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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학교운동 회고담
서길원(현 성남 보평초등학교 공모교장)
역사의 그림자
오늘 아침 8시, 나는 두 아들과 함께 아내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의지해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45년 세월을 살며 아직도 2종 운전 면허증이 없는 구식 교사이기에 많은 것을 교사인 아내에 의지하며 산다. 내가 근무하는 남한산초등 학교는 해발 400미터 정도의 남한산도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성남이나 서울 방향에서는 승용차를 타고 추락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산길을 15분 정도 올라야 한다. 남한산 도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산성 안에 들어서면 20만평이 넘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조선왕조의 건물과 산성 그리고 식당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한산성의 중심부인 침괘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른쪽에는 구한말 이전까지 광주 관아가 있던 행궁이 새롭게 복원되어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왼쪽으로는 소나무 숲 아래 청록색 기와로 가지런히 덮힌 단층 건물과 운동장이 보인다. 거기가 남한산초등학교다.
나는 지난 여섯 해를 남한산 산길을 오르내리며 봄볕에 산에 쌓인 눈이 녹고, 나무에 새싹이 돋고, 우거졌던 신록이 낙엽 되어 길가에 뒹구는 모습을 보며 지냈다. 그 사이 다섯 살 때부터 이 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며 나를 따라다니던 큰 아들이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올해 이 학교 병설유치원을 졸업하고 1학년에 입학했다.
남한산초등학교가 있는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서울 강남, 서초, 송파, 강동, 경기도 하남, 광주, 성남이 이곳의 행정 관할이었다. 인근 지역의 군사, 행정, 경제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안에는 1,000호 이상이 살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남한산초등학교는 일제의 교육칙령이 내려진 이듬해인 1912년에 공식적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1918년 일제는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가 산재해 있는 남한산성에서 모든 관청과 주민의 대부분을 광주시 경안 일대로 강제 이주시키고, 산업화과정을 겪으며 나머지 주민 일부가 떠나 현재는 100여 가구만이 이곳에 남았다. 거기에다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은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할 수 없어 외부의 인구 유입이 불가능했다. 남아있는 주민들은 대부분 공원지역을 찾는 행락객을 대상으로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학구에 거주하는 주민 감소는 곧 학생 수 감소로 이어졌다. 남한산초등학교는 1996년부터는 삼복식 학급으로 운영되었고, 2000년에는 26명까지 줄어 교육부의 “영세초등학교 통폐합 운영 계획에” 따라 이듬해에 통폐합 대상 학교로 지정될 예정이었다.
세상이 사람을 바꾸고
교사로서 살아오면서 아름다웠던 한 장면을 그려보라면 보랏빛 옥잠화 꽃이 교사 처마 밑을 가득 메우던 1996년 여름에 내가 맡은 아이들과 함께 남한산으로 소풍을 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교조 합법화와 관련된 일로 징계를 받고 남한산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의 초등학교로 행정 전출되어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 일요일,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세 번 번갈아 타고 남한산에 소풍 왔다가 점심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우연히 들렀던 곳이 지금의 청록 기와지붕의 남한산초등학교이다. 그 때 처음 보았던 이 학교는 그 동안 내가 보아왔던 사각상자와 같은 학교가 아니었다. 숲속의 공원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학교였다. 그때 나는 ‘이런 학교에서 원 없이 선생 노릇해 보았으면’ 하고 소망했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남한산과 인연이 되어 선생으로 이곳에서 생활한지 벌써 6년째 접어들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마음의 준비도 없이 선생이 되겠다고 전주교육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2년 동안 YH사건, 10.26사태, 5.18 민주화 운동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져서 학교는 문이 열려있을 때보다 닫혀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 와중에 나는 무엇을 배웠는지도 모르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어렵게 전라남도 고흥에 발령을 받아 초임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 정권 시기여서 학교에서는 국민정신 교육을 열심히 해야 했다. 젊은 교사들 몇몇은 숙직실에서 광주항쟁 불법(?) 비디오를 은밀하게 보았다. 총각인 나는 학교 관사에 혼자 살면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아이들과 열심히 사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3년차 되던 해부터는 과학주임 자리를 맡게 되었다. 당시는 과학 영재 교육의 중요성을 부르짖던 시기였다. 나는 6학년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과학 영재반을 맡아서 정규 수업 전에 매일 한 시간씩 더 가르쳤다. 당시는 교과 전담도 없던 때라 정규 수업 32시간에 6시간을 합해서 매주 38시간 수업을 한 셈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인데 그 때는 열정 하나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시험지는 교사가 직접 만들었다. 기름먹인 종이를 철필로 긁어서 원지를 만든 다음, 원지 아래에 갱지를 놓고 끈적끈적한 등사 잉크를 바른 로울러를 원지 위에 굴리면 철필 자국을 따라서 잉크가 갱지에 스며들었다. 손으로 로울러를 한 번 굴리면 시험지가 한 장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손에 잉크를 묻혀가면서 시험지를 만들어서 매달 시험을 쳤다. 시험을 치고 나면 각 학급에서는 평균 점수를 교장에게 보고하고, 그 결과는 교장실 벽에 있는 막대그래프에 학급별로 표시되어 비교되었다. 마치 보험회사의 영업 실적표처럼.
그러던 중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일손을 던다는 핑계로 학습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시험지를 무상으로 받아서 시험을 치르고, 그와 함께 문제집을 팔아주면서 사례비를 챙겼다. 교사들의 업무를 경감한다는 명분 하에 학교장과 일부 선배교사들이 은밀하게 거래한 것이다. 교사는 시험지를 밀지 않아도 되고 상전들은 뒷돈을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문제집을 학생들에게 강매하지 않은 몇몇 교사들은 한편으로는 월말고사에서의 학급평균 하락이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과서보다는 문제집을 열심히 푸는 동료교사를 보면서 교사로서의 양심이 무엇인지 자문해야했다. 이 때도 30대 후반의 선배교사들은 승진을 위한 점수를 관리하기 위해서 학교장 앞에서는 무기력해 있었다.
초임인 나는 이 문제를 교무실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 문제에 깊숙히 개입되었던 교사가 내게 유리 재떨이를 내던지고, 나를 위협했다. 나 또한 퇴직을 각오하고 비리와의 전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교장은 시험지를 등사해서 시험을 보게 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였다. 그렇지만 이듬해에 다시 문제집이 들어오고, 사례비는 학년 친목 활동비로 전환됨으로써 모든 교사를 공범으로 만들어 갔다.
이렇게 초임 학교에서 이 년 더 근무하면서 나는 '학교는 아이들을 위해 존립하는가?', '성실한 교사는 모두 훌륭한 교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로 전출을 희망해 강원도와 충청북도와 경기도가 만나는 여주의 6학급 벽지학교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여주읍에서 하루 네 번 버스가 운행되고 승용차로 1시간 쯤 거리가 되는 학교였다.
여주에서의 교직생활은 나에게는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한편으로는 시골의 순박한 아이들과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시기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교조 파동으로 좌절을 겪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이오덕 선생님이 이끌던 글쓰기교사 모임에 참가하면서 교육 현실에 대해 눈을 떴고, 선배 교사로부터 참 교사상을 보고 배웠다. 젊은 내 눈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페스탈로찌 교사는 그 곳에 다 모여 있고, 의식화 교사도 다 모여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모두들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렸다. 붕어빵과 호떡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교실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교사로서 살아가는 길인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립고등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비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인 학교운영과 재단의 전횡을 들으며 가슴을 아파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전교조의 전신인 교사협의회에 참가하고, 이후 전교조 활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다가 전교조 결성과 관련된 파동을 겪으며 나는 도망치다시피 여주를 떠나 성남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렇지만 나는 성남에서의 생활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했다. 나는 여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겠노라 다짐하며 1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이때 내가 근무했던 대신초등학교 학부모 중에는 농민운동에 참여하는 분들이 많았다. 대신면은 여주에서도 농민운동이 힘찼던 곳이었다. 이때 해체 가정이 학급에서 3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농촌지역의 가정 해체 문제는 심각했다. 엄마가 집을 나가 아빠나, 할머니 품에 자라는 아이의 대부분은 빈곤과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농촌교육에 대한 대안을 갖지 못하고 농촌이 교육의 가막소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나는 농민운동하는 분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한편으로는 당시에 막 태동하던 열린교육 운동에도 관심이 있어 각종 세미나에도 열심히 참여하곤 했다. 여주에 뿌리를 내리고 농촌교육 운동을 하겠노라고 소박한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은 이런 소박한 소망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는 1994년 전교조 합법 및 해직교사 원상복직 관련 서명 관련으로 징계를 받고, 경기도 광주로 행정 전출을 당해 농촌교육 운동의 꿈은 깊은 동면에 빠져야 했다.
내가 새로 근무하게 된 만선초등학교에는 농촌 같지 않은 7학급 시골학교였다. 학교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의 허리는 골프장 공사로 잘리어 나가고, 거리 곳곳에는 골프장 공사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경치 좋은 계곡 주변에는 전원주택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고, 도로가에 중소 공장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또한 그 즈음에 정보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가정에서는 일터에서 늦게 들어오는 부모를 대신해 비디오와 컴퓨터와 게임이 자리를 지켰다.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에게조차 음란물이 무방비로 열려 있었다. 내가 이런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과 들로 다니며 공부도 하고, 학교 꽃밭에 꽃도 가꾸고, 텃밭에 채소도 심고, 개울에서 고기도 잡으면서 놀아주는 일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2년 간 근무한 뒤, 총각 자취 생활을 접고 홀로 계신 어머니와 함께 살며 출퇴근할 생각으로 성남으로 내신을 냈다.
성남으로 발령받은지 6개월 만에 인근 학구에 신설되는 학교에 근무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학교는 성남지역에서도 주거조건이 열악한 상대원동에 위치해 있었다. 고등학교가 이전한 뒤 급히 초등학교로 리모델링한 학교였다. 초임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선배교사인 교무부장과 교감 선생님이 연구부장으로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나는 신설학교에서 새로운 꿈을 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합류를 결정했다. 9월 1일자로 개교한 신설학교다 보니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36학급의 교사 가운데 삼분의 이가 신규였다. 많은 게 어설펐다. 하지만 학교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선생님들은 즐겁게 생활했다. 그 당시 일반적인 권위적인 학교의 모습과는 달랐다. 햇병아리 교사들이 열심히 회의에 참가하고 의견을 내고 그것들이 받아들여졌다. 모두가 주인공처럼 일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누구하나 시키는 사람 없이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도 학교에 나와 일하곤 했다. 교사들은 서로 따뜻했고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께서도 자상하게 교사들을 이끌어 주었다. 이런 화목한 교직원 분위기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늦장가를 드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는 여전히 공문서에 의존해서 운영되고, 공문서는 해가 갈수록 폭증했다. 학교는 아이들이 처한 조건보다 교육청의 행사나 시책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연구부장인 나는 당시 한창 열풍처럼 유행하던 열린교육 연구 시범학교를 찾아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마다 한결 같이 판에 박힌 수업 행사를 보면서 이런 수업을 왜 하는지 스스로 물었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과 운동도 교육 관료들 손에 들어가면 ‘오렌지도 탱자가 된다’는 속설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교육 현실에 더욱 회의가 들었다.
이 즈음 참교육실천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학급운영에 관심을 기울이고, 학급행사를 중심으로 학급운영의 방향을 모색했다. 나는 전교조에서 초등학교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학년 교육과정 만들기 운동을 통해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교과 활동을 하던 사람들과 함께 소모임을 통해서 구체화하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교육부에서 교과교육 연구 모임을 공모했다. 이 때 학년 교육과정 만들기 소모임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팀들이 응모해서 입상하고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 남한산초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사들도 이때 소모임 활동과 교과교육연구 공모에 참여했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런 활동 덕에 나는 전교조 합법화와 함께 경기지부 정책실장 자리를 제안 받아 잠시 외도하게 되었다. 그 동안 참교육 실천운동을 함께 한 사람들이 요청하는 지라 의리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교육청과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 간에 새로운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학교개혁의 기틀을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단체 교섭이나 협의 등의 과정을 통해 내가 만난 다수의 장학 관료들의 모습은 커다란 산과 같았다. 일반 교육 행정직은 그래도 대화가 수월했다. 대체로 법규와 규정 그리고 예산과 교육적 근거가 합당하면 접점을 쉽게 모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장학 관료는 달랐다. 교육적 근거나 규정이 합당해도 학교장들의 정서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한치 앞도 나갈 수 없었다. 어떤 제도도, 어떠한 개혁적 조처도, 어떠한 합리적 이성도 이들의 관행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교육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하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희망을 만들고
2000년 10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교조 경기지부 사무실에 뜻밖의 전화 한통이 찾아들었다. 전화의 주인공은 정채진 씨였다. 나는 이 분을 성남시 은행동 빈민가에서 공부방을 운동을 할 때부터 알게 되어, 학교에서 동화읽는어른모임 만들기, 학교 도서관 만들기, 민주적 학교 운영위원회 만들기 활동 등의 일로 친분이 있었다. 전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남한산초등학교가 폐교 직전인데, 남한산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성남에서 학생들이 전학을 신청하면 받아 줄 수 있다고 하니 아이들을 성남에서 남한산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켜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콩나물시루 같은 도시학교보다 가족 같은 규모에 자연환경까지 갖추었으니 아이들 정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선택했지만, 좋은 자연환경도 하루 이틀이고 결국 좋은 학교를 만드는 것은 좋은 선생님이므로 좋은 선생님을 추천해 주시고 함께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남한산초등학교 인근에서 근무하던 안순억 선생님을 소개했다. 안 선생님은 전국 교과교육 공모 사업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조직 활동도 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런 일에 제격이라고 판단했다.
정채진씨는 남한산과 이웃하고 있는 성남시 은행동에서 “동화읽는어른모임”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었고, 이 단체에서는 2000년 7월에 남한산초등학교에서 “남한산 역사이야기 캠프”를 이틀 동안 열었다. 이들은 산에 둘러싸여 있는 남한산초등학교의 자연환경에 감탄하면서, 2001년 3월이면 이렇게 아름다운 학교가 폐교된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현재의 정연탁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이 만남이 오늘의 남한산초등학교가 만들어지는 시발점이었다.
정연탁 교장 선생님은 2000년 3월에 남한산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남한산초등학교에는 학생 26명, 교사 3명, 교장 1명, 기사 1명의 폐교 직전의 학교였다. 교장 선생님은 부임하자마자 학교의 낡은 시설을 교체하고, 학생들의 수업 결손을 방지하기 위해 교사들을 대신해서 잡다한 잡무를 도맡아서 처리하는 등의 노력을 해서 지역 주민의 호의를 얻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당신이 근무하는 동안 만큼은 학교가 폐교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지역주민에게 선언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학생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정채진 씨 등은 성남 지역 학생의 전학을 받아주겠다는 약속도 쉽게 받아낼 수 있었다.
이들은 야영을 마치고 돌아가서 “작은 학교 살리기 및 새 학교 만들기”라는 취지 아래 “전입학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동화읽는어른모임 회원 및 이웃 사람들에게 학교의 여건과 형편을 설명하고 전학 또는 입학 희망자를 모집했다. 당시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은행초등학교에 가서 남한산초등학교 전학 홍보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학교에는 과거에 남한산초등학교에 교감으로 근무하던 선생님이 교장으로 있어서 적극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부모들은 대부분 대규모 도시학교의 폐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터라 예상보다 많은 부모들이, 예상보다 넓은 지역에서 전학을 신청해왔다. 추진위원회는 신청자 가운데 남한산초등학교와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전입생을 선정했다. 2000년 12월과 2001년 2월 두 번에 걸쳐서 50여명의 학생을 전학하게 하고, 3월에는 20명의 신입생을 입학하게 했다. 이 아이들 중에는 기존학교에서 부적응을 겪은 아이가 20%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에 이르기까지 이십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전학생 선정 기준과 방법, 새로운 학교의 프로그램, 새 학교에서 학부모의 역할과 위상, 적임 교사 초빙, 통학버스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 밖에도 이들은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하게 될 교사들과 함께 새로운 학교 만들기 공동 연수를 진행하고, 교육활동 우수학교를 견학하기도 하였으며, 2001년 2월에는 교사들과 함께 그 동안 방치되어있었던 학교 시설과 환경을 다시 정비하였다. 당시 학교 준비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안순억 선생님은 그 때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아직도 선명히 회상한다. 2000년 11월 19일 스산한 늦가을의 일요일, 그날은 입학 예정 학부모 전원에게 우리 학교의 향후 교육방향에 대해 내가 발제를 하던 날이었다. 학습관을 꽉 메운 학부모들은 숨을 죽이며 내 어설픈 그림을 경청했고, 이어진 토론에서는 학교교육 전반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새 학교에 대한 기대가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막연히 머릿속에만 있던 교육주체들의 새로운 교육에 대한 갈망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서둘러 함께 할 교사들을 찾아 나섰다. 동화를 쓰는 김영주 선생님이 흔쾌히 동참해주었고, 최지혜 선생님이 합류해주었으며, 전교조 경기지부 정책실장으로 근무 중이던 서길원 선생님이 2001년 1월 1일자로 근무가 만료되어 우리학교에 먼저 부임하게 되었다. 남한산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선생님 세 분 중 한 분은 전근을 가셨지만, 나머지 두 분은 우리보다 더 깊은 교육적 열정과 힘을 지닌 분들이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남한산초등학교에서는 그 동안의 준비 과정, 추구하는 학교상, 학교 운영 방안, 인사 및 시설 개선 요구 사항을 담은 “새로운 학교, 남한산초등학교를 만들기 위한 기초계획서”를 광주시 교육청에 공문으로 발송하고, 여러 교육계 인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교육청으로부터 유치원 교사를 포함하여 남한산에 지원했던 교사 네 명이 순조롭게 발령을 받고 교감, 행정실장과 교사 한 명을 추가로 배정받았다. 이렇게 해서 남한산초등학교는 2001년 3월에 6개 학년 6학급 학생 103명, 교사 7명, 교장과 교감 각 1명, 유치원 교사 1명, 행정실장 1명, 기사 1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폐교되기만을 기다고 있던 남한산초등학교에 2000년 9월부터 2001년 2월까지 6개월 사이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필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나치게 구조화되어 있고 관료화된 학교 틀 속에서 탈주를 꿈꿔 왔던 사람들의 만남이 그러했고, 학부모와 교사, 학교장과 지역 교육청 그리고 지역사회의 만남이 너무도 조화로웠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일 이 때 어느 한 곳에라도 문제가 있었다면 오늘날의 남한산 교육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현재의 남한산초등학교 교장이신 정연탁 선생님과 처음 교장실에서 만났을 때의 일이다.
"이번에 들어오는 교사들 대부분이 전교조 교사들인데 괜찮겠습니까?"
내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고양이가 쥐를 잘 잡으면 되지 검은 고양이냐, 흰 고양이냐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선생이 애들만 잘 가르치면 되고, 교장이 이것을 잘 도우면 되지 않겠어요"
교장 선생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민주적으로 경영하고, 한 줄 세우지 않는 교육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도 곁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정적으로 교장 선생님의 이런 생각과 학교 경영관이 새로운 꿈을 꾸는 교사들의 생각과 합치했기 때문에 남한산초등학교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이런 열린 학교 경영으로 인해 지역 교육청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전교조 교장이라느니, 교사들에게 쥐어 사는 교장이라느니 등의 억측과 소문도 들어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 남한산초등학교는 거듭났다. 그러나 우리 학교가 거듭났다는 것은 단순히 폐교되지 않고 학생 수가 들어났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거기에 머물렀다면 그것은 폐교를 한 번 미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 학교의 거듭남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처한 조건 속에서 우리가 놓여있는 한계를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폐교 직전의 농촌 소규모학교였기 때문에 전면적인 개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우리는 학교를 친환경적이고 아이들 생활 중심의 교육 환경으로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했다. 남한산초등학교는 도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으므로 주변의 자연환경이 뛰어났다. 또한 남한산초등학교는 복식수업을 하는 영세학교이다 보니 교육청의 관여와 행사 동원, 공문서의 부담이 적어 상대적으로 학교 안의 자율적 활동의 폭이 넓었다. 우리는 이런 조건을 이용해서 친환경적이고 아이들 생활 중심의 교육 환경을 만들었다. 둘째, 남한산초등학교만의 고유한 교육과정 활동을 만들었다. 남한산의 숲, 병자호란의 유적 등과 같은 지역의 자연, 문화, 역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삶과 함께 하는 체험중심의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전교생 130여명의 6학급 소규모 학교이다 보니 교사 수가 적을 수밖에 없고, 그런 속에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나 외부 전문가와 연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연계해서 ‘계절학교’, ‘숲속학교’ ‘남한산 순례’, 모두가 함께 하는 ‘다모임’, 학생 하나하나가 주인공이 되는 입학식과 졸업식과 같은 독특한 교육과정 활동을 만들었다. 셋째, 공동체학교를 지향하게 되었다. 학부모와 교사가 함께 나서서 “작은 학교 살리기 및 새 학교 만들기” 운동에 나섰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민주적이고 공동체적인 학교를 모색했다. 익명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작은 학교다 보니 개방적인 학교 풍토와 사람 간의 소통과 결합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 학교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실천해 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가능한 일부터, 잘못된 것을 고치는 일부터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작은 학교 교육의 특성을 살려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즐거운 학교,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일이 관료주의적 관행에 찌든 학교를 과감하게 뜯어 고치는 일이었다. 통제와 지시 그리고 경쟁이 지배하는 회색 공동 시설물과 같은 학교를 자발적인 즐거움이 살아있는 역동적인 학교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권위주적인 시설물을 철거하고, 일본제국주의 시대부터 유지되어 온 관리 위주의 학교 체제를 어린이의 정서와 생활을 고려한 체제로 바꾸어 갔다. 주번, 운동장 애국조회, 경쟁과 선발 위주의 시상 제도 등의 낡은 틀과 관행을 바꾸었다. 교사들의 회의도 민주적인 협의가 살아있도록 했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
남한산초등학교는 ‘참 삶을 가꾸는 작고 아름다운 학교’라는 슬로건이 내보이는 것과 같이 아이들이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하고자 했다. 학교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각종 시설과 환경, 그리고 학교 운영 관행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을 여기에 적합하게 바꾸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가운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학교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 아이들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각종 체험학습 활동을 자주 하게 하고,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아이가 다함께 참여하고 협력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남한산초등학교를 새롭게 혁신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아이들이다. 그동안 국가 또는 학교장이나 교사들에게 있었던 학교의 주인 자리를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현재 우리 학교에 재학하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이전의 학교에서 부적응을 경험했다. 어떤 아이는 이전 학교에서 몇 달씩 학교에 나가지 않았고, 어떤 아이는 아예 한 학년을 건너뛰었고, 어떤 아이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이 학교에 전학하였다. 지금 이 아이들은 남한산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방학을 원망할 정도로 학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즐겁게 생활한다. 아이들의 표정도 밝게 살아났고 전학 초기에 아이들 사이에 만연했던 욕설과 폭력이 사라졌다. 교사와 학부모의 노력도 이런 결과가 나타나도록 한 요인이지만, 그 노력의 핵심에는 아이들의 생활 리듬에 맞춘 ‘학교 시스템 만들기’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학교 환경 만들기’가 자리잡고 있다.
먼저 우리는 권위주의적인 관행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났다. 권위주의적인 통제가 아닌 자율과 합의를, 경쟁이 아닌 자기 주도성과 협력을 지향하는 교육을 하고자 했다. 애국조회, 반성조회 등 전체 운동장 조회를 없애고 조회대를 치웠다. 교사 주번제도 없애고 아이들 주번도 없앴다. 경쟁에 의한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대회와 시상제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아이들을 ‘한 줄 세우지 않는 교육’을 표방했다. 지역 교육청 등에서 실시하는 각종대회에는 거의 참가 하지 않았고 졸업식에서도 외부 기관에서 제공하는 상을 폐지함으로써 아이들을 서열화하는 것을 막았다.
아이들의 하루 생활 일정도 새롭게 바꾸었다. 어린이의 신체적 특성, 학습 리듬, 놀이 욕구를 고려하여 각 학년이 80분 단위의 블록수업을 실시한다. 오전 1블럭과 2블럭 사이에는 30분의 중간놀이 시간이 주어진다. 2블럭을 마친 다음에는 점심시간이 있다. 아이들은 블록 사이의 중간놀이 시간을 이용하여 운동장이나 놀이터, 학교 뒷산 등에서 마음껏 논다. 놀이 시간만이 아니라 놀이 장소와 시설도 함께 제공했다. 울창한 학교 뒷산에는 오솔길을 만들어 산책로를 만들어주고, 뒷산 느티나무에는 밧줄과 그네를 매달아주고, 운동장의 흉물스런 시멘트 스탠드를 철거하고 잔디언덕을 만들었다. 밤나무 숲에 있던 철제 체육기구와 차가운 시멘트 의자를 모두 치우고 복합 놀이터를 설치했다. 나무벤치와 정자, 작은 연못도 만들어 공원처럼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어 갔다.
교실 바닥은 맨발로 생활할 수 있도록 온돌화하고,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가정처럼 편안한 교실, 정서적으로 안정감 있는 교실을 만들었다. 또한 아이들이 사용하는 학용품과 각종 비품도 아이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제공했다. 학교가 제공하는 학용품과 준비물은 품질이 좋은 것으로 선정하여 가능한 한 6년간 쓸 수 있게 하고, 개인 사물함과 책꽂이를 제공하여 물품을 알뜰하게 관리하게 했다. 바쁜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할 때마다 가정에서 겪는 부담을 덜어주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만들어놓은 관리 위주의 행정편의적인 학교를 어린이의 정서나, 생활공간, 동선,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한 아이들 생활 중심의 학교로 바꾸는 것은 예산의 문제에 앞서 교육적 안목이 중요했다. 아이들이 즐겁고 배우고 자유롭게 생활하기에 적합한 학교 환경을 고민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고, 그리고 나서야 학교 리모델링에 필요한 절차와 경비를 고민했다. 이런 과정을 걸치며 5년간의 작업을 통해 곳곳에 모든 교직원의 땀이 배인 오늘의 남한산 학교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5년의 세월이 지난 결과 지금은 학교 곳곳에서 남한산 나름의 색깔이 배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 전학해 오는 아이들은 일 주일이 지나면 생기가 살아난다. 하지만 전근해 오시는 교사들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데 반 년 가까이 힘들어 한다. 남한산초등학교가 행정적인 지시와 통제가 아닌 교사의 자발성에 의해서 움직이고, 교육청의 공문서나 대회 행사가 중시되지 않고 모든 활동이 아이들의 교육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아이들과 밀착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곧잘 남한산 교사 같지 않다는 질책을 받기도 한다.
삶을 배우는 체험 학습
남한산초등학교는 대안학교가 아니다. 일반 학교와 별로 다름없이 국가에서 정한 교과목을 국정 교과서를 이용하여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것은 마음껏 놀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한산초등학교의 교육과정은 독창적이고 다양하다. 학습의 내용이 아이들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지 않는 체험학습을 중시하고 이를 교육과정화했기 때문이다. 그간의 학교교육이 근대 국가주의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과학, 이성, 지력을 지나치게 중시했다면, 남한산초등학교에서는 예술, 감성, 노작, 인성이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요소로 보고 교육과정을 구성했다. 또한 교과서와 교실 중심 수업을 벗어나 현장 체험 중심의 학습을 일상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체험활동을 자아체험, 생활체험, 자연체험, 예술체험, 역사체험 영역으로 나누고, 토요체험학습, 숲속학교, 여름계절학교, 가을계절학교, 남한산 순례 등의 형태로 체계화했다. 연중 전일제 체험학습을 운영하는 토요일에는 학교가 새롭게 살아난다. 기존의 정규 교육과정을 다양화하여 다양한 학습의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육과정을 분석하고 각 학년에 적합한 체험학습 요소를 추출하고 영역에 따라 크게 분류하고 주제 중심의 교육과정을 구성했다. 이 때 문화재 학습, 학예, 자연생태, 향토, 농사짓기, 공연이나 박물관 견학 관람 등 다양한 체험활동이 이루어진다.
계절학교는 연간 두 차례에 걸쳐 열린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교과 이수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재량시간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는 운영상의 어려움 때문에 재량시간을 교과 시간 가운데 하나인 것처럼 운영함으로써 그 의의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이 한 주제 활동을 선택하고 일 주일 간 집중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연속하여 배치하는 계절학교를 개발한 것이다. 아이들은 계절학교에 참여할 때 대부분 다음해 활동까지 예측하고 계획해서 활동을 선택하기 때문에 학습 의욕이 강하고, 놀라운 집중력과 학습 효과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계절학교를 “흠뻑 빠져 배우는 공부”, “몰입을 배우는 교육과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손끝 배우는 여름계절학교’는 여름방학 직전에 일 주일 동안 생활공예 활동을 중심으로 일 주일 간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목공, 도예, 지공예, 끈공예, 퀼트, 인형만들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각 반별로 초빙된 외부 전문 강사가 아이들을 지도한다.
‘몸과 마음으로 배우는 가을계절학교’는 가을 남한산문화제 기간에 일 주일 간 공연 예술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이 때 합창, 연극, 춤, 무용, 기악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집중적으로 배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교생이 학교예술제와 연극제 무대에 오르게 된다. 특히 학교예술제는 지역축제와 결합되어 개최되기 때문에 전교생이 지역축제 무대에 올라 ‘자신감’을 키우는 중요한 기회가 되고 있다. 그래서 ‘남한산 아이들은 무대 체질’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 외에도 정규교육과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기적성 활동은 전교생의 방과 후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저학년은 사물과 소리를 배우고 고학년은 국악 관현악, 그리고 불가의 전통무예인 선관무(禪觀武)을 배운다. 저학년과 고학년이 한데 어울려 밥을 해먹고 한 텐트에서 잠도 자며 공동체성과 리더쉽을 배우는 숲속학교, 학부모와 함께 가을 남한산을 일주하는 남한산순례, 6학년 중국 수학여행 등도 모든 아이들에게 또 다른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밖에도 아이들은 학년별로 배분된 학교 실습지에서 직접 땅을 일구고 야채나 곡식, 화초를 가꾸고 수확의 기쁨을 맛본다.
이런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교사는 정해진 학급의 학생에게, 정해진 교과를,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만 가르치지 않는다. 담임형, 순환형, 초빙형, 전체형 등으로 교수인력을 다양화하여 학생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와 학습의 경험을 제공한다.
다함께 만드는 공동체 학교
남한산 초등학교는 “다함께 만드는 새로운 학교 공동체”라고 내세울 정도로 교사와 학부모의 참여를 중시한다. 남한산 초등학교가 학부모의 적극적인 참여로 새롭게 탄생한 점도 그렇고, 기존의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학교 운영의 관행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교사와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민주적인 학교 운영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기존의 학교가 지나치게 경직된 관료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됨으로써 교사가 아이들을 자율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교사들은 교과서와 공문서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학교의 의사결정 구조를 민주적으로 만들고, 모두에게 주인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자발성과 열정을 살리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결국 학교의 교육력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문제의식에 근거해서 우리는 학부모총회,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 대표자회의, 학급 학부모회의, 교사-학부모 연석회의 등 다양한 의사소통의 통로를 만들고, 그것이 자리 잡도록 힘을 쏟았다. 또한 학교 홈페이지를 통한 커뮤니티 형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학교 홈페이지를 기획할 때부터 구성원 간의 커뮤니티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 덕분에 지금은 거의 모든 정보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유된다.
교사들은 방학 때마다 1박2일 간의 연수를 갖는다. 연수기간 동안에는 지난 학기의 교육활동을 평가하고, 새 학기 교육계획을 마련한다. 이 외에도 학부모와 합동 연수를 통해 학부모의 의견을 수렴하고, 새 해 교육계획을 수립한다. 이렇게 해서 수립된 교육활동 계획은 학기 중 매주 월요일 오후에 열리는 교사회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실천된다. 교장, 교감, 교사가 참여하여 학교 교육 활동의 중요한 업무와 안건을 협의하고 결정한다. 이런 회의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교장, 교감 선생님의 모습이다. 이 분들은 결코 직함의 권위를 드러내지 않고 교사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지켜봄으로서 신뢰의 관계를 만들고 열정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믿음이 교무실에는 매일 같이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게 했고, 교사들이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힘든지 모르고 달려올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남한산초등학교는 학부모와 지역사회 그리고 각계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학부모의 자원봉사 활동은 매우 활발하고 주체적이다. 운동회, 계절학교, 문화체험학교 등에 학부모가 역할을 분담하고 자원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한다. 가정에서 돌볼 여유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품앗이 학습을 하기도 한다. 대학의 건축과 교수와 설계사가 ‘아름다운 남한산 학교를 만들기’를 구체화하기 위해 6개월에 걸친 워크샵에 참여해 주기도 했다. 교육행정가와 정치가는 물론 예술가, 영상전문가, 교육학자 등 여러분들께서 새로운 학교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관심과 지지를 보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각종 활동을 하다보면 다함께 참여하고 협력하기도 하지만, 서로 외면하고 갈등하는 일도 흔히 있다. 돌이켜보면 사소한 것 하나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잘못된 관행을 돌려놓는 일이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다 보면 현실적인 조건이나 요구와 이상 사이의 차이, 구성원들 사이의 이상의 차이로 인해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학교 체제의 조기 정착과 천천히 여유 있게, 교실 중심과 학교 중심, 사적인 관계와 공공의 책무 등이 그런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학교가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운영됨으로 인해서 그런 갈등이 더 쉽게 외부로 드러났다. 그렇지만 이러한 갈등의 이면에는 모든 구성원이 다 함께 살아있는 학교,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과 고민이 담겨있었다. 결국 자발적인 참여와 협력이 남한산의 큰 그림을 그렸다면, 차이와 갈등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며 남한산 교육을 진화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하겠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뒤돌아보며
나는 우리가 특정한 철학이나 이념을 바탕으로 출발하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남한산초등학교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가 처하고 있는 교육적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 학교 교육과정은 아직도 체계적이지 못하고 산만한 점도 눈에 띠지만, 우리는 이런 미숙함을 하나씩 바꾸기 위해 토론하고 실천하고 정리해가면서 성장하고 진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지난 20년 간의 교단생활의 경험과 상식과 교육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무엇이 교육적 본질에 가까운 것인가를 되물었고, 이런 생각을 함께 하는 남한산 식구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쳐야 할 것, 우선 가능한 것과 나중해야 할 것을 찾아내고, 우리 힘으로 고쳐나가려고 애썼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함께 고통과 변화와 성장을 경험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교사는 교직 경력 5년이면 석고화가 진행되어 변화와 성장이 정지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나 남한산초등학교에서는 예외이다. 우리 학교는 늘 무엇인가를 묻고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남한산초등학교는 ‘교사에게도 참 좋은 학교’라고 말한다. 나는 교직 생활을 시작한지 20년 만에 남한산초등학교에서 다시 성장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아이들과의 만남이 새로워지고, 내 행동이 초등학교 선생다워짐을 느낀다. 또한 학교교육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지금 교직 생활을 다시 시작한지 6년째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지고 몸에 베인 자신의 습관(習慣)을 벗어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 여겨진다. 그간의 많은 일 속에서 생긴 많은 갈등의 고통의 과정은 나에 모습을 돌이켜 보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내 아픈 마음을 달래본다고 동사섭을 찾아 마음공부 란 것도 접해 보았고, 더 큰 행운은 붓타파라 스님이 이끄는 싸티(Sati)수행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마음의 고통을 지니며 살고 있으면서도 가까운 친구가 되어 근대적 사유의 틀로 부터 탈주를 도와준 오영건씨, 그리고 남한산에서 함께한 모든 동료들이 모두 행복으로 가는 여행을 도와준 나의 좋은 친구이며 스승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가는 길이 곧 무위 자연인(無爲 自然人)임을 알게 해준 것이 남한산학교에서 살았던 6년간의 소득이고 행복이다.
배움과 나눔의 공동체를 향해
지난 겨울 방학에 안성 수덕원에서 제2회 ‘작은 학교 교육연대 워크샵’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나눈 많은 이야기와 여기에 참여한 다른 여러 학교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좀 더 객관적으로 뒤돌아보고 제2의 도약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가 우리 자신의 현실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보고 비판하고, 대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 나온 가장 큰 화두는 ‘배움과 나눔의 학습공동체’, ‘조화와 협력을 배우는 교육과정’, ‘자율주의 생활공동체’였다.
봄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바로 남한산초등학교 교직원 연수가 있었다. 2005학년도 교육활동 평가와 함께 2006학년도 중점사업을 계획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작은 학교 교육연대 모임에서 나온 중심과제에 대한 실천 전략을 논의하고, 남한산 교육의 한계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확인하고 모색했다. 우리의 제2의 도약을 꿈꾸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때 제기된 남한산 교육이 극복해야 할 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교 교육 목표인 더불어 사는 인간 교육, 삶을 가꾸는 교육이 일상적 교육활동 속에 녹아있지 못하고, 각 교실의 교육 활동의 개별성이 강해 남한산 교육이 지향하는 색깔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면이 있다.”
“체험교육이 특별활동이나 재량활동 또는 일회적인 활동 중심에서 벗어나 교과 활동 안에서 좀 더 통합적이고 일상적인 교육활동으로 실천되어서 삶의 변화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학교 내에서 사적인 관계, 개별적 소통이 강화됨으로써 일상적인 수업활동에 대한 긴장감과 공식적인 연수 활동이 약화되고, 남한산 교육의 지향과 철학을 만드는 일과 상호 성장하고 변화하는 힘이 약화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지난 연수에서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첫째, 교사는 수업과 교육과정을 중심에 두고 교사간의 소통을 이루고 서로 성장하는 학교를 만든다. 이를 위해 모든 교사는 연2회 이상 수업을 공개하고 토론하며, 교실을 수시로 개방하여 열린 교실 만든다. 그리고 남한산 교육 목표의 살리는 교육과정을 만들기 위해 예술과 자연, 교과와 체험, 감성과 이성의 조화와 통합을 위한 프로잭트 학습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이를 수업으로 공개한다. 또한 교수-학습에 있어서는 학생들 간에 소통과 관계가 살아 있는 수업, 협동, 협력, 토론 학습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둘째, 학생은 자율을 배우고 스스로 실천하는 생활 공동체를 만든다. 이를 위해 기초 기본 생활교육을 충실히 한다. 교사의 통제와 검열을 통한 지도가 아니라 자기관리력, 자기주도성을 통해 자율과 협동을 기르도록 한다. 사물에 대해 정성스럽게 대하는 마음을 기르고 경청하는 태도를 기르기 위해 교실에서는 고요하게 여는 아침 활동 등 자신, 사람, 자연과 만남의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하고, 가정에서는 부모의 역할을 강화한다고 정했다.
그간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해를 열심히 살아왔다. 특히 수업이란 일상 속에 큰 기쁨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어 기뻤다. 예술가는 음악이나, 미술이라는 표현활동을 통해 세상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한다. 교사는 배움 수업이라는 매개 통해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동료들과 만나게 된다. 수업을 동료교사들과 나눔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의문을 갖게 함으로서 내가 어떻게 세상과 만나고자 했는지, 아이들에게 안내하고자 했는지 바라봄으로서 또 다른 나로 태어난다. 동료들 또한 수업을 공유함으로서 성장을 돕게 된다. 일상의 수업 하나에도 몰입과 성찰 그리고 공존이 함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간의 남한산에서 살아온 6년의 생활은 뜻을 같이 한 친구 몇이서 배낭하나 둘러매고 여행이 프랑스와 러시아 혁명지를 돌아온 여행이었다면, 이제 남한산을 등 뒤로 하고 떠날 여행은 충청도 서산의 자그마한 사찰인 개심사(開心寺)를 개구쟁이 반 아이들과 함께 소풍을 나서는 느낌이다.
그간 참 많은 변화와 홍역의 과정을 겪고 이제 다시 온전하고 평화로운 삶터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간 나를 억압하는 구속하는 거대한 구조와의 싸우며, 일그러진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통해 희망을 만들고자 애쓰며 살아왔다면, 이제는 작은 유리벽 교실 안에서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찾아 일부터 찾을 수 있것 같다.
이제 일상의 나와 가장 가까운 인연과 함께 자유와 행복을 찾는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듯 싶다. 아이들이 배우는 일상적으로 배움과 놀이가 자각하고, 몰입이고, 공존이길 소원한다. 아이들도 자신의 눈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고, 또래 친구들 서로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고, 배움의 스승이 될 수 있었으면 바람이다. 나는 오늘도 내가 맡은 2학년 나무마을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면 빈 교실에서 아이들의 어수선한 사물함 책꽂이를 확인하고 책과 공책을 바르게 정리해 놓은 다음 책상 속에 알림장을 놓고 갔는지 서랍을 확인한다. 긴 빗자루 하나를 들고 아이들의 어설픈 비질이 지나간 다시 쓸며 하루 수업을 정리한다. 작은 행위의 끝에 몰입이 있음 배운다.
오늘도 아이들의 작은 비질 속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있고, 자비가 함께하길 기원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 아이들 표정부터 다른 남한산초등학교. 이런 혁신학교는 우리 공교육의 소중한 모델입니다. 앞으로 5년이면 작은 학교에서 큰 학교로, 농촌에서 도시로, 초등학교에서 중고교로 모델이 확산되겠죠. 그 길은 교직원들의 헌신, 학부모들의 참여로 넓어질테고요. MBC가 만든 인기 동영상 "행복을 배우는 작은학교"는 혁신학교가 어떤 것인지 참 실감나게 알려주죠. 아직 못 보신 분들은 '동영상 교육희망' 메뉴에서 보실 수 있답니다.
좋은 자료 퍼갑니다^^
널리 퍼뜨려 주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