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제 6강 (이 근호목사, 2009년 10월 09일(2), 서울의존교회)
둘째시간입니다. 첫째시간을 요약하겠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공로로 만들어지기에 사람이 자기공로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공로가 나오지 않으려면 사람은 전적으로 죄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어 있는 것이 누구에게 유리한가 하면 하나님께 유리합니다.
우리 생각은 ‘내가 지금보다 더 착해지면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시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하나님 생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더 좋아하세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줄을 알면 알수록 자기 훌륭함이 안 나옵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천국에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서함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 고 되어 있잖아요.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삽시다. 아예 의인 안 되기를 작심하고 삽시다. ‘두 번 다시 내가 의인되고자 시도한다면 나는 개다. 교회에서 인간답기를 시도한다든지 착한 짓을 하려고 한다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한번 살아보세요. 그때부터 남은 생애는 천국입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행복이 오지 말래도 마구 밀려와요. 스트레스 받아서 빠진 머리 다 새로 날 거예요. 하나님의 생각하고 같은 생각을 해야지 자꾸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라고 괜히 그러지 마세요. 그냥 막 사시면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동안 왜 우리가 막 못살았냐 하면 ‘착한 사람 증후군’, 착한 사람 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속은 시커먼데 겉으로는 착한 짓을 하니까 위층하고 아래층하고 삐그덕거려서 자기도 망하고 하나님도 짜증내고 그랬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는 것을 그토록 좋아하시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아셔야 오늘 본문은 왜 죽는 것이 기쁘냐 하는 것인데 그 점이 설명이 됩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서 ‘내어줌’ 이란 죽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죽었고 예수님은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해서 죽은데서 살아나셨다.’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뭔가 일을 했습니다. 무슨 일을 했는가? 죽었다가 사셨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어떤 사람이 아는 체 하면서 ‘당신 교회 다닌다면서요?’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몰라, 그런 것은 안 가르쳐주던데? 그냥 믿으라고 하던데?’ ‘뭘 믿는데?’ ‘몰라, 그냥 무조건 믿으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그냥 구원받는데.’ 구원 안 됩니다.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믿으면 그것은 일종의 주술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의미를 알아야 돼요. 여러분과 연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죽은 것과 연관성이 있어야 되고 예수님 살아난 것과 나와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나의 범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그가 신학박사든 철학박사든 목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너는 죄인이야’ 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 되어 줘야 뭐가 빛이 납니까? ‘예수님이 죽었다’ 가 의미가 있다니까요!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대로 ‘어이, 2번 행인 돌아보면서 엎어져서 죽는다’ 그 씬 들어갑니다. 카메라 좋고 큐! 그런데 이 엑스트라가 죽으려고 하다가 안 죽고는 자꾸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캇! 당신 나가. 당신의 얼굴이 많이 나오기 위해서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고 영화를 위해서 당신이 죽어나가는 그 장면을 연출해 줘야 영화감독인 내가 빛이 난다고.’
‘야, 영화 진짜 잘 만들었다. 그 때 골목에서 그 죽는 씬이 참 좋았어. 영화 너무 잘되었어. 감독 누군지 진짜 훌륭해.’ 지금 감독이 누군지 그 감독이 훌륭하다는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우리가 영광 받으면 안돼요. 예수님이 이만큼 영광 받으시는 주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우리 잘 살라고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를 빛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인이다, 우리 속에 이런 범죄함이 있었다는 것을 평생을 살면서 넉넉하게 보여줘야 돼요. 팔월 한가위 때는 과일도 곡물도 넉넉해서 팔월 한가위만 해라, 그렇게들 말한다잖아요. 우리 속에는 밤과 대추가 넉넉한 것이 아니고 뭐가 넉넉합니까? 죄가 넉넉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아직도 못 보여준 죄가 또 있다는 말입니다. 제 어머니 연세가 83세 되셨는데 약간은 정신이 약간 혼미할 경우들이 있어요. 나이 드신 노인들이 흔히들 그러듯이 이 말도 했다가 저 말도 했다가 그래요. 자식들 집에 갔다가 타박을 받아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 묻힌 대전에 가서 ‘왜 당신이 일찍 죽어서 내가 설움 받게 하느냐’ 고 탄식합니다. 그거 아직 남아 있는 죄입니다.
마저 다 써 먹어야 됩니다. 자식들이 나의 가치를 무시해서 내가 속상하니까 죽은 남편한테 호소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만일에 아버지를 화장을 했으면 묘소가 없으면 어디 가서 호소할지를.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기체면과 자존심과 자기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이것을 죽을 때까지 안 놓습니다.
예수 믿고 회개하는 것 같지요? 저 밑바닥에는 결코 안 놓는 것이 있어요. 오히려 은밀하게 더 커져 있지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한테 뭐라고 하면 옛날일 다 끄집어냅니다. 세 살 때, 열 살 때, 열두 살 때, 이야기 다 합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열 번 듣고 스무 번 듣고 쉴 새 없이 듣다 보면 나중에 지겨워요. 그러면서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내가 죽어야지’ 합니다만 절대 안 죽습니다.
제가 언젠가 했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거짓말을 품고 남을 대한다고 했지요. 그 거짓말이란 남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여분의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퍼줘도 이것만큼은 안내놓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인간이 죄인이 아닙니다. 그것이 있음을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간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 십자가 앞에서 ‘저분이 왜 죽었지?’
내 힘으로는 아무리 끄집어내려고 해도 안 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자존심입니다. 심지어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품고 자살하지 그것 끄집어내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게 있고 또 그게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있는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 없으면 천사되게요? 여러분, 천사되면 안 됩니다. 천사되어 버리면 예수님 죽으심의 의미가 없어요.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내 힘으로 절대 해결 못하는 죄가 우리 안에 그대로 녹녹히 남아 있어야 돼요. 십자가를 자랑하려면 십자가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내 힘으로 내 죄를 어쩌지 못한다, 그것을 같이 병행해서 겸해서 이야기를 해줘야 그게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나, 성질 있거든. 그런데 얼마나 십자가가 감사한지.’ 그래야 십자가가 됩니다.
앞으로 누군가 여러분을 툭 치면서 ‘교회 다닌다면서? 그렇다면 십자가가 뭔데?’ 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리 해도 인간 안 되거든? 그게 바로 십자가란다.’ 그걸 알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리 해도 인간 안 됩니다. ‘너는 아무리 해도 죄인이야’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났다 그 말은 이 죄인을 뭐로 바꾸었다?
누가 뭐래도 의인으로 바꾸어 버린 거예요. 바꾸어질 거야, 차츰 나아질 걸, 천국가면 달라질 걸, 그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의인으로 바뀌어졌어요. 주님께서 의인으로 이미 바꾸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주님께서는 ‘음, 의인 잘 놀고 있지?’ ‘주님 저 죄인이거든요.’ ‘그래, 의인아! 마음껏 네 죄를 알렸다.’ ‘저 의인 아니거든요? 저 또 죄졌거든요.’ ‘그래, 의인아!’
계속해서 의인이라고 이야기를 해줘요.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죄인과 더불어서 함께 죽었다고 성경에 되어 있어요. 이것이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김 목사님이 조금 전에 떡을 드셨는데 제 배가 부릅니까? 김목사님 배가 부르지 제 배가 부른 것 아니죠. 왜? 개체가 달라요.
김 목사님께서 저보고 ‘제가 이 목사님 죄를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해도 제가 안 믿지요. 같이 잠자리를 해도 꿈을 따로 꾸는데 어떻게 ‘제가 목사님의 죄를 다 가져가겠습니다’라는 그 말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농담이겠지요. 마음이야 고맙게 받습니다만 내 죄는 내가 알아서 하고 김 목사님 죄는 김 목사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고 극히 당연한 거잖아요. 특히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얘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서 네 죄가 없어졌거든?’ 그런데 애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엄마가 그렇게 말할 때 예, 라고 해야 뒤탈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안 그러면 계속 잔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믿나?’ ‘엄마 믿어요.’ ‘그래, 착하다.’ ‘그럼 휴대폰 사줘야죠.’
결국은 엄마가 이야기한 복음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똑똑한 애라면 ‘엄마, 예수님께서 죽었는데 왜 내 죄가 없어지지?’ 그러면 엄마가 난감해서 ‘와,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렇게 설명하면 참 똑똑한 엄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캥거루 알지요? 캥거루 배에 뭐가 있지요? 캥거루 새끼가 있지요.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고 여자가 엄마를 낳은 것이 됩니다.
제가 말을 해놓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로 인해서 여자가 엄마로 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엄마라는 말은 자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주가 된다는 말은 혼자서 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주님이라는 뜻은 구원할 백성과 함께 구원할 때, 그걸 포괄해서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주여, 라고 하는데 그게 단순히 호칭만 주여, 라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구약 때 주님으로서 하실 일을 다 같이 한꺼번에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엄마가 아기를 낳아도 그것은 엄마의 몸입니다. 애들은 그걸 못 느껴요. 엄마는 알아요. 엄마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애가 어디를 가도 항상 엄마는 그 애를 떠나지를 못해요.
왜? 자기 몸에 있을 때도 자식이고 몸밖에 있을 때도 내 자식입니다. 자기 몸의 연장입니다. 원래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의 몸이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여자가 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고 여자 안에 자궁(애기 집)을 두어서 여자는 모든 것이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의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몸 안에 있는 자궁을 지키기 위해서 공격적이 아니고 수동적입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게 되면 잠시 남자를 이용할 뿐이지 자기 몸 안에 애기 집이 있으니까 아기만 낳으면 비로소 여자가 되고나면 그 동안 있었던 모든 남자하고 다 거리를 둡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애기를 낳는 그것이 본래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은 여자가 여자로서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섭하냐, 남편들이 섭섭해요. 그러면 남편이 어떻게 되느냐? 그때부터 남편이 아기가 되는 거예요. ‘밥 좀 줘 잉’ 하는 식으로. 이렇게 아기만 되면 그 아내한테 사랑받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자가 성질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성의 몸을 만들 때는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은 번식기능, 아기를 보호하는 기능으로 여자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여자는 오래 살잖아요. 남자는 여자 없이는 못사는데 여자가 관심이 아들에게 감으로 말미암아 남자가 관심사가 떨어져 버리면 자기 짝을 잃어버리잖아요. 짝이 없다는 말은 곧 자기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는 자식이 있는 한 자기는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손자 낳으면 손자까지 봐주잖아요. 자기는 계속 살아 있으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여자 없이 남자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되는데 우리하고 예수님하고 다른 몸이고 시차도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인이 의인 될 수 있느냐? 그게 로마서 6장에 보면 나옵니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 보면 세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물세례라고 합시다. 물세례를 첫 단계가 물에 입수되어야 하고, 수장되고, 그 다음에 다시 튀어 나와야 합니다. 물에 들어간다. 물에 잠긴다. 그리고 물에서 나온다. 이것이 물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세례 받으시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 받으시고 그 다음에 불세례를 받으셨는데 세례라는 것은 세례 주는 사람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절차는 매장되어야 합니다.
잠수입니다. 물이니까 수장입니다. 세례가 되려면 기존의 내가 살았던 나의 노선, 나의 세계가 없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 그야말로 우리는 죽어야 돼요. 없어지면 안 되고 죽어야 된다니까요.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예수님의 그 죽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죽음의 세계가 저주의 세계입니다.
이 저주의 세계에서 저주받을 인간과 더불어서 함께 죽는데 이걸 가지고 ‘세례’라고 하고 다른 말로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 연합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세례가 있습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그래서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물에 집어넣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란 우리가 성령을 통과하면서 죽었다가 다시 살 때 그걸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 다시 산다, 이걸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례라는 것이 구약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면 홍해가 있습니다. 여기가 홍해바다라면 이 바다 속으로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가지요.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이 바다 속으로 길을 내줍니다. 위에서 보면 폭포처럼 되어 있고 절벽처럼 되어 있지요.
이 바다 속으로 난 길로 많은 군중들이 밀려들어갑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세례라고 합니다. 집단으로 세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례라는 것은 죽음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사람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죽음 안에서 못 나가는데, 이 죽음 속에 예수님이 택한 백성과 함께 죽었다가 부활해서 첫 열매가 되어서 빠져나가면 그 다음, 그 다음 차례대로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은 죽음 자체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뒤집어씌운 죽음의 그 그물자체가 부활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자만 부활되는 그런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여기에 이불을 뒤집어 씌운 거예요. 그러니까 자다가 ‘누군데?’ 하겠지요.
이때 이불만 벗겨내는 것이 아니고 이불 채 이 학생하고 같이 나올 때 그걸 세례라고 하고 연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온 것이 아니고 뭐가 나왔지요? 덮어씌운 이불이 나왔는데, ‘대체 이불속에 뭐가 들었나?’ 하고 보니까 거기 자기가 들어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덮어씌운 이불이 어떤 기능이 있느냐 하면 죽어도 사는 기능을 갖고 있는 이불이 우리에게 덮어씌운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그 십자가 올 때에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부활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너는 죽은 자야, 너는 죄인이야’ 라고 했던 그 능력이 사실은 우리를 영원히 죽이는 능력이 아니고 영원히 부활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에 ‘너는 죄인이야’ 라고 했던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이라는 집사가 있었는데 에티오피아 내시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성령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어요.
에티오피아 내시가 성경 보다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라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빌립집사가 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해 주니까 그 때 빌립이 물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은 거예요. 왜 물세례를 받았는가?
자기가 그것을 듣고 나서 깨달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예수님이 왜 살아났는지, 이제 알았다’는 겁니다. 바로 그걸 알게 된 사람만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다시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활승천 하셨으니까 이 땅에서 우리 눈에 안보이잖아요. 예수님은 안 보이는데 누구만 남아 있습니까?
계속 성도들은 생기지요. 그렇다면 성도가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던 그것 때문에 지금 자기가 이렇게 성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불을 덮어 씌워서 끄집어냈는데 그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니까 일어날 때마다 성도 하나 톡 튀어나오고 또 성도 하나 톡 튀어 나오는 거예요. 어느 집에 가서 ‘엄마 어디 가셨는데?’ 물으니까 ‘엄마 밭에 갔어요’ 합니다.
‘네 집 형제가 몇이냐?’ 하니까 ‘형제가 열입니다’ 했어요. 형제가 열 명이 있다는 말은 엄마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엄마가 있으니까 열 명이라는 애가 있잖아요. 성도가 있다는 말은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그 십자가와 부활의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이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이라는 것은 여기에 자식들이 죽 있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주어진 사람들의 특징은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는 의인이 되었다, 혹은 살았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각자 자신의 직업이 다르고, 착한일 한 정도도 다르고 나쁜 일 한 정도도 서로 다를지라도 이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 증거되지요.
그러니까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지금 이미 의인되었기에 천국에 가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 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자기 삶에서 부담 같은 것이 없어요. 자기는 죽어도 괜찮은 인간이고 살아 있는 것은 ‘너희’를 위한 것뿐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에서 이야기한 성도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우리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어디서 뭘 하든지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는 하나의 증거물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이 그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서 믿는 것도 아니고 그냥 믿게 되었으니까,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이 일을 벌리고 있다는 그 자체니까 나보고 멱살 쥐고 따지고 흔들지 말라는 말이지요.
‘빙거’ 라는 말은 ‘증거’를 뜻합니다. ‘멸망의 빙거라’ 만일 복음을 대적하고 안 믿는 사람은 그가 다만 멸망의 대상일경우이기 때문에 내 말을 안 믿을 것이고 혹시 믿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처럼 똑같이 ‘아하, 또 하나님께서 일을 벌리셨구만’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가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산다는 것이 이렇게 편할 수가 있습니까?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개척교회 하는데 30명 나오다가 복음 전하니까 10명 남았다. 계속 복음전하니까 그나마 다 떠나고 자기 식구밖에 안 남았다. 그럴 때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라고 원망을 할 것인데 진짜 복음 아는 사람 같으면 ‘가라, 가라! 다 가고 나 혼자만 남게.’
이게 얼마나 편합니까? 이게 너무 화가 나서 하는 오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천국은 사람이 없는 곳에 천국이 있어요. ‘목사님, 구원받은 사람이 있잖아요.’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나는 없어도 됩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100명이 모여도 여기는 사람 없는 곳이 됩니다.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고난이란 나의 그림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욕하지요. 그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나의 그림자에요.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하늘에 보름달이 떴어요. 그러면 달그림자가 생기지요. 이 사람이 이 사람을 보고 또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서로 본다고 할 때 각자의 그림자를 보게 되지요.
이 그림자가 고난이에요. 어떤 사람이 ‘당신은 십자가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한다면서?’ ‘예’ ‘세상에 그런? 그러면 나쁜 짓을 해도 간다고?’ ‘예’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라고 욕을 할 때 사실은 누구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입니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고 우리가 평소에 했던 이야기에요.
우리 옛날 그림자입니다. 그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반갑다 친구야.’ 그리고는 다독거려 줘야 합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림자를 만나게 합니다.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으니까 그것이 나의 고난이 되고 남도 그림자가 있으니까 또 남이 나를 미워하고. 어쨌든 우리는 계속 죽을 때까지 나의 옛사람그림자, 죄를 남길 수 있는 그림자가 죽죽 늘어서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은혜로 주신 것은 이 고난을 보면서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았지’ 라는 것을 늘 되새길 수 있는 기회들을 허락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소리 하는 분이 있어요. ‘목사님, 예수 믿고 난 뒤에 죄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고난은요?’ ‘누가 저보고 예수 믿는다고 욕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제가 행동을 똑바로 해서 그런지 집안에서도 그렇고 누가 저보고 예수 믿는다고 고난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림자가 없다는 말입니까? 세사에, 해가 떴는데 그림자가 없을 리가 있습니까? 주님이 햇님인데, 왜 그림자가 없습니까? 그 사람은 예수님과 비교 안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과 비교해보면 항상 그림자가 열댓개 생겨요. ‘너에게 속옷을 내어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 놓아라 ….’
이것들이 전부 다 우리의 옛날 그림자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이것들이 다 그림자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림자를 느끼거든 구원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 나라도 그런 식으로 비판하겠다.’ 제가 성화론이 없다고 주장하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제 주장에 대해서 비난을 했습니다.
제가 십자가복음을 알기 전에 십자가복음의 능력을 받기 전에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거의 다 봤어요. 그걸 보면서 성화 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정 낙원목사님만 애쓴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교회 다니고 남들보다 더 훌륭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게 교회 다닌 업적이고 성과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착해져야 복이 오기 때문에. 인간의 머릿속에 착해야 복이 온다는 것이 장착되어 있는 거예요. 착해야 복이 오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도 그런 그림자가 남아 있어요.
뭔가 일이 잘못되면 ‘아하,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구나’ 라는 이것이 우리 옛날 그림자에요. 원래 나쁜데 착해지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림자를 평생 몰고 가야 되고 여러분들은 이미 죄인 되었어요. 십자가가 드러나기 위해서 여러분은 점점 더 죄인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속성에 대해서 이의를 걸지 마시고 그대로 사세요. 거기에 꽃가루 뿌려서 아름답게 만들지 마시고.
죄인 중에서도 약간 예쁜 죄인, 이러지 마세요. 무슨 예쁜 죄인이 있습니까? 시체 넣는 관중에서도 예쁜 관, 이러지 마세요. 죽으면 시체고 해골인데 꽃가루 더 뿌렸다고 그게 예뻐지겠습니까? 그냥 죽음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지요. 십자가의 능력이 뭐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고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있습니다. 누가요? 성령이. 성령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면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갈라디아서 5:19-24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착해진 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욕심이 많고 욕정이 많다는 것을 그냥 십자가를 만나서 그냥 노골적으로 털어놓은 것뿐입니다. ‘저 욕심 많거든요.’ 그게 온유입니다. ‘저는 죽어도 또 죽어야 되거든요.’ 그게 자비라니까요. 자꾸 제 강의가 이해가 안 된다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강의할 때마다 이렇게 고함을 지르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하는 소리가 ‘정과 욕심을 못 박으면 착한 성품이 나온다’ 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정과 욕심을 못 박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못 박을 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이 정과 이 욕심은 없어지고 죽어야 돼’ 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온유와 화평이고 자비와 양선이라는 말이지요. 왜? 십자가만 드러나게 되니까.
제가 총신대도서관에 들르느라 그쪽 방면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아주 특이한 간판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미용실간판인데 매우 역설적입니다.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은 미용실 간판은 난생 처음입니다. ‘머리 못하는 집’ 얼마나 겸손합니까? 마치 ‘은혜와 진리교회’ 가 있다면 ‘은혜도 없고 진리도 없는 교회’라고 간판을 한번 걸어보세요.
십자가는 십자가 믿으면 구원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박아야 구원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정과 욕심을 빼놓으면 우리가 아니잖아요. 십자가는 믿으라고 목걸이 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정과 욕심이 있는 우리를 박치기 하라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계속 퍼내려고 있는 십자가고.
‘끄집어내, 끄집어내. 솔직하게 다 끄집어 내!’ 그러면 그 정과 욕심이 십자가 안에서 뭐가 됩니까? 그 정과 욕심이 십자가 안에서 ‘너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온전히 주님의 공로로만 네가 의인되었단다.’ ‘이 사람 의인입니다! 이 사람 십자가 때문에 의인되었어요!’라고 주께서는 만방에 그 사람을 통해서 전파할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인간이 나 때문에 구원 받았어요’ 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내가 잘나서 구원되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와 버리면 그것은 십자가가 없는 교회가 되지요. 그렇다면 아까 말한 것에서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 시점이지요. 막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욕을 하니까 막산다고 하지 말고 막 십자가에 우리 정과 욕심을 못 박읍시다.
못 박으려고 하면 끄집어 내놓고 박아야 됩니다. 누구에게 알릴 필요도 없어요. 본인이 혼자 하면 됩니다. 본인 안에 성령이 있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시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둘 다 똑같은 인간끼리 뭘 잘났다고 서로 영광을 취하고 서로 뛰어나다고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겠습니까? 그런 것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이것을 다시 강의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공격할 때 십자가 때문에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거예요. 왜? ‘옛날에 너희들이 그랬었으니까.’ 제 취지가 이렇습니다. 여기에 친구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성령을 받았어요. 성령의 세례를 받으니까 뭘 압니까?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나는 의인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세계이고 천국의 세계입니다.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의 공로로 의인되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는데 그 옆의 친구가 가만있겠습니까? 가만있지 않고 마구 공격하게 되지요. 왜 공격을 해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이 사람은 무엇의 증거다?
‘나는 구원되었음’의 증거가 되고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그러니까 너는 구원 못 받고 잘렸지. 너는 잘렸지’ 가 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두 사람은 친구입니다. 그냥 친구로 남아 있게 되면 두 사람 다 누가 구원될지 안 될지 압니까, 모릅니까? 몰랐었어요. 모르는데 성령이 오게 되니까 이 사람은 구원받고 반드시 나머지 사람은 성령 받은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 자기하고 같았었는데 달라졌으니까. 지금 우리 교회에 여러 가정이 나갔어요. 그 이유를 뭘 로 대는가 하면 ‘남편이 목사님 말을 못 알아 듣겠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교회 안 나오겠다는 거예요. 저는 이해하지요. 나의 옛날 그림자이니까. 남편이 안 나오겠다는데 혼자서 교회 나오면 이 가정은 불화가 일어나지요.
가정불화까지는 아니어도 남편이 교회를 가라고 이해를 해줘도 무엇이 부끄러움이 되겠습니까? ‘교회 집사까지 되어놓고 남편하나 전도 못했나?’ 우리교회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도 없습니다만 본인이 남편 두고 혼자 교회 나올 때 얼마나 믿음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라고 한 거예요.
이 부끄러움을 감추는 방법은 그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그 현장을 피해버리는 겁니다. 타조가 적들이 쳐들어오니까 자기머리를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그러면 적들이 지나갔습니까? 타조가 적들이 눈에 안보이면 자기에게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분의 뜻은 제가 이해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남보다 질이 나쁜 여자가 되고 남편도 하나 전도 못하는 것이 교회 왜 나오느냐?’ 가 되어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위상에서 질이 뚝 떨어지는 것이 된다는 말이지요. 떨어졌다는 것은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자기가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는 잡아당기잖아요. 떨어지라고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정과 욕심을 못 박아야 ‘너는 네 행함과 상관없이 남편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사람이다’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말씀대로 이 사태를 적용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부부 중에 아내만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자동적으로 남편은 멸망의 증거가 되어야 하고 아내는 구원의 증거가 되었지요. 이것을 보여주라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든 거예요. 그렇게 부부됨을 그 아내 된 집사님은 감사해야 됩니다. ‘빌립보서 1장 28절의 말씀이 우리 가정에 이렇게 이루어지네요’ 라고 하면서 감사해야 됩니다.
말씀대로 되었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나도 가치 있는 여자고 의미 있는 존재인데…’라고 자기위신을 따지고 듭니까? 우리에게 따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물로 종결되어 버렸는데. 더 이상 내 가치와 내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세요. 그게 바로 온유고 화평이고 자비고 양선이고 성령의 열매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도 없고 비난도 없을 때 여러분들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내가 뭔가 지금 잘못되지 않았는가? 물론 그런 식으로까지 생각할 필요 없는 것은 여러분의 면전이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을 욕할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교회만 알고, 예수밖에 몰라 …’ 하는 식으로 여러 이야기로 궁시렁 거릴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께서 배치해서 하실 일이고 어쨌든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내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구원받은 증거인 되라고 했고 내가 구원받아줘야 나머지 사람은 멸망 받아야 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나를 따로 분리시켰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착해지려고 하지 말고 내 속에 또 어떤 것이 들어있는가, 즐거이 그것을 끄집어 내놓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도록 성령께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