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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6일 토요일 : 경주 터미널 천지장에서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빨래도 잘 말랐다. 어제의 대감집에서 아침으로 추어탕을 먹는다. 주인은 가야국 거창이 고향인데 아들들을 잘 두었다. 환갑이야기를 하다가 아들이 셋이니 한꺼번에 하지 말고 3년에 걸쳐 한 아들씩 교대로 하라고 하면서 서로 웃었다. 옆자리의 넉넉해 보이는 부부는 서울에 사는 모양인데 자주 고향을 찾는듯하다. 갈치찜을 먹다가 내 추어탕을 보고 고향그리움이 배가 되는 모양이다. 전라도 추어탕은 걸쭉한데 경주에서는 뼈를 거르고 또 걸러 부드럽고 시원하고 담백하단다. 경상도에서는 山椒(산초)를 향신료로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제피’를 쓴다는데 시장에서 판다고 한다. 사람의 혀와 귀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맥주가 목에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느낀다. 독일이나 일본의 맥주는 기름을 칠한 것도 아닌데 누구나 그 부드러움을 이야기한다. 일본두부는 중국의 식당에서도 흔히 맛볼 수 있는데 명주로 걸러 목에서 스키를 탄다. 귀는 또 어떤가? 축음기에 눈이 똥그래진 것이 언제인데 테이프에서 CD를 거치고 억대의 음향기기도 있으니, 그뿐이랴? 디지털 카메라의 화소와 실크의 촉감-眼耳鼻舌身과 色聲香味觸 - 인간의 감각과 자연의 존재의 교감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여튼 경북에서는 추어탕을 많이 먹고 삿뽀로를 많이 마셨다.
모량을 지나친 것은 자료가 목적이었는데 토요일이라는 것을 깜박했다. 그러나 - 이곳은 문화유적의 도시이니 박물관이 있지! 박물관은 월요일이 휴일이니까! 나는 머리가 좋단 말이야! 관광안내소도 바로 광장에 있겠다! 부지런히 짐을 꾸렸다. 간단한 관광지도를 받고, W기자가 소개해준 서라벌연구소-남산연구소 등에 전화를 해본다. 옛길에 대해서라면 단연 경주박물관의 박방룡선생에게 물어보라고...벌써 11시가 되어간다. 그러면 이제 박물관으로! 뒤로 돌아서면 택시정류소다. ‘양수리 운전기사의 집’이 생각나서 택시운전수들과 길이야기도 했다.
- 선생님 같이 서민을 생각하는 분은 꼭 최제우(동학의 창시자) 선생의 생가를 찾아야 되니더 - 어딘지 아세요?!(지도에 표시를 해준다)
택시로 경주박물관에 내린다. 학예연구실을 찾는데 당직만 있다. 연구실 따로 박물관 따로 - 그러면 그렇지! 내 머리가 좋다면 그냥 걷지?! 왜 물어가며 걷겠는가?
관광버스들이 아이들을 쏟아놓는데 손에, 손에 모두 수첩을 들었다. 봉덕사종 주위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그 아이들의 활기가 내게는 관광이다. 갑자기 기운이 떨어진다. 긴장의 끈을 풀어버린 탓일까? 인각사와 달리 덕동에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된 고선사지의 석탑을 본다. 나는 이 탑이 마음에 든다. 사람의 손은 최대한 절제하고(인공) 자연을 퇴대한 존중하면서 쌓아올린 이 탑은 그래서 좀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그 정도의 타협이 좋다. 그 타협이라는 말을 나는 조화로 해석한다. 과학에도 그런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도도 없고 덜렁 박물관과 그것을 지키는 수위만 있는 이런 장소가 오히려 길을 묻기에는 더 불편한 장소다.
경주유적지도 : 배낭이 무겁다. 그사이 벌써 책과 팜프렛 무게가 늘었다. 오늘은 박물관 내부를 보기에 지친다. 기념품코너의 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훑어본다. 대개 집에 있는 것이지만 현장에서 뒤지면 새로운 느낌이다. 문득 지표조사를 한 경주유적지도를 본다. 1만분의 1 - 내 지도의 열배나 자세한 이 지도는 거의 손금을 보는 정도다. 그 책의 표지에서 읍성과 관아와 객사를 본다. 객사에서 울산경계를 본다. 지나온 아화와 지나친 모량을 본다. 이 지도는 적어도 200년은 되어 보이니 철도도 전봇대도 버스터미널도 없는 조선시대다. 읍성의 돌담 동서남북에 문이 있고 서문에는 鎭營(진영)이 있고 형산강이 흐른다. 반대쪽 동남쪽에는 첨성대와 반월성이 보이고 잇대어 동창과 괘릉과 불국사를 지나 맨 아래 울산의 경계가 보인다. 지쳐서 멀거니 과거로 유령처럼 돌아온 의식은 그 지도를 따라 헤맨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지난 세월 몇 번 이곳을 찾았던 기억위에 지도를 겹쳐(오버랩)본다. 시가지에 들어가 본 일은 없고 오직 천마총 반월성 석빙고 첨성대 계림 불국사- 변두리만 맴돈 것이다. 그 시가지-관아가 있고 객사가 있고 그 중심지를 다시 바라보고 또 영천경계에서 아화와 건천을 지나 무열왕릉을 지나 시가지(읍성)에 들어와서 안압지 옆 경주박물관을 지나 동남으로 멀리 불국사의 조역을 지나 구어역을 지나 울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그려본다.
처음 보는 지도위의 역표시 : 이 호화판 지도책은 8만원이다. 그 옆에 보급판은 5만원이다. 망설이면서 색인을 보다가 눈에 뜨인 것이 朝驛(조역)! 부지런히 페이지를 훑는다. 지도에 역을 표시한 것을 처음 본다. 조양동 고분군 사이 몇 채의 인가 ‘탑마을’에 그 역은 탑과 더불어 있다. 이 부분은 5천분의 1이다. 그 책을 사고 카드로 결재한다. 밖은 햇살이 눈부시고 부신만큼 어지러웠다. 배낭과 카메라와 손에든 책-기댈만한 난간도 마땅하지 않다.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이 번화한 곳엔 이상하게 먹을 곳이 없다. 아니 내가 찾지 못했거나 찾았다 하더라도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는 그런 탈진이었을 것이다. 이럴 때야말로 가만히 앉아 쉴 때인지도 모른다.
박물관의 이 지도를 보면 보도블럭을 깔아놓은 인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남산(금오산)을 따라 동으로 가면 대강 32개 가운데 26번째 조역으로 갈 수 있다. 집사람은 천선생과 이선생과 지금쯤 인천에서 이 먼 길을 향해 떠났을 것이다. 나란히 걸으면 충분히 석양에 조역도 찾고 불국사에도 갈 수 있는데 몇 걸음 걸어보다가 되돌아와 그냥 버스정류장에 주저앉는다.
人跡끊긴 불국사관광단지 : 버스를 타기로 한다. 버스는 일직선으로 가지 않고 통일전으로 돌아간다. 정말 거칠게 운전한다. 국도의 불국사마을을 지나 내던져진 정류장은 ‘하이 눈(하오의 결투-게리 쿠퍼 주연)’의 거리처럼 고요하다. 촬영을 끝내고 버린 한낮의 영화 세트처럼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호반의 아파트식 콘도에서 쉴까 했는데 그 집들은 모두 기와를 얹고 시멘트에 흰 칠을 하고 하나같이 4-5층인 바둑판미로에 군부대의 관사 아파트를 닮았다. 딱 한번 폐광이 된 강원도의 여량을 지나 구절리의 빈 집에서 이런 적막을 맛보았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불국사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모두 두세 번 씩. 나도 몇 번 이곳에 왔는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예약은 사조콘도로 했고, 확인전화도 왔는데 어디서 그 콘도를 찾을까? 조선시대의 주막- 그런 온돌에서 무릎을 맞대고 막걸리를 마시며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밤은 이제 쉽지 않다. 겨우 모퉁이에서 연탄을 피워놓은 수퍼의 문을 민다. 담배와 맥주를 몇 캔 샀다.
- 이북에 퍼주기 해서 모두 금강산으로 가니....
인기척을 몇 번 하고(박인로의 船上嘆을 빌리면 ‘헛기침 아함이...’)나서야 부스스하게 컴컴한 안방 문을 밀고 나온 아주머니는 장탄식을 한다. 신판 요산 선생(김정한)의 ‘寺下村’이 떠오른다. 과잉투자를 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계획경제의 부산물인가?
콘도는 디귿자로 5층 건물이다. 이 거대한 빌딩에 이 시간에 들어온 사람은 나 혼자다. 방 2개에 거실 겸 냉장고와 찬장이 달린 주방 그리고 꼭지달린 샤워기와 땟국물이 자르르한 겨울 베란다와 東向(동향)에 산- 0번에 전화를 해서 더 좋은 방은 없느냐고 묻는다. 방의 크기만 다를 뿐 똑 같단다. 기둥세우고 칸을 막고, 수도꼭지 붙이고, TV를 들여놓으면 여관이 되는 이런 집은 수용소를 닮았다. 이 방을 찾는데 집사람은 고생 좀 했는데 와보니 여기 저기 숙소가 없는 것은 아닌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도심여행-시내에서 나도 집사람도 여관을 찾지 못했고 서로 아는 장소는 불국사 외에 똑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텅 빈 방에서 천천히 맥주를 마신다. 차다. 겨울 창을 바라보니 길 건너 식당에 인기척이 있다. 서서히 일어나 주차장을 건너 된장국을 시켜 먹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없는데 모과를 썰고 있는 아주머니들과 먹거리 이야기를 하며 웃었고 나물들이 맛이 있었고 돌아오면서 모과를 얻어왔다. 향이 좋았다. 그리고 지하실 사우나에서 목욕을 했다. 또 면도를 했다.
再會 : 일행은 날이 저물며 부지런히 전화를 한다. 길은 막히고 밀리고 안동을 지나고 ...그리고 경주에 들어와서 불국사를 찾고 드디어 도착했다. 그 사이 불 꺼진 이 이상한 도시에 가로등이 켜지고 오직 이 콘도(기숙사?)에만 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족모임-회사연수-동창회-목욕손님...갑자기 야시장이 열린 듯 했다.
집사람은 병어를 졸여왔다. 어디서고 법주도 안동소주도 사기 어려운 것이 너무 이상했다. 경주에 와서 서울 술을 마신다는 것이 어리둥절했다. 종이 한 장이 무거운데 안동에서
부터 소주를 짊어지고 오기에는 너무 힘들었었다.
충주까지의 사진을 크게 뽑아왔다. 한 200장 될까? 그 사진들은 지나온 길과 계절을 회상시켰는데 너무 낯선 느낌이었다. 아니 내 오관과 소리와 냄새와 촉감이 없는 카메라의 시각은 너무 싸늘했다. 그러나 聾兒(농아)처럼 그 사진에서 기억을 되살리며 한 장 한 장 과거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았다.
- 이 먼 길을 뭐하러 왔노?!
- 잘 걷는지 감시하려고...
- 그래 감시가 되나?!
- 다리는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하는데 많이 부었다. 더구나 작년에 靜脈瘤(정맥류)를 성모병원 P교수가 집도했는데 좀 불안하기도 하다. 평생 처음 ‘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데, 부모에게서 받은 그 살에 칼을 댔었다.
- 예전에 행상들은 발을 묶어 천장에 걸어놓고 잤다던데...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바람이 불고 불국사는 광장을 지나 멀리 어둠속에 있고 사위가 고요하다면 산사의 밤으로 틀린 것은 없는데 아스팔트위에 불 꺼진 괴기한 상자들(여관)사이를 지나는 이 황량한 기분은 옮길 수 없다. 불이 환한 것은 오직 우리 집(콘도) 뿐이었다.
- 왜 방폐장이라도 유치하려 하는지 좀 알 것 같구만!
드문드문 불이 켜진 가게마다 들러
- 안동소주 있어요? 동동주 있어요? 막걸리 있으니껴?
제일 좋은 막걸리는 이동막걸리다. 겨우 한 집에서 경주의 토속 막걸리를 샀는데 다들 달다고 하는 바람에 주흥이 깨졌다.
이튿날 : 집사람은 과자와 옷을 가져왔다. 좀 늦게 일어났다. 명승은 볼수록 빛이 난다. 이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려했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 말들이야 나와 걷는다지만 먼 길을 와서 걷고 나면 어기서 목욕을 하고 언제 인천까지 간다는 말인가? - 남산 아니면 불국사-그러면 차가 있으니 좀 멀리 굴불사 등등. 이 사람들은 나에 비해 경주 전문가다. 집사람은 이틀의 휴가가 더 있다. 아침을 먹고 결국 민속공예촌에 들러 보문단지에 짐을 풀어놓고 무열왕릉을 거쳐 영천으로 가기로 한다. 집사람이 음식을 만들어 나를 먹이면 이 사람들은 이 먼 길을 와서 결국 집 밥을 먹고 운전만 하고 돌아가는 셈이다.
다시 영천으로 : 한 걸음이라도 어서 북쪽으로 가서 이 사람들의 길을 줄여주고 싶었다. 곧게 벋은 벚꽃 길을 따라 시내를 벗어나 개울(형산강)을 건너고 철길옆의 무열왕릉에 차를 세운다. 여기서 삼국의 쟁패와 승리 그리고 왕릉의 귀부외 이수(국보)를 만난다. 비신은 없어졌다. 누가 그 위업을 毁損(훼손)했는가? 누가? 왜? 이 부근이 모량역이고 ‘나그네’의 고향이다.
그 牟梁驛은 在府西二十三里 西距義谷驛二十四里 西北距阿火驛二十二里 大馬二匹 中馬二匹 卜馬十匹 驛吏十五人 驛奴二十名 婢一口가 여지도서의 기록이다, 또 金克己의 詩가 있는데 정과장이 메일로 보내왔다. 우선 옮겨두고 다음에 번역하기로 한다.
鄕心萬里久搖㫌/忽向家山振策行/遙嶺漸況他界色/亂流初放故園ꊱ/駕收斷梗隨風跡/持慰浮雲戀峀情/世上榮枯堪一笑/何ꊲ擾擾苦馳名 * ꊱ은 변이 ‘土’ 아래 ‘夕’ 이고, 傍(방) 이 ‘羊’, ꊲ는‘亻’+‘頁’
* (鄭以吾 詩) 驛路蟬吟老樹秋/東都遊客獨登棲/五侯地舘蓬蒿遍/玉笛閑吹往事悠
* (趙 俊 詩) 鷄林山水欲淸秋/萬古興亡客倚樓/尙使後人迷不鑑/天東此日獨悠悠
다시 북으로 차를 몬다. 고분군이 나타나는데 이 金尺里古墳(금척리고분)에는 전설이 있고 그 무덤가운데로 국도가 지나는데 더 넓히자는 논의가 있단다. 그만큼 고분이 잘려 나갈텐데... 고분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 - 그런 것은 후손이 돌보지 않는 主人(주인)없는 무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안개와 옅은 구름이 시야를 가린다. 서해안에서는 황사인지도 모른다. 요사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 주요소에서 기름을 넣고 여근곡을 물어 농로를 따라 철길을 건너간다. 여근곡은 부끄러운지 속치마를 벗지 않고 있다. 그 전망대를 지키는 수호신이 紗帽冠(사모관)을 쓰고 열심히 産母(산모)의 모습을 한 오봉산과 여근곡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 부분 ‘마고’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이야기와 연결하면서...다시 북으로...
阿火(아화)를 지난다. 그 역을 확정하지 못했다. 만약 기차역이 그곳이라면 阿火驛은 在府西北五十五里 北距永川淸通驛三十里 大馬二匹 中馬二匹 卜馬十匹 驛吏十四人 驛奴十八名 婢十九口가 있었고 또 시가 있었다.
* (金克己 詩) 何處堪惆悵/晨興遠邁時/登途雖促促/去國尙遲遲/嶺枕新曦湧/林間宿霧披/ꊱ杯無奧語/庭樹綠猗猗 **ꊱ은 ‘奉’으로 보임.
경주를 벗어났다. 만불사의 그 擧神像(거신상-서있는 불상)을 다시 본다. 차에서는 걸었을 때의 그 느낌이 전혀 없다.
우리는 차를 타고 가는데 선생님은 이 먼 길을 걸었다면서 L선생은 감탄을 한다.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네! - 내일 근무할 자네들이 걱정이지...
인터체인지를 이용해 새로 난 4번국도에 올라 나란히 달리는 고속도로를 본다. 아직은 차가 드물지만 대전에만 가면 남도의 차가 다 모일 것이다.
영천의 그 터미널에 세 번째 들리니 이제 친근하다. 일요일-겨우 차를 주차했는데 영화식당은 만원 - 줄을 서있다. 주인들은 아는 척을 한다. 나는 어깨를 약간 뒤로 젖힌다.
- 아니 무슨 집이 줄을 다 서요!
그래도 빨리 자리를 만들어준다. 집사람은 비위가 약하다. 이집은 육회전문인데 두 사람이야 접시가 나오자 ‘그리고 말이 없었다(하인리히 뵐).’집사람도 처음
에는 망설이더니 한 점 두 점 입맛을 다
신다. 운전수 빼고 한 잔씩 하고 일인분을 더 시켰다. 마침 장날- 그 유명한 영천장에 콩팔러 간 것은 아니지만 활기를 본다. 장꾼들은 모두 보퉁이를 끼고 있다. 마치 잉카의 후예처럼 산골짜기에서 1년의 수확이 이곳에서 흥정되는 듯 하다. 체-지게-바구니 모두 그 옛날이 묻어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보이지 않는 어느 골짜기에서 내려와 겨울 해를 머리에 이고 벌써 돌아갈 먼 길을 걱정하고 있다. 차는 피난길에 나선 듯 조심스레 인파를 헤친다. 일출이 아름답던 그 다리 밑에도 사람들이 꽉차있고 차들로 메워졌다. 이곳은 약재가 유명하고 보약을 지어주는 한의원도 많다.
조선통신사와 조양각 : 갈대의 강 - 그 금호강을 지나 朝陽閣(조양각)을 우러러본다. 이제는 촉석루처럼 친근해진 그 누각아래서 나는 한가하다. 포은 정몽주는 이곳 출신이고 그의 기개를 이 사람들은 닮았는가? 포은고등학교도 있다. 영천의 옛이름이 영양인데 그 陽(양)자가 들어있는 조양각은 明遠樓 혹은 서세루라고 불리는데 공민왕 17년(1368) 부사이던 이용, 그리고 향내 유림들이 합심하여 지은 건물로서 영남 7루의 하나다. 좌우에 청량당과 쌍청당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 조양각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명현, 풍류객들의 시를 판각한 8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경내에는 산남의진비와 영천지구 전승비,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등의 기념물이 있다.
1763년(영조35)음력 8월 일 이 정자에서 조선통신사의 일원이었던 김인겸은 대접을 받았다.
일동장유가의 일절인데 4/4조로 소리 내어 읽어보면 의외로 쉽게 뜻이 통할 것이다. *秣馬(말마)는 말에게 먹이를 주는 것/ *열읍은 수령의 대유 / *버거는 ‘다음으로’.
淸晨(청신)에 秣馬(말마)하여 永川으로 바로 가니,/ 邑地(읍지)도 웅장하고 안세도 광활하다./ 여기는 대도회라 전례로 연향하매,/ 감사도 친히 오고 列邑이 많이 왔네,/ 조양각 높은 집에 鋪席(포석)을 장히 하고,/ 순사와 삼사신이 다 주워 올라앉아,/ 그 버거 사 문사를 차례로 좌정하고,/ 풍류를 치오면서 잔상을 드리오니,/ 찬품도 거룩하고 기구도 하도할샤./ 군관과 원역들은 이 연석에 못 든다고,/ 연상을 각각 받고 딴 좌에 앉았구나. /
이때 正使(정사)는 조엄이었다. 춘향전의 연회장면이 떠오른다.
이어서 말에서 재주를 부리는 馬上才(마상재)가 벌어졌다. 기마민족의 기상을 일본에 과시한 이 말 타는 기술은 통신사행사의 중요한 종목이었다.
눈앞의 너른 들에 혁통처럼 길을 닦아, 볼품 좋은 닫은 말게 마상재를 시험하니, 그 중에 박성적이 좌우 칠보 날게 하고, 송장거리 등니장신 일등으로 하는구나. 사방에 관망할 이 양식 쌓고 두루 모다, 좌우에 미만하니 몇 만인 줄 모르괘라. 창녕의 관속들이 왔다가 나를 보고, 반겨하고 뛰노는 상 그려 두고 보고지고. 경주 부윤 송라 찰방 낱낱이 반갑고야. 육십 리 묘장원에 연일 지대 나왔구나.
청통사와 청통역 : 공원에 올라 왕평의 시비를 보고 호연정에 다시 들렀다. 이형상<1653(효종4)-1733(영조9)>은 왕족이니 당연히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태종의 셋째아들 효령대군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성균진사를 지낸 주하(柱夏)다. 1677년(숙종 3) 사마시를 거쳐 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 호조좌랑, 금산군수, 제주목사를 지내고 1727년(영조 3)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영천에 호연정(浩然亭)을 세워 학문에 힘쓰면서 〈둔서록 遯筮錄〉을 초안했다. 시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자료를 널리 모았으며, 시조를 한역한 작품 77수를 남겼다. 저서에 문집 〈병와집〉·〈둔서록〉·〈강도지 江都志〉·〈남환박물지 南宦博物誌〉·〈악학편고 樂學便考〉·〈예학편고 禮學便考〉·〈성리학대전〉이 있는데 이는 보물 652호로 遺稿閣(유고각)이 집 뒤에 있다. 이 집의 택호인 호연정의 서문을 보면 ‘이치가 내 정자에 있는 것은 원기가 만물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정자를 지은 자는 집을 만들었고 이 정자에 사는 자는 거처하여 ...중략... 이치는 숨은 것이며 기운은 나타난 것이며 물건은 나뉘고 사람은 다른 것이다 운운 성리학에 심취한 모습이 역연하다.
해남의 고산 고가처럼 이곳에도 종손이 집을 지키고 있으니 반갑다. 효령대군 21세손은 대학입시 준비중인데 조경학과를 지망한단다. 그가 전해준 안내책의 城皐九曲(성고구곡)을 보니 그 아홉 번째 노래가 九曲淸通寺(구곡 청통사)다.
구곡이라 좋은 경치는 땅의 형세가 원래 그래서인가?(九曲煙塵地勢然)
뒷 냇물의 형승이 앞 냇물의 형세보다 더 났네(後川形勝勝前川)
淸通驛(청통역)에서 하고 하는 일이란(淸通驛裡爲爲事)
반은 인간(속세)에서이고 반은 마상에서 일세(半是人間馬上天)
제목은 청통사지만 내용은 청통역이다. 이 절만 찾으면 바로 청통역이 보일 것이다. 앞냇물은 금호강이고 뒷냇물은 신녕천이다. 이 노래는 단양팔경처럼 영천구경을 노래한 서경시이니 이 역은 경치 또한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1702년 숙종 28 壬午 병와가 지었고 밀성 孫貴睦이 獻額하였다는 주가 달려있는데 세 번째 이곳을 찾아 이 시를 얻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이번에는 청통사를 찾아보자!
길 건너 보물인 충렬사를 보고 왕평의 생가를 지나 두 사람을 인천으로 보냈다. C와 L은 떠났다. 그들의 자동차가 한번 신호등에 섰다가 건널목을 건너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함께 일했던 동료- 이 길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지나온 세월과도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몇 걸음 더 걷다가 우리도 택시를 타고 어수선한 파장골목을 헤치며 기차역에 내렸다. 영천에서 경주로 가는 열차는 쉽지 않았다. 한번은 내 길을 청량리부터 따라온 이 기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인연이 없다. 집사람 차표를 예매하고 흙길을 걸었다. 해는 또 저물고 바람이 찼다. 버스는 내가 걸어갔던 길을 그리고 승용차로 올라온 길을 새 길과 옛길을 엇바꾸어가며 쏜살처럼 달리다가 어둠속에 그 길을 묻어버렸다. 터미널에서 은행가는 길을 물어 시내를 걸으면서 천년의 고도를 음미했다. 저녁은 먹지 않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봄이면 벚꽃이 필 강변로를 달리다가 ‘불친절한 운전수씨’ 때문에 우리는 그냥 현대호텔에 버려졌다. 정원을 헤매다가 되돌아 나와 동쪽을 바라고 끝에서 끝까지 보문호를 반 바퀴 돌았다. 가끔 젊은 연인과 노년의 관광객들이 그림같은 호수가를 가벼운 바람에 스쳐가며 가로등으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디서 샹송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미국식주막 : 힐튼호텔은 편안했지만 노트북이 없는 나그네에게는 불편했다. 그 사람들도 여기서 하루 재웠으면 좋았을 텐데 집사람의 병어조림을 여기서 먹을 수는 없어서 불국사 여관촌까지 갈 수밖에 없었었다. 각국의 수상이 머물다간 이 주막은 2박3일 아침을 먹고 X원 - 패키지로 편안한 값이다. 봉필이의 사위님의 부인님께서 배려해주신 덕에 주머니에서 돈은 나가지 않았다. 수퍼에서 사들고 온 비싼 맥주를 아주 조금씩 마시고, 그 기운에 비지네스센타에 내려가 조금 메모를 정리했다.
11월28일(월요일) : 아침을 여관에서 한다는 것은 나그네에게 복이다. 그런 주막은 이제 전라도 대흥사 유선장 뿐이다. 숲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그런 편안한 자리에서 죽을 떠 넣고 과일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흘러가는 성탄의 노래를 들었다. 뜨락을 거닐면서 햇볕이 뜨거움을 잃고 잎이 져버린 여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전 내내 전화를 했다. 전에는 전화를 하면서 쉬었는데 오늘은 쉬면서 전화를 했다. 114→→ 경주 박물관 학예연구실 (054-740-7538) 박선생은 대구 박물관으로 전근하시고, 논문은 대출중 → 대구박물관→ 박방룡학예실장실 → 실장님은 부산 출장 중→ 핸드폰으로 어렵게 박 선생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인근 대학에서 열람할 수 있다는 정도...다시 114→ 경주문화원의 미스000과 대화가 이루어졌는데 ‘오시면 해결될 것 같은데요?!’
경주문화원 : 그 불같은 성질의 집사람은 조용히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경주-대구-부산을 전화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가련한 남편을 지켜보고 있다. 그 논문은 쉽게 손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이 생겼으니(내일은 비워주어야 한다) 옷차림을 가벼이 하고 버스를 기다린다. 택시와 흥정을 해보는데 만원은 좀 비싸다. 좀처럼 버스는 오지 않고 지나가는 승용차는 모두 검은 색이다. 이런 차는 손을 들어도 태워주지 않는다. 손님을 태우고 한바퀴 돌고 다시 나타난 택시 운전수가 ‘아직도 기다리시니껴?’ -(그래! 시간이 돈이다)-운전수는 50% 할인한 가격으로 책받침에 프린트한 여러 관광코스를 소개한다. 모두 가볼만한 곳이고 가격도 좋지만 오늘은 아니다. 부지런히 옛길을 물어본다. 운전수만큼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만 모르는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다. 조양동 지나 입실 지나 구어라고 해 보아야 조양동부터 모르는데 그 다음을 알 수가 없다. 공부에서 기초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일이 그 말을 적어놓지 않은 것을 지금 후회한다.
택시는 경찰서를 지나 조선시대의 시청인 기와집 동헌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새로운 박물관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을 박물관으로 썼다면 분명 들렀을 텐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화-모량-사리-조역-구어역은 모두 이곳을 기준으로 거리를 재고 있다. 뜰에는 서봉총의 스웨덴 황태자가 심어놓은 잣나무가 하늘은 찌르고 있었고, 동헌은 경주문화원으로 그 한 칸을 시사편찬위원회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 건물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전화로 서로의 용건은 알고 있었다.
-어려운 걸음을 하시는데 경지정리 등으로 옛길이 남아있어야지요...어떤 길로 오셨는지 궁금하네요...
원장님은 박방룡 실장의 ‘신라왕경과 도시계획’이라는 논문을 복사해놓고 또 한 권의 박사학위논문을 펼쳐 보여주시면서 이 그림이 200年前 경주부의 그림인데 서쪽의 이 다리 사진은 다음페이지의 일제사진과 같다고 설명해주셨다. 갑자기 마음에 햇살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심호흡을 해가며 그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논문을 복사해달라거나 대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경도대학에서 출판한 이 논문의 저자 이름을 한 글자씩 되뇌어보니 韓三健-일본 이름은 아니었다.
- 이분은 혹...
- 지금 울산대학에서...
귀가 번쩍 틔었다. 원장님은 직접 그 두 페이지를 복사해주시고 내 카메라에 눈길을 주시며 정문에 이 그림을 크게 옮겨놓았으니 찍도록 권유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뜰을 한 번 더 돌고 나서 부지런히 핸드폰의 뚜껑을 열고 J교수에게 사정을 전했다. 1시간 뒤에 연락을 해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집사람과 그 시가지를 음미하며 걸었다. 동헌의 문을 들어설 때나 나올 때나 변한 것은 없었지만 이 길 위에 신라의 천년이 그리고 고려와 조선을 지나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인 시대가 200년 전에 있었고 일제를 거쳐 지금 저 거리의 간판 신호등과 차들이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2천년을 늘였다 줄였다하면서 몇 블록을 걸었다.
내가 지금까지 신고 걸어온 신발을 파는 콜롬비아 가게가 처음으로 눈에 띄었다. 등산복가게들을 바라보니 동물인 인류가 그 탄생부터 얼마나 많은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는지 그 걸음의 역사를 생각나게 했다. 아주 늦은 점심을 부산식당에서 먹었다. 부산사람인 부인이 끓여주는 누룽지를 집사람은 반가워했다. 고향에서 먹어본 뜨물누룽지는 보리와 콩가루를 섞어서 구수한 맛이 났다. 이 부인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과 청계천관광을 다녀왔다며 웃는다. - 청계천이라더니! 쪼매 큰 또랑이드만?!
J교수의 전화가 왔다. 정말 정확한 사람이다. 내일 저녁에 약속을 했고 H교수가 논문도 한 권 준비하겠다고 한다. 나는 저녁을 사겠다고 약속했다. 일이 잘 풀리는 것인가? 실마리는
붙잡은 것이다. 긴장이 풀리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경주의 방황- 시간과 공간을 엮어가며 천천히 걸어 시가지(邑城)를 빠져나오니 바로 황남빵집이 나타났다. 신호등을 지나 첨성대에 이르니 반월성 앞 너른 들의 배추가 석양에 초록을 뽐내고 푸른 하늘엔 조각구름이 범선마냥 흐르고 있었다. 채소밭 사이의 곧은길을 소녀는 자전거를 타며 웃고, 조랑말이 끄는 마차가 아이들을 태우고 힘없는 방울소리를 풍기면서 지나간다. 이 죽령길에서 유일하게 만난 말이다. 우리가 기마민족이라는데 그리고 말을 기르던 30곳의 역을 찾아 걷고 있는데 이렇게 100년에 씨가 마를 수 있을까? 대능원이 아름다웠다. 봉분은 대지에 누워있는 여인의 젖가슴처럼 풍만하게 솟아 노랗게 석양을 받아들이고 봉긋하게 솟아 병풍처럼 지평선을 가로막은 산맥에 다리를 뻗고 있었다. 풍요의 상징일까? 저 봉분은? 그리고 궁궐에서 왕릉까지는 얼마만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저승과 이승에 대한 고대인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양의 경복궁에서 망우리 밖 동구릉은 대략 30리는 떨어져 있었는데 이곳 신라사람들은 어떠했는가? 첨성대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면 천문의 관측뿐만 아니라 이 왕릉에 대한 경배와 제사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계림을 지나며 그 탄생과 저승과 하늘을 우러르는 그 첨성대를 묶어 생각해본다. 신라초기의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대신하던 그 무당신앙은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땅에 들어온 그 신앙들은 형태만 다를 뿐 모두 신에게 일직선으로 소망을 비는 그 영성(‘靈’은 농경시대에 비(雨)를 비는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전하는 무당으로 되어있다<靈=雨+口口口+巫>)으로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혹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아닐까? 월성이 있고 반월성이 있고 - 저기 앞서가는 아내는 月城 李氏다 - 그 반월성이 토성이었다면 저기 2천년동안 베어지고 다시 자란 비탈의 나무들은 본래 없었을 것이다. 적군이 그 나무에 기어오르거나 불을 지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의 성곽은 마지막 보루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그런 것처럼 불리했을 때는 성곽에서 적군과 최후의 대치를 했다. 盛大(성대)의 도시들의 그런 산성은 예비의 장소였고 주 생활무대는 아니었다. 따라서 공주의 공산성이나 부여의 부소산성이나 또 이곳의 반월성도 그런 예비의 성격일 것이다. 서울의 四大門(사대문)밖의 남한산성처럼 말이다.
문무왕은 戰火(전화)가 가시고 포로들의 울부짖음이 가라앉았을 때 이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자신을 화장하게 했을까? 그런 망상은 접어두고, 언제나 그런 것처럼 결국 천마총 앞에서 첨성대→대릉원→계림→ 반월성→석빙고 이렇게 간단히 경주를 돌아보았다. 1시간 남짓? 집사람은 조금은 나와 함께 걷고 싶어 했다. 이미 겨울 해는 서산 언저리를 더듬고 있는데 우리는 다시 박물관 앞 불국사 길에서 망설였다. 결국 토요일 불국사로 가던 그 정류장에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갓 심은 가로수가 여윈 가지를 의지할 데 없는 청공에 맡기고 오직 뿌리에 의지해 흔들리며 버티고 있었다. 붉은 보도블록이 깔린 길은 편안했다.
함께 걷는 길은 편안했다. 금방 버스 정류장이 또 지나간다. 함께 걷는 사람을 伴侶(반려)라고 한다. 사람을 반으로 갈라놓고(人(인)+半(반)) 또 한 사람이 呂(려)라는 음을 빌려 붙어 있다(侶(려)). 同伴者(동반자)라는 말도 있고 또 道(도)를를 닦는 친구를 道伴(도반)이라고 한다. 오른쪽은 남산에 기대어 바둑판처럼 반듯한 논이요, 산기슭은 동방역을 지나 불국사로 가는 철로가 따라오고 있었다. 31대 신문왕릉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울산가는 역마을을 물었지만 장보러 다니던 입실 지나 구어지나 ... 지명들은 환한데 길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지금 지도라도 있다면 그려가며 확인할 텐데 이곳에서는 마땅한 지도를 구하지 못한 채로 방황하고 있으니... 저녁은 먹지 않기로 했다. 비지네스센타에서 집사람과 메모를 정리했다. 맥주를 한잔 마셨다.
離別(이별) : 깨어보니 바람이 몹시 분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고 징글벨 소리의 볼륨이 높아졌다. 두툼한 외투에 쌓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이른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오른다. 모두 노인 들이다. 1905년부터 여기 일본인 학교가 있었다니 이 사람들은 이 학교에 다닌 경험이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아침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에 물결이 일어 줄이 끊긴 백조 배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忌日(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故人(고인)의 뜻은 무엇일까?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아니면 아들이 이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일까?
우리는 짐을 꾸렸다. 아내가 가져갈 붉은 배낭은 너무 무거웠고 내 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프런트에서 계산을 마치고 불러준 택시로 경주역에 내려 유럽여행처럼 락카에 동전을 넣고 짐을 맡겼다. 시장에서 祭需(제수)를 마련하고 분황사에 내렸다. 人間到處有靑山-사람 발길 닿는 곳이 모두 墓(묘)자리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일구는 어머니가 가르치신 것이기도 하다. 어느 곳이든 종교불문하고 기도를 드리자고 이미 이야기했었다. 집사람은 돌아가서 모레 또 제상을 차릴 것이다. 기와에 그런 뜻을 대강 썼다.
분황사는 황량했다. 경주에는 31개의 국보가 있다. 토요일 고선사지 석탑과 봉덕사종 - 어제는 산책하며 첨성대 오늘은 이 탑을 본다. 분황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 이 탑은 국보 제30호. 3층으로 높이 9m30cm지만 원래대로 9층이라면 그 장엄함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安山巖(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인데 지금도 구석에 무너진 것으로 보이는 다듬어진 돌들이 쌓여져 세월을 잊고 있다. 그 높이에 어우러지게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넓고 높게 쌓아 네 모퉁이에 부드럽고 사실적인 수법으로 암수의 사자상이 지키게 했는데 암사자는 물개와 흡사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실(龕室-창고)을 만들고 문(門扉)을 달았는데 그 안에 불상 같은 예배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텅비어있다. 문 좌우에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워놓은 인왕상(仁王像)이 태권도의 자세를 취하고 지켰음에도 소용이 없었나보다. 이 여덟 명의 문지기들은 발달된 근육과 발의 자세와 어깨 등 모두 확실한 무인의 자세로 당시의 기상을 실감할 수 있다.
이런 기법은 중국의 톈룽산[天龍山] 석굴에 있는 수대(隋代)의 인왕상들과 비교된다고 한다. 옥개부(屋蓋部)는 전탑(塼塔) 특유의 구조인 상하에 층단(層段)이 있는데 1915년 수리 때 2층과 3층 사이의 석함(石函) 속에서 은제사리합, 구슬류, 금동제장신구류 등이 발견되었다.
겨울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절을 끼고 담 옆에서는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주인은 마방이 지금의 황남빵집 앞(천마총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마차가 그때까지 있었다고 하니 연탄을 실어 나르던 그 짐마차(베를린 영화제에 나갔던 000감독<?> 김승호 주연의 ‘馬夫(마부)’라는 기념비적 영화)인지 驛院(역원)의 짐마차인지는 아리송하지만...
집사람은 어제 걷다만 길을 이어 가자고 하는데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보다가 출근해야할 사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어지럽다.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보내는 것이 道理(도리)다. 역으로 돌아가 짐을 꺼내고 표를 바꾸고 대구에서 KTX로 환승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맹목이라는 말이 있다. 집사람은 내 건강이 나는 길이 맹목이었다. 그냥 경주에서 새마을을 타면 이 걱정은 해소되는 것인데 걱정 때문에 서로 반대의 길을 간다는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경주발 대구행 기차는 레일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꼬리를 사렸다. 나는 역사를 잠시 거닐다가 안내데스크에서 중앙선에 대해 물었다. 이 안내원은 정작 자신의 철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 이 열차는 1992년(?)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승객이 없어 수지타산으로는 벌써 폐선되어야 했어요...겨우 산업용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 함께 공부했다.
중앙선 철도 : 부산이 종점으로 알고 있었는데-청량리에서 경주가 중앙선이다. 사철로 출발해 부분 개통하다가 완결된 것은 1942년-그러니 영주에서 1941년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거다..청량리와 덕소 그리고 무인역이 된 팔당과 능내 양평에서는 그 역사를 산책했고. 헤어진 중앙선을 다시 만난 단양역은 침수로 산으로 올라가서 죽령을 함께 넘었다. 풍기지나 영주에서는 옮겨간 구역사의 철로 위에서 아침을 먹었고 옹천역앞에서 21세기 만두를 먹고 운산역이 바로 그 기차역이었으며 신녕 영천에서 나란히 아화 모량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중앙선 역사는 모두 77개 그 개요와 함께 그 이름을 적어둔다. 기차역이름을 훑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청량리역에서 경주역까지 382.5㎞. 경기도 양평군, 강원도 원주시, 충청북도 제천시와 단양시, 경상북도 영주시·안동시·의성군·영천시 주변 내륙일대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날로 증가하는 조선·만주·일본 간의 여객과·화물의 수송을 원활히 할 목적으로 이 노선을 건설했다고 백과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1923년부터 기획되어 1935년에 345.2㎞의 노선이 확정되어 중앙선이라 하고, 1936년부터 실측공사에 들어갔다. 죽령을 기준으로 노선의 북부는 서울의 동경성(청량리) 방면에서부터, 남부는 그해 12월 영천 방면에서부터, 중앙부는 죽령 터널과 치악 터널 부근에서부터 동시에 공사를 실시했다. 북부의 청량리-양평 간 52.5㎞는 1939년 4월에, 양평-원주 간 55.9㎞는 1940년 4월에, 원주-단양 간 74.3㎞는 1942년 2월에 각각 개통되었고, 남부의 영천-우보 간 40.1㎞는 1938년 2월에, 우보-안동 간 48.9㎞는 1940년 3월에, 안동-단양 간 73.5㎞는 1942년 2월에 각각 개통됨에 따라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구간을 경주까지 연장하기 위해 1938년 7월 조선철도주식회사의 사철이던 영천-경주 간 37.5㎞의 협궤선을 매수, 중앙선에 포함시키고 광궤개축공사를 실시하여 1939년 6월에 상업운전을 개시하면서 노선명을 경경선(京慶線-아마 서울과 경주라는 뜻이었겠지)으로 개칭했다가 해방 후 1945년 10월에 중앙선으로 환원했다. 1969년 9월부터 1973년 6월까지 청량리-제천 간 155.2㎞, 1987년 12월에 제천-구단양 간 29㎞, 1988년 12월 구단양-영주 간 35㎞를 전철화했다
전구간에 걸쳐 험준한 차령산맥과 소백산맥을 통과함에 따라 터널 95개소, 교량 305개소가 설치되었다. 특히 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역과 충청북도 단양군 죽령역 사이에 있는 죽령터널은 길이 4,500m로 태백선의 정암터널에 이어 한국에서 2번째로 긴 철도터널이다. 너비 3.9m, 높이 5.9m의 단선터널로 죽령역 쪽이 희방사역 쪽보다 고도가 높기 때문에 나선형으로 터널을 만들었다. 또한 원주시 금교역에서 치악역 사이에 있는 길아천교는 길이 235.7m, 높이 32.97m로 한국에서 가장 높은 교량이다. 이 철도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봉양역에서 충북선에, 제천역에서 태백선에,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역에서 경북선과 영동선에 연결되어 영동·영서 지방을 잇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73개소의 역이 설치되어 있으며, 1991년 현재 연간 1,137만 6,000명의 여객을 수송하여 한국철도여객수송의 7%를 담당하고 있다. 화물수송량은 발송이 928만 9,000t, 도착이 632만 3,000t으로 각각 한국철도화물수송량의 15%와 10%를 차지해 여객운송보다는 지하자원을 수송하는 산업철도로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철로가 없던 조선시대 전국 8도에 500개 남짓의 역이 있었다고 했는데 2001년 통계에는 남한에 631개의 기차역이 등록되어 있으니 계산해 보아야겠지만 조선조에 30리라면 요즘은 15리 단위로 줄잡아 조선시대 역 1곳에 두개의 기차역이 설치되었다면 어떨지? ...
밑줄 그은 곳은 내가 걸어온 길의 역이고 진한 부분은 그 역에 들러본 곳이다.
청량리, 망우, 동교, 도농, 덕소, 팔당, 능내, 양수, 신원, 국수, 아신, 양평, (원덕, 용문, 지평, 석불, 구둔, 매곡, 양동, 판대, 간현, 동화, 만종, 원주, 유교, 반곡, 금교, 치악, 창교, 신림, 연교, 구학, 봉양, 제천조차장, 제천, 고명, 삼곡, 도담,) 단양, 단성, 죽령, 희방사, 풍기, 안정, 북영주, 영주, 문수, 승문, 평은, 옹천, 마사, 이하, 서지, 안동, 무릉, 운산, 단촌, 업동, 의성, 비봉, 탑리, 우보, 화본, 봉림, 갑현, 신녕, 화산, 북영천, 영천, 송포, 임포, 아화, 건천, 모량, 율동, 금장, 경주.(77)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차표 한장은 동해남부선 포항이 시발역이고 부산이 종점이다. 기차는 달랑 세칸이다. 동방-불국사-입실-아화-호계 ... 안내원이 이 역이름을 적어주었다.
동해남부선 자료에는 범일, (부산)부전, 거제, 남문산, 동래, 안락, 재송, 수영, 우일, 해운대, 송정, 기장, 일광, 좌천, 월내, 서생, 남창, 덕하, 선암, 울산, 효문, 호계, 모화, 입실, 죽동, 불국사, 나원, 청령, 사방, 안강, 양자동, 부조, 효자, 양학, 포항등 35개의 역이 있는데 이번에 보니 시발역이 부산의 중심가인 부전역이었다. )
울산대학교 : 내가 되돌아와 걸어야할 그 길을 살피면서 또 여관과 식당을 눈여겨보는데 고개는 없고 거의 평지를 달린다. 불국사를 지나자 들판은 보이지 않고 거의 이어진 도시를 가르며 달린다. 이 무궁화호는 모든 역을 통과하고 호계에서 잠시 머문다. 이제는 완전히 도심을 달린다. 울산역에 들어서자 입이 벌어진다. 현대자동차의 차들은 푸른 태화강을 배경으로 조가비처럼 반짝인다. 끝없이 이어진 자동차들은 거대한 조가비의 모래사장을 연상케한다.
역에서 내려 광장을 돌아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했다. 울산대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허교수가 약속한 도서관으로 숨을 몰아쉬며 뛰어나온다. 국민체조를 하듯 흥분이 가실 때까지 잡은 손을 흔들었다.
울산의 꽃바위
그 동해에 너울을 만들며
지난밤 바람불고 물결이 뒤채더니
수평선에 산이 생겼다.
그래도 태양은 떠오르나니
눈이 내리거나
비가 내리거나
어려울 때일수록
한줌의 햇살을 가슴에 품고
가끔 쓰린 가슴을 문지르며
내일도
새해처럼 떠오를 그 아침을 기다리자!
태양은 언제나 아무 말 없이
태양은 언제나 뜨겁게
동해에서 떠오르나니...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梁曉星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