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1월호에서 따옴
DJ 노벨평화상
이것이 궁금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됨으로써 이후 정국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13전14기, 평화상 후보로 14번째 추천된 김대통령은 어떤 과정을 거쳐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가.
그 과정에 그와 그의 수상을 도우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였는가. 아태평화재단이 미얀마의 민주화를 돕고, 김대통령이 재빨리 동티모르에 파병을 결정한 것도 노벨 평화상 수상에 도움을 줬다는 분석이 많다.
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국내 정치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차기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여권 후보들은 더욱 김대통령에게 종속적인 위치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일단 노벨상 수상을 축하해준 야권은 야권대로 ‘정치와 노벨상은 별개’라는 태도로 나올 공산이 크다. 김대통령과 여권이 의약 분업을 둘러싼 의정(醫政) 분쟁, 경제 위기 등을 재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노벨 평화상을 받느라고 내치를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고 남북관계는 어디로 흘러 갈 것인가. 전문가들은 DJ의 노벨상 수상 이후 한국은 남북 및 국제문제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고 하는데….
공동집필
이정훈,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노벨상 개관
윤영찬, 송인수, 선대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내 정치
정낙근 안민포럼 사무총장,정치학 박사- 남북 및 국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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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김대통령 노벨상 수상 개관
1)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기다리는 과정에 온 국민은 전전 긍긍했다?
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경축할 일이지만,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국민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여론은 택시 기사나 상점 주인 등 주로 장삼이사(張三李四)의 국민들에게서 나오고 있는데, 이들은 “북한에 다 퍼다 주고 우리는 뭐 먹고 살라는 말이냐. 북한을 도와도 내치(內治)를 잘 하면서 도와줘야지 노벨 평화상 받으려고 자꾸 북한만 도와주면 어떻게 하느냐”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불만과는 별도로 김대통령이 노벨상을 받게 되기까지 많은 국민이 불편을 겪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 비판적인 인사들은 “올해 노벨 평화상을 못 받았으면 내년에 받으려고 김대통령은 또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것이다”며 “차라리 올해 받은 것이 잘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지난 9월7일 김대통령이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담에서 페라손 스웨덴 총리를 만나면서부터 증폭되었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이 회의에 참석하려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심한 몸수색을 받고 화가 나 북한으로 돌아갔다. 비판적인 인사들은 “유엔 밀레니엄 회담에서 김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에 유리하도록 페라손 스웨덴 총리,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3자 회담을 가지려 했는데, 김영남 위원장이 돌아감으로써 3자 회담이 무산되었다”고까지 혹평했다.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전후에 제기된 이러한 비판은 노벨상 수상 후 김대통령이 대북문제뿐만 아니라 경제를 중심으로 한 내치(內治)에도 진력해줄 것을 바라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로셀비치도 평화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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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0년 노벨 평화상 경쟁자들은 누구?
구나르 베르케 노벨위원회 위원장이 ‘김다융’(김대중의 노르웨이식 발음)을 발표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이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후보 추천 기간은 전년도 10월부터 다음해 2월1일까지인데, 김대통령은 미국 상하의원들의 추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함께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후보 추천 마감이 2월1일이기 때문에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김위원장을 공동 후보로 추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올해 평화상 후보로 거론된 사람과 단체는 약 150명(개)으로, 김대통령을 위협한 강력한 경쟁자는 올해 중반까지는 성공적으로 중동평화협상을 이끌어냈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중동 사태가 악화됨으로써 탈락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반핵단체인 그린피스, 구세군, 미국에 본부를 둔 국제 인권단체인 ‘인권 워치’, 전범재판소를 비롯한 다수의 UN기구, 이탈리아의 가톨릭 구호단체인 ‘산테디조’, 제3국의 부채 탕감에 노력해온 ‘2000 대희년 운동’ 등도 후보로 거론됐다.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전 총리와 마르티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은 지난해 NATO군이 유고를 공습한 전후에, 발칸반도에서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한 공로로 후보에 올랐다. 북한과 이라크 주재 미 연락사무소장을 지낸 빌 리처드슨,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에오도라스키스,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한 조지 미첼 전 미국 상원 의원 등도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발칸의 도살자’로 불렸고 민중 혁명으로 하야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도 후보로 올랐었다.
“미얀마와 동티모르 민주화 지원”의 積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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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노벨 평화상은 노벨상 중의 노벨상인가?
‘다이너마이트 거부’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1833∼1896)이 남긴 유산 3100만 스웨덴 크로네를 기금으로 1900년에 생긴 노벨재단은 이듬해인 1901년부터 물리·화학·의학·문학·평화 5개 분야의 공헌자를 선정해 상과 상금을 주고 있다. 그러다 1968년 ‘경제’를 추가하면서 6개 분야로 늘어났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지만, 진정으로 세계 평화를 바란 사람이다. 따라서 평화상이야말로 그의 뜻을 가장 잘 실현한 상이라는 지적이 많다. 평화를 제외한 5개 분야는 전문 분야지만, 평화는 인류 평화와 복지에 기여한 사람이면 누구나 수상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이러한 보편성도 평화상의 권위를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5개 분야는 노벨의 고향인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발표하고 시상하는데 반해, 평화상만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발표하고 시상한다. 이는 노벨이 살 당시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한 나라였다는 것이 첫째 이유로 꼽힌다. 노르웨이가 독립한 것은 1905년이다. 노벨은 비록 고향은 스톡홀름이지만 오슬로가 더 평화를 더 추구한다고 보고, 평화상은 오슬로에서 선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출된 노벨위원회 위원 5명은 매년 5∼6 차례 회의를 갖고 수상자를 결정한다. 노벨상은 노벨의 기일(忌日)인 12월10일 수여된다. 평화상 수상자에게는 900만 스웨덴 크로네(약 11억원)와 함께 금메달이 수여된다.
김대통령은 아시아 출신으로는 일곱 번째로 평화상을 수상한다. 여기에는 79년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도 포함된다. 테레사 수녀는 루마니아 태생이나 인도 국적을 얻어 인도에서 활동했기에 아시아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96년 평화상은 동티모르의 벨로 주교와 오르타가 공동 수상했기 때문에 김대통령은 평화상을 받은 아시아 인으로는 여덟 번째가 된다.
의도된 미얀마 민주화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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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전 14기! DJ의 노벨상 도전사는 어떻게 되는가?
DJ의 노벨상 도전사는 86년부터 시작된다. 86년과 87년 그는 연속해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그 때는 군부독재에 항거해서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경력, 즉 한국 내부 문제로 추천되었다. 그러나 그가 87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부터 노벨 평화상 논의는 물밑으로 들어갔다.
노벨상과 관련된 DJ의 노력은 92년 대선에 패배한 뒤 영국에 건너가 있을 무렵 다시 본격화했다. 93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남북 통일과 아시아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와 함께 하며 보좌한 이가 김상우 전의원이다. 그는 당시 정치인은 전혀 만나지 않고 학계 인사와 세미나를 하면서 독일에 자주 갔다.
DJ는 독일 통일 이후 3년을 보면서 통일 과정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통일 독일을 보며 한반도 통일 논의를 좀더 깊이있게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 DJ는 영국에서 2∼3년 체류할 계획이었는데, 예정보다 앞당겨서 6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와 곧바로 만든 것이 아태평화재단이었다.
아태재단의 주 관심사는 한반도 통일과 아시아의 민주화였다. 또 94년 DJ는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 AP)를 만들었다. 이 단체를 김상우 전의원이 맡았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를 만들 때의 기본 동기는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DJ는 ‘Foreign Affairs’지를 통해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와 논쟁을 벌였다.
리콴유는 아시아에는 유교 문화와 오랜 기간의 권위주의 통치가 펼쳐졌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DJ는 백성을 주인으로 섬기는 전통을 예로 들며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DJ는 민주주의는 세계 어느 곳에도 통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역설했다.
당시 DJ는 아태재단과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를 통해 단순한 세미나나 회의, 학문적 토론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아시아와 세계의 지도자로 떠오르는 실천 사업이 필요했다. 그 첫단추가 바로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지지였다. 미얀마는 상당히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88년에 학생이 주도한 전국적인 시위를 군이 강경진압했다. 이 때 국제 여론은 경악했고 미얀마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런데도 군부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지 90년에 총선을 실시했다. 결과는 군부 패배였다. 국민 80% 이상이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를 지지했다. 그러나 군부는 그들이 주도한 총선에서 지자, 이를 무효로 하고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국회와 헌법도 없이 불법으로 미얀마를 통치하고 있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이념과 인권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미얀마 민주주의 쟁취는 아태 민주지도자회의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 이 단체 사무총장인 김상우 전의원은 미얀마 민주화를 지원하는데 DJ 대리인 노릇을 했다. 그는 미얀마를 세 차례 방문해 아웅산 수지를 두 번 만났다. 첫번째인 95년에는 가택연금 상태인 아웅산 수지에게 DJ 친서를 전했다. 이 친서에는 아태 민주지도자회의가 아웅산 수지와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 전의원은 15대 국회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의원 모임을 만들고 의원 110명의 서명을 받아 96년 여름 다시 미얀마로 들어가 아웅산 수지를 만났다. 97년 2월에 갔을 때는 아웅산 수지를 만나지 못하고 공항에서 체포되어 강제 추방당했다. 당시 김 전의원은 추방된 다음날인 97년 2월8일 태국 방콕에서 30여개 사의 외신기자를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해, 국제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 이후에도 방콕과 서울을 오가며 미얀마 민주화 관련 세미나를 열었다.
전세계적으로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는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곳으로 DJ의 아태 민주지도자회의와 노르웨이 본드빅 총리가 만든 PD미얀마(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세계 민주지도자 네트워크)가 있다. 노르웨이는 바로 노벨 평화상위원회가 있는 국가다. 이 두 단체는 10월17일과 18일 이틀 동안에도 IPU(세계 의원 연맹) 총회가 열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미얀마 민주화 투쟁 지원과 미얀마 경제 지원 문제를 여론화했다. DJ는 미얀마 민주화 지지를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했다.
유엔은 매년 ‘UN 미얀마 결의안’을 채택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이 결의안을 지지하고 실제로 미얀마 민주화를 후원하는 유일한 국가다. DJ가 이것을 결정할 때 외무부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외무부는 중국과 북한에 대한 입장이 있어 이것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DJ는 외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지원만은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해에 터진 동티모르 내전 사태에도 한나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투병력을 파견했다. 이를 통해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운다는 인상을 전세계에 심었다. 올해 초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 평화음악회를 열어 수익금 20만 달러를 동티모르에 지원했다. 또 지난해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 동티모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 오르타씨를 한국에 초청해 동티모르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올해 초에는 동티모르 독립 영웅 자나나 구스마오를 초청해 포럼을 열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DJ는 지난 해에도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최근 들어 노벨 평화상은 개인보다는 단체에 주는 경향이 강한데, 지난해 개인 후보 가운데 DJ는 5위권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노르웨이의 지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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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로비는 얼마나 했을까? 그 로비가 먹혔을까? 또 DJ 노벨상을 위해 뛴 국내외 인사들은 누구인가?
DJ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로비를 했다면, 그리고 그 로비가 먹혔다면, 이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올해 초부터 DJ의 노벨상 수상을 위한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정통한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국내에서 노벨상 대책을 총지휘한 이는 청와대 남궁진 정무수석이다. 그는 노벨상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고, 국내외 지지 인사를 연계하는 등 발표 당일까지 숨가쁘게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다음이 김상우 전의원이다. 그는 92년 DJ의 영국 케임브리지 시절부터 외교정책을 보좌했다. 국민회의 시절에는 DJ를 대신해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며 국제사회 여론을 움직였다.
다음은 미국 인사들. 노벨상 가운데 특히 평화상만큼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미국과 유엔이다. 미국에서는 올해 연방 하원의원 사이에서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지지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몇명이 어떻게 서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도한 이는 민주당의 토머스 하킨(Thomas Harkin) 의원이다. 그는 92년 미 대선 당시 클린턴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2위를 한 인물이다.
DJ의 노벨상을 위해 노력한 또다른 인물은 올해 미 대선 민주당 부통령 후보 리버만이다. 그는 85년 1월 DJ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안전보장을 위해 미 의원들을 대동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DJ가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해준 인물이다. 미 하원에서 서명운동을 이끈 토머스 하킨스 의원은 지난 8월19∼21일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DJ만 만나고 돌아갔다. 그는 DJ에게 하원 의원 서명 명부를 전해주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와 노르웨이의 평화상 선정위원회를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있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 ‘World View International Foundation’의 임원인 노르웨이인 루네 헤슈빅(Rune Herschvik). ‘World View International Foundation’은 1995년 리우 정상회의 이후 유엔 자문기구로 위촉된 단체로 미디어 사업을 통해 청소년 문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단체 회장은 노르웨이 국영방송인 ‘NRK’ 앵커맨이던 아르네 표르토프트(Arne Fjortoft)다. 60대 후반인 그는 노르웨이의 전·현직 총리와 교분이 깊은 인물이다.
헤슈빅씨는 올해 봄부터 청와대를 여러차례 드나들며 청와대 비서진과 접촉했다. 그는 노벨 평화상에 관한 노르웨이 선정위원회의 정서 등 여러 정보를 수집해 청와대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한국에 온 표면적인 이유는 영국의 유명한 조각가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만든 대형 조형물을 한국의 휴전선이나 철원, 판문점, 서해안 또는 남북한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제 3의 장소에 설치하려는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이 조형물은 작가가 World View International Foundation에 기증한 것이었다. 이 조형물 설치 프로젝트는 현재도 진행중이다.
정치적인 로비의 대상이 된 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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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노벨 평화상 수상 후의 DJ 위상은?
DJ는 퇴임 이후에도 노벨상의 권위를 이용하여 인권이나 아시아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굳이 그 모델을 들자면 지미 카터나 넬슨 만델라가 있다. 카터는 유명한 카터 재단을 통해 최근에도 인도네시아 총선을 감시했고 전세계의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만델라는 그 도덕적 권위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등지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해결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DJ도 그런 역할을 할 것이고 아태재단과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 그 발판이 될 것이다. 아마 아태재단은 남북 문제를 전담할 것 같고,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 아시아에서 권위주의와 독재 정치를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것이다.
DJ는 특히 아시아 민주화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아시아 지역은 많은 나라가 선거를 통해 군부 정권이 민간 정부로 이행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을 지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권 이양 뒤 제도적 장치(법치주의 확립, 지도자나 공무원의 반부패 분위기 숙성-이는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태 민주지도자회의는 DJ를 대신해서 이런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7)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은 누구인가?
제 1회 때인 1901년에는 국제적십자를 창설한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동맹을 창설한 프리데리크 파시가 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정치인으로서 평화상을 처음 수상한 이는 1906년 수상자인 시오도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난 러일전쟁 마무리를 잘 중재한 공로를 인정받아 평화상을 받았다. 1919년에는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지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1935년 노벨위원회는 독일 나치 정권에 투옥된 카를 폰 오시에츠키를 선정함으로써, 국제활동이 아닌 국내활동자를 처음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1936년에는 유럽이나 북미 출신이 아닌 인사로는 최초로,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외무장관이 이 상을 받았다.
2차 대전 때까지는 주로 전쟁을 막는 데 공헌한 이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인권운동가 등으로 선정 범위를 확대했다. 1960년 이에 따라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 상을 수상했고, 75년에는 소련의 인권 운동가 사하로프 박사가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노벨위원회는 평화나 인권을 정착시킨 사람이 아니라 현재 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을 후보자로 선정함으로써, 특정 지역의 평화 운동을 밀어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89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선정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91년에는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이끈 아웅산 수지 여사를, 92년에는 과테말라의 인디언 인권 운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를, 96년에는 동티모로의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던 벨로 주교와 오르타 동티모로 독립운동 대변인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노벨위원회의 이러한 태도는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나 정권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나 로비를 받기도 했다. 99년이 대표적으로 이 해 노벨위원회가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인 왕단(王丹)과 웨이징성(魏京生)을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은 노벨위원회를 상대로 강력한 로비를 펼쳐 후보 선정을 막았다고 한다. 말도 많고 탈도 적지 않았던 노벨위원회는 88년 유엔 평화유지군을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해 최초로 군사 단체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100년의 역사 속에서 노벨위원회는 평화상을 줄 만한 사람이나 단체가 없다며 16차례는 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브란트의 受賞과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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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쟁 지역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후 그들은 잘 풀렸는가?
분단국가와 관련해서는 71년 동방정책을 펼친 서독의 브란트 총리가 처음 이 상을 받았다.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하는 대북 포용정책의 원형으로 불리고 있어, 두 사람의 평화상 수상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러나 74년 브란트 총리는 그의 개인 정치 보좌관인 권터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로 밝혀져 사임하는 비운을 맡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73년 월남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공동으로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었다. 레둑토는 아시아 인으로는 최초로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기에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레둑토는 유럽인이 주는 상을 받을 수 없다며 노벨 평화상 수상을 거부해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78년에는 중동전쟁을 치른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가 공동으로 이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사다트 대통령은 81년 10월6일 이집트 국군의 날 행사 도중 저격을 받아 사망했다. 93년에는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 반대 운동을 펼쳐온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과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이 흑백 인종 갈등을 종식시킨 공로로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어 94년에는 역시 중동 평화를 정착시킨 공로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이 아라파트 PLO 의장과 함께 이 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러나 라빈 총리는 95년 11월4일 유대 교주의자의 저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이처럼 분쟁 지역의 평화상 수상자는 우연찮게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평화상을 받은 때로부터 21년이 지난 1990년 완전한 평화통일을 이룩하였다. 73년 키신저와 레둑토라는 공동 후보를 배출했던 베트남 전쟁은, 키신저가 이 상을 단독 수상한 후 막바지로 치달아, 월맹이 군사적으로 남부 월남을 통합하며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 통일과정에는 남부 월남인들이 보트 피플로 대거 탈출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동티모르는 96년 벨로 주교와 오르타가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99년 독립을 이끌어냈다.
78년 이집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총리가 공동으로 평화상을 수상한 후, 앙숙이던 두 나라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교적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94년 공동 수상자를 배출했던 이스라엘과 PLO는 최근 제5차 중동전을 일으킬지도 모를 정도로 심각한 분규에 싸여 있다. 83년 평화상을 수상한 바웬사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는 대통령이 된 후 환상에 빠져, 산적한 문제를 방기함으로써 국가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평화상이 반드시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9)역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한국인
한국인 중에서 노벨상 후보로 가장 많이 추천된 이는 경희학원의 조영식(趙永植) 학원장이다. 조학원장은 모두 18번 추천됐다.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경북대 김순권(金順權) 교수는 아프리카의 식량난을 해소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92년에는 세계식량기구(FAO), 93년에는 나이지리아 대통령 등이 추천하는 등 모두 다섯 번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소설가 고 김동리(金東里) 선생은 88년 국내 문인들이 문학상 후보로 추천했었다. 한국펜클럽은 92년 최인훈, 93년 고 한무숙, 94∼97년 서정주 98∼2000년 구상 선생을 문학상 후보로 추천한 바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96년에 서정주씨가 99년에 구상씨가 공식 후보가 됐다고 발표했었다.
10)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으로 한국인의 노벨상 콤플렉스가 풀렸는가?
김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한국은 드디어 노벨상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한국은 평화상과 문학상 분야에서만 후보를 배출하고, 물리 화학 의학 경제 등 전문 분야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후보를 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김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으로 노벨상에 대한 갈증이 풀렸으니만큼 이제는 전문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도록 범정부 차원에서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들은 전문 분야에서 나오는 노벨상 수상자야 말로 국익을 구체적으로 증진시키는 수상자라고 말하고 있다.
제2편 DJ 노벨상 수상과 국내정치
11)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지역갈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김대통령 개인의 영광을 넘어 전 국가적·민족적 경사임에 분명하다. 김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칭찬에 인색한 한나라당마저 김대통령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망국 병’이라는 지역감정까지 사라지게 만들 ‘만병 통치약’이 될지는 미지수다.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소식을 접한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은 “노벨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독설을 퍼부었다. 김 전대통령의 발언이 도를 넘은 측면도 있지만 일정 부분 영남정서를 반영하는 대목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모든 사고와 행동이 반(反)DJ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YS의 반응이 전형이다. 상을 받은 사실에 대한 평가보다는 ‘DJ에게 상을 준 노벨상’을 의심해야 직성이 풀린다.
두 번째는 DJ에 대한 반감은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감정적 증오심일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DJ는 거짓말쟁이니까’ ‘DJ의 색깔이 의심스러워서’라는 김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의 ‘근거’를 아직도 많이 들을 수 있다. 또 김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피해의식’까지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남의 씨를 다 말린다’는 얘기가 대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지역갈등의 치유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성급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지역감정으로 인해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어느 정도 ‘약발’을 유지할 것인지 하는 의구심도 적지 않다. 김대통령이 집권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또 차기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김대통령에 대한 객관적 평가보다는 ‘지지’와 ‘폄하’로 더욱 극명하게 양분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12)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DJ의 권위주의가 강화될 것인가?
노벨상 수상은 DJ의 도덕적인 기반을 강화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상황에서 ‘DJ 정권의 권위주의화’도 경계해야 할 대목임에 분명하다. 김대통령은 평상시에도 ‘대외적인 평가’와 ‘대내적인 평가’ 사이에서 상당한 섭섭함을 토로해왔다.
김대통령이 내치 과정에서 일정 부분 ‘판단 미스’가 있었던 것도 스스로 판단해 논리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의 아집을 보인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적 평가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대목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경우 DJ는 ‘권위주의자’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실제로 ‘권위주의’의 길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우선 김대통령은 ‘DJP연합’에 힘입어 겨우 40%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소수파다.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지지도는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겠지만 권력기반이 지지도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지지도가 80∼40%대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은 그만큼 권력기반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주의자인 김대통령도 자신의 허약한 권력기반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가 지난 ‘4·13’총선 이후 돌아앉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에게 ‘한 번 만나자’고 구애(求愛) 공세를 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민련의 교섭단체화가 무산되고 이 때문에 자민련의 협조가 어렵게 되자 김대통령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의 영수회담 정례화 카드를 제시, 한나라당을 파트너로 삼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여당 중진은 DJ의 권위에 눌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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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민주당의 중장기 이해득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당 총재인 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민주당에도 적지 않은 활력소가 될 것이다. 김대통령이 추진해온 개혁작업이나 남북관계 개선작업을, ‘노벨상’이라는 국제적 인증으로 더욱 자신있게 뒷받침을 할 수 있게 됐다. 김대통령의 지지 기반 확충은 곧 민주당의 외연(外延) 확대로도 연결될 수 있다. 민주당 인사들이 김대통령의 후광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김대통령의 지지도에 당 지지도를 근접시킬 수 있다면 정권 재창출에도 한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인기 상승이 민주당의 지지 도약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지지도 변화 추이가 그랬다.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 직후 김대통령의 지지도가 80%대에 육박했지만 민주당의 지지도는 30%를 겨우 웃돌았다.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으로 당의 총재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중·장기적으로는 당에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민주당에 대한 정치권 일반의 인식, 즉 ‘자생력이 없는 정당’ ‘불임(不姙)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14)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민주당 내 대선주자 선발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 앞서 민주당 대권후보의 가시화 시기를 2002년 1월로 못박은 바 있다. 김대통령의 언급은 아직도 유효하고, 2002년 1월경 민주당 차기후보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으로 현재 차기를 노리는 각 후보의 ‘DJ의존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민주당 주자들 중 김대통령의 지지 없이도 후보 고지를 넘볼 수 있는 자생력을 갖춘 인물은 한 사람도 없다. 호남 출신은 호남 출신대로, 비호남 출신은 비호남 출신대로 DJ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김영삼 전대통령과는 달리 비교적 안전하게 임기를 마무리 지을 가능성이 높다. 또 향후 호남에서는 적어도 다음 총선까지는 그의 영향력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향후 이들 후보군의 언행은 매우 조심스럽게 전개될 것이다. 김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면서 ‘눈 밖에 나는’ 행동은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것이 되레 민주당 내 대권주자들을 위축시킴으로써 당의 활성화를 저해하고 침체에 빠뜨리는 역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민주당, 자민련 합당은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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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자민련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민주당의 구심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함으로써 자민련에 대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민련은 현재 여당인지 야당인지조차 매우 불분명한 상황이다. 하지만 자민련이 쉽사리 민주당과의 통합 등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씨를, 15대 대선에서 김대통령을 지지함으로써 2인자 자리를 지켰던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명예총재의 독특한 셈법에 그 논리적 배경을 두고 있다.
현재 자민련의 제1목표는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통한 독자 세력화다. 그래야만 충청권이라는 지지기반을 유지할 수 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통해 현실적인 이득을 얻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다.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도 자민련의 생존원칙을 흔들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 2002년 차기 대선에서 독자후보를 낼 가능성이 높지 않은 자민련으로서는 막판 대선과정에 ‘캐스팅 보트’를 쥐고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몸 값’을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당쪽은 자민련과의 통합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민련이 거부하는 한 통합은 어렵다. 지난 ‘4·13 총선’ 직전 민주당이 자민련과 합당을 추진했으나 자민련이 이를 거부한 것은 하나의 선례다. 문제는 현재와 같이 자민련이 비교섭단체를 벗어나지 못할 때 자민련도 독자세력화나 현상유지가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자민련 내 강경파와 온건파, 친 민주당계와 친 한나라당계 간에 불화와 갈등이 일 소지가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원내 과반수 확보를 위해 자민련 전체가 필요하다. 자민련이 쪼개지는 상황까지 감수하면서 민주당이 자민련과 통합을 해야할 이유는 없다.
야당 “노벨상 허니문 오래 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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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대응은?
한민족의 경사로 평가되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을 고른다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은 주요 사유인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이총재가 그동안 신통치 않은 평가를 해왔기 때문이다.
DJ의 노벨상 수상 선정에 대한 발표문과 이총재의 평소 발언을 비교해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발표문은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訪北)은 남북 긴장완화에 촉진제가 됐다’고 밝혔지만, 이총재의 견해는 정반대다. 그동안 각종 연설에서 한 그의 주장은 ‘남북한 사람들이 여러 번 오갔지만 실제로 남북의 긴장완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이 대량 살상무기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고 휴전선 주변의 무력 대치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정부가 긴장완화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대해서도 이총재는 10월9일 여야 영수회담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구걸하듯 했는데 성과 없이 끝났다”고 규정했다. 김대통령이 “남북 사이에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군 당국이 참여해 경의선을 복원하기로 했다”고 설명했지만 이총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사사건건 폄하해온 김대통령의 남북 정책이 노벨상을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됐으니 이총재가 멋쩍어진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김대통령의 ‘남북 정책 드라이브’가 강화되는 등 노벨상 효과가 계속되기라도 하면 이총재는 이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총재측의 반응은 일견 태연하다. ‘그동안 정부의 대북(對北)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온 것은 사실이나 이는 남북 교류 확대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추진 속도나 방향성에 대한 반대였다. 따라서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하순봉(河舜鳳) 부총재도 이와 관련, “우리가 주장하던 것은 우리가 어렵게 지켜온 자유 민주 인권 등의 가치가 훼손되는 통일은 안된다는 것”이라며 “이 주장은 노벨상과 관계 없이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17)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의 여야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나라건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았다면 정치권은 한동안 잔치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다. 그것도 그 나라 역사상 첫 노벨상이라면 정쟁(政爭) 중지 선언 정도가 나옴직하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이야 축제 무드지만 한나라당은 마지 못해 축하할 뿐 실제로 반기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회창 총재만 해도 13일 노벨상 수상 사실이 발표되자마자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뜻을 표하고 난까지 보냈다고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런지는 의문이다.
10월14일 충남 예산의 선영을 찾아 기자들에게 한 말만 봐도 그렇다. 그는 먼저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 “축하할 일”이라고 말했지만, 곧이어 “그러나 앞으로 좀 더 내치(內治)를 잘 해달라는 국민들의 뜻을 읽어줘야 한다”고 토를 달았다. 만약 진심으로 노벨상 수상을 축하한다면 설사 기자들이 김대통령을 꼬집는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더라도 응당 “자,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노벨상을 탔는데 그런 말은 삼갑시다”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노벨상 수상 후 권철현(權哲賢) 대변인 명의로 나온 논평에도 곳곳에 가시가 숨어 있다. ‘노벨상 수상이 장기집권 도모와 통일 대통령 추진 등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씻어주길 바란다. 이젠 나라 밖 일보다 나라 안 일에 더 관심을 갖고 국민의 삶의 질이 실질적으로 증진되도록 내치에 정성을 다 해주길 소망한다’(10월13일)거나 ‘노벨상이 내부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 키는 아니다. 대통령은 집권 초심으로 돌아가 위기상황에 다다른 내정을 바로 잡아야 한다’(10월15일)는 식이다.
이러니 ‘노벨상 허니문’이 그리 오래갈 것 같지 않다. 당장 10월19일부터 국정감사가 시작되면 언제 노벨상을 받았냐는 식으로 여야가 이판사판 맞붙을 공산이 크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아예 “노벨상 효과는 이미 발표 3, 4일만에 사라진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결국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국가적 경사인 것은 사실이나 여야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여론 추이를 읽어야 大權에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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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2002년 대선 구도에 미치는 영향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과 2002년 대통령선거의 함수 관계를 미리 진단하는 것은 사실 무모한 일이다. 노벨상 수상이 민족적 쾌거이기는 하지만, 대선까지는 2년여의 시간이 남아 있어 그 사이 언제 무슨 변수가 생길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이 대선 구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리라고 짐작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특히 앞으로 1, 2년 동안 그 어떤 이슈보다 남북 문제가 국민적 논의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어서 어떻게 보면 이번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으로 논의 구조가 달라질 가능성도 없지않다.
만약 변화 조짐이 있다면 곤혹스런 쪽은 정부의 남북 관계 개선 움직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한나라당일 것이다. 반면 그런 변화 조짐이 없거나 아니면 반대로 역작용이 있다면 오히려 민주당 쪽이 난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조사 결과는 아직 없다. 그저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저마다 자기 쪽에 유리하게 여론을 해석하고 있을뿐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지금 진행되고 있을 여론 변화 추이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2년 후 대선 구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제3편 남북관계와 대외관계
19)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각은 어떠할까?
10월14일 현재 북한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보도가 전혀 없다. 이는 북한 언론의 보도 관행상 지극히 당연하다. 북한은 지금까지 노벨상 수여와 관련된 소식을 단 한번도 보도한 적이 없었다. 지난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단함으로써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마당인데, 노벨위원회가 김대중 대통령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을 북한 주민에게 알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더욱 과거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은 노벨 평화상 자체를 탐탁찮게 생각해왔다. 노벨 평화상은 주로 반공·멸공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민주 체제로 전환시킨 인물에게 수여해 왔다고 보고 있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단독으로 평화상을 수상한 것을 보고 김정일은 서운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노벨상 자체를 탐탁찮게 여기는 김정일로서는 그러한 생각보다는, 김대통령의 수상을 자신의 마스터플랜을 실행할 수 있는 호기로 활용할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김대통령에게 제시할 평화상 수상에 따른 계산서를 미리 준비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김정일로서는 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오히려 자신의 전략 실현에 한층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할 것이라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우선 미국과 한국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 북한이 붕괴되지나 않을까 하는 그간의 우려는 일단 해소됐다고 봐야 한다. 김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당에 같은 민족인 북한이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북한의 경제난 해소를 위한 외부의 지원과 투자를 유도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노벨상 수상으로 오히려 자주성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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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김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남북 관계 전반에 끼칠 영향은 무엇일까?
김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가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인 이상, 김대통령은 현재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어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김정일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사실 김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김정일에 의해 한반도 평화가 언제든 깨질 수도 있는 상황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향후 남북관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페이스에 끌려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김대통령으로서도, 많은 비난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추진해온 대북 햇볕정책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이상,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론 분열은 상당부분 불식될 것이다. 이는 김대통령으로 하여금 대북정책 수행에 상당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겠지만, 잘못되면 자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 재창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와 남북관계 진전을 통한 평화통일 환경 조성이라는 필생의 목표 사이에서 김 대통령은 선택을 강요받을 수 있다. 김 대통령으로서는 두 목표가 자연스럽게 일체화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이것은 김대통령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있는 것이므로 선택의 결단이 필요하다.
노벨상 수상으로 김대통령이 내치에 주력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으나, 이는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경제위기를 단시간에 극복할 수 있다는 전망이 섰을 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대통령으로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걸맞게 남북문제 등 대외문제에만 주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 성공도 결국은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북한이 정상회담 이후 끊임없이 6·15 공동선언의 이행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은 남한의 경제협력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내치와 외치, 국내경제와 남북문제는 분리될 수 없는 사안이다. 6·15 공동선언 제1항인 ‘자주’의 원칙은 외세를 배제하는 것이든 외세를 활용하는 것이든, 일단은 남북 당사자 원칙을 실천하겠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 이 점에서 분명 정치 명분상의 자주 원칙의 실현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와 안보는 상호 연동된 것임을 잊어선 안된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공 여부도 결국은 대북 경협을 위한 김대통령의 국제자본 유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남한의 경제력으로는 북한에 대한 경제 협력이 어려워 국제자본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경제부문의 대외의존성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부문의 자주성 훼손은 정치·안보분야의 자주성 훼손과 직결될 것이다.
내치와 남북관계는 상호 독립된 것이 아니다. 또 국내경제가 세계경제와 연동되어 있는 현실에서 짧은 기간 내에 우리 경제가 회복될지는 미지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1997년에 미국이 주도하는 IMF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처럼 앞으로도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다.
우리 경제의 대외 의존성이 심화되면서 다시 남북관계의 대외 의존성도 증대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대북문제 해결에 있어 대외 의존성 심화는 오히려 통일비용을 증가시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북일관계 개선이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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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DJ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남북 경협 전망은?
김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은 북한에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상회담을 비롯한 각종의 남북회담에서도 발표된 내용과는 달리 북한과 이면계약을 맺고 있지는 않나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남북관계의 특성상 모든 것이 공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북한은 더 많은 경제협력을 남측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희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경제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 국내경제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 대북 경협에 나설 기업은 없다. 북한이 아무리 투자보장협정이니 이중과세방지협정이니 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도, 냉정하게 보면 지금까지의 경협 부진은 이러한 장치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제도의 준수와 이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남한과 국제사회에 신뢰를 주지 못했다.
김대통령으로서는 남북경협을 더욱 활성화시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의 입지를 더 높이고 싶을 것이나, 경협을 실행할 기업의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만 남북경협 활성화의 관건이 북한의 지불 능력과 결부되어 있다고 볼 때 국제자본의 대북 유치가 가능하다면, 남북경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조명록 특사의 방미를 계기로 북미관계의 진전과 이와 연관된 북일관계의 추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일 수교를 전제로 일본의 대북 배상자금이 어떤 형태로든 활용될 계기를 마련할 경우, 대북 경제진출이 경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한국의 기업들에 숨통을 터 주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북한이 6·15 공동선언 이행을 촉구하는 것은 남측의 경제협력 약속을 이행하라는 압력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에 나온 것도 일차적으로는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 때문이었으니만큼,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남북관계 개선에 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있다. 그 브레이크가 바로 공동선언문의 제1항과 2항, 통일원칙과 통일방법에 관한 것이다. 더욱이 북한으로서는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그들 덕택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대가를 요구할 경우 이를 들어주지 않기도 곤란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김대통령이 분명 현재의 한반도 상황으로 인해 여러 측면에서 도움을 받고 있고, 김 대통령 스스로도 남북문제를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남한, 비용 지불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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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은 완화될 것인가?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냉전의 마지막 섬으로 남아 있던 한반도가 평화의 길로 들어섰음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앞으로 김대통령은 국제적으로 높아진 권위를 바탕으로 남북 화해 무드를 주도하면서 임기 내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북미수교가 현실화할 경우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은 불가피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한미군의 주둔을 양해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거의 대북 억제력으로서의 주한미군은 아니다. 다시 말해 동북아의 지역안정과 평화유지를 위해 주둔한다는 것인데 이는 주한미군이 중립적 성격을 띤다는 의미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 병력과 군비의 감축, 그리고 전진 배치된 병력을 후방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는 주한미군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의 방안으로 언급되는 것이 비무장지대의 미군 관리 방안이다. 이는 주한미군이 평화유지군 성격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경우 북한은 주한미군의 평화유지군 전환을, 그들의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론의 한 단계로 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또 하나의 시나리오는 남북한과 미·중의 정상이 참석하는 2+2 형식의 4자회담을 개최하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과 시기를 맞출 수도 있다. 만약 이것이 성사된다면 김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임기 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달성하고 자신의 3단계 통일방안의 제1단계인 남북연합단계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권위에도 부합하는 업적이 될 것이다.
23)DJ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대외 관계에 끼치는 영향은?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과거 대통령처럼 퇴임 이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특히 그의 바람대로 김대통령은 임기 내에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퇴임 후에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중재자 역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국제사회의 분쟁 중재자로 활동하는 공간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과 관련된 각종 협상이 열리면 국제사회는 김대통령에게 노벨상 수상자에 걸맞은 역할을 기대할 것이다. 문제는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에는 반드시 비용 지출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보편적인 의제를 다루는 다자간 회의에서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동북아 및 한반도같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 현안을 다룰 때에는 상당한 비용 지출이 따른다. 최근 조명록 북한 특사의 방미를 통해 북미관계에 급속한 진전 가능성이 마련된 것도, 이면에는 아마 양국간의 현안인 미사일문제에 대한 타결 전망이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사료된다.
이번 북미 공동선언문에서는 미사일 발사 중단을 재확인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조명록이 워싱턴에서 “인공위성 발사 지원 조건부 미사일 개발 중단”을 언급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지금껏 양국간 논란의 초점이 미사일 수출 중단과 그 대가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북한 특사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미사일 개발 중단이 흘러나왔다면 이는 단순한 레토릭(수사)으로 볼 수 없다.
만약 예측대로 미사일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면, 남은 문제는 미국이 KEDO처럼 미사일 컨소시엄을 만들어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 장거리 미사일과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있는 나라일 것이다. 이 점에서 우선 일본을 들 수 있다. 일본은 북일 수교시 대북 배상자금을 지불해야 할 나라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이를 위한 전제조건 중 하나로 북한 미사일 발사의 저지를 들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일본은 비용을 지불하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일본의 비용 지불은 일반적으로 수교 이후가 될 것으로 추정되나, 미일간 물밑교섭을 통해 북일 수교 이전에도 지불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북한 역시 이 자금의 관리방법에 대해 양해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북한에 현금이 직접 들어가는 것을 미국은 아직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북한 군부의 고위 실세이자 미사일 전문가인 조명록이 처음으로 워싱턴에 들어가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던 것으로 사료된다.
다음으로 지불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 일본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이 문제의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비록 미사일 문제에 대해서는 미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해관계가 약하다 할지라도 노벨상 수상이라는 명분 때문에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역할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과연 김대통령은 당면한 문제인 미사일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의 비용을 분담할 것인가? 하게 될 경우 국내의 논란을 어떻게 설득해 나갈 것인가?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