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토요일 오후 5시, 장암고개가 아예 주차장이다. 이 시간에 차들이 이리 밀리는 줄 몰랐다. 비가 와서 교통체증이 더 심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 비는 때 맞춰 내려서 좋은 비(호우시절)는 아니다. 수락산역까지 1시간 가까이 걸렸다. 건대입구역에 도착하여 100미터 달리기 하듯 뛰었다. 무릎과 발등이 아파서 키 작은 조카보다 뒤처졌다. 막 출입문을 닫는 순간 극장 안에 들어섰다. 광고 끝나고 영화 첫 장면이 시작된다. 숨이 차서 몇 장면은 집중을 못했다.
정우성(박동하)이 건설 중장비 회사의 평범한 회사원으로 나온다. 동하는 중국 청두로 출장을 왔다 시간이 남아서 두보 생가를 찾는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낭랑한 목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긴다. 그녀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났던 고원원(메이)다. 둘은 반갑게 재회한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다. 두보가 좋아했다는 복숭아 꽃이 피었다. 복숭아 꽃 분홍색은 무릉도원 낙원의 색이다.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린다. 대나무 숲은 초록색이다. 초록은 흠결 없는 순수의 색이다.
동하와 메이의 기억은 서로 엇갈린다. 기억은 편집되어 뇌리에 남는다. 그래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동하는 메이와 서로 사귀었다고 말하고, 메이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동하의 기억 속에 메이는 동하에게 자전거를 배워서 탈 줄 아는 여자였고 메이의 기억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이다. 동하의 기억 속에서는 메이와 키스를 한 적이 있고 메이의 기억 속에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다. 동하는 메이와 나누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동하가 묻는다. 만약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냐고. 메이의 표정은 분명히 ‘그렇다’로 보이는데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짜증이 아니라 고뇌다.
3일간의 짧은 출장길, 두 사람은 데이트를 즐긴다. 광장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두보 생가에 다시 놀러가기도 하고 비를 맞기도 한다. 동하는 다시 싹트는 애틋한 감정으로 귀국을 하루 미룬다. 하루란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는 동하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이미 결혼한 메이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메이는 스찬성 지진에 남편을 잃었다. 동하와 사랑을 다시 시작하려면 남편의 그림자가 희미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루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동하는 메이의 선물인 두보시집을 들고 청두를 떠난다.
메이는 동하가 한국에서 보낸 자전거를 뒤뚱거리며 배운다. 드디어 균형을 잡고 타기 시작할 때 메이는 눈부시게 환하게 웃는다.
동하가 허름한 티셔츠 차림으로 두보 생가 앞에서 기다린다. 아, 곧 메이가 나타나겠구나! 영화는 끝났다.
다시 시작하는 동하와 메이의 사랑은 두보 생가에 피었던 복숭아꽃처럼 화사한 분홍색 낙원을 약속해줄 것 같다. 두보 생가의 대숲에서 일던 초록색 바람처럼 상쾌한 웃음을 만들어 줄 것 같다.
메이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던 복숭아꽃잎 한 장, 기어이 그 꽃잎을 살짝 떼어내주는 동하의 망설이는 손길이 아름다웠다. 과거였던 사랑이 오늘이 되어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미래를 향해 한발을 내딛는 순간은 언제라도 아름답다.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사랑을 가슴으로 안으며 따뜻한 온기를 되살리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그러므로 동하와 메이는 축복받은 연인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다. 그의 영화를 두 편 보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 였다. 전자에서는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슬픈 사랑이었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삶의 유한성, 그 쓸쓸함이라니!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심은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림이 역할을 아주 잘했다.
‘봄날은 간다’를 동두천 극장에서 한 남자와 보았다. 관객은 열 명도 채 안 되지 싶었다. 그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는 유지태였고, 나는 ‘사랑도 변한다’는 이영애였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하지 어떻게 영원을 믿느냐는 나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순간이 조각보처럼 이어지면 영원이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보다 약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사람 맘이 변하고 상황이 변한다. 우주는 이런 변화의 합집합이다. 변화의 카오스가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우주, 얼마나 아름다운가.
건대역 주변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선 것도 몰랐다. 극장을 나선 우리는 스타벅스처럼 왁자한 찻집이 아닌, 조용하고 이쁜 찻집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미로 같은 지하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스타벅스와 비슷한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나는 카페라떼를 마셨다.
조카: 영화가 너무 심심해.
이모: 그래도 나는 좋은데. 백김치처럼 슴슴한데 나는 백김치를 좋아하거든.
조카: 토핑이 좀 부족하잖아.
이모: 부족해도 넘치는 것보다는 좋아.
조카: 캐릭터를 형상화하는데 실패했어. 유학시절 동하가 시를 쓰던 사람이라는 게 너무 가볍게 묘사되었어. 그가 시인이었음을 좀더 일
찍 알았으면 좋았을 걸!. 메이가 왜 그렇게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지 좀더 묘사가 되었으면 좋았을 거야. 인물이 살아야 서사가 사는
데 인물이 좀 부족해. 그래서 서사에 집중이 안 돼.
이모: 정우성이 저런 평범한 역할을 맡아도 어울리네. 여배우는 정말 그 역할에 딱이다. 청순하면사도 지성적이네.
조카: 아, 정우성의 양복 간지는 정말 끝내줘요.
이모: 이번엔 조금 후줄근했잖아. 아, 그래도 정우성은 정말 옷발이 좋아.
조카: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감정을 섞고 몸을 섞고 삶을 섞는 과정이야.
이모: 삶을 섞는 단계가 가장 어렵지. 두려움을 동반하잖아.
조카: 허감독 영화 다 봤는데‘봄날은 간다’가 제일 좋다. 더 이상 발전이 없어.
이모: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제일 좋아. ‘외출’과 ‘행복’은 못 봤으니 할 말이 없고.
허감독, 사랑에 관한 시선이 좀 바뀐 것 같아. 한때 잃었던 사랑이지만 다시 진행형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잖아. 사랑이 조금 통속적으
로 해석되었네. 현실의 사랑은 본래 좀 통속적이잖아.
조카: 클로즈업이 너무 많아. 아, 그 마음 이해해. 그렇게 아름다운 고원원을 어떻게 멀리 잡겠어. 나라도 그렇게 당겨서 가까이서 보고 싶
었을 거야.
이모: 그렇지만 너무 당겨 찍어서 여운이 덜하잖아. 여백의 멋을 포기한 것이지. 안타까워.
조카: 이모 다리도 아픈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봤으니 이 영화 오랫동안 기억해.
이모: 그래야지. 두보의 시도 찾아 읽어봐야지.
조카와의 수다는 늘 즐겁다. '10월의 마지막 밤' 노래를 흥얼거리지만 가사를 몰라서 마주보고 킥킥거리다가 조카는 신길동 친구집으로 가고 나는 혼자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서울을 벗어나니 다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이 비는 때맞춰 내리는 좋은 비일까. 10월의 마지막 밤, 쓸쓸함의 우비를 입고 우수에 젖어 동하와 메이의 다시 시작하는 사랑의 애틋함을 느껴보는 시간에 내리는 이 비는 알맞은 토핑이다. 그러나 이 밤비는 호우시절이다.
春夜喜雨(춘야희우.봄날의 밤비)/ 미산 윤의섭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고운비는 때를 알고 마춰 내리고
常春乃發生 상춘내발생
봄이면 초목이 싹이 트고 자란다.
隨風潛入夜 밤수풍잠입야
비는 조용히 바람따라 내리고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소리없이 가늘게 초목을 적시네.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들길은 하늘 덥힌 구름으로 어두운데
江船火獨明 강강선화독명
가의 고기배 홀로 불 빛이 반짝인다.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이른아침 촉촉히 붉게 물든 꽃들을 보게될것이고
花重錦官城 금화중금관성
관성의 꽃송이도 촉촉하게 늘어저 있겠지..
첫댓글 호우시절을 보고싶었는데 기회가 닿질않아 보질 못했고 대신 후기로 잘 감상하였습니다..^^ 뒤에 있는 시는 두보의 ' 춘망'을 생각케 하네요. ^________^
생각보다 빨리 극장에서 사라졌나 봐요. 나도 여기저기 뒤져서 찾아냈어요. 극적 장치가 없어서 밋밋하지만 참 자꾸스며드는 영화였어요.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정말 금새 사라졌더군요조카님과의 풍경도 참 이쁘게 그려지네요..님덕분에 감상 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카랑 수다놀이 자주 한답니다. 즐거운 파트너지요.
비 내리는 오늘....미루님이 올려주신 글과 시가 절 따뜻하게 데워주네요...^^*
비 내리는 오후 덕수궁에서 놀았어요. 비에 젖은 만추의 풍경이 사무치게 아름답더군요.
금요일 EBS에서 허진호 감독 인터뷰를 봤습니다....이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군요....같은 생각이 들만큼 좋은 영화였던거 같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이 드는 영화였어요. 스며드는 사랑의 감정!
잘 읽었슴니다.영화보다 글이 더 마음에 닿는군요.
영화, 촉촉히 스며드는 봄비 같아요. 아직 안 보셨다면 한번 보세요.
호우시절 보고싶었는데.. 올가을은 이상하게 제대로 영화도 못보고.하는 것도 없어요. ㅠㅠ 저는 개인적으로 허진호감독의 작품 중에서는 봄날은 간다가 좋았어요. 사랑이 어 떻게 변하니.. 사랑이 식어가는 상대를 바라보며 비통한 심경과 냉가슴을 앓던 그 심경이 너무 절절하게.. 개인적으로 나는 상우에 가까울까. 은수에 가까울까.,.아마도 그렇게 진하게 공감이 되었던 이유는 상우가 되었던 은수가 되었던,그런 비슷한 감정과 그러한 관계의 스펙트럼 안에 놓여 본 경험이 있어서였겠지요. 아 ..저는 은수처럼 자신의 사랑에 대해 관조하고 ,스스로 이번엔 다를거야라는 기대를 하며 최면에 걸리지않는 쿨함을 무척 동경해요. ㅎㅎ /
감정이입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았으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명화가 되지요. 상우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랍니다.
넘 고맙다고 미루님께 말씀드리려구요. ㅎㅎ 어찌해야 좋을지 ..넘 좋아서요. ㅎㅎ
별말씀을!
호우시절, 미루님 덕분에 안 보고도 보았습니다. 잔잔하면서도 짧은 문장의 이어짐이 읽는 내내 제 머리속에 초당 24 프레임의 영화를 재생해 주네요. 전부터 느꼈는데, 미루님은 서정성을 잘 살리는 독특한 문장법을 지니고 계셔요. 부럽습니다... 훗날 동행하게 될 사찰여행에선 꼭 대표기자 역할을 맡길테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ㅎㅎ
비디오 대여해서 한번 보세요. 두 사람의 표정을 1/10 도 전하지 못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