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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허 교무의 세상읽기
신용벌에 5룡이 산다는데요?
이 글은 박용덕 교무가 1월11일 교역자광장 자유게시판에 올린
‘교운에 대하여’라는 글을 읽고 벅찬 감동을 받아서 촉발된 글이다.
내가 중앙총부에 산지가 몇 해인가?
예비교역자 3년, 원불교신문사 12년, 원불교역사박물관 2년째이니
17년이나 살고 있다.
그나마 역사를 전공했고, 문화에 관심이 있어
원불교신문 문화전문기자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중앙총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지식 뿐이었지
한데로 통합할 수 있는 안목은 없었다.
중앙총부에 5룡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른채 살았다는 말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그리고 내가 나의 사고와 상상력을 가두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았는지
통렬히 반성했다.
그나마 주산(周山) 박용덕 교무님같이 교사의 외길을 걸은,
안목을 갖은 한 분이 계셔서
후진의 눈을 뜨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새삼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산 박용덕 교무님은 중앙총부의 5룡과 건물 배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머리 속에 중앙총부가 다 그려지지 않거나
그려진다 해도 차분히 생각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인터넷의 속성상 차분히 읽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필자도 주산님께 다시 물어서 확인한 후에야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이 글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은
이 글이 게시판에 한 번 올렸다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대로 한 번 더 설명을 하고
더불어 영산성지의 명칭과 관련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진한 글씨가 박용덕 교무 글이다.)
도덕군자가 등천한다는 신룡벌에는 5룡의 혈이 있다.
동쪽으로는 호수 건너 미륵산이 보이고
황등호수 가에는 계룡동(鷄龍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신룡벌의 동쪽 계룡동은 새벽에 닭이 홰를 치며 우는 마을,
서북쪽 끝 五龍洞은 만석들을 향하여 길게 언덕길이 뻗어나가 장래 대창의 운세를 보인다.
중앙총부가 자리한 신룡(新龍) 벌은
새 용이 승천한다는 뜻이다.
신룡벌에 5룡이 있고,
신룡벌 넘어 해뜨는 동쪽에 계룡부락이 있다.
계룡부락은 알봉이 있는 마을이다. 이리자선원 들어가는
조그만 삼거리에 계룡부락이라는 돌이 새겨져 있다.
계룡은 5룡이 등천하기 전에 먼저 그 소식을 알려주는
선지자의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참으로 신비스러운 지명이다.
(나아가 대종사님이 나신 곳이 길룡(吉龍)리 아닌가?.
이렇게 보면 대종사님은 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륵불 회상을 용화회상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계룡의 계는 닭 계이다.
닭이 신새벽을 알리는 것처럼
새 용이 등천하는 것을 알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신용벌의 동쪽인 이곳이 계룡마을이라면
이는 미륵산과 연관이 있을터.
미륵산이 큰 산도 아니고, 경치가 빼어난 곳도 아니건만
미륵사라는 큰 절을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과일 열매가 어디에 달려있는가?
열매는 줄기가 아니라 가지 끝에 맺힌다.
미륵산은 노령산맥의 남은 기운이
진안에서 전주-봉동-금마로 이어지는
마지막 봉우리이다.
나무로 치면 가지 끝에 해당되는 곳이다.
무왕은 이러한 것을 보았기에
이곳에 미륵사를 건립한 것이다.
미륵사야말로 다가올 용화회상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어진 것이 아닐까?
땅으로 숨어들어간 미륵산의 기운이
계룡마을로 바로 이어짐을 느낄 수 있다.
계룡이란 이름은 바로 그 용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는 말이다.
신용벌에는 5룡이 있다.
현재는 오룡마을만 있고 1,2,3,4룡 마을은 없다.
박용덕 교무님은 건물 지은 순서대로 1-4룡을 붙였다.
방위와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주산님이 붙인 순서가
그대로 들어맞는다.
중앙총부에서 해 뜨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해는 미륵산 쪽에서 계룡마을을 거쳐 성탑을 지나
해너머골이라고 하는 서원관 쪽으로 진다.
주역에서 동쪽은 1,6 서쪽은 4,9이다.
그렇게 보면 해뜨는 동쪽이 1룡,
해지는 서쪽이 4룡이다.
대종사님께서 갑자년 가을
신룡리 344번지에 3,495평의 땅을 확보하고
그 一龍에 본관 2동을 건축하였으니 바로
도치원과 꼭두마루집 엿방이다.
현재는 본원실과 세탁부라 부르지만
당시에는 본관과 엿만드는 공장(엿방)으로 사용하였다.
이 一龍의 혈에 현재 송대, 성탑, 영모전, 원불교역사박물관이 들어섰다.
1룡은 곧 성탑을 중심으로 구정원과 역사박물관 능선을 말한다.
二龍의 혈에는 대각전을 지었다.
2룡은 법은관, 원음각 능선을 말한다.
三龍의 혈에는 원불교대학원과 효도마을이 차지하였다.
총부 저수지를 두고 원불교대학원대학교, 수도원, 효도마을로 이어지는 능선을 말한다.
四龍의 혈에는 최근에 서원관이 신축되었다.
사룡은 익산교당부터 시작하여 대각전과 구보은원(현 적공관) 너머 골짜기,
신룡벌의 서쪽이며 석방리 뒷산, 아늑하기 이를 데 없는 품세를 가졌다.
해넘이골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쉽게 말하면
익산교당, 복숭아 농원인 원림농원과 서원관 앞 능선을 말한다.
5룡은 어디인가?
5룡의 혈은 원불교 광고판이 서있는 송암농원부터 시작하나
일제가 인위적으로 철도를 놓아버려
계문언덕을 오룡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철도를 놓아 인위적인 힘에 의해 오룡이 분리되었으나
삼룡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오룡과 삼룡의 넉넉한 품새가 일룡(송대)을 감싸고 있어
회룡고조 조손(祖孫)의 관계가 참 아름답다
일제는 오룡의 혈에 철도를 놓아 지세를 꺾었지만
다행 재정산업부가 오룡의 혈자리 육교 앞에
원창식품 공장을 세우고
계문교회 언덕길로 뻗어나가게 한 것은
여간 잘한 일이 아니다.
좌산종사 12년 기간에 총부는
도치재 잿배기에서부터 철둑길 오룡동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추진 과정에서는 말이 많았지만
총부 부지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으므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실로 좌산종법사의 괄목할만한 치적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이렇게 오룡 운운하며 각룡마다 그 성격을 논하게 되는 것도 좌산종사의 공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옹색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
성지개발론이 아니었던가.
그 때는 철로길까지 확보하면 굉장히 넓은 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철로가 바로 지척이다.
특히 필자가 근무하는 역사박물관에서 보면
그 사이에 건물이 많이 들어서 더 그렇게 느껴진다.
주산 님은 중앙총부의 배치가
1룡 성탑, 도치원, 금강원, 종법실= 근본
2룡 대각전, 교정원사무실, 언론방송= 참여, 발전
3룡 대학원= 구도자
4룡 영모원, 요양, 복지시설= 추모, 수양
5룡 후진양성 기관= 구도자
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대종사께서 一龍에다 본관을 짓고
그 앞들에 회원들의 사갓집이 들어서게 하였으며
사무실을 자리잡게 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二龍에다 대각전을 세운 것은 장래 발전의 세를 보인 것이다.
주산 님이 아쉬워하는 부분은 3가지이다.
첫째, 웅장한 기운이 뻗지르는 이룡의 혈 대각전 아래
중앙수양원(원로원)이 들어선 것은 순서가 잘못되었다.
용장한 기운을 꺾는 격이다.
익산 시가지로 향하는 이룡의 혈에는
신문사, 방송국, 출판사, 보험회사, 시민사회 운동 등
대사회성 있는 사무실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부분은
원불교역사박물관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역사박물관은 현재 1룡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신관은 1룡 꼬리를 자르고 건립했다.
본원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필자가 근무해보니 이곳은 박물관 터로는 부적합한 지형이다.
수맥이 흐르는데다 지형이 낮아서 습도 조절이 안되고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기도 힘든 곳이다.
장기적으로 익산 시민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원로원을 4룡 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로 짓는 것이 좋다고 본다.
둘째, 영모전을 비롯하여 노인 관련 요양 시설은
해너머골 4룡에 배치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영모전은 가능하면 익산교당 뒤
가장 높은 터를 잡아 지으면 좋을 것이다.
셋째, 4룡(서원관)과 5룡(정화의집)의 구도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정화의집 같은 노인 요양기관이 4룡에 있고
군창만리로 뻗어나가야 할 서원관이
5룡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산은 이를 알고 처음에는 울분이 솟았으나
어느 날 배산에서 만석들 들길을 걸어 4룡의 혈로 들어서다
문득 한 감상을 얻었다.
“아, 이것이 우리 운세구나”
사람의 운세는 자기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니
후진이 근본을 돌이켜보지 않으면
새 판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한판이 바꿔야 할 운센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진이 후진을 미덥지 못하게 여기면
그분들이 와서 새판을 짜는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어르신들께서 5룡의 혈을 차지하였는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방법은 있다.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실력만 갖춘다면
절로 순리로 돌아올 것이다.
무가내하 힘을 갖춘 젊은 도꾼들의 서원관이 들어서야 할
5룡의 혈은 3룡의 혈과 연하여 回龍顧祖의 형세로
근본(일룡)을 돌이켜 보고 있는 형세이다.
전도유망한 도꾼들을 양성하여 미망한 세상을 밝히게 된다면
군창만리의 운세로 돌아설 것이다.
결국 주산의 관심은 군창만리에 있다.
새벽에 닭이 우는 계룡동에서 시작하여
오룡동으로 뻗쳐나가는 지세,
신룡벌 도덕공동체는 군창만리(群倉萬里)의 교운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증산선생도 예언하고
대종사도 상기하였듯이
彼天地虛 此天地盈 群倉萬里라 하였던 곳이 아닌가.
대종사 그 글뜻을 새기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쪽 서양은 주인이 빠지면 비고,
이쪽 동양에 주인이 오면 여기가 찬다.
앞으로 너희들 대우받는다”
(彼天地와 此天地는 선천과 후천으로 봐도 좋다.
피천지는 일정하, 차천지는 이 시대.
群倉은 군산의 옛 이름.
만석들에서부터 군산까지 펼쳐진 풍족한 평야이다.
얼마나 풍족하냐면 금은보화 곡식이 가득한 창고가
무리지어 있으니 그 물질적 풍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물질풍족이 아니라
그와 아울러 정신 개벽, 즉 정신의 개화를 추구한다.
이런 정신 물질의 발전이
서해바다, 중국대륙까지 탁 트이었으니
더 더욱 확장하여 태평양까지
무궁한 도운이라 하였다.)
군창만리는 군산 쪽으로 뻗어가는 우리 교세를 뜻한다.
앞으로 우리 교단의 관심은
철둑 건너 오룡동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도에 관심 있는 용장한 구도자들
세상의 도꾼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群倉萬里, 만석들 가운데로 길게 내민 계문동 언덕
좌우에는 도살장과 종말(폐수)처리장이 있다.
이 기막힌 대비 속에
우리는 정신문명을 꽃피워할 사명에 처하였다.
환경 친화적인 나무도 심고
땀 흘려 농사도 짓는 그런 수도원 운영체제가 가동된다.
이제까지 명색뿐이었던 수도원이
노인요양시설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젊은 구도자들의 무문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의 無門關은
종래의 6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은둔 수행처가 아니라
사방이 탁 트인 수도도량이란 뜻이다.
여기 수행 공동체는 일률적인 규제는 없으나
다양한 기법의 수행법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놀고먹는 구시대 수행의 폐단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 때 어느 곳이나 선방 아니겠는가마는
사리연구 위주의 훈련체제가 아닌
언어도단 입정처의 오직 삼매 위주의 수련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실종되고 오직 땀방울만 있을 뿐이다.
오늘의 땀방울이 오는 날에는 삼매의 결정체로 빛날 것이다.
농약과 도살과 오물의 악취가 진동하는 평야의 한가운데
이들 도꾼들이 건강하게 살아나야
인류의 복지가 이룩될 것이며
우리 도덕공동체의 오만년 대운을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총부 건설당시 엿장사이며
만석평의 밭갈기도 눈물겨워라
이제 이 노래는 더 이상 애조를 띄지 않을 것이다.
슬픈 눈물이 아니라 감격의 눈물이어야 한다.
세상읽기도 중요하지만
우선 내가 발딛고 있는 이곳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 더 소중하리라.
이렇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중앙총부를 바라보라.
군산으로, 서해로, 중국으로, 유럽으로, 대서양을 돌아 미국으로,
태평양을 건너 다시 중앙총부로 동그라미가 굴러갈 것이다.
그 동그라미 역사를 그릴 줄 알아야
밖으로 세계로 미래로 나갈 것 아닌가?
월간 교화 2월호 문향허 교무의 세상읽기 | | |
첫댓글 초기 교단사를 정리하신 주산 박용덕 교무님,쉽게 다시 새겨주신 문형허 교무님이십니다. 우리 후진들이 알고 있으면 좋으리라 여겨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