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인품과 애민
최영은 전공으로 하사받은 전토를 노비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노비신분을 파하여 평민으로 살게 하였다.(노평가: 고려의 최영시대 유행가로써 최영의 파격적인 신분타파로 공이 높아질수록 평민이 많아진다는 최영에 대한 칭송민가, 이같은 최영의 독단적행위는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3차례나 탄핵을 받았으나 공민왕에 의해 모두 묵살됨=고려실사에 의하면 이같은 최영의 덕으로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해방된 수가 수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전까지 무려 12만에 이르렀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은 “공직자는 무릇 황금보기를 돌같이 보아야 한다”는 명언인데 자신은 이에 평생토록 충실하여 이성계일파가 반역을 성공한 후, 그의 죄를 밝히려고 아무리 조사해도 단 하나의 비리도 없었으므로 참수함에 있어서 죄목은 단하나 "대국인 명나라를 정복하려한 대역죄" 란것이었으니, 고려황실에 대한 역적이 아니라 외국인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라니...당시 이성계란 인물이 철저한 중국숭배주의의 근본적 본성을 알수있는 명백한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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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본관은 철원(鐵原).
수사공(守司空) 유청(惟淸)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이다. 공민왕은 청렴,엄격하며 부하들과 같이먹고 자는 젊은 장군 최영을 각별히 신임하였다.
1354년5월, 공민왕은 대호군단(大護軍團)을 창설하였다. 최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호군단은 공민왕의 직접명령을 받는 친위軍隊으로써, 고려 제1무장인 최영과 휘하에 유탁·염제신,이성계,조민수등 40여명의 장수 및 정예군사 3,550명 전원이 철기 및 전차대로 구성된 중무장 군대였는데, 특히 백마 200필로 구성된 기단대(오늘날 의장대)가 있어 창설기념사열에 참석했던 공민왕 및 대신들이 그 화려함에 크게 감탄하였다.몽고군과 고려군의 차이는 몽고군은 가죽갑죽을 입어 서양의 철복(가야철갑형태)에 비해 움직임이 자유로왔는데 고려 철기군은 얇은동전같은 쇠비늘을 겹쳐만든 철갑옷으로 . 행동이 자유롭고 가죽보다 강한방어력을 가진철갑군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 해, 형제국인 원(元)나라에 장사성(張士誠)의 반란이 일어나 전국을 휩쓸자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는데, 공민왕은 고려의 정예군인 대호군을 파군키로 하였다.
대호군은 원나라로 원정하여, 1만5천의 원나라 군과 함께 고우(高郵)·사주(四州)에서 장사성의 5만반군과 대전투를 벌이는데, 고우에서 수리전술로 무려 10배가 넘는 장사성의 주력부대 3만7천을 괴멸시키고, 원나라군이 고전중이던 사주로 신속히 이동하여 이곳에서 전투중인 1만5천 반란군 배후를 공격하여 괴멸시킴으로써 장사성의난을 완전히 진압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고려실사에서는 이 전투를 최영의 고사대전투 라 한다.
수리병술: 수리란 매,독수리를 뜻하는 우리고유어인데, 높은곳에 위치해 있다가 목표가 잡히면 신속하게 하강하여 날개를 펴고 낚아채버리는모습에서 착안한 병술이라 수리전술,수리전법이라 부르는,속전속결의 군사작전중에 하나다.고조선때 제1단군이 창안하여 반도에서-중국-러시아-몽고-독일-헝가리 지역까지 정복했던 병술로써 (후일 몽고제국이 재정복한 지역임), 최첨단무기(고조선당시 최초쇠검인 청동쇠검,활등),스피드(기마), 강도높은 훈련, 높은 사기등 4가지를 근본으로 하는데,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패수해전,살수,패수대첩등)-몽고(마흐레육전,모스크동전 등)-고려(최영)- 금(청=팔기군)-이조(이순신:학익진)으로 이어진 한민족 전통병술이다. 세계최고의 병법은 중국의 손,오자병법이 아니다. 원래 구려병술서인데 고려때까지 거의 집집마다 한권씩 있었으나 이조개국당시 이방원(이조태종)의 왕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모조리 수거 소각시켰는바, 현재까지 남아있는 책자는 구전외 하나도 없다.
1361년, 홍건적 2만군이 재침입하자 최영은 수도 개경을 비우고 후퇴하였다. 이에 개경을 함락한 홍건적이 성안에 있던 음식등을 먹으며 승전잔치를 벌이는 방심한틈을타 이방실·안우의 군으로하여금 이를 야습케하여 개경을 수복하고, 대호군단은 도망치는 이들의 퇴로를 끊어 완전히 섬멸하였는 바, 돌아간 홍건적은 한명도 없었다. (연사 최영)
공민은 이 공을 높이평가하여 도형벽 상공신(圖形璧上功臣) 제1등공신으로 전토(田土)1천마와 노비1천8백을 하사하고 전리판서(典理判書)직에 임명하여 조정의 유력한 실력자로 자리잡게되었는데.
최영은 하사받은 전토를 노비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노비신분을 파하여 평민으로 살게 하였다.(노평가: 고려의 최영시대 유행가로써 최영의 파격적인 신분타파로 공이 높아질수록 평민이 많아진다는 최영에 대한 칭송민가, 이같은 최영의 독단적행위는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3차례나 탄핵을 받았으나 공민왕에 의해 모두 묵살됨=고려실사에 의하면 이같은 최영의 덕으로 노비에서 평민으로 신분해방된 수가 수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하기전까지 무려 12만에 이르렀다.
전라 수군 확충
우왕은 1380년 최영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 임명하였는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왜구 때문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에 “천도가 백성들과 농사에 해로우며, 또 내성(內城)을 쌓아서 대비하면 되며, 전라도에 수군기지를 확충하면 될 것”이라 하여 이를 철회시키고 해도통도사가 되어
“국리민복에 종교가 따로없다” 며, 전국 사찰의 재산과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전라도에 수군기지를 만들어 대전함 100척과 중,소함 230척등 총 330여 척을 만들어 고려수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는데, 이 시스템은 이후 이조의 이순신때까지 유지되어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군의 기초가 되었다.
이듬해, 수시중(守侍中)을 거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내고, 1384년 판문하부사·문하시중이 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퇴하다가 조정 대신들의 만장일치결의서를 두번이나 받고서야1388년 수문하시중에 올랐다.
문하시중에 오른후, 염흥방·임견미등의 반역을 적발하여 이들을 처단했는데, 우왕은 최영의딸을 납비(納妃)토록 명하여 최영이 한사코 이를 사양했으나 5번에 거친 우왕의 거듭된 재촉에 의해 납비하였다.
원제국의 기황후, 고려여인 강씨의 지원군 요청과 고려의 10만 정벌군 출병
이때 원나라가 통치하던 중원에는 명국이라는 새로운 진족국가가 출현하여 원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황후로써 실권자였던 기황후(고려여인)는 모국인 고려의 왕과 최영주석에게 칙사를 보내 신흥 명국을 제압할 수 있는 지원군을 퍄병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고려의 우왕과 최영주석은 10만대군을 편성하여(본대7만 +요동군3만), 휘하의 이성계를 우장군겸 정벌군 총사령관으로, 조민수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대대적으로 출발시키게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대 반역 !!
화하족 후손으로써 평소 명나라와 친분이있던 이성계는 고려조정의 명나라 정벌방침이 결정되자,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최영주석의 집으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명나라를 정벌하여 구려의 원한을 갚고, 고려민족의 숙원인 대륙회복의 큰뜻을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하고, 만약 중국정벌의 위업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신과 다섯아들은 살아돌아오지 않겠다는 혈서를 최영에게 바쳤다.
이에 최영은 이성계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조민수를 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하군대부 박인충의 진언이 있어 최영은 이성계를 총사령관으로하되 군을 좌,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사령관에 조민수를 임명하는 군체제로 변경하여 파병하게 되었다.
정벌군의 식량은 2주일치로 요동까지의 분량이었으며 요동지방에서 자사 김세환의 3만군과 합류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도성을 출발한 이성계와 그 아들들 및 일파는 미리 계획한 대로 위화도에 도착하자 뚜렷한 이유없이 전군의 행군을 멈추도록 명령하였고 이곳에서 장마가 올때까지 지체하였다. 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마침내 장마가 오자 사기가 떨어져 개경을 출발할때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이성계는 비오는날 전군을 모아놓고 비를맞으며 순 억지인 "4불가론"을 주장하며 회군을 역설하고 선동하여 마침내 고려본성으로 회군하여, 평양과 개경을 점령한후 명나라의지시에 따라 최영의 목을 베고어 참수하고 우왕을 폐위한후 독약을 먹여 죽인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로부터 지시받은대로 허위의 중국조선인 기자조선을 계승한 조선 즉, 이씨조선를 개국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써 고구려와 동족인 돌궐의 원나라를 물리치고 진족들의 명국을 세운 진족들은 고려(고구려포함)만 생각하면 치가 떨릴정도로 무척 싫어했기때문에 반역에 성공한 이성계에게 고조선(원래 조선)을 신화화하기위해 조작한 기자조선을 계승한 조선을 개국토록 지시한것임)
사라져버린 한민족의 정체성-500년간 말살된 홍익인간, 배달정신
멸망한 고려와 원제국
이로써 고려의 숙원인 북벌 즉 중원정복, 고토회복의 뜻은 사라져버리고 중원에는 진족들의 나라인 명정권이 한반도에는 후기자조선인 이씨조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려와 원제국이 멸망하고 명과 이조가 각 개국하여 지배하게되자, 과거 고려지방이었던 요동호목 김건주(자사로써 김누얼의 7대손, 요동자사 김세환의 형, 누루하치의 친인척)은 방어상 요동을 버리고 만주로 이동하여 (건주)려진국을 건국함으로써 요동지방은 자동으로 중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만주만은 려진국(금나라 후일 청나라)으로 유지되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까지의 암울한 한반도 시대로 접어드게 된것이다.
고려의 정벌군이 위화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요동자사의 보고를 받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우왕과 최영주석은 친히 평양까지 왔으며 최영은 직접 위화도로 와서 병력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성계는 대군을 회군시켜 고려를 공격하기위해 진군하고 있었다. 이에 최영은 황급히 우왕을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와 성문을 굳게 닫고 궁안의 나인등으로 조직된 460명의 결사대로 맞섰으나 7만대 500은 전투대상이 아니되어 이성계군이 성벽을 넘자 모두 칼을 버리고 도망가버렸고 황실앞에서 최영혼자 칼을 휘두르다가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편, 고려정부로부터 10만대군이 출병했다는 파발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지르던 원 황실과 기황후는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지않는 고려의 지원군을 원망하며 명군에게 패퇴하여 몽골초원으로 도망쳐갔고 이후 기황후 고려강씨는 8개월 후 병을 얻어 죽었다.
[이성계의 최영주석 참살, 우왕 독살, 이씨조선의 개국 ㅡ고려양민 약 20만 대살륙 사건]
이성계의 7만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500명이 안되는 궁인들로 급조된 낭군으로 맞서 싸우다 사로잡힌 최영은 고봉(高峯:지금의 고양)에 유배된후, 합포(合浦)에 옮겨졌다가 공료죄(功遼罪)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고, 우왕은 귀양지에서 독약을 받아마시고 죽었으며 왕비로써 우왕과 함께있던 최영주석의 딸도 우왕이 죽자 음식을 먹지않고 42일을 울기만하다가 죽었다.
당시, 참수되기위해 귀양지에서 개경으로 올라오는 최영주석의 죄인호송 길에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어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그 행렬이 160여리에 달했다.(이것은 고려인들의 대규모 항의시위였다)때문에 이성계는 고려부흥운동을 염려하여 이조개국직후 전국적으로 포고령을 내려 3개월에 거쳐 고려왕씨 일가친척 및 관련 현자 학자를 색출하여 모조리 살해하였는데 이때 죽은 고려양민의 수가 20만에 달했다.
(이사건은 세계역사에 유례없는 유일한 일로써 이조실록 및 사학계에서는 비밀로부치고 현재의 이조위주의 왜곡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으나 정통사학계에서는 이 일을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중공의 동북공정보다 10배나 더 심각한 중요한 역사조작 및 왜곡사례로 평가한다)
최영주석에 대한 후기...
최영은 대표적인 고려인으로써 전쟁에 임해서 단 한번도 진적이 없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말타기 활쏘기에 명수로써 특히 활솜씨는 날아가는 두마리의 새를 꿰뚫을 정도였고, 유년시절부터 연개소문을 존경하여 금해병서를 손에 놓지 않았으며 "내가이 크면 연개소문의 못다이룬 위업을 이어받아 반드시 고토를 수복(중원정복)을 달성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여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혼이 씌인 아이로 불리웠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있다.(청연사 최영)
실재로 최영은 마침내 중국정복의 뜻을 실천하여 고려의 전군을 동원하여 중국정복군을 출병시켰으나, 자신을 믿드시 남도 믿는 결점으로 이성계에게 속아 대군의 지휘권을 이성계에게 맡기는 실수를 범하여 마침내 이성계에게 천우의 기회를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최영은 생전동안 약 15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는데(휘하전투 포함)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할정도의 전과이다.
"무패의 장군이면서도 겸허하기를 규수(여자)와 같았으며, 재물과 여색을 멀리하여 첩이 없었으며, 주석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집이 누추하여 우왕이 개축을 명해도 한사코 사양하여 죽기전까지 4칸의 방을 넓히지 않았다."
이러한 지도자가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공직자의 부정부패,가렴주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의 재임동안 국가는 튼튼했고 국력은 강했었다.
이런 훌륭한 인물이 된 바탕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잘 훈육받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높은 가치관과 강한 생활철학이 남달리 깊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은 “공직자는 무릇 황금보기를 돌같이 보아야 한다”는 명언인데 자신은 이에 평생토록 충실하여 이성계일파가 반역을 성공한 후, 그의 죄를 밝히려고 아무리 조사해도 단 하나의 비리도 없었으므로 참수함에 있어서 죄목은 단하나 "대국인 명나라를 정복하려한 대역죄" 란것이었으니, 고려황실에 대한 역적이 아니라 외국인 명나라에 대한 역적이라니...당시 이성계란 인물이 철저한 중국숭배주의의 근본적 본성을 알수있는 명백한 부분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상적인 경우에서는 도저히 납득할수없는 세계역사에 유일한 이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고려백성들은 최영장군의 죄를 반대, 시위하며, 분노하여 울지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한 고려실사(연사)기록이 아니더라도, 한민족이라면 위화도회군이 단순히 친명,친원적인 견해차이 이전에 본질적인 어떤문제가 있었던 일임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역의 이조시대동안 최영은 아주나쁜사람으로 기록되고 해석되어 철저하게 왜곡되었는바 위의 사실을 전하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사람이 별로 없이 잊혀져가는 왜곡된 국사를 배우고 또 가르치는 현실이 괴롭고,안타까울뿐이다.
그의 묘는 :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데 , 찾는 사람이 거의 없고, 아는사람도 별로 없이 초라하다. 그의 묘는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적분(赤墳)이라도 불린다.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부산 자성대(子城臺)에 있는 사당(祠堂)에서 '최영장군제'가 열리고 있으며, 단군과 같이 우리 고유 무속신앙에서만 숭배의 대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조작, 반역,왜곡된 역사를 막고저 길 한가운데 서있던 위인 최영주석, 이성계에 의해 그가 죽임을 당하면서 이미 고려정신, 한민족 정신도 죽임(말살)을 당하기 시작한것이다.
역사의 갈림길...
중국정벌의 고려군 10만의 출병과 회군과 본국멸망은 세계 어느나라 역사에도 없는 일로써, 최영주석과 이성계는 우리 한민족역사의 갈림길에 있던 인물로써... 이후 이조500년의 빈곤..그리고 오늘의 남북분단 현실과 사회적 갈등(노사분규),빈부격차(땅투기),역사왜곡,가치관혼란,황금만능주의,부정부패 등 이사회에 만연한 어두운 그림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왜곡,조작의 이 사건에 대해 우리는 객관적안목에서 다시 역사를 평가할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재의 국사는 위화도반역은 정당했다고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치고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사는 쿠데타와 부정부패로 점철되어있고 그런 생활속에서 우리는 살고있습니다.
사회는 온통 불신과 투쟁, 차별이 난무하고 가진자들은 자기만 잘 살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바 이러한 잘못된 의식이 우리 한민족을 파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이조시대의 정책답습이요,
이를 이용한 일제시대의 통치수법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 관습이며 폐습이며 문화인것입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바로 잡읍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르치는 국사는
중국국사에다가, 철저하게 이조위주로 왜곡되어있는 조작된 국사입니다.
이 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보다 10배,100배나 더 심각한
근본적 문제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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