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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임직 안수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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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도들이 그 의미를 오해함으로써 참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용어를 살펴보는 2번째 시간으로서 ‘안수’입니다. 이 용어 역시 오용으로 말미암아 우리 신앙이 당하고 있는 불이익은 엄청나다 할 것입니다.
안수라는 용어의 진정한 성경적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안수’ 용어의 문자적 의미
안수란 어루만질 안(按) 손 수(手)로 이루어진 말로써, 단순히 ‘손을 얹는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도 ‘laying on of hands’입니다. 한글이나 영어의 문자적 의미는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전문 사전에 기술된 설명을 중심으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히브리어로는 ‘손/능력’을 의미하는 ‘야드’(yad)의 용례로서, ‘손 안에’는 책임/돌봄/지배 등을 포함하는 권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소유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한편 ‘…에게 손을 올려놓다’라는 표현은 ①살해, ②축복, ③특정 직분이나 임무 위임, ④대속(희생제물)의 4가지 기본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출처 : 구약원어신학사전 / 요단출판사 / 844항).
○ 헬라어로는 ‘티데미’(tithemi)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일반적 의미는 ‘두다/놓다/세우다/임명하다’의 뜻으로 사용되며, 막8:25에서는 ‘안수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출처 : 신약성서신학사전(리틀 킷텔) / 요단출판사 / 791항).
한편 다른 학자는 ‘안수하다’라는 뜻의 동사 (헬)카디스테미(kadistemi)가 ‘임명하다’(ordain) 또는 ‘세우다’(appoint)라는 뜻을 지닌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은 문자적 의미, 즉 히브리어의 ③번 용례와 헬라어의 ‘임명’ 의미를 고려한다면, ‘안수’라는 용어가 목사 직분의 임직과 제법 관련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및 헬라어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할 때 발생된다 하겠습니다. ‘안수’에 관한 신학적 의미부여 작업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과 특별한 사명을 위해 구별하는 행위’ 또는 ‘어떤 직분에 임명하는 엄숙한 의식’이라는 의미를 포함시킵니다.
여기서 ‘사명의 위임’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때, 잘못하면 상당한 오해가 가미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살펴보겠지만,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며 서로 첨예한 대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 목사/신학자들은 ‘사명의 위임’의 의미를 굉장히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며(이는 목사성직론의 근거로 보는 자세임), 일부 학자들은 ‘사명의 위임’ 의미를 가능한 한 최소화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이 용어를 심각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평신도들은 보수주의 목사들의 견해만이 성경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함으로써, 용어의 참 의미를 모른 체 신앙생활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잘못된 교육의 결과로서 목사에게 신적인(솔직히 표현하면 ‘무당의 권위와 비슷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상당한 의견대립을 각오하지 않고는 다룰 수 없는 경계선상의 개념임을 인식하고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안수의 신학적 의미 고찰(사전 및 일부 학자들의 설명)
첫째, 아가페 신학사전의 설명입니다.
○ 안수와 관련된 기본사상은 안수 주체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것과, 어떤 것(복, 능력, 권위 등)을 대상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동질화’ 및 ‘능력전이’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안수 의식의 주요 용도들과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①복을 기원하거나 선언함(창48:8-20; 마19:13-15), ②병든 자에게 병고침을 상징하거나 그 능력을 전달함(막5:23; 눅13:13), ③성령의 은사를 받게 함(반드시 그렇지는 않으나 주로 세례 때 시행됨)(신34:9; 행8:14-19; 딤후1:6), ④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이나 직무를 맡을 사람을 임명하거나 구별함(민8:10=레위인들; 민27:18-23=여호수아; 행6:5-6=장로들과 선교사들).
○ 교회는 여러 세기 동안 안수를 이런 용도로 사용해 왔으며, 어떤 교회는 세례 때, 어떤 교회는 병자 성사 때, 어떤 교회는 견신례 때 사용했다.
○ 감독제(주교제)를 채택한 교회들은 성직 임명 때 안수기도를 시행했으며 사도들로부터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연속성 개념을 강화시켜 주는 점에 있어서는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안수기도가 참된 교회 체제에 필요하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도 없고 신약의 증거도 없다.
둘째, 톰슨 주석 성경의 주제별 사전의 설명입니다(5012-안수).
○ 제물에 대한 안수(레1:4; 3:2; 4:14 등).
○ 축복을 위한 안수(창48:14; 마19:15; 막10:16).
○ 치유를 위한 안수(막6:5; 눅4:40; 행28:8 등).
○ 성직 위임자를 위한 안수(민8:10; 신34:9; 행6:6; 딤전4:14; 딤후1:6 등).
※ 제물 안수는 ‘동질화’ 개념으로, 축복/치유/성직 안수는 ‘능력전이’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며, 이 중에서 성직 안수가 크게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셋째, 프랭크 바이올라 著 ‘교화가 없다’의 설명입니다.
○ 신약성경에서 3번 나오는 장로들 안수 관련 구절들에 나오는 ‘안수하다’라는 말은 「직책을 만들어 거기 앉히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지지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공중 앞에서 장로들이나 다른 사역자들을 인정할 때,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손을 얹었다.」는 의미이다.
○ 1세기에 손을 얹는 것은 직책에 앉히거나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역할을 인정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이었다.
○ 후회스럽게도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는 그 반대의 뜻이 받아들여졌다.
○ 3세기 때는 ‘안수’가 완전히 다른 뜻으로 변해 버렸다. 공식적인 크리스천 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4세기에는 안수식은 상징적인 복장과 엄숙한 의식으로 꾸며졌다. 안수는 만민제사장주의를 짓밟는 교회의 계급을 만들어 내었다.
○ 이러한 안수 방식은 로마의 행정관리들을 임명하는 관습에서 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 제도방식이 그리스 계급제도와 합쳐진 것으로서, 어거스틴 및 그레고리와 크리소스톰 등의 지지를 받아 그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 4세기 때의 문서는 이렇게 말한다. “감독은 말씀의 사역자요, 지식의 보존자요, 신성한 예배의 여러 부분에 있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통치자인 동시에 총독입니다...그는 여러분으로부터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하나님 다음의 존재이며, 땅에 있는 여러분의 신입니다.”
○ 안수는 사제를 완전히 구별되고 거룩한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 이런 사상은 비성경적이다 못해 아주 해로운 것이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설교하고 세례(침례)를 주거나 주의 만찬을 인도하는 것이 ‘안수받은 사람’에 국한된다는 말은 없다.
* 이상은 p.155-159를 발췌하여 일부 표현을 보완 정리한 것으로서, 큰 의미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직접 원문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폴 스티븐스 著 ‘21세기를 향한 평신도 신학’의 설명입니다.
○ 제2장의 각주 18)번 설명입니다. “안수를 힘이나 직책을 부여하는 의식 혹은 의례로 여기는 사상은 한마디로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M. Warkentin, Ordination : A Biblical, Historical View, p.172). 루터는 “이 성례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것은 교회(천주교를 의미함)와 교황이 창안한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 제6장의 ‘안수’ 부분의 주요 언급은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신약성경에서 일곱 집사를 안수한 것과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선교사로 파송하는 것 등의 예를 보면, 신약성경이 리더십의 카리스마를 교회에 주어진 은사로서 높이 받든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하지만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로는 안수의 위계적인 양상, 평생 가는 안수, 안수를 은총이 수반되는 성례로 보는 입장, 안수는 안수받는 자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 놓는다는 견해, 안수는 사제에게 성찬식을 집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 또한 개신교에서 행하는 유의 안수, 즉 특히 칼빈주의 전통에서 안수받은 자에게만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배타적으로 주는 것(기독교 강요 Ⅳ.3.8)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내용들을 근거로 한 제 개인적인 이해를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 먼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목사에게 주어지는 안수는 성경적 근거가 있다는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안수’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이는 성경의 지지가 매우 취약한 천주교 신학의 작품일 뿐입니다.
○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목사직분에 대한 ‘신학적 안수’의 의미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견해로 알려지고 있으나 오히려 이 견해가 보다 충실한 ‘성경적 안수’ 개념인 것입니다.
○ 사실상 목사 안수 개념은 성경에 입각한 참다운 기독교 신앙 정립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사항입니다. 잘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견해를 적극 지지합니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안수의 사례 검토
먼저 구약 및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번의 안수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가페 신학사전과 톰슨주석 성경은 약간 상이한 4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심각한 차이가 아니므로, 톰슨주석 성경의 설명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 제물에 대한 안수는 기본적으로 제물인 짐승과 안수하는 인간이 동일하다는 개념을 전제한 행위입니다. 즉, 죄인인 인간이 안수함으로써 희생제물인 짐승에게 죄가 전가되고, 짐승의 희생이 곧 인간 자신의 속죄의 행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일단 안수가 ‘동질화’를 의미한다고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존속되지 않으므로 ‘동질화’ 의미의 안수(죄의 전가) 개념이 지금은 폐지되었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 둘째, 축복을 위한 안수입니다.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한 것이나 예수님이 아이들을 축복한 것이나 동일한 개념입니다. 어른이 사랑의 마음으로 손아래 사람들을 축복하는 그냥 단순한 개념입니다. 오늘날 부모가 자식들에게 손을 얹고(안수) 축복 기도하는 것과 아주 동일한 의미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의 계승개념입니다.
○ 셋째, 치유를 위한 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또는 바울이 안수하여 병을 낫게 하신 것은 긍휼의 심정으로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비록 구약에는 분명한 치유안수의 예가 찾아지지는 않으나, 제사장들이 환자들을 검진하는 것도 치유 안수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치유 안수는 오늘날에도 신유기도나 신유행위를 통해 이어지고 있는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치유의 전이개념입니다.
○ 이상 살펴본 3가지 안수 용례는, 폐지되었든 계속사용 중이든, 별다른 쟁점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신학적 의미를 정립해야 할 필요나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 편하게 수용하면 되는 것입니다(축복안수, 치유안수).
○ 문제는 네번째 ‘성직임직 안수’입니다. 안수를 통해 신적인 권위가 임한다는 개념인데, 이것이 보통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랭크 바이올라나 폴 스티븐스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고 1세기 이후에 그 의미가 괴상하게 왜곡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네 번째 개념은 철저한 천주교적 개념인 것입니다. 이 잘못된 개념을 개신교가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오늘날 이처럼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은 목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향유를 위해, 알면서도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를 팔아먹는 행위(배도)라는 점을 모르고 있습니다.
○ 따라서 신약성경을 근거로, 네 번째 ‘성직임직안수’ 개념의 비성경성을 해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직임직 안수 개념의 비성경성.
성직임직 안수 개념은 ‘목사에게 주어지는 안수는 신적인 권위를 수반하는 엄숙한 행위’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앞에서 누차 설명드린 바와 같이 이러한 이해는 지극히 비성경적이며 단지 성경을 왜곡시킨 천주교의 설명일 뿐입니다. 개신교는 당연히 이 설명을 거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발목 잡힌 일부 목사들(기득권자들)에 의해 오히려 확대 수용되는 불가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조명을 받아가며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일곱 집사 안수 사례입니다(행6:1-6).
○ 6절을 보니 안수 집행자는 사도들입니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안수는 높은 직분자가 낮은 직분자에게 행하는 하향식 행위인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지위의 높고 낮음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먼저 성숙된 자가 나중 성숙된 자를 안수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수를 ‘상급 존재가 하급 존재에게 베푸는 시혜’로 오해하는 과오는 절대로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택된 일곱 분들의 자질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안수를 받기 이전에 이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안수로 인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런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받고 있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성도들이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되는 성경의 핵심 교훈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이점이 앞에 인용한 몇몇 분들이 지적하시는 바, ‘안수는 이미 주어진 은사를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라는 설명의 진정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안수의 개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안수로 인하여 특정한 자질이나 권위가 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 지엽적인 교훈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일곱 집사를 누가 뽑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게 교회의 회중들이 독자적으로(사도들의 영향력 없이) 선발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 전체’가 행하는 일의 성경적 개념입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가 행하는 성경적 일(사역)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본받아야 합니다. 만약 사도들이 지명하여 집사로 세웠다면 이는 교회 전체의 사역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배제되고 순수하게 온 교회가 합심하여 세웠기에 ‘교회 전체’의 행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안수 행위는 실제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요식적/형식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즉, 안수는 후속 확인 차원에서 사용된 방법인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우는 사례입니다(행13:1-3).
○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은 안디옥 교회는 당시 5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인도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늘날의 담임목사 직무는 바나바가 수행하고 있었고, “선지자들과 교사들”로 지칭된 바울을 포함한 4명은 바나바를 돕는 위치였을 것입니다(이것을 오늘날 담임목사제도의 당위성을 보증하는 설명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처럼 묘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초대교회는 현재와 같은 일인독재체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결코 일인독재체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 문제도 다룰 것입니다).
○ 이들 중 담임목사격인 바나바와 부목사격인 바울이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떠나게 됩니다(3절). 누가 안수를 주는 주체인가요? 교회입니다. 본문에 명확히 기록된 것은 아니나, 온 교인 전부가 돌아가며 안수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머지 3명의 지도자들이 대표 안수를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복수 대명사인 They는 어느 경우든 사용 가능한 단어입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바나바나 바울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높은(?) 자에게 안수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앞에서 안수를 ‘상급 존재가 하급 존재에게 베푸는 시혜’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바로 그 이유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곳의 의미는 ‘평신도를 포함하는 교회 전체가 목회자인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를 했다.’는 것으로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 마찬가지입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안수를 받음으로써 선교사의 자격과 권위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안수 받기 전에 선교사다운 자질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령께서도 인정하고 계셨습니다(2절). 이미 보유한 그 자질을 근거로 안수함으로써 확인하고 확정했을 뿐입니다. 여기서도 안수가 후속 확인 차원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감독의 자질입니다(딤전3:1-7 및 딛1:7-9).
○ 오늘날 크게 오해받고 있는 구절 중의 한 곳입니다. 목사에게 가장 철저하게 적용해야 할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용치 않는 구절입니다. 기껏해야 가끔 아주 피상적인 설교에서 인용될 뿐인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 구절은 목사 안수의 절대 요건이 담긴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현대교회는 이 구절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 위의 두 구절에 나오는 감독의 자질은 몇 가지나 될까요? 어떤 학자는 20가지라고 하던데, 제가 헬라어를 기준하여 검토해 보니 23가지였습니다. 일단 저는 23가지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 이미 다른 묵상에서 여러 번 다루어서 중복됩니다만, 이야기 전개를 위해 불가피하므로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목사안수 제도의 맹점입니다.
- 현대 목사안수(자격부여)의 요건은 무엇일까요? 유일한 조건은 ‘신학교 졸업장’입니다. 이것 하나면 만병통치요 해결 안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일부 목사들이 기득권 보호를 위해 거품 물고 강변하는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소명)’도 졸업장 앞에서는 꼬리를 내립니다. 졸업장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 잘 이해가 안 되신다고요? 예를 들으시면 쉽게 이해됩니다. 저를 예로 들겠습니다. 제가 작심만 한다면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데는 전혀 제약이 없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2-3년 정도 공부하고 실습도 하고 목사고시에 합격만 하면??? 저도 목사 될 수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제가 목사 되는 것을 반대하실 수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대교회가 필요충분조건으로 정해놓은 ‘신학교 졸업장’을 취득했기 때문입니다(구약의 철저한 실패를 아무 생각 없이 답습하는 모습이지요. = 왕상12:25-33).
- 왜 저는 지금 목사 노릇 못합니까? 지식이 부족해서요? 능력이 없어서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이유는 오직 신학교 졸업장 하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자질과 은사와 무관하게, 오직 신학교 졸업장(지적요건 충족) 하나만으로 결정해 버리는 현대 목사안수 제도는 지극히 비성경적인 무지일 뿐입니다.
○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아무 생각없이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 속에 성경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오해하듯 무슨 목소리나 특정 구절을 통해 오지 않습니다. 그 부르심은 바로 위의 두 구절을 통해서만 옵니다!!! 뭡니까? 예, 바로 감독의 23가지 자질입니다. 이것들이 목사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골고루 주시는 은사입니다만, 특정한 성도들(목사가 될 성도들)에게는 더욱 풍성히 주시는 은사들입니다. 이 은사들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발견되는 것입니다. 찾아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특정 성도에게서 이 은사들이 두드러지게 발견되면 바로 그 성도를 목사로 안수해야 하는 것입니다(23가지 모두 만점인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성도가 곧 목사로 부르심 받은 자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인 것입니다. 강권적 부르심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며 달리 말하면 은사론이기도 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개인적 확신(감동)이 있다 해도, 23가지 자질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검증은 필히 받아야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정 성도에게 주신 ‘목사의 은사’를 누가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까? 자기 스스로 발견한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교회가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놀라운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목사의 은사를 자기 자신이 발견하고 교단이 확인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속은 것입니다. 개인의 생각은 환상일 뿐이고(눈물 한번 흘리고 콧물 한번 닦고 나면 너도 나도 목사 하겠다고 설칩니다), 교단은 결코 개인의 목사 은사 소유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목사은사는 함께 부딪치며 교회생활하면서 저절로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이런 목사은사가 발견된 자를 감독으로 안수하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입니다.
○ 누가 안수합니까? 아무 권한도 없는 교단이 합니까? 누가 교단에 목사 안수권을 주었습니까? 성경입니까? 오직 교단 스스로가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교단법이 유일한 근거일 뿐입니다. 교단법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입증 받을 수 있는 교단 안수권 주장은 완벽한 허위일 뿐입니다(이것마저 스스로 창안한 것도 아니고 천주교에서 빌어온 것입니다). 목사안수는 철저하게 지역교회 고유의 임무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어느 한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철저한 실패 가운데 하나일망정………
○ 왜 교단이 목사안수를 할 수 없습니까? 또 왜 해서는 안 됩니까? 이유는, 교단(또는 신학교)은 개인이 목사은사를 받았는지를 검증 내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은사는 함께 생활하면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그런 성격의 자질들입니다. 도덕적이고 품성적이고 영적인 자질들이 뒤섞여서 오랜 세월의 검증을 받아야 확인되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2-3년 교육기간 동안 책이나 보고 시험이나 치루는 방법으로는 결단코 판정해 낼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불을 보듯 뻔한 이치 아닙니까? 신학교도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이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탐심 때문입니다. 엄청난 수업료가 달아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런 손해를 감수하겠습니까?
○ 다른 묵상에서 다루었기에 자세한 설명을 생략합니다만, 신학교는 현재의 운영형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돈 받고 신학교육 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역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학교육은 지역교회가 목사로 안수한 예비목사들을 무료로 보습교육 시키는 체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학법 반대에 목이나 매고 있는 분들에게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해 봤댔자 입만 아프겠지요???!!!
지금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성직임직 안수의 비성경성’입니다. 이 논의의 초점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수를 통해 신적 권위가 위임된다.’는 개념은 철저히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에는 매우 교묘한 노림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안수권을 강조함으로써 안수 받는 자의 허영심을 만족시킨다는 점입니다. ‘나에게 그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안수를 실시하는 자의 격을 한 단계 더 격상시킨다는 점입니다. 안수 받는 자도 거룩한데, 하물며 안수 행하는 자야 오죽 하겠느냐는 생각입니다(지금 교단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안수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성직자들의 권익에 부합되는 현상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성경과 맞지 않는 완전한 오해에 불과할 뿐입니다. 한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 딤전4:14절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고 하십니다.
○ 디모데가 바울의 영적인 자녀이며 동역자/후계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디모데는 바울에게 안수 받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받을 수 있는 교훈은 무척 많습니다만, 오늘 묵상과 연계되는 한 가지만 살피는 것으로 한정하겠습니다.
○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장로의 회’(the body of elders)란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느 조직의 장로들 모임일까요? 예루살렘 교회일까요? 안디옥 교회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에베소 교회에 소속된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서가 아니라 에베소 교회 장로 모임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행한 주체가 누구냐고요? 당연히 에베소 교회 장로들입니다. 지금 바울의 서신이 적용되는 이 시점에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목사(대표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4절은 디모데가 안수 받던 과거를 회상한 말입니다. 결국 ‘한 교회의 목사는 그 교회의 장로들의 모임에서 안수를 시행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울도 간섭하지 않았던 지역교회 고유의 임무(권한)가 바로 목사 안수권입니다(안수의 의미도 ‘신적 권능의 위임’이 아니라 ‘목사은사 소유에 대한 확인’ 개념입니다). 이걸 현대의 교단은 아무 근거 없이 가로챘습니다.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이런 황당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천주교의 욕심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임을 앞에서 알아보았습니다.
○ 바울이 디모데와(딤전3:1-7) 디도에게(딛1:7-9) 감독 세우는 기준을 가르칠 때도, 결코 예루살렘 교회나 다른 교회의 인준을 받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자기 교회(여기서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자체적으로 시행할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지역교회 목사 안수는 지역교회 고유의 권한입니다. 결단코 지역교회 외부의 어떤 단체가 영향력을 끼칠 사안이 아닙니다(현재 교단들은 지역교회의 고유 권한을 꿀꺽 삼켜놓고도 시침 뚝 따고 눈만 껌뻑 껌뻑하고 있습니다. 연상되는 게 있으시지요?).
○ 그냥 수긍하기 싫으니까, 파송의 경우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파송의 경우라 하더라도 성경적 근본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역교회의 목사은사 확인 및 안수 후 다른 지역으로 파송한다는 것 외에는 전혀 동일할 뿐입니다(에베소 교회의 바나바와 바울 파송의 예). 더 이상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일인 것입니다.
출 처; 한국 교회개혁 포럼 글쓴이; 맑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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