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중 제2막에 사랑하는 여인 엘비라의 창가로 달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달이 환하게 밝아 있고, 발코니로 나온 엘비라는 만돌린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조반니의 사랑스러운 노래 '나의 아름다운 보배여'를 듣고 행복에 겨워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이 부분에다가 'Standchen'이라고 적어 놓았다. 즉 '세레나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세레나데(Serenade)의 가장 기본적인 전형이다. 다시말해서 세레나데는 달밝은 밤에 연인의 창곁에 나가 간단한 반주 악기와 함께 사랑의노래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바로크 직후나 고전파 시대에 이러한 실례(實例)는 널리 성행했고 사랑을 구애하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그러나 그것만을 세레나데라는 음악형식의 '모든 것'이라고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오히려 연인의 창곁에서 부르는 밤의 노래라는 의미는 극히 한정적이고 부분적이다. 세레나데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아름다움과 특성은 다양한 형식을 음악형태로 나타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장르를 이룰 정도로 풍성한 양적 질적 팽창을 보여준다.
세레나데를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소야곡(消夜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기는 어디까지나 일본식 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우리식 표현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냥 세레나데라고 부르는 것이 휠씬 자연스럽다.
이 말은 원래 이탈리아어의 'sere(저녁 때)'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본래적인 말뜻에 가장 충실한 것이 앞서 예를 든 성악곡의 형태다. 이럴 경우의 세레나데는 그 창자(唱者)가 반드시 남성이어야 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선율미에 있어서도 단순하고 따라부르기 쉬우며 간편한 악기를 동반하여 부르는 것이 전형적인 형태에 세레나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의 세레나데는 그 용례(用例)가 다양해서 어느 특정한 형태의 음악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돈 조반니>의 경우처럼 오페라의 일부분으로 삽입되어 극의 흐름을 유연하게 함으로써 잠시 편안한 상태로 듣는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한 예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호프만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순수한 연주회용 아리아에서도 세레나데의 기법이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연주회용 세레나데는 그 본래적 용법에 잘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오히려 기악곡의 발달과 함께 세레나데를 찾아보는 것이 휠씬 효과가 있다. 세레나데를 그저 '노래'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악적인 형식의 세레나데는 매우 신선하고도 흥미로운 음악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기악형식의 급격한 발달이 이루어진 18세기 중엽부터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에 어울리는 세레나데 음악이 널리 쓰여져 왔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작곡가는 모차르트일 것이며, 모차르트의 수많은 실내합주용 작품을 통하여 세레나데 특유의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가 정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이런 종류의 음악을 작곡하면서 단순한 음의 장난 정도로 여기고 쉽게 쓰지는 않았다. 여흥과 오락을 위한 음악으로 세레나데가 작곡되었으면서도, 거기에는 모차르트 특유의 구조적인 아름다움 등이 잘 조화되어 순수 기악곡으로서도 손색 없는 우수함을 들려 주고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오케스트라용 세레나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제13번 G장조다. 흔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로 잘 알려진 이 작품을 통하여 모차르트는 기악합주용 세레나데의 완벽한 정형(定型)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기악용 세레나데는 모차르트가 특히 관심을 두었던 분야이기도 해서 모두 13곡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부제(副題)를 달고 있는 제6번<세레나데 노투르나>, 제7번 <하프너>, 제9번<포스트 호른>, 그리고 제10번<그랑 파르티타>같은 작품들은 순수 감상용 관현악곡으로도 널리 연주되고 녹음되어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모차르트는 세레나데란 이름 이외도 디베르티멘토, 카사치오네, 노투르노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이 모든 것들도 역시 넓은 의미의 기악합주용 세레나데의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세레나데 작곡가가 모차르트라고 해도 결코 잘못이 아니다.
세레나데는 모차르트 이후에도 관현악용이나 현악합주용으로 발전하여 그 본래적 목적에 상관없이 작곡가들이 취향을 우아하게 이끌어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예컨데 브람스가 남긴 두 곡의 오케스트라용 세레나데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 경우에는 세레나데가 어떤 사랑의 뜻을 담은 노래라는 형식성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순수하게 관현악적인 기법과 재능을 과시하는 표현수단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브람스가 세레나데 작곡에 뜻을 둔 것이 자신의 오케스트라 용법을 세련되게 가꾸어 보려는 실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음미해 볼 만한 일이다.
브람스 이후에도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수크, 엘가 등의 작곡가들이 현악합주용 세레나데를 작곡했다. 이 음악들은 모두가 관현악을 제외한 순수 스트링 앙상블의 효과를 내고 있어서 그 유려하고 달콤한 분위기가 사뭇 모차르트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세레나데가 현악합주용으로 작곡되었다고 해서 그 기본 정신성이 원형의 의미를 완전히 탈피해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현대적인 접근법으로 세레나데를 작곡했다고 하지만, 역시 이런 종류의 음악에는 18세기적 사회 분위기가 은은하게 깔려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도 세레나데는 역시 세레나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