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오랜기간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고도(古都)답게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그리스·로마시대 부터 오스만제국까지의 유적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스탄불을 포스팅하면서 무엇을 먼저 올릴까 잠시 고민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이스탄불을 여행할때 이스탄불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떠나면 더 재미있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스탄불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땅으로 '비잔티움'이라 불렸으며, 서기 330년 비잔틴제국으로 불리는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이라 했다. 그후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불려 졌으며 1453년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이스탄불은 1922년 까지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를 이어왔다.
근대사에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낸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케말파샤에 의해 오늘의 이스탄불이 터키의 영토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지만 여전히 이스탄불은 터키 제1의 도시다.
아야 소피아는 가장 터키스럽고 2,600년의 고도(古都)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이 앵글이 아야 소피아의 모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위치다.
성 소피아 성당으로 더 잘 알려진 아야소피아(AyaSofia)
우리에겐 성 소피아 성당으로 더 잘 알려진 아야 소피아는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1만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서 6년만인 537년 완공되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과 건축공법을 동원하여 건축한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아야 소피아의 헌당식에서 황제는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압도했습니다" 라고 외쳤다.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소피아는 그리스말로 '지혜'를 뜻하는 말로 성스러운 하나님의 지혜를 기리며 봉헌한 성당이란 뜻이다.
비잔틴시대 건축물 중 최대 걸작으로 내부 높이는 약 56m 돔의 직경이 31m 이다. 규모면에서는 영국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 다음으로 크다. 1626년 지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기 전 까지는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소피아성당이 지은지 1,000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는 얘기다.
1,500년이란 세월은 돌로 세운 건축물이라도 해도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 때문인지 성당안은 보수를 위한 철제 구조물과 여기저기 훼손된 모습과 복구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이스탄불은 수 많은 재앙과 온갖 재앙을 견뎌내고 몇 번의 지진에도 소피아 성당만은 그 모든 재앙을 면했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는 1,000년 동안을 비잔틴 제국의 정교인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1453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정복된 후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벽화들은 회칠을 해서 덮고 건물밖에는 4개의 첨탑을 세워 이슬람의 사원으로 용도 변경되어 사용해 왔다. 그 후 기독교 상징물인 벽화들이 차례로 복원되고 1935년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에 의해 기독교와 이슬람교 어느쪽도 아닌 박물관으로 지정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아야 소피아 성당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테이블이 있어 음료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터키 국민들은 국기를 무척 사랑하는가 보다. 전망 좋은 곳이면 어디든 빨간색의 터기국기를 볼 수 있다.
아야 소피아에는 4개의 첨탑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4개의 첨탑 모양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첨탑을 세운 술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장 잔디밭 주변에는 아야 소피아를 화폭에 담는 화가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거대한 대형 돔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위에 걸려 있는 나무로 만든 검은 바탕의 둥근원판에는 금색의 글씨로 알라와 무하마드 등 4명의 칼리프(이슬람의 통치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랍어는 도무지 그림인지 글자인지 구분이 안된다.
지름이 31m인 거대한 돔의 지붕은 로도스섬에서 만들어진 가벼운 벽돌로 지어졌다고 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당대 최고의 기술을 총 동원하여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었다.
대형 돔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정말 신비로워 보였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서로 다른 두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은 이슬람교의 이교도에 대한 관용이 없었다면 아야 소피아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성당의 정면 모습이다. 사진 중앙에 황금색으로 된 부분을 자세히 보면 정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처음에 아야 소피아가 이슬람 사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슬람 사원을 지을때 이슬람교의 제1성지인 메카의 알 하람 사원 내의 카바 신전을 향하도록 하는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 의해 함락 당하자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소피아 성당은 자미(이슬람사원)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랍이 새롭게 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큰 돔 안쪽 중앙부분을 자세히 보면 둥글게 금색으로 그림같은 무늬가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아랍어로 된 쿠란(코란)의 구절 이라고 한다.
중앙 제단 위에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모자이크와 그 양쪽에 아랍어로된 원판을 볼수 있다.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건물을 파괴하지 않은채 두 종교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광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이스탄불만의 독특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성지 메카를 향해 있는 미흐랍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노약자를 배려한건지 계단이 아닌 완만한 경사로로 이루어 져있다.
2층 왼쪽에 있는 회랑은 현재 화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야 소피아의 건축물중 벽을 장식하고 있는 대리석은 양쪽이 대칭으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성모마리아와 세레요한이 함께 그려진 그리스도의 모자이크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면서 이곳은 회교사원으로 그 용도가 바뀌고 그 과정에서 성당 주위에는 첨탑이 세워지고 성당 안은 회칠로 덮혀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이로서 비잔틴 제국의 화려했던 모자이크는 회교사원으로 사용되는 수 백년 동안 회칠 속으로 사라졌다.
그후 1931년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벽 중앙의 모자이크가 발견되면서 아야 소피아가 비잔틴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졌고 회칠을 벗겨내고 복원작업을 하면서 비잔잔틴 시대의 화려했던 흔적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현재는 회칠을 벗겨내는 복원작업은 중단한 상태이고 앞으로도 더 이상의 복원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벽화의 아랫 부분은 많이 훼손 되었는데 이는 오스만 군대에 의한 훼손이 아니고 십자군 전쟁 당시 라틴 기사들의 물욕이 빚어낸 결과라고 한다.
훼손 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모자이크 아래 부분에 세워져 있다.
누런색은 모두가 황금이다
모자이크 부분을 자세히 보면 신기하고 놀랍다. 학창시절 미술시간과 책을 통해 낯 익은 그림이었는데 이곳에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성당안의 모자이크는 손상이 심한 것이 많은데 이곳은 비교적 상태가 좋은 2층 회랑에 있는 그리스도를 안은 성모 마리아와 황제 가족의 모자이크로 요하네스 2세와 황후 이레네가 마리아와 예수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습의 모자이크화다.
얼굴이 성형수술을 잘못해 부작용으로 일그러진 모습이다. 실제 이 모자이크화도 여러차례 보수를 하면서 실제 변형된 모습이라고 한다.
아야 소피아를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다.
< 2010. 5. 20. 이스탄불 아야소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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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내와 함께 떠난 사진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핫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