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과 경숙이 생각에
눈을 뜨면 티브이에서 정순신 검사 아들 학폭에 대한 기사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하다. 오래된 사건이니 우리는 별 관심 없이 몰랐던 사실을 아버지가 장관에 지명 되면선 온통 나라가 혼수 상태다.
늘 학폭의 심간한 상태를 나라에서 걱정을 하고 단속을 한다고 하지만 늘 순하고 죄 없는 아이들이 폭력을 당한 다.
자녀도 집안 단속도 교육을 시키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나라의 중책을 책임 질수 있단 말인가, 공부를 해야 할 아이들이 학교가 두렵고 가면 괴로힘을 당하니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아이들이 늘어난다.
재벌과 권력을 가진 부모를 둔 자녀들은 부모의 힘을 등에 업고 만만한 아이들을 골라 마음대로 폭력을 일삼으며 평생을 궁지로 몰아 넣어 버린다.
부모는 자녀들의 거울이며 부모의 행위를 닮는다. 현 사회를 보더라도 최고의 대표 아들들이 권력과 재벌의 부모를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며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을 괴롭히고 용서 할 수 없는 죄를 지어도 돈만 있으면 솜 방망이 처벌로 큰 문재 없이 죄를 받지 않는다. 내 자식들이 행여 학폭에 시달리지나 않을까? 아이들은 매를 맞으면서도 보복이 무서워 혼자서 비밀리에 숨기고 고통을 당한다. 세상에 학교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현실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하루속히 학폭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강력한 국가 조치가 시급한 때이다.
날이 갈수록 아이들이 물질에 매료되어 반 학생들끼리 좀 어진 아이들을 골라 왕따를 시키고 돈을 갈취하는 학생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친구들의 괴로움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겨나니 마음 놓고 자식을 키우지 못하는 세상인 것 같아 앞날이 더 걱정스럽다.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 다닐 때 육교 밑이나 지하도 계단에서 발로 차이고 돈을 빼앗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토록 많이 맞고도 말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을 때 다리나 엉덩이에 피멍이 들어 물어보면 마지못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늘 신문에서나 뉴스에서 아이들의 문제를 볼 때 지난날 우리 고향 경숙이 생각이 난다.
친구 경숙의 집은 도로 옆 바닷가에 작은 초가집이었다. 우리 마을과는 거리가 좀 멀었지만 학교에 오고 갈 때 늘 같이 다녔다. 아버지가 병들어 있었고 어머니가 고기 장사를 하며 생활을 했다. 오빠 둘과 여동생 한명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이장 저장을 옮겨 다니면서 5일 만에 한 번씩 집에 오셨다. 장날이면 보는 딸도 귀찮아 손에 돈만 쥐어 빨리 보내 버리는 어머니 곁에 늘 갈치나 고등어등 고기가 한 상자씩 담겨 있었다. 돈을 쉽게 얻는 경숙은 공부에 취미가 없고 군것질을 잘 하며 우리 반 대장들에게 늘 돈을 갖다 바쳤다.
우리 고장은 오서리 동대 서대가 있었는데 서대 아이들은 힘이 세고 키가 크며 제일 학생 수가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학급에서 주동을 잡았다. 공부를 좀 못하고 순한 아이들은 늘 겁을 먹고 대장들이 시키는 대로 어떤 일도 거역을 할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수 톱을 걸어 종소리 땡 하면 공부를 못하게 했다. 경숙은 대장이 오라고 하면 미리 겁을 먹고 내일 돈을 얼마를 줄게 하며 약속을 한다. 내일 돈을 못 주면 모래는 곱을 주어야 하고 모래가 되면 다시 또 얼마를 더 해서 거액의 빚을 져 꼼짝 달싹도 못했다. 곁에서 경숙이를 지켜보던 나는 숨통이 막혀 “너는 왜, 늘 빚을 지고 죄인처럼 사니” 묻는 말에 확실한 답도 못하고 “자꾸만 때리려고 하니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공부시간에도 글을 못 쓰게 하고 급장 선거를 할 때도 눈치를 보며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오래 동안 우리 반 아이들이 격고 있는 고통을 혼자서 고민을 하다가 단정을 내렸다.
당시 우리반 학생이 63명 중 여학생이 절반이었는데 팔십프로가 고통을 겪고 있어도 아무도 말 한마디 못했다. 오래 동안 모습을 보며 반드시 이번 학급어린이 회의 때 고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토요일 어린이 학급시간이 돌아왔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며 이쪽저쪽 찬스를 노리다가 손을 들고 발표를 했다.
“이 숙자는 여학생들 거의 종 만나기 스톱을 걸어서 공부를 못하게 하고 또 한 친구는 엄청난 돈을 빚을 지고 있으니 용서 할 수 없습니다.” 발표를 하자 남학생들 모두가 손뼉을 쳤다. 여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렇게 나의 발표에 대장과 나를 힐끔 보며 눈치를 살폈다. 대장의 나쁜 짓이 거론 되자 엄중한 벌이 자행 되었다. 약 삼십 명의 남학생들에게 매를 맞게 되었고 의자를 들고 회의가 끝날 때 까지 벌을 썼다.
울음바다 속에 혹한 대가를 치른 대장은 그 일이 있은 후 친구는 돈을 주지 않아도 되었고 여학생들은 평화를 맞은 듯 기뻐했다. 늘 대장에게 시달리던 반 아이들은 살짝 내게 와서 고맙다고 하며 대장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장보다 공부를 잘하여 생활부로 활략하고 있었으니 남학생들도 눈치를 보며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늘 나의 눈치만 보며 자신의 지난 행위를 뉘우치는 듯 했다.
그 후 졸업하고 국제 시장에 취직을 하고 있을 때 고향 친구 생각이 났다. 그때 마침 주인집 외삼촌이 너 같은 친구를 구해 달라는 부탁에 경숙이를 편지로 해서 오게 했다. 경숙이와 함께 장사를 배워 앞으로 꿈에 그리던 길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처음 경숙이가 오던 날 너무 반갑고 좋아하며 우리는 약속을 했다. 열심히 장사를 배우자고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경숙이가 약 2개월 동안 같이 장사를 하던 날 숙모님과 삼촌은 부르시더니 아이가 지혜도 없고 장사도 못한다고 하셨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보시라고 하고 나는 친구가 열심히 하도록 타일렀는데 숙모님은 도무지 같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사도 그렇지만은 아침마다 숙모님 화장품으로 화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수간 맥이 탁 풀렸다.
이제 겨우 열 일 곱살에 무슨 화장이며 남의 집에 살기 위해선 성실함이 우선인데, 숙모님의 말을 듣고 주위를 시키면 될 것이라고 했지만 희망이 없다고 했다.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했던 순간 하는 수 없이 경숙을 3개월 만에 고향으로 보낼 수 밖 없었다.
친구를 보내려니 혈육처럼 마음이 아팠다.
고향으로 돌아간 경숙은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더니 삼년이 지날 무렵 다방에 근무 한다고 전화가 왔다. 갑작스런 친구의 소식에 “경숙아 왜 하필 다방이니” ‘왜 어떠니’ 아무걱정도 없이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다방엔 건달들이나 불량패들이 여자를 농락하는 곳인데, 철없는 친구의 미래가 걱정이 되었다. 충무동 어느 다방에 있다는 친구의 소식을 듣고 퇴근길에 친구가 있다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방 입구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서 있는 친구의 불행에 내 가슴이 꽉 막혔다. 추운 겨울에도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려한 화장을 한 채 앉아있는 친구에게 왜 너는 눈에 무엇이 보이지 않니, 안타까워 곁에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친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환경 때문인가, 혼자서 가슴만 짓눌렀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동창 모임이 있었는데 우리 반 남학생이 어느 날 호기심에 친구와 술집을 갔는데 술상을 차려오는 사람이 경숙이라고 했다. 경숙은 친구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 술상을 던져놓고 밖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며 친구도 놀랐다며 안타까워했다.
무엇이 참인지 아무리 좋은 길을 열어 주고 싶어도 바른길을 볼 줄 모르던 경숙의 어린 시절이 생각 할수록 가슴이 아프다.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회갑이 넘고 인생의 황혼 길에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최악의 자리에서 헤매고 있는가, 어린 시절 피부도 희고 인물도 예뻤으며 너무 착해 자기 것을 모두 다 남을 주던 순하기만 한 경숙이었다.
학교에 오갈 때 같은 길을 걸으며 웃음 보따리를 펼쳐 놓고 웃어 대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친구 경숙이가 노후에 건강하게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았으면 마음으로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