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토요휴업일에 학교 나가 보고서 마무리를 한다. 점심으로 박춘하 한계수 등과 동면 팥죽집에서 국수를 먹었다. 차를 유마사로 운전하여 나무기둥이 가로막은 절 입구에 차를 세우니 두시쯤이다. 한창 공사 중이어서 파헤쳐진 흙길을 따라 올라간다. 지난 9월의 물은 다 사라졌고, 나무도 붉은 기운이 완연하다.
새로운 길을 가볼까 생각하다 용문재를 향하고 오른다. 30여분 오르다 옹달샘에서 물을 마신다. 용문재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는데 몇몇 사람을 만난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바위를 올라 봉에 오르는데 세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소주에 족발을 먹고 있다. 권하는 소주 세잔을 마시며 애길 나누다 보니 동면중 뒤의 도로공사하는 기술자들이다. 차분히 죽치고 앉아 애기하며 같이 먹는다. 40분 정도나 앉아 있었다, 조금 뻔뻔하다.
먼저 일어나 정상을 향하다 만난 용담을 찍어보는데 자신이 없다. 예쁜 꽃이다. 바람이 서늘하다. 전망이 좋다. 주암호가 군데군데 빛을 발하고 멀리 지리산이 완연하다. 곡천 쪽을 찍어본다.
집게봉 쪽으로 방향을 잡고 중봉에서 머뭇거린다. 지난번에 본 암반 위의 물이 좋아 그리로 내려간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이다. 지난 번 폭포와 같았던 바위 위의 물은 졸졸 그 흔적도 찾기 어렵다. 경사 진 바위 위를 수련삼아 걸어온다. 스릴이 넘친다.
물이 고인 곳에 단풍잎이 떠 도는데 옷을 벗고 들어간다. 종아리가 시리다. 이 추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참아보지만 금방 밖으로 나오고 만다. 가을 오후의 양광은 금방 힘을 잃는다.
어쩔 수 없이 땀에 절어있는 속옷을 챙겨입으니 그래도 개운하다. 유마사에 들르니 여스님이 빗자루로 감나무 잎을 쓸고 있다. 어쩌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마사의 입구를 찍어본다.
다섯시쯤이다. 준환이가 창욱이 아버지에게 가자는 전화가 생각 나 광주로 갈까 순천으로 갈까 고민하다 주암호 쪽으로 운전한다.
6시가 넘자 라디오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 좋고, 해가 넘어가며 이룬 자연 풍광이 아름답다. 차를 두어번 멈추고 구경한다. 사진도 찍어본다. 해질녁 떠나는 이의 마음이 어떤 건지 짐작간다.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이 떠나는 것인가? 갇힌 자의 떠남인가? 머무르지 못하는 자의 떠남인가? 고인돌 공원 넘어가며 어두워지는데 들국화가 가드레일 너머서 나를 부른다.
벌교 삼성병원 주차장에 차를 두고 준환이의 트럭을 영국이랑 셋이 타고 순천 성가롤로 병원으로 간다. 아버지는 오른 부위에 힘도 조금 가하시며, 발음 연습도 하신다. 누님은 유치원 선생님보다 친절하게 아버지를 ‘가르치시고’ 아버지는 유치원생보다 더 말을 잘 듣는다. 누님은 서울로 모시고 가 한방 치료를 더 해 보실 참이랜다.
셋이서 나와 점암곱창집에 가서 소주를 마신다.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진 자의 모습을 보이려는 친구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도마에 올랐다. 우리 나이가 그런가? 나는 거기에서 자유로운가? 셋이서 노래방을 나왔을 땐 우린 조금 취해 있었고, 술에 취하자 친구들을 찾았지만 아무도 응답이 없다. 12시 넘어 한모형님이 나온다. 대단하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데 주인여자가 절반을 더 먹는다. 영국과 준환이도 어디로 가버리고, 한모형이 태워주는 택시 타고 벌교의 어느 여관에서 잠을 잔다.
눈을 뜨니 10시가 넘었다. 두통에 물만 한 병 마시고 몸을 씻고 나선다. 버스 터미널 앞이다. 앞문을 버리고 뒷계단을 도둑처럼 내려온다. 그리고 담을 넘어 거리로 나서니 눈이 부시다.
차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철로를 걸을까 하다가 중도방죽을 따라 간다. 공사 중인데 갈대와 억새가 가득하다. 철길 아래의 개펄에 물이 돌아가고 갈대 너머로 노란 벼논이 좋다.
곱게 비질하여 가지런한 억새가
저리 힘모아 부드럽게 하늘을 쓸었으니
가을 하늘이 어찌 맑지 않을까?
내게도 저 하늘처럼
내 마음 한번씩 쓸어줄 그 무엇 하나 있었으면---
공사장에서 진흙 한 뭉텅이를 들고 큰 길을 걷는다. 인도에 평생 오른손을 들고 고통을 감내하며 수도하는 노인을 생각하며 이 흙덩이를 평생 들고 살아볼까 하는 엉터리 생각도 해 본다. 아니 내겐 이 흙덩이보다 더 쓰잘 데 없는 그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차들은 무어 그리 화나는 것이 많은지 소리소리 지르며 내 곁을 지나간다.
덥다. 땀이 밴다. 겉옷을 팔에 걸고 걷는다. 도로 옆 농로로 내려간다. 훨씬 좋다.
지하도를 지나 논둑을 타고 집을 지나다 담 너머 익은 감을 딴다. 하나를 배어 무는데 개가 짖는다. 오기로 담에 올라 큰 감이 두개 달린 가지를 꺾는다. 개가 짖는데도 무시하는 건지 인기척이 나는데도 내다보지 않는다. 유람하며 걸은 길 50분쯤 걸렸을까? 병원 주차장에 이르니 차가 없다. 허허, 하하하 소리내어 웃는다. 다시 여관으로 걸어가긴 이젠 싫고, 택시는 너무 빠르고, 버스 정류장을 찾아 삼광중학교 쪽으로 나간다. 순천 가는 길목에서 차 한대가 멈추더니 정화형네 가족이 내린다. 강일이까지 순천의 결혼식에 간단다. 한모형님을 만나더니 다정한 형님을 또 뵈니 좋다. 내가 차 찾아 헤매는 줄 안다. 차를 돌려 나를 터미널 앞에 내려준다. 감을 강일한테 준다. 12시가 다 돼 간다.
차를 끌고 충전한 후 낙안으로 간다. 주차장엔 관광버스가 몇 대 서 있고 성곽 위엔 깃발들이 펄럭인다. 이달말에 음식문화축제를 한단다. 한 집에서 거절 당하고 또 다른 넓은 집에서 혼자도 밥 주냐하니 앉으랜다. 편한 걸로 주라하니 된장찌개를 준다. 건더기는 남고 국물이 금방 마른다. 밥을 먹고 느릿하게 낙안온천 아래에 차를 세우니, 12시 50분이다.
잔돌이 굴러내리는 길을 오른다. 해는 온몸으로 쏟아지고 금방 진땀이 난다. 아, 물 준비도 안했다. 30분 정도 오르자 바위가 나타나자 그리 오른다. 500미리 물통에 반쯤 남은 물을 한 숨에 마셔버린다. 배낭을 베고 눕는다. 지나는 이들의 애기소리가 꿈결처럼 들리더니 30분 정도 잤다. 정신을 차리고도 한참을 하늘보고 누워있다가 서서히 일어나 오른다.
금강암 평상엔 등산객이 가득하고 스님은 가스렌지에 물을 끓인다. 물을 얻어 먹을까 하는데 뒤로 돌아도 물이 없다. 돌아와 바위에 새로 새겨둔 관음불상을 본다. 언젠가 앉아 사진을 찍었던 암벽에 볼이 통통한 관음상이 하얗게 앉아있다. 볼썽 사납게 알루미늄으로 불단 앞을 꾸몄는데 엉터리다. 차가운 쇠파이프와 철망으로 사방을 막아두었다. 여유 없어 보인다. 이러지 않았는데.
정상에 오른다. 금전산 667미터. 돌무더기 탑을 쌓은 저 옆에 작은 돌에 검은 글씨를 새겨 두었다. 조계산 쪽을 보며 한참을 앉아있다 온다. 다시 금강암에 오니 사람은 없고 물통에 컵을 덮어 부엌앞에 내 두었다.
물을 두 컵 마신다. 주변에 물 나올 곳이 보이지 않은데 고맙다. 내려오니 3시 30분. 작은 산에 두시간 반 이상을 있었다. 바위 위에서 잠 잤으니 신선에 조금 가까워졌을까? 낙안 온천에 가서 물부터 마시고 앉아 있다가 나온다. 저녁 어두워지기 시작한 길을 광주로 잡아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