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사업과 봉사와 자선이 닿는 곳에 인격을 잃어 가는 사람이 있다. 복지가 성盛하는 곳에 관계·소통 쇠衰하는 사회가 있다.
‘복지병’에 물든 사람들, 대신해주거나 베푼 것에 익숙한 사람들, 다른 집은 쌀 주고 우리집은(나는) 왜 쌀을 주지 않냐며 화를 내고 불을 지르겠다는 사람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다른 집과 거리를 두게 하여 구걸하게 하였는가?
사람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사람살이의 마땅한 도리가 무엇인지,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복지의 근본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지, 이러한 향방과 이치를 버려두고 시세時勢와 증상문제·욕구만 좇아 달음질할 수는 없다. 성실하게 돕는 것만으로는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른다.
사회사업의 일(기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선배님들이 그리해왔듯이 대신해주거나 베풀어주는 것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기술)을 할 때에도 우리는 한번 쯤은 생각해보고 행동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귀찮다고 혹은 복잡하다고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사업에 있어서 이상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전문가랍시고 대신해 주거나 베풀어주며 행세하지 않는가. 평범한 사람살이 속에 있던 것을 전문성이니 전문직이니 하면서 뚝 떼어 가져다가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가.
그래서 사회복지와 사회복지사는 흥하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품격과 자연력을 잃어가고 구차스러워지지 않는가. 사람살이의 생태가 어지러워지지 않는가.
검증되지 않은 모호한 지식, 일반화하기 어려운 불완전한 지식을 아주 조금, 그것도 어설프게 배웠으면서도, 별나게 신통한 지식·기술이라도 있는 것처럼 전문가랍시고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가.
저는 대학의 평생교육원을 통해서 미술치료지도사자격증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1학기는 기초반 2학기는 심화반, 임상실습 80시간을 이수하였지만 누가 자신을 진단해달라고 하면 겁부터 납니다. 조심스럽습니다. 단지, 미술이 좋아서 강좌를 듣고 싶었던 이유가 가장 큰 이유였는데 가끔씩 저를 곤란하게 합니다.
나의 말이 혹여나 ‘문제’가 되고 ‘증상’이 되고 ‘진단’으로 끝날까봐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의사들도 아동들이 ADHD로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하고서는 약물을 처방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ADHD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욱더 어설픈 지식을 가진 저로선 미술치료보다 미술활동이 좋습니다.
학생들은 실무를 어떻게 준비하는가. 무엇을 해야 할지 꿈은 희미하고 갖춘 게 없으니 졸업할 때가 되어도 스스로 부끄럽고 답답하지 않은가. 학습권은 온데간데없고 학습문화는 실종되어 버렸으니 사회사업 교육 현실은 부끄러워 차마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꿈꾸기를 귀찮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열정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당사자와 지역사회의 자연력으로써」 하는 사회사업입니다.
복지생태는 ⓐ약자 인지적인 사회 - 약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 ⓑ약자와의 공생성이 강한 사회 - 약자와의 관계와 소통의 밀도가 높은 사회, ⓒ복지가 자연스러운 살림살이로 소통되는 사회 - 사람들의 일상과 직업 그 살림살이 속에 약자를 위한 배려·도움·나눔이 있는 사회, ⓓ이렇게 사람살이의 생태 자체가 복지 친화적인 사회, 약자가 살 만한 사회입니다.
③ 이념·철학·정신·사상·원칙
- 복지를 보이지 않게 소통시키자
- 복지를 어디에나 두루 스미어 흐르게 하자
- 복지를 보편적이거나 평범하게 하자
- 복지의 바탕을 기르자
④ 방법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당사자와 지역사회의 자연력으로써 돕습니다. 그 방법은 단순합니다. 걸언乞言 즉, 인사하고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걸언乞言은 복지를 당사자가 사는 곳에서, 당사자를 주체로 세워서, 당사자의 삶이 되도록 녹여냅니다.
그 상황, 사안, 여건 속에서 가급적으로는 자연력으로서 걸언하여 주선하고 거들어 들이는 것입니다. 2년정도 학교를 다니면서 재가 자원봉사를 나갔습니다. 봉사를 나가면 ‘할머니 쉬세요’라고 하면서 청소해드리고, 밥차려드리고, 빨래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랑 함께 청소하고, 할머니께서 잘 하시는 음식을 해주시면 함께 맛엤게 밥먹고, 설거지는 제가 합니다. 할머니께서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은 함께 하고, 할머니께서 잘하시는 것은 세워드리고, 제가 감사함으로 설거리를 하는 것, 손녀딸이 왔을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사회사업은 약자가 살 만한 「사회」를 도모하는 사업입니다.
지역사회의 바탕이 됩니다.
사회의 「공생성」을 담당하는 사업입니다. 「사회」가 핵심 소관입니다. 복지제도나 복지시설도 담당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복지제도’, ‘복지시설’은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구실을 통해서 사회를 도모합니다.
자연주의 사회사업의 이상은 「지역사회의 복지생태화」입니다.
윗사람이나 제도가 바뀌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핑계하거나 여건을 탓할 것도 아닙니다.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저는 무섭습니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을 때가 몇 번이나 드는지 모릅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현장에서 그렇게 실천해 온 것입니다. 예부터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 옛 공동체에서도 복지는 평범한 이웃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던 같습니다. 인격과 자존심을 지켜 호혜적 관계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것 같습니다. 품앗이, 乞粒, 마당쓸이...
복지제도가 있었는가? 복지서비스가 있었는가? 옛 어르신들은 계ㆍ두레ㆍ품앗이처럼 서로 돕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오셨습니다. 어르신들의 살림살이에 관심 갖고 싶습니다. 현재에도 그런 살림살이를 좇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게 소통하는 복지 - 이는 생색내며 베푸는 것도 아니고, 구차하게 받는 것도 아닙니다. 쌍방의 인격과 자존심이 살아있는 상호작용입니다.
복지사업·후원·봉사·자선·사랑·구제라는 이름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면, 고맙기는 하지만 인격의 상처, 낙인, 소외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너무도 쉽게 열등한 존재로 분류되어 버리고 대상화해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복지를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궁금합니다. 사회복지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노인복지센터, 지역아동센터 더군다나 시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저소득층, 나보다 어려운 사람,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아동, 문제아가 이용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자녀가 지역아동센터를 다니냐며 화를 냅니다. 복지의 이름이 사회에서 이웃집으로부터 상처받고, 낙인 찍이고, 소외당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아픕니다. 안타깝습니다.
사람과 자원을 끌어들여서 우리의 복지사업을 함으로써 우리가 그 공을 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의 삶에 보이지 않게 내장內藏하여 그 사람들이 나누고 돕게 함으로써 결국 그 사람들에게 공을 돌려야 합니다.
공생성을 회복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제도와 시설 속에 복지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복지를 풀어내고 생활 속에 복지를 내장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복지가 아니라 생활복지 나아가서 삶인 것이다.
보통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보통사람의 일상과 직업 속에, 보통사람들의 공동체 속에, 보통의 제품과 서비스 속에 복지기능을 내장하거나 부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지를 어디에나 두루 스미어 흐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지의 많은 분야와 많은 이론중 제가 선택한 복지는 ‘자연주의 사회사업’이고 이 점이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복지제도와 프로그램과 시설을 따로 만들어 서비스할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보통 사람이 이용하는 일반 제도와
프로그램과 시설에 복지 요소를 내장內藏하거나 부가하여 사회 약자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쓰는 것을 함께 쓰고 보통사람들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복지의 대상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약자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지의 대상자는 우리 모두입니다. 전 보편적 복지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개별화시켜 삶의 불편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청각장애인용 TV를 따로 보급할 것이 아니라, 일반 TV에 자막수신기능을 내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청각장애인도 어디에서나 TV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용 공중전화를 따로 설치할 것이 아니라, 일반 공중전화에 턱을 없애고 높이를 낮추고 보청기 호환 기능과 소리 증폭 기능을 내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휠체어 장애인, 키 작은 아이, 허리 굽은 노인, 가는 귀 먹은 사람, 청각장애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쓸 수 있습니다.
웹사이트를 만들 때 장애인용 페이지를 따로 만들 것이 아니라, 웹 사이트 자체를 장애인도 볼 수 있도록 접근성을 고려하여 만들어야 합니다.
장애인용 도서관을 따로 만들 것이 아니라, 공공도서관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장애인 축제를 하는데 지역주민을 참여시켜서 장애인과 주민이 함께 어울리도록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역의 축제에 장애인도 주민으로서 참여하도록, 지역축제가 장애인 주민까지 배려하여 수용하도록, 그리고 지역축제의 기획·준비·진행 과정에 장애인 대표가 참여하도록 공작하고 지원하는 활동은 어떻습니까?
장애인 축제를 따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고, 거기에 지역주민을 참여시키는 것도 좋지만, 일반 지역 축제에 장애인도 주민으로서 참여하고 또 주민으로서 누리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하지 않습니까?
장애인을 주민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는, 장애인도 그저 주민으로서 살아가도록 주선하고 거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복지를 보편적이게 하는 것입니다.
저상버스 따로 만들어서 대문만한 글자로(?) 저상버스라고 쓰지 말고, 모든 버스를 저상버스로 만들자.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다르게 복지의 섬, 복지의 성, 드림랜드를 만들지 말자 - 별천지 낙원에 보호하기보다 보통 사회 속에서 함께 살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복지시설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복지라는 이름으로, 따로, 특별하게, 구분하여 직접 서비스하는 방식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가급적 지역사회에서, 지역사회로써, 지역주민의 삶이 되도록 풀어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제품이나 서비스를 설계하는 것을 「보편적 설계」라고 합니다. 경제 능력, 신체·정신 능력, 건강, 연령에 상관없이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제품과 서비스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복지 normal welfare “보통으로” - 보통화 normalization
장애가 중증이라도 가급적 보통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맞추어 준다, 보통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생활권이나 의식주도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게 합니다. 남녀 간에 어울려 살며 교제하는 조건이나 생활 흐름이나 연령에 따른 관계와 처신까지 가급적 보통 사람들과 같거나 비슷하게 합니다.
편의상 따로 서비스를 하더라도, 장애인용을 비장애인용과 다르지 않게, 수급자용을 일반 이용자용과 다르지 않게, 시설입주자용을 일반가정용과 다르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보통사람들의 것과 같거나 비슷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주거·요양시설은 주거환경과 활동공간, 음식, 의복, 생활용품, 생활방식 등을 최대한 보통사람들과 비슷하게 만들어 주려고 합니다.
기숙사를 일반 가정 형태로 바꿉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판 대신 보통 가정처럼 다양한 식기를 씁니다. 옷이나 신발도 개인에게 돈을 주어 그가 원하는 것을 사게 합니다. 연극을 볼 때 극단을 초청하거나 집단으로 가지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시내 극장에 삼삼오오 뜻 맞는 친구들끼리 혹은 가족 단위로 가서 봅니다.
시설 바깥 보통 사람들처럼 아침밥을 먹고 나갑니다. 일터로, 학교로, 치료실로, 놀이터로, 프로그램 장소로 갑니다. 낮 동안 바깥에서 지내다가 오후나 저녁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침과 저녁밥은 집에서 먹지만, 점심은 대체로 밖에서 먹습니다. 요즘은 시설의 생활도 이와 같이 보통사람들의 생활 흐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시설의 아동들이 모두 옷이 같습니다. 색깔도 모양도 다 같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지 묻지 않습니다. 모두 쌍둥이인가 봅니다. 보통은 모두 자기 취향에 맞게 입지 않습니까?
항상 비빔밥을 먹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먹기 쉬우라고, 국에 밥에 김치, 돈까스, 반찬 몇가지를 그릇에 모읍니다. 그리고 가위를 들고 잘게 자릅니다. 이것은 제가 부르는 ‘이상한 비빔밥’입니다. 장애인은 맛을 모릅니까? 당연하고 생각합니다. 손도 모르자고, 먹기 좋게 편리하기 위해 그런다고 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저보로 돈을 줄테니, 먹어보라고 하면 절대로 먹지 않겠습니다.
따로 식판을 사용해서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싸운다고 자기가 먹을 만큼 먹기 위해서 식판을 쓴다고 합니다. 음식찌거기가 줄어들었을까요? 음식물은 더 많이 나옵니다. 자신이 떠가는 것도 아닙니다. 얼마만큼 먹을지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담고서야 먹으라고 합니다. 맛이 이상합니다. 반찬이 아깝다고 버리지 않아서야 건강에 이상이 생길까봐 걱정이 됩니다.
※ 보편적 복지와 평범한 복지
보편적 복지는 보통사람들이 쓰는 것을 같이 쓰게 하고, 평범한 복지는 보통사람들의 것과 같거나 비슷하게 합니다.
드러난 문제와 욕구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증적對症的 임기응변臨機應變을 일삼기보다는, 「뿌리와 바탕」을 다루자. 문제를 일으키는 뿌리, 문제를 예방·해결할 수 있는 바탕, 문제를 희석시켜버릴 만큼 크고 탄력적인 바탕, 그 바탕을 이해하고 건드려서, 자연처럼 그렇게 스스로 살리고 기르고 치유하게 하자.
①당사자를 세워야 합니다.
당사자의 탄력성 - 복지 자연력을 깨우고 기르고 생동시켜 주어야 합니다. 대신·대체하거나 베풀어주기보다는 주선하거나 거들어서 당사자가 살게 해야 합니다.
계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 당사자를 참여시켜서, 당사자가 선택·획득·생산·통제·활용하는 주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어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진지하게 설명하고 묻고 의논하고 함께 하고 부탁하고 거들어서 가급적이면 당사자가 주인 되게 해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당사자가 사는 곳에서, 당사자를 주체로 세워서, 당사자 그 사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역사회라는 바탕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지역사회 자체를 약자 인지적 사회, 복지적 환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회복지사들이 복지시설 안에서만 잘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단히 지역사회와 상관하며 가급적 지역사회에서, 지역사회로써, 복지를 지역주민의 삶으로 풀어내기 위해 공작해야 합니다. 시설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설 안에서보다 시설 밖 지역사회에서 더 많은 복지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차근차근 도모하자.
뜻 있는 사람들을 자원봉사자나 후원자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직업세계와 일상생활 속에서 복지적 삶을 살도록 주선하고 거들어서 지역사회를 복지 생태로 가꾸어야 합니다.
개인주의적, 이기적인 삶 속에서 자원봉사자, 후원자로 끌어들이기보다 직업세계와 일상생활 속에서 복지적 삶을 살도록 주선하고 거들 수 있겠는가? 지역사회를 복지 생태로 가꾸어 갈 수 있겠는가? 맥락으로 도시에서도 자연주의 사회사업이 가능한가? 묻습니다. 전 최근 들어 ‘구실’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구실이 있어 고맙습니다. 제도와 기관으로 자원봉사자라는 구실로서 관계맺기 때문에 소통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일정한 시간이 아니라 그 외의 관계와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직업세계와 일상생활 속에서 복지적 삶을 살도록 주선하고 거들어서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지고 지역사회를 복지생태로 가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지를 보이지 않게 어디에나 두루 있게 하고, 보편적이거나 평범하게 하고, 바탕을 기르자는 것, 이것이 자연주의 사회사업의 이념·철학·원칙입니다.
자연주의 사회사업의 이념은 ①복지를 보이지 않게 소통시키자. ②어디에나 두루 스미어 흐르게 하자. ③보편적이거나 ④평범하게 하자. ⑤바탕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걸언」은 특별한 기술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예禮입니다.
①인사하고
②여쭙고
③의논하고
④부탁하고(부탁하되 때로는 먼저 본을 보이거나 함께 합니다. 부탁하되 주선하거나 거들어 줍니다.)
⑤감사하는 것입니다.
「관계와 소통」은 복지의 토양이요, 「자연력」은 복지의 항산恒産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사업은 「사회」로써 하는 사업입니다. social work 즉 「사회적」으로 하는 사업입니다. 「사람사이에서, 사람들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사업의 핵심 현장은 사회, 「지역사회」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구실로 지역사회에 나갑니다. 지역사회를 만납니다. 지역사회와 상관합니다. 지역사회를 도모합니다.
사람에게는 남을 돕고자 하는 착한 마음, 스스로 서고자 하는 자존심 - 이러한 「복지적 본성」이 있습니다.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이러한 「복지적 본성과 자연력」을 깨우고 기르고 생동시켜서 복지를 이룹니다.
사회사업가가 일방적으로 기획·준비하지 않습니다. 대신하거나 베풀어주지 않습니다. 가급적 지역사회를 주체로 세워 지역사회가 하게 합니다.
겨울광활에는 크리스마스활동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날이 되면 선물(후원)들이 여기저기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공연도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선물도 받고 공연보면 됩니다. 크리스마스날에는 집에서 어떻게 보냅니까? 가족의 식구들이 크리스마스장식도 하고, 선물도 준비해서 서로에게 줍니다. 저또한 어릴적 오빠랑 집에 있는 옷걸이봉에다가 어머니께 이불솜을 받아서 장식하곤 했습니다.
성탄절에는 우리 마을이 어떤 분위기였으면 좋을지,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지, 가족이나 친구에게 카드와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는 친구에게는 거들어줍니다. 모르는 글자도 가르쳐주고, 선물 구입하로 갈때 함께 가자고 말하면 함께 가기도 합니다. 선물구입이 어려울 것 같으면 서로 아이디어를 내봅니다. 선물은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돌에다가 이쁜 꽃그림을 그려서 주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로 의논해봅니다. 산타옷, 천사옷, 루돌프 옷을 입고, 마지막 악세사리로 성탄준비가 끝나면 모듬별로 성탄행사를 나누로 마을을 돌아다닙니다.
아이들의 집에 가서 철암의 고마운 분들을 찾아서 성탄절의 따뜻함을 나눌 마을분들을 찾아서 집에 장식을 해도 되는지 여쭙고, 장식도 하고, 캐롤을 부르며 감사함을 전합니다.
노래를 잘 알지 못해서 똑같은 가사만 반복해도 즐겁습니다. 경로당의 어르신들은 사랑스럽다며 냉장고에서 먹을거리를 줍니다. 공부방에 가서 나눠먹으라고 합니다.
행복, 감사, 나눔, 따뜻함이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날이라고 사회사업가가 일방적으로 기획하고 준비했으면 어땠을까요? 또 아이들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되었을 것이고 대상화되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기획하고 진행하니 아이들 입에서 " 선생님, 오늘 참 행복해요." 라는 말이 스스로 나오지 않습니까?
크리스마스 아이들의 일상입니다. 아이들의 삶입니다. 아이들의 삶에서 아이들이 주인이 된거지요.
우리에게 쓸 것이 넉넉하다 하여 우리의 것으로써 하면 후에도 우리의 책임이 되어 항상 그렇게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역사회의 것, 지역사회의 자연력으로써 돕되 제자리에서 생동하도록 공작합니다. 자연력을 끌어들여 우리가 활용하기보다는, 가급적 제자리에서 주인이 살려 쓰게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제자리에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일상과 직업으로써 살리고 돕고 나누도록 주선하고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
따로 행하는 일(후원·봉사)은 곧 부담스러워지기 쉽습니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쉽습니다. 쓰고 남는 것, 쓰고 남는 시간, 쓰고 남는 힘, 찌꺼기로 돕기 쉽습니다. 자기 식구 먹는 것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다른 농사처럼 되기 쉽습니다.
주민의 일상과 직업 자체가 다른 사람(특히 어려운 사람)을 살림으로써 살고, 살리면서 사는, 「살림·살이」 되게 하는 것이 귀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따로 떼어내어 우리 복지사업의 대상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주체로 또한 지역사회 주민으로 살게 합니다. 도움 받는 것도 지역주민으로서의 삶이 되게 합니다.
①특별히 복지라는 이름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으면서도 ②지역사회 사람 사이 어디에나 두루 스미어 흐르며 ③보편적이거나 ④평범하고 ⑤바탕이 만들어집니다.
① 당사자가 사는 곳에서
② 당사자를 주체로 세워서
③ 당사자 그 사람의 삶이 되도록 주선하고 거들어 줍니다.
당사자가 주체가 되고, 당사자의 자연력이 생동시키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해도 잘 주선하고, 거들어 드리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프로그램 대상자, 서비스 대상자, 후원 대상자, 봉사 대상자, 케어 대상자, 보호 대상자, 치료 대상자, 사례관리 대상
자... 「대상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 세우는 것입니다.
첫댓글 깊이 있게 읽었구나. 우정이 경험으로 잘 녹여서 정리했네. 공감가고 이해가고 좋은 자극이 된다. 고맙다.
'오래된 미래' 라는 책에 보면 서구식의 무차별적인 개발, 전통과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도움과 개발이 가져오는 무시무시한 부작용들이 잘 나타나 있지. 농활 기간 시간되면 함께 읽고 싶구나.
'오래된 미래'라는 책은 처음 들어봐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사람과 사회, 한덕연선생님께 이번 연수 기간에 다시 듣기를 바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