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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은 조선말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小癡) 허유(許維)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본채와 초가로 된 사랑채, 화실,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기념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1980년에 세워진 기념관에 한국화 6점, 서예 9점, 사군자 8점, 민속유물 176점, 수석 95점, 고서 33점, 복사품 97점이 전시되어 있다.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 미산(米山) 허형(許瑩), 남농(南農) 허건(許健) 3대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중의 하나이다. |
< '운림산방' 옆의 첨찰산 중턱에 있는 "쌍계사". 시간 관계상 들리지 않하였으며, 첨찰산 산행도 못 하였다. >
< "신비의 바닷길"과 "뽕할머니" >
국자지정 명승 제9호 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古郡面 回洞里)와 의신면 모도리(義新面 茅島里) 사이 약 2.8 km 바다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바다밑이 40여 m의 폭으로 물위로 드러나 바닷길이 열린다는데 신비로움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가 갈라지게 된 것은 전설이 하나 있는데 옛날 조선 초기 148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일이다. 성은 손(孫)이고 이름은 동지(同知)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바다에서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만나 그만 진도군 고도면 회동(回洞)이란 마을에 오게 되어 겨우 가까스로 한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그 마을은 호랑이의 재난이 극심해 호환(虎患)을 당하기 쉬웠다 ('옛말에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면 창귀(倀鬼)가 된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손동지(孫同知)가 정착해 살게 되었고,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500년 까지 살았지만, 호랑이의 피해가 극심해 뗏목을 타고 의신면(義新面) 모도(茅島)로 떠나는데 황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한 할머니를 두고 떠나게 되었으니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그저 뽕할머니란 별칭으로 불리는 할머니였다.
그래서 이 할머니가 날마다 나와서 기도하는데 '귀신도 빌면 듣는다'는 옛 말처럼 정성을 다해 기도한 것에 용왕이 감응하더니 '내가 마을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게 무지개 다리를 놓겠다'고 용왕은 말했다. 과연 용왕의 말대로 무지개가 나타나고 물길이 갈라져 호동(虎洞: 호랑이가 들끓는 마을이란 뜻)의 뿔치 사이와 모도의 뿔치 사이에 무지개가 드리워져 큰 길이 나고 모래 등성이가 나타나 할머니가 호랑이 등에 타고 호동(虎洞) 쪽에서 건너오는데 꽹과리를 치며 건너오는 사람들을 만났고 할머니는 '너희를 만나 내가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 한 후 뽕할머니는 "신령(神靈)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한다. 그 후 뽕할머니는 영등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지금도 매월 4월20일과 5월20일이면 바다가 갈라지는데 매해 3월이면 뽕할머니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니 영등굿이 바로 뽕할머니께 드리는 제사다.
※ 관리자 : 진도군 <안내 : (061) 544-0151>
< "신비의 바닷길" 현장, 매년 최대 간조시기를 맞춰 축제(2014년 3월 30일~4월 2일)를 하고 있다. >
< "신비의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의 거리 약 2.8 km(폭 40 여m) 이다. >
< "국립남도국악원(國立南道國樂院)" >
1999년 9월 국악의 원형보존과 창조적 계승을 위해 민속음악을 비롯한 민간음악까지 수용하여 전통음악 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지역 특성에 알맞은 교육과 공연을 개발하기 위해 민속예술의 보고 진도에 국립남도국악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2000년 7월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기본계획에 따라 진도군과 협의하여 임회면 상만리 373번지 일대 113,245 ㎡의 부지를 건립지로 확정하고 2000년 12월 국제현상설계공모로 설계를 하였다. 2001년 11. 27일 기공식을 하고 2년 8개월의 공사를 시행하여 2004년 3월 건물을 완공하였음.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악원의 소속기관인 '국립남도국악원'의 직제는 2003년 11월에 신설되어서 2004년 1월에 시행하게 되었음. 같은 해 2월 16일 국립남도국악원 초대원장에 박영도 원장이 취임하였고 3월부터 개원준비를 위해 준비기획단을 구성 운영하여 7월 7일에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전속 국악연주단의 단원은 전국 공모를 통해 선발하고 8월1일 임명하여 현재 다양한 공연, 연수, 체험,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 "남도석성(南挑石城)" >
1964년 6월10일에 사적 제127호로 지정 되었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석성으로 이 자리는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유적지로서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의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건립경위는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남동리를 남도포(南桃浦)라 불렀다. 남도포에는 삼국시대부터 해안경비에 이용된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정부는 이곳 남도포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인 만호를 배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남도석성을 축성했다.
당시 남도포의 만호는 조도의 해역과 신안 하의 해역을 관할했다. 기록에 따르면 남도포에 만호부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음력 1월)의 일이라고 전하고 있어 현존하는 남도석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도석성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한 평지성으로서 현재 남동마을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남동리는 서방 및 남방으로 돌출한 서망산 및 망대산 사이의 내해에 자리 잡고 있다. 남도석성은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남도석성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도석성의 길이는 610 m, 높이는 5.1 m이다. 석성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성안의 관아와 객사 및 내아가 복원됐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있고 남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곽의 형태는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사다리꼴이다. 성벽은 1m 내외의 장대석으로 성의 기초를 구축한 다음 상부로 올라 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내탁법에 의해 쌓아 올렸다. 성돌은 방형 및 장방형의 판석형의 돌로써 대개 대형석재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쌓았다.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남아 있는데 그 규모는 각각 폭 2 m, 3 m, 3.7 m 이다. 또한 서문과 동문에는 각각 2개 및 1개의 문지 초석이 남아 있다. 이들 문에는 각각 옹성을 두었다. 남도석성의 남문 앞으로는 동에서 서쪽으로 천이 흐르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천을 ‘가는골(세운천)’이라 한다. 이 개천에는 두 개의 홍교가 있는데 남문 바로 앞에 단홍교가, 이로부터 9 m 거리에 쌍홍교가 위치하고 있다. 동·서·남문이 있던 자리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해안지방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임을 보여주는 유적으로서 가치가 크다
< 진도읍 쌍정리 168(T. 061-543-5900, 010-5183-3536) 맛집 "기와섬"에서 남도회정식을 맛있게 먹다. >
< "용장산성(龍藏山城)" > 사적 제126호 이다. 용장산성은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위치하며,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고려 원종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1225년 고려에 왔던 몽고 사신이 귀환하다 피살되자 몽고는 고종18년(1231) 고려를 침입하였고,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고군을 상대로 40년 동안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원종11년(1270) 고려정부가 마침내 몽고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몽고의 강요에 의해 강화도에서 다시 수도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배중손(裵仲孫) 이하 삼별초의 군사들은 반기를 들어 대몽항쟁의 굳은 결의를 다짐하고, 원종의 6촌인 왕족 승화후(承和候) 온(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아 강화도에서 항쟁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개경과 너무 가까워 앞으로 우려되는 개경정부의 공격과 장기간 항전에 어려움이 있어 천여 척의 배와 병력, 가족, 물자를 싣고 남천하여, 진도 용장으로 옮겨와 대몽항쟁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때 쌓은 성이 용장성(龍藏城) 이다.
<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 >
향토유형유산 제5호(2001. 10. 30) 이다. 1956년 11월29일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682-4번지에 건립된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불가사의하게 거둔 명량해전 승첩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한 점에서 군민 정신문화의 교육적 가치가 있다.
이 전첩비의 구조를 살펴보면, 높이 3.8 m, 폭 1.2 m, 두께 0.58 m의 비신을 자연암을 떨어내어 조형한 높이 1.2 m, 폭 4.7 m, 길이 5.7 m 규모의 거대한 거북좌대(귀부) 위에 세웠으며, 그 위로 높이 1.2 m, 폭 1.2 m, 길이 2.1 m의 크기의 머릿돌을 올려 놓았으며 동양 최대 높이의 비로 알려지고 있다.
비문은 시인 이은상 짓고 글씨는 이고장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는 점에서 그 예술적 가치 또한 인정받고 있다. < 안내번호 : (061) 540-3139 >
< 고군면 면사무소옆에서 이 맛있는 생낙지탕탕, 돼지고기 볶음에다 소주로 반주하다. >
< 고군면 하율리 마을회관에서 이 맛있는 달걀, 생낙지탕탕, 돼지고기볶음 안주에다 홍주로 뒷풀이를 하였다. >
< 다른 안주보다 달걀(친구의 어머님께서 손수 기른 닭으로 부터 낳은 달걀)이 제일 맛이 있었다. >
< 쌍으로 동참하신 분들중 마나님들은 친구 어머님께서 쑥떡을 해 오시자 사정을 하여 쑥을 캐 다듬고 있다. >
< 해남군 땅끝마을 >
< 해남군에 '땅끝', 아래는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전망대' 이다 >
<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
< 보성군 조성면 행복마을 >
< 구례군 토지면 내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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