 맨발로 나왔어요. 어머니는 성묘병원 영안실로 가면서 길가에까지 서 있던 조화를 걷어차면서 이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화를 내었어요. 빈소에 가니 이승택 노동청장이 와 있었어요. 그 옆에는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세 건물을 가리키는 삼동(三棟)에서 보낸 조의금이 보자기에 싸 있었어요. 어머니는 그 보자기를 풀어 돈을 내다 뿌리며 아들의 여덟 가지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는 것을 각서로 써 4대 일간지에 보도해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리고 장례식과 관련해 잡혀간 사람들을 다 내놓으라고 했어요. 센트리호텔에 납치되기 전에 장기표 학생에게 학생장으로 할 것을 위임한다고 도장을 찍어주었어요. 그래서 혜화동 서울대 문리대에 분향소가 차려지고 몇 백 명의 학생들이 상복을 입었어요. 그렇게 해서 평화시장에 7평 되는 노동조합 사무실을 마련했어요. 평화시장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합의를 한 뒤 합동장례식을 치렀어요. 19일에 마석 모란공원으로 갔어요. 그 상황의 이야기는 너무 많아 다 할 수가 없네요. 어머니는 형이 분신하기 이전에 닷새 동안 단식기도를 했어요. 그래서 형의 일을 예상하고 당당하게 감당한 것이에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하네요. 언제 다시 기회를 만들어 듣도록 할게요. 대구에서는 작년에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설립되어 전태일기념관 건립 운동 등 많은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태삼 선생님과 제가 발을 뗀 일이 활성화되고 있어 참으로 감사해요. 전태삼 선생님과 저는 2017년 8월 24일(목)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 부산에서 만나다”라는 주제로 전태일 열사의 어린 시절 흔적을 찾기 위해 부산을 다녀온 적도 있지요. 그날 부산일보사 정문 앞에서 출발해 전태일 열사가 살던 부산진역 앞 수정동 일대, 전태일 열사의 삶의 터전이었던 국제시장, 배가 고파 양배추를 건지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던 영도다리 근처 등을 답사했지요. 답사를 마치고 오후 6시 ‘스페이스 닻 갤러리 3층’에서 전태삼 선생님과 제가 “전태일 열사의 어린 시절을 듣다”라는 대담을 가졌고 시인들이 시 낭송을 했지요. 그날 함께했던 김남영, 김성배, 김요아킴, 박금란, 박이훈, 박형준, 서정원, 송유미, 유지소, 이영숙, 이정모, 전다형, 전비담, 채수옥 등의 문인들, 그리고 부산 시민들께도 감사함을 전해요.
약력
■ 전태삼
1950년 부산 출생. 전태일 열사 동생.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있음. 전태일문학상 운영위원, 안양대학교 교수.
<대담 사진 설명>
1∼3번 : 대담 진행 사진으로 적당히 배치
4번 : 2015년 6월 5일 전태일 열사 대구 집(고희림, 백무산, 민종덕, 전태삼, 맹문재)
5번 : 전태일 열사가 다닌 청옥고등공민학교(현재 명덕초. 000, 나문석, 김용락, 전태삼, 이창윤, 맹문재)
6번 : “전태일의 고향과 문학” 대담 장면
7번 : 2015년 11월 21일 대구에 ‘전태일공원’을 세우고(정중규, 민종덕, 김채원, 조선남, 전태삼, 정용태, 맹문재, 노태맹, 김용락, 이유선 등)
8번 : 전태일 열사 부산 시절 답사 장면(전비담, 전다형, 김성배, 이정모, 김이하, 전태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