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쌍수 LG전자 부회장‥34년간 지방근무
김쌍수(金雙秀ㆍ59) LG전자 부회장은 최고경영자(CEO)가 되고 나서야 서울 본사 근무를 시작한 인물이다.
지난해 1월 부회장이 되면서였다.
입사 후 34년 동안 부산 창원을 거치며 지방의 생산현장을 완벽하게 장악해온 그의 서울 입성에 여의도에 있는 LG 쌍둥이빌딩은 술렁댔다.
예상대로 그의 첫 마디는 "내 앞에서 스트레스 얘기 하지 마라.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이었다.
김 부회장은 무슨 일이든 숫제 뿌리를 뽑는 스타일이다.
스스로 독하게 일했고 아랫 사람들에게도 '독한 열정'을 강조한다.
불량률 제로를 추구하는 생산라인의 6시그마 공정을 관리조직에도 적용하겠다고 나서자 본사 직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부회장은 경북 김천의 중농 집안에서 자랐다.
김천 성의고 시절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지게에 소풀을 짊어지고 집안 일을 도왔던 전형적인 시골 학생이었다.
공부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가끔씩 자신의 장래를 생각할 때면 '차라리 서울 가서 장사나 해볼까'하는 공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돈벌어 미끈한 차림으로 내려온 고향 형님들의 얘기 보따리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이 때문에 김천시 봉천동의 한 야산에 올라 김천역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는 기차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기적을 울리며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소년 김쌍수의 마음도 흔들리곤 했다.
서울을 동경하던 그는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대학 진학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대학 배지를 달고 이른바 '대처'로 뿔뿔이 흩어져 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표없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기로 마음먹고 대구로 나와 입시학원을 다니게 됐다.
공부를 해서 공대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해 5ㆍ16 군사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이 공업진흥책을 본격 표방하면서 그곳에 자신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지만 열심히 한 덕에 당시 인기를 모았던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했다.
고대했던 서울행에 성공한 그는 대학시절 공부만 했다.
"아무런 연고도, 직장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제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철도 좀 들었고요. 참 열심히 공부했어요."
3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 부산군기지 사령부와 김해공군학교에서 기계공작병으로 복무를 마친 그는 68년 복학해 금성사 예비 합격증을 받아들었다.
사세를 한창 확장해 나가던 금성사는 성적 좋은 졸업반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69년 1월 사무기술직으로 정식 입사한 후 첫 근무지는 부산공장의 냉장고 생산라인이었다.
마침 냉동공학에 매력을 느끼던 차였다.
제조 담당 엔지니어를 1년가량 하다가 설계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입사 동기들은 서울 본사 근무를 선호했지만 그는 땀 냄새 나는 현장을 좋아했다.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해결될 때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일하는 것에 비해 왠지 승진 운은 없었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현장 직원은 본사 직원에 비해 확실하게 '홀대'받고 있었다.
게다가 김 부회장은 체질적으로 윗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 못했다.
무뚝뚝한 성격에 말투도 직선적이었다.
승진이 늦어져도 그는 묵묵히 일했다.
우직하게 앞만 보고 가는 생활이 계속됐다.
76년 기정보(과장급)로 승진하면서 불도저 같은 그의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냉장고 제조기술은 대단히 취약해 해외에서 중요한 부품들을 많이 갖고 왔다.
김 부회장은 설 연휴 때도 고향에 가지 않고 신형 냉장고 위에 올라앉아 밤을 새웠다.
부품을 뜯고 조립하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금성사가 70년대 중반 일본 기업으로부터 도입한 우레탄 발포어 최신 설비를 한국형으로 개조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로였다.
"지금 생각해도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우리나라의 냉장고 기반기술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겁니다. 윗사람들이 뭘 시키면 절대로 '못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겁 없이 일했고 겁 없이 도전했지요."
76년 부산공장의 냉장고 설비가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김 부회장이 제2의 고향이라고 일컫는 창원 생활이 시작됐다.
품질과 고객만족의 모든 열쇠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서울 본사행을 바라지 않았다.
77년 기정, 81년 기감(부장급)이 되면서 철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한 식견과 판단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82년 회사는 그에게 냉장고 사업부의 초대 연구소장을 맡겼다.
석사도, 박사 학위도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냉장고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86년 세탁기 공장장으로 발령이 났다.
무려 18년을 보낸 냉장고 사업부를 떠나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당시 세탁기 사업은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사업 존폐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개인 김쌍수에게는 또 하나의 시험대였다.
냉장고 사업부의 원숙한 엔지니어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회사 전반의 전자사업을 총괄할 수 있는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갖게 되느냐의 기로였다.
그는 2년도 안돼 세탁기 사업부를 흑자로 전환시켰고 80년대 말에는 회사의 주력 사업부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그 시절 김 부회장은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은 잘못된 얘기다. 진짜 힘은 실행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이 때부터 '혁신'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공정을 바꾸고 개선했다.
김 부회장의 혁신은 95년 창원공장의 리빙웨어SBU장(상무)을 맡고 있을 때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그는 세탁기 조립라인에 '3BY3 운동'을 들고 나왔다.
3년 내 생산성을 3배로 올리고 각 부서에서 30%의 핵심 인력을 빼내 'TDR(Tear Down Room)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TDR 요원들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주위의 아무런 간섭 없이 오로지 혁신적이고 실행적인 아이디어를 짜고 실험하는 데 몰두했다.
공장의 아침 인사는 '3BY3'로 바뀌었고 회식을 할 때는 '3BY3'라는 라벨이 붙은 특주가 준비됐다.
심지어 족구를 할 때도 '3BY3 존'을 만들어 그 구역에서 득점을 하면 3배의 점수를 주곤 했다.
시행 초기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될까…'하고 부정적이거나 냉소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무슨 일이든 해보기도 전에 못한다고 단정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실제 이 운동은 단기간에 상당한 성과를 냈다.
LG전자의 생산혁신 성공은 제너럴일렉트릭(GE)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다.
96년 7월 백색가전을 총괄하는 리빙시스템 사업본부장(전무)으로 올라섰다.
그는 여전히 지방(창원)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미 현장에선 그가 CEO였다.
김 부회장의 이력서에는 그 흔한 'OO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가 단 한 줄도 없다.
해외 근무 경력도 없다.
"도저히 중간에 빠져나올 수 없는 곳만 다녔기 때문에 딴 곳에 눈 돌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과분한 업무를 맡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이 오늘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김 부회장의 청년기나 초기 회사생활은 결코 특출나지 않았다.
이사가 되는 데도 20년이 걸렸다.
하지만 주어진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유별난 집념과 실행력으로 끝내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전문경영인으로는 드물게 '대기만성'을 이룬 셈이다.
[신입사원들에게… ]
"무엇보다 우리 직원들은 'Right People'이 돼야 합니다.
좋은 머리 덕에 공부만 잘하는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동료들과 협력하고 혁신의 가치를 공유하는 직원들을 원합니다.
우선 맡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열정과 건강을 지녀야 합니다.
저보고 체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일하면서 몸 버린 적은 없습니다.
고민하지 마십시오.
일을 안하려고 하니 고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빠른 판단력과 자신의 일에 만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계층의 리더들입니다.
열정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어떻게 궁금한 것을 참고 있습니까.
책도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읽어야 합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부터 무식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곤란합니다.
회사의 전략적 목표에 여러분 개인의 목표를 일치시키십시오.
개개인이 목표를 이루는 순간 회사도 비전을 달성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은퇴 후 우리의 자녀들이 어떤 회사를 다녔느냐고 물어볼 때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꿈은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룹 공채 출신으로는 처음 LG전자의 대표이사에 올랐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의 시대입니다.
스스로 리더라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십시오."
(출처) 한국경제신문
카페 게시글
♣【 세상은 】♣
[성공]
김쌍수 LG전자 부회장‥34년간 지방근무
하늘새
추천 0
조회 32
04.08.21 19:08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