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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태국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습입니다. 동네의 스님들이 시주 단지를 들고서 동네를 쭉 돌면 미리 나와 있는 동네 주민들이 스님들에게 그날의 일용할 양식과 절에서 필요한 소모품들을 시주하지요... 스님들은 어떤 음식이던지 가리지 않고 받아야하고, 또 불평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준 음식에 고기가 섞여 있어도 그냥 먹습니다.
위의 사진중에 왼쪽에 흰 옷을 입고 리어카를 끌고 있는 청년은 스님 도우미지요.... 넘 많은 음식을 시주 받으니까 이렇게 도우미가 스님 옆에 붙어 다니면서 시주한 음식을 대신 운반해 줍니다.
▒ 역사 ▒
13세기에 선주민인 몬족(族)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부 타이의 랑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 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타이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에 걸친 란산 왕국(라오족) 등 타이 민족의 소왕국 이 각지에 생겼다. 아유타야 왕조(1350∼1767)는 위계전 제도(位階田制度)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를 구축하였다. 1767년에도 다시 미얀마 군대에 점령당했으나 아유타야 왕조의 무장(武將) 프라야 탁신[鄭昭]이 미얀마를 격파 하고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열강들의 압력이 드세어져 1855년에 영국과 보링조약을 맺고 자유무역항과 치외법권을 승인하였다. 그 뒤 왕족 전제(專制)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에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국으로서 발족하였다. 열강의 진출로 아시아 각국이 식민지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1947년에 피분파(派)가 쿠데타로 프리디 등을 추방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군부내에서 대립이 심해졌다. 사리트가 죽은 뒤 정권을 인계받은 타놈은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 으로 환원시켰다. 1973년 12월 국왕은 타마사트대학 학장 산야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1976년 10월에는 군부가 타놈의 귀국을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제압한 데 이어, 새 내각을 발족시켰으나, 1977년 10월 국방장관 겸 최고사령관 크리앙사크가 타닌을 축출 하고 총리에 취임하여 1978년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980년 2월 야당이 제출한 불신임안으로 사퇴하였고, 프렘 국방장관 이 총리에 취임하였다. 1988년 선거후 프렘은 정부에 남아있기를 권유받았으나 강력히 거절했다. 그의 후계자인 차티차이 춘하벤 은 쑨톤 콩쏨퐁 장군의 무혈반란으로 1991년 2월에 쫓겨났다. 선거를 하지 않고 임명된 군대수상은 1992년 3월 강력한 일반 여론의 항변에 의해 만들어져 새 입법하에 치뤄진 선거후에 정식 으로 취임되었다. 군대지배하의 잔혹한 진압이 수상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왕이 과도기에 시민의 수상을 임명하게 했다. 구민주당은 1992년 9월 선거에서 소수의 다수당을 이겨 추안 릭파이가 수상으로 있는 시민정부와 연합했다. 현재의 태국 은 입헌 군주제로 1932년 이래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압둘야뎃(H.M. King 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 사법부를 통한 사법권을 행사해오고 있다.
사회구조와 가치관
불교국가이자 농업국가인 태국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으로 국가의 존립이래 외세에게 독립을 잃은적이 없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국가 존립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태국인들은 왕을 중심으로 지혜를 다하여 극복하였으며
일찍부터 들어온 서양의 문명과 문화에 대하여도 결코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 이질적인 외래 문화를 태국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신문화로 태국화하여 발전시켜 오고 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의식구조, 또는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보면 태국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타이족의 고유문화와 불교문화, 농경문화 그리고 1932년까지 지속된 전제군주제의 영향-싹디나 제도-을 간과하여 태국인의 의식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태국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을 어떻게 하며 어떠한 행위를 할 것인가 하는, 또는 일상생활에서 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선택, 취향, 관심의 방향, 언행, 사고, 희망, 기호 등으로 표현되는 결정이 바로 태국인의 의식이자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엠브리(John F. Embree)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태국 사회는 '느슨하고 완만하게 구조화된 사회'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엄격히 조직화된 집단들이 결여되어 있고 자발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규제받기 보다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유롭게 개인간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인간의 상. 하 관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태국 사회구조의 특징이다. 이러한 것은 옛부터 국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전제군주국이었고, 따라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회내의 위계적 신분질서가 근래 태국사회에로 계속 이어져 온 것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국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은 태국 사회내에서 집단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고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성향을 갖도록 했으며, 한편 태국인과 태국사회의 정신적인 면을 지배해 온 불교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생활철학"으로써 태국인의 가치관을 형성해 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타이족의 "타이"라는 단어는 "자유"를 의미한다. 엄격한 형식이나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선호한다. 태국인들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자유스럽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고 있다. "진짜 태국인은 농민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태국인은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전인구의 약 80% 이상이 농업, 수산업, 목축업, 삼림업에 종사하고 있다. 땅을 중심으로 살고있는 이들은 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적 모임이나 행사, 축제가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온 동네사람들은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어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낙천적이다. 땅이 생활의 원천인 이들은 별로 이사를 하지 않고 사회적 신분의 변화도 거의 없다. 대신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가족을 중심으로한 응집력이 강하며, 전통적으로 가족중심의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 소비자와 생산자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농민들은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어서 인습이나 관습에 집착하며 변화에 스스로 적응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도시인보다 느리고 소극적이다. 따라서 태국인들은 깊은 사고를 하거나 창조적 고통을 기피하고, 무슨 일이든 빨리 끝내기를 바라며 일의 결과가 좋던 나쁘던 상관하려 하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영국인들은 연구하는데 재미를 느끼고 미국인들은 일을 하는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면, 태국인들은 일을 보는 것 그 자체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개인의 감정, 느낌, 관습에 의존하는 성향이 비교적 강하며, 원칙이나 이념보다는 자유를 선호하고 개인간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부모에게 효도함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 은혜를 모를 때에는 "아까딴유"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의식이나 체면을 중시하여 결혼, 장례식, 각종 잔치, 보시 등의 일상 생활상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낭비도 서슴치 않는다.
또한 태국은 권위주의 사회이며 신분사회이다. 건국이래 태국은 왕을 정점으로한 통치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13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여 쑤코타이 왕국을 건립한 이래 1932년에 입헌혁명에 의해 민주주의 제도가 들어올 때까지 태국은 전제군주인 왕을 최고의 통치자로 한 절대왕국이었다. 쑤코타이 왕국에서 아유타야 왕국, 톤부리 왕국, 그리고 랏타나꼬신 왕조(현 짝끄리 왕조)에 이르면서 왕의 성격은 만백성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즉 탐마라차(Thammaracha, Dhammaraja, 정의로운 왕, 법왕)의 성격과 신왕(Thevaraja), 생명의 주인 (Lord of Life), 그리고 전 영토의 주인 (Lord of Land)의 성격을 지닌 카리스마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싹디나 제도에 따르면 태국인들은, 특히 평민은 누구나 상전을 섬기게 되어 있다. 평민은 왕이나 왕족, 또는 관료를 상전으로 모시고, 매년 일정기간씩(처음에는 6개월이었으나 아유타야 왕국 말기에는 4개월, 짝끄리 왕조 초기에는 3개월로 단축 됨) 상전을 위하여 경작하고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등 봉사하고 부역을 하여야 했다. 상전들은 사법권이 없는 평민을 대신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러한 상전과 평민과의 관계를 흔히 후견인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라고 하고 있다. 이 후견인 관계는 태국인의 의식속에 자리잡아 아직도 인간관계를 비롯한 생활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사회는 1932년 6월 24일에 입헌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잘 유지되어 공적인 면에서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엄격히 강조되는 사회였지만 사적인 인간관계는 극히 개인적이며 자유롭고 평화롭고도 낙천적이다. 왕실 및 고위 관료사회를 중심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도입되고 독립유지를 위한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평민의 부역제가 폐지되고 노예제도 해방되었다.
태국인들의 의식은 윤회와 업보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는다"라는 의식을 굳게 믿는다. 특히 악과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당사자가 아니면 후손이 받는다고 믿어 공덕쌓는 일에 정성을 다 한다. 아침마다 탁발나온 승려에게 음식을 바치거나 절의 사업, 예를 들어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원을 수리하거나 승려의 여행, 승려에게 일용품을 지원하는 일 등등은 "탐분(make merit)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행해진다. 어려움에 처한 다른사람이나 동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자비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여긴다.
엣부터 사원은 태국인에게 있어 생활의 중심지이며, 승려는 생활의 스승이자 안내자였다. 그러므로 학교, 병원, 재판소, 오락장, 놀이터, 여행객을 위한 여관, 복지관, 집회장, 박물관, 양로원, 고아원, 창고, 장례식장 등의 기능을 하며, 승려는 종교적인 역할외에 스승, 상담자, 신문물 전달자, 재판관, 의료인, 정부와 국민의 가교 역할 등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은 시골일수록 강하다. 한마디로 불교와 사원, 승려는 태국 사회의 보수성과 일체감의 상징이며, 정신적 총체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승려와 사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태국 사회에서 승려는 절대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왕실에 있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사람은 승려밖에 없다. 승려는 국왕앞에서도 절하지 않는다.
승려가 엎드려 절해야 하는 대상은 부처님뿐이다. 이러한 승려와 승려가 거처하는 사원은 태국 사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1. 교육기관 : 종교에서 경전은 대개 번역하지를 않는다. 일반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되면 가르침의 참뜻이 얼마간은 변하거나 소실되기 때문이다. 한자로 번역된 경전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태국의 불교는 아직까지 팔리(Pali)를 쓰고 있다. 태국어에는 우리말의 한자어 수만큼이나 팔리어와 싼스크릿트어가 섞여 있다. 따라서 글을 잘 아는 사람은 승려였다. 태국에서 승려는 훈장이고 승려가 있는 절은 서당과 같은 곳이었다. 태국어에서 학교라는 의미를 지닌 "롱리얀"이란 말은 근대에 들어와 서구식 학교가 설립되면서 생겨난 신조어이다. 옛날에는 학교라는 단어가 아예 없었다. 절이 곧 학교이고 승려가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이름을 대개는 한자어로 짓듯이 태국사람들도 이름을 대개는 팔리어나 싼스크릿트어로 짓는다. 따라서 글을 모르는 주민들이 작명을 청해오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승려의 일이기도 했다. 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절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 주로 승려들이 일반 학문을 하지 않고 정해 놓은 과정에 따라 불교를 공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험에 합격할 경우에 나름대로 속세에서 배우는 일반 학문의 학위에 버금가는 증서를 받고 그 학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2. 의료기관 : 태국에서 사원은 곧 병원이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병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 글자를 아는 승려들이 주로 민간요법에 관한 서적을 읽고 의학 지식을 습득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위생과 보건을 돌보기도 했다. 따라서 누가 아프면 먼저 절에 와서 승려를 찾았고 승려에게서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승려들은 민간요법에 의한 의학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3. 사회복지기관 :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승려와 사원은 그 자체가 사회복지기관이기도 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절에 기거하면서 승려의 심부름을 하거나 절의 잔일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태국어로 "데카와트" 또는 "아람버이"라 부르는데 오늘날에도 태국 전역의 사원에 적지않은 아이들이 기거하고 있다. 또 사원은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잠자리를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자리를 제공해 준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을 여행하면서 절에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밖에도 태국 사회에서 승려와 사원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 국가인 까닭에 불교명절을 중심으로 한 태국의 축제나 큰 행사는 대개가 절에서 열려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화합과 단결을 이루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문제나 주민들간의 불화가 있을 때에도 주민들이 찾아와 의논하고 이를 중재하여 처리해 주는 곳도 승려가 있는 사원이다. 이처럼 사원은 태국인들에게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사원은 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않될 정신적 구심점이며 마음의 안식처이다. 무슨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사원이다. 또 태국인들은 죽으면 승려를 모셔와 염불을 하고 장례를 치른 뒤에는 절에서 화장을 한다. 그러한 까닭에 사원은 태국인의 생의 종착지이며 승려는 삶의 최후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승려수업
승려수업이란 일정기간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로 불법을 익히고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태국의 불교적 전통이다. 태국의 건장한 남자라면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나 한 번 승려수업을 해야만 하는데 이를 "부엇껀비얏"이라고 한다. 또 승려수업을 하지 않은 사람을 "콘팁"이라 해서 '익지 않은 사람' 즉, 아직 선악이나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미숙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성인 남자라 해서 누구나가 승려수업을 받는 것은 아니며 한쎈씨병, 나병, 간질병, 부채가 있는지, 자유인인지 등등 8가지를 심사해서 통과를 해야만 한다. 또한 태국의 승려들은 227가지의 계율을 지키며 생활하는데 이것을 "파라지카"라 하며 그 중 '살생의 죄', '여자를 범하는 죄', '훔치는 죄', '거짓말의 죄' 등 이 4가지("파티목카"라 칭함)를 범하면 교단에서 추방을 당하고 승적을 박탈 당한다. 태국에는 비구니들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옛날에는 332가지의 계율을 지켰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어려워 자동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일단 승려가 되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생활이 계율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아침 6시 전에 일어나게 되면 모두가 침소에서 나와 목욕을 하고 정해진 장소에 모이게 된다. 승려들이 모두 모이게 되면 마을에 탁발을 나가게 되는데 마을 전체를 구역별로 분류하여 거기에 따른 조를 편성하여 나누어 가게 된다. 따라서 어느 한 집도 승려가 다녀가지 않는 집이 없다.
태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독실하여 스님에게 공양하기 전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다.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면 지정된 장소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절대로 자신의 밥을 퍼서 먹을 수 없다. 절에서 일하는 소년들이 밥과 반찬을 떠서 바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 이를 "빡껜"이라 한다. 이는 승려는 남이 주는 밥만을 먹어야 한다는 불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불교와 태국인
부모로 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이른바 모태신앙으로 불교가 태국인들에게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태국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불교문화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태국에는 현재 2만 9천 여개의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은 태국인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수시로 찾는 곳으로 정신적인 안식처로 또 하나의 집이라 할 수 있다. 태국인들은 절교하는 것을 "시주그릇을 엎는다"고 한다. 태국인들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승려에게 시주하며 1년을 시작하는 새해 첫날에도 시주로 한 해를 시작한다. 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단순한 목걸이가 아니라 스님상이다. 태국인들에게는 어느 스님은 질병을 걸리지 않게 하는 영험이 있으며 어느 스님은 재물을 가져다주는 영험이 있고 어떤 스님은 화를 입지 않게 하는 영험이 있다는 등의 믿음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총에 맞았는데 총알이 옷만을 뚫었을 뿐 살갗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그것이 다 그사람 목에 걸고 있는 스님의 영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스님들은 사고 팔기도 하는데 스님상 중에 어느 것이 영험이 좋다고 알려지면 그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일부 절에서는 사진을 곁들여 신문에 판매 광고를 내기도 한다.
태국인들은 태어날 때는 집에서 태어나지만 죽어서는 모두가 절로 간다. 태국의 절 안에는 화장터가 있어 업을 다한 사람의 육신을 화장하고 영혼을 받아들여 쉬게 한다. 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태국의 불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