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990년 9월 베를린으로 갔다. 장벽이 무너진 지도 10개월이 지난 때였다. 당시 그 도시에는 두 개의 큰 축구 클럽이 있었는데 FC 베를린(FC Berlin)은 동베를린을 헤르타 BSC(Hertha BSC)는 서베를린을 연고지로 하고 있었다. 헬무트 클롭플라이쉬(Helmut Klopfleisch)는 이미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FC 베를린은 과거 디나모 베를린(Dynamo Berlin)이라고 불렸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 그러니까 구동독 시절 이 팀은 얀 스타디움(Jahn Stadium)에서 경기를 했었다. 내가 처음 머물렀던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경기장이 있는 프렌츠라우어베르크(Prenzlauer Berg) 지구는 연합국의 베를린 폭격을 견뎌낸 몇 안 되는 곳이었다. 건물은 오래되어 낡고 덜컹거렸다. 수리공의 유지보수 작업은 1920년대 이후로는 없었다고 한다. 1945년 5월 소련의 붉은군대는 시가지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내가 묵었던 곳은 총알구멍이 없는 몇 안 되는 건물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익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20년대 아르데코풍의 멋진 작품인 정문은 창문이 네 군데나 박살나 있었다. 그 구멍으로 바람이 휘몰아쳤고 덕분에 고양이 오줌의 역한 냄새가 희석되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베를린 특유의 대기는 실제 기온보다 10도는 더 차갑게 체감되었다.
층계참에 있으면 각 층에서 나는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커피 따르는 소리, 부삽으로 석탄을 난로에 퍼 넣는 소리까지. 입주자들은 대개 모두 집에 있었다. 가장 일곱 중 넷은 더이상 밥벌이를 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과거 관료로 생활했던 내 이웃은 그때 파출부가 되어 있었다. “만일 처지가 나처럼 급전직하한다면 사람들은 내일이라도 당장 장벽을 다시 쌓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동베를린을 ‘베를린’이라고 부르던 습관도 고쳐야 할 판이었다.
대량 실업과 신나치의 낙서 그리고 루마니아인 거지들이 있었지만 동베를린은 여전히 공산주의의 수도였다. 그곳은 언제나 11월처럼 보였다. 그 도시는 카키색과 옅은 갈색 그리고 끝없는 회색의 음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사회주의 노동자 조각상들--그들이 철거했던 아리안족 조각상들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은 이 도시에 어떠한 명랑함도 제공하지 못한다. 시 중앙에는 마륵스와 엥겔스의 동상이 있다. 마륵스는 앉아 있고, 엥겔스는 서 있다. 아마도 레닌은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동상 앞쪽에 이렇게 낙서를 해놓았다. “다음에는 좀더 나아질 거야.” 그러고는 뒤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미안하군.” 베를린 여행은 정말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동유럽의 한 학생 잡지가 푸념조로 얘기한 것처럼 “예전과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변화하리라는 것뿐이다”.
디나모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팀명을 바꿨고 얀 스타디움을 떠난 상태였다. 더이상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기장은 프렌츠라우어베르크 지구에서 가장 괜찮은 시설이었다. 그곳은 구장벽에서 단지 몇 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전화를 하러 서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그곳을 지나칠 때면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관중석 스탠드 두 배 높이로 치솟은 짙은 회색의 감시탑에는 탐조등까지 설치되어 있어 경기장은 마치 수용소 같았다. 그리고 동독 시절 경기가 있는 날이면 실제로 관중의 월경을 감시하고 막았다고 한다. 탈출을 막기 위해 군인들이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관람석을 차지했다. 당연히 관중은 적었다.
디나모팀은 ‘열한 마리 돼지들(Eleven Schweine)’로 불렸다.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없는 클럽이었다. 그러나 또한 가장 성공한 클럽이기도 했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열 번이나 전동독선수권을 연속 거머쥐었던 것이다.
수도에서 전동독선수권전을 계속한다는 확고한 목표에 따라 대전이 끝나고 디나모가 설립되었다. 1989년 혁명 당시까지 클럽 총수는 에리히 밀케(Erich Mielke)였다. 이 80대의 노구는 공포스런 구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우두머리였다. 사람들은 독일민주공화국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와 그를 구별하기 위해 밀케를 ‘형’ 에리히로 불렀다. 70대의 호네커는 당연히 ‘아우’ 에리히가 되었다. 밀케는 자신의 클럽을 아주 좋아했고 그래서 동독 내 최고 선수들이 모두 자기팀에서 뛰도록 만들었다.(그 중에 한 선수가 토마스 돌(Thomas Doll)로 그는 현재 라치오에서 가자(Gazza, 8장을 보라)와 함께 뛰고 있다.) 또 그는 심판 판정을 좌지우지했다. 디나모는 95분경 얻은 페널티킥으로 잡은 게임이 수두룩하다.
동베를린에는 디나모가 그렇게 되기를 열망했던 노동자 클럽 유니언 베를린(Union Berlin)팀도 있었다. 이 클럽의 용감한 팬들은 ‘철의 유니언’이라는 슬로건 사이사이에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라는 말을 집어넣곤 했다. 그리고 유니언이 디나모와 격돌하면 경기장은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모두가 유니언을 응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언제나 디나모 차지였다. 경기 종료 10분 전이면 관중은 썰물처럼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렸다.
리그 선수권을 매년 차지한 디나모 선수들이라고 해서 별천지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도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것이다. 장벽이 무너지기 몇 년 전 일이다. 클럽의 스트라이커 안드레아스 톰(Andreas Thom)이 서독 잡지 ≪슈테른 Stern≫과 인터뷰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을 탈출하는 이유는 이곳의 삶을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이곳은 아주 이상한 나랍니다.” 톰이 어렵게 밝힌 생각이다.
그는 장벽이 철거될 때까지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를 금지당했다. 드디어 장벽이 무너지자 그와 그의 동료들은 분데스리가에 합류했다. 리그 타이틀을 열 번이나 거머쥐었던 위르겐 복스(Jürgen Bogs) 감독은 여전히 디나모에 남아 있지만 과거의 낡은 마법을 다시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이 도시에 왔을 때 FC 베를린은 슈포르트포룸(Sportforum)이라는 아주 작은 경기장에서 시합을 하고 있었다. (밤새 헤맸지만 찾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관중은 겨우 천 명 정도였는데 대다수가 미치광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훌리간이었다. 이 공산당 관료와 슈타지 비밀요원의 후계자들은 콜롬비아의 마약 거래자들이나 세르비아의 인종청소주의자들만큼이나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악한 집단이다. 그들의 특권 때문에 그들은 과거에도 서방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대규모 응원단이 디나모를 응원하러 모나코까지 간 적도 있다. 장벽이 무너지자 그들은 공산주의와 네오나치즘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구호는 “승리를 위하여(Sieg Heil)”과 “우린 밀케가 너무 좋아”였다. FC 베를린은 가망이 없었다. 클럽은 한 홍보회사를 고용하여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팀은 곧 베를린 아마추어 리그로 떨어지고 말았다. 5년 만에 아니 그보다 더 빨리 한때 동독 리그 챔피언이었던 FC 베를린은 몰락했다고 지역 신문은 전할 것이다.
서베를린에는 헤르타가 있었다. 1930년과 31년 전독일챔피언이었던 이 팀을 독일인들은 진정한 명문 클럽으로 인정했다. 그들은 한때 베를린 전체를 대표하는 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1년 8월 13일 밤 갑작스럽게 장벽이 쳐지자 헤르타 선수와 팬의 절반은 자신들이 동베를린에 묶였음을 알았다. 클럽은 형편없는 선수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뇌물수수 추문에 휘말렸으며 유망한 10대 공격수 피에르 리트바르스키(Pierre Littbarski)를 놓쳐버렸다. 심지어 80년대 중반에는 베를린 아마추어 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했다.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독일 2부리그에서 뛰고 있었고 1950년대 헤르타 셔츠를 입고 마침내 경기장을 찾았던 동베를린 축구팬들은 눈물 바람으로 올림픽 스타디움(Olympic Stadium)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헤르타의 가장 열렬한 팬은 헬무트 클롭플라이쉬일 것이다.
축구가 정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클롭플라이쉬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체구가 좋고 금발에 둥근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부적당한 팀을 응원했다는 이유로 동독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베를린 체류 기간 말미에 그를 만났다. 1991년이었다. 그는 2년 전에 동베를린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동독은 이제 지도상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과거 사회주의 비판에 열을 올렸다. “난 이제 더이상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내 아내도 마찬가지예요. 구동독을 통치했던 범죄자들이 여전히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대화 중에 되풀이해서 이 말을 반복했다. 그의 아내는 커피와 케이크로 날 환대해주었다.
클롭플라이쉬의 기구한 인생과 관련해 내게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그의 증언이 하나이고 슈타지가 작성한 두툼한 파일이 또 하나다. 새로 구성된 독일 정부는 비밀경찰의 희생자들이 자신의 파일을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저명한 동독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감시보고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클롭플라이쉬는 내게 자기 파일의 사본을 보내주었다. 그의 생활을 감시하면서 작성된 문서는 아주 세세한 점까지도 실제 그의 생활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비밀경찰의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클롭플라이쉬는 1948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1989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인민공사에서 전기공으로 일했고 나중에는 한 사기업에서 창문 청소원으로 일했다. “우린 정말 별볼일 없었어요. 그들이 우릴 그렇게 만들었죠.” 그는 자신이 직업을 바꾼 것은 인민공사가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아니 슈타지가 적어놓은 것처럼 그는 “격정적 태도의 소유자로, 그것은 그의 성격에 각인된 것이다”. 파일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K.는 이해력이 좋으며, 사태를 잘 파악한다.” (슈타지가 항상 그의 이니셜 K.를 사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파일이 카프카의 것으로 오해받지는 않으리라.)
정치와 관련하여 파일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서방의 매스미디어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K.는 분데스리가에 열광하고 있다. K.에게 있어 축구와 정치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러나 슈타지 전체가 이 견해에 동의했던 건 아니다. 서독 관리가 클롭플라이쉬에게 그의 파일을 전해주면서 한 말은 “전부 축구 얘기더군요”였다.
슈타지 보고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K. 가족의 여가는 주로 축구다. 그들의 주말 계획은 …….” 그가 나에게 사태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동독에서 가장 좋았던 때는 여름 별장에서였죠. 베를린 교외에 있었는데 조용 하고 주위에 인적이라곤 없었어요. 공산주의 선전 문구도 없었구요. 여름날 저녁 에 우린 그곳에서 서방의 축구 경기를 보면서 행복감을 만끽했죠. 여름 별장에 가면 마치 서방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곳은 우리의 작은 캘리 포니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독을 떠나자 그들이 여름 별장을 가져가버리더 군요.”
그는 별장을 돌려받기 위해 5년 동안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보고서 내용을 계속 보자. “K.는 스스로를 서베를린 축구 클럽 헤르타 BSC의 광적인 팬이라고 생각한다.” 종전 후 3년이 지나고 그가 태어났을 때 헤르타는 이미 서베를린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 장벽이 쳐지지는 않았고 그래서 소년 클롭플라이쉬는 헤르타의 홈경기를 보러갈 수 있었다. 장벽이 올라간 것은 그가 13살 되던 해였다. “미친 짓입니다. 독일놈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당신 같으면 런던 중앙을 가로지르는 벽을 쌓겠어요?” 그는 28년을 기다렸고 그제서야 자기가 응원하는 클럽의 홈경기를 볼 수 있었다.
장벽이 올라가고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동베를린의 헤르타 팬들과 함께 장벽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헤르타 경기장이 국경에서 겨우 이삼백 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장의 관중이 환호하면 철의 장막 뒤의 축구팬들도 함께 환호했다. 곧이어 국경수비대가 장벽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았다. 나중엔 헤르타가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경기장을 옮겼다. 올림픽 스타디움은 서베를린의 서쪽 끝에 있고 그래서 장벽으로부터도 수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 이제 관중의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동베를린에는 헤르타 팬클럽이 있었습니다. 물론 불법이었죠.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죠. 매번 다른 장소에서요. 가끔은 빙고 클럽이라고 속이고 카페의 뒷방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헤르타의 감독이 모임을 찾는 경우도 있었고 가끔은 선수들이나 코치들이 넘어오기도 했죠. 과거 이삼십 년 동안 일했던 헤르타 감독들을 모두 만난 것 같아요. 그들은 클럽의 일을 얘기해줬죠. 평범한 소식들은 서방의 라디오와 TV를 통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내부적 문제나 진짜 가십 따위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소식을 갈망했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나라 사람처럼 소외되었을 겁니다. 감독들은 우리를 한 무리의 광신자들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비관적이라고 항상 우리에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모임의 비밀을 지켜달라고 그들에게 요구했죠. 그런데도 그들은 경기 일정을 알리는 프로그램에 동베를린의 열성 축구팬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어요. 평지풍파를 일으킨 겁니다. 슈타지가 감시를 강화한 것은 당연했죠. 그들은 국경을 통과하려는 감독들을 제지했습니다. 위르겐 쥔데만(Jürgen Sündemann)을 알몸수색한 적도 있었죠. 모임 때마다 우리는 감독이 국경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를 긴장 속에서 기다렸죠. 아슬아슬한 모험이었습니다.”
“난 헤르타·바이에른 뮌헨(Bayern Munich)·서독 국가 대표팀을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동구권 팀과 격돌하는 팀이라면 어느 팀이라도 응원했죠. 디나모 베를린 이 애스턴 빌라(Aston Villa)와 싸울 때도 리버풀(Liverpool)과 격돌할 때도 포배 르츠 프랑크푸르트(Vorwärts Frankfurt)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와 시합할 때도 난 현장에 있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정말 좋습 니다. 발로 차는 슛이나 다름없었던 데니스 로(Dennis Law)의 20야드 밖에서의 헤딩슛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우리 팀을 물리치자 신문들은 ‘영국에서 온 프로축 구 선수들이 …….’ 하면서 우리 팀은 아마추어라는 식으로 차이를 강조했죠.”
두 독일 사이의 유일한 시합이 동독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은 역사의 작은 아이러니이다. 1974년 월드컵 경기에서 동독은 서독을 1대 0으로 격파했다. (골을 넣은 위르겐 슈파르바서(Jürgen Sparwasser)는 나중에 서독으로 망명했다.) 내가 그 얘기를 꺼내자 클롭플라이쉬는 먼 곳을 쳐다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집은 초상을 치르는 분위기였어요. 그저 행운의 승리 였는데도 동베를린에서는 커다란 축하행사가 열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악의 사 태는 축구에 대해서는 도대체가 아는 게 없는 당 간부들이 300명씩이나 관중석 에 앉아 소형 국기를 흔들며 엉뚱한 순간마다 박수를 쳐댄 일이었을 겁니다.”
클롭플라이쉬는 그 경기를 TV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는 소비에트 블록 안에서만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앨범을 꺼내어 서방의 축구 스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프란츠 베켄바워(Franz Beckenbauer)·칼 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바비 무어(Bobby Moore)·바비 찰튼(Bobby Charlton)·그리고 로저 밀러(Roger Milla)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서방 팀과의 경기를 관전하려고 동유럽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찍은 것들이다. 창문 청소원의 월급으로 이게 가능할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었죠. 게다가 난 노조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휴가도 낼 수 없었어요.”
30년 만에 그는 헤르타가 폴란드의 Lech Poznan(폴)과 시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날 폴란드 국경은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동독 국경수비대도 이 시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인파와 차들을 돌려보냈다. 클롭플라이쉬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선수를 썼다. 그의 노모를 모시고 간 것이다. 검문소에서 그는 어머니를 가리키며 수비대원에게 호소했다. “어머니는 폴란드에서 자라셨어요. 고향 마을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어머니를 모셔가는 중입니다. 부탁드려요.” 거짓말이었지만 국경수비대는 통과시켜 주었고 그는 시합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공산주의 체제에 파열구를 낸 것이라고 생각하며 통쾌해 했다. 그러나 슈타지가 이 여행을 모를 리 없었다. 그의 해외 축구 관전 여행 목록에 이 시합도 기록되어 있다. 파일을 보자. “이 가족은 분데스리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면 뭐든지 이용하려고 함.”
슈타지는 클롭플라이쉬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추적하며 감시했다. 여기에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가리아인민공화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의 축구 시합에서 보여준 K.의 행동은 독일민주공화국의 국제적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통탄스럽게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보고서는 독일민주공화국의 고귀한 명성에 오점을 남긴 다른 수많은 축구 이단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클롭플라이쉬는 나중에 그가 다니는 창문청소 회사의 사장이 소피아로의 그의 여행에 대해 슈타지 대원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보고서에서 알았다. 그 만남에 관해 슈타지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동지는 아주 협조적이었음. 앞으로도 계속 보안 기관을 적극 돕겠다고 말함.” 클롭플라이쉬는 사장을 아주 좋아했었다.
1981년 바이에른 뮌헨팀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했다. 슈타지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적의를 품은 부정적 세력, 그러니까 범죄적으로 위험한 인물들·파괴적 젊은이들을 막기 위해.” 그들은 실패했다. 클롭플라이쉬의 파일을 보자. “1981년 3월 18일 많은 축구팬과 더 많은 수의 시민이 바이에른팀이 묵고 있는 호텔 앞에 운집했다. …… 질서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체코 군대는 호텔 입구를 봉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장면이 호텔방 창문을 통해 한 남자에 의해 영화 필름 카메라로 찍혔다.”
그가 바로 클롭플라이쉬였다. 바이에른팀 사무처 직원일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뮌헨 사람에게 그가 보낸 편지 내용이 파일에 적혀 있다. “우리는 관련 기념품을 숨겼습니다. 국경에 도착하자 그들이 우리를 다시 수색했습니다. 마치 은행강도나 되는 것처럼 말이예요. 축구장에 가서 바이에른팀을 구경했다고 그런 조사를 받다니 정말 말이나 됩니까?”
곧 클롭플라이쉬와 슈타지는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슈타지의 호이어(Hoyer) 대위가 1981년 12월 12일 클롭플라이쉬와 가졌던 소위 ‘예방적 대화’에 관한 기록을 파일에서 찾을 수 있다.
“K.는 제시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런 날씨에는 자동차를 사용할 수 없기 때 문에 대중교통 수단으로 왔노라고 말했다(그날은 눈이 오고 얼음이 얼었다).”
말을 해도 좋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성격에 각인된 격정적 태도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기 신분증을 압수한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그때문에 그는 해외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진정하라고 하자 그는 축구 얘기를 꺼냈다. 보고서를 보면,
“축구는 그의 취미고 그의 가족도 그렇게 알고 있다. …… 그는 축구 시합을 보러 프라하에 간 적이 있다”.
고 적혀 있다. 그는 디나모 베를린과 Vfb 슈투트가르트(Vfb Stuttgart)가 대전하는 경기 입장권을 살 수 없었다고 호이어에게 불만스럽게 얘기했다.
“그는 호이어 대위에게 이 일을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표가 한 장 생겨도 시합에 갈 수는 있는 거냐며 따져 물었다. 그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게 분명히 지적되었다. 그는 자신이 훌리간이 아니라며 그들의 조치를 비난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신분증이 압류당한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말썽꾼들은 괜찮은데도 말이다. 그는 M.을 언급했다. 이 분야에서는 유명한 사람 이다. 그는 자기가 M.과 혼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바이에른 뮌헨과 디 나모 드레스덴(Dynamo Dresden) 사이에 앞으로 있을 시합과 관련하여, 그는 또 입장권을 공식적으로는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바 이에른 뮌헨팀의 선수를 알고 있고 편지만 한 통 하면 입장권은 쉽게 구할 수 있 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가 5639289번으로 전화해서 호이어 대위와 면담할 것을 우리는 신중히 권고하였다.”
그러자 클롭플라이쉬는 화가 났다.
“그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자기는 시합에서 아무 런 즐거움과 재미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다른 ‘대화들’이 또 있다. 클롭플라이쉬가 내게 말했다.
“파일을 보면 그들은 그걸 ‘대화’라고 부르죠. 우리가 안락한 방에 앉아 화기애 애한 분위기에서 얘기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잘못 아신 겁니다. 무시무시했죠. 난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이나 다름없었어요. 이 소파의 한쪽 귀퉁이만 한 작은 방 에 갇힌 적도 있습니다. 매번 심문하는 사람이 달랐어요. 내가 심문자마다 다른 얘기를 하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내 추측일 뿐이죠. 모르겠어요. 그들 이 무얼 캐내고 싶어하는지 정말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여기서 질문을 하는 건 우리지, 네가 아니’라고 윽박지르더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여기 서베를린 그의 아파트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모든 게 정말 같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른 누가 나와 함께 있었는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난 누 구의 이름도 발설하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그들은 모든 걸 파악하고 있었을 겁니 다. 하지만 난 그들이 내게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죠. ‘동독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은 인민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해요. 더이상 참을 수 없으니 제발 동독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K.는 위험한 정치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그를 동독 체제의 적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반나치 활동을 하셨죠. 그리고 동독이 얼마나 잔혹한 국가인지도 늘 말씀하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늘 그런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정말 모르겠어요. 난 서방이 더 잘 산다는 것도 알았지만 별로 신경쓰진 않았거든요. 난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읽고, 보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겁니다.”
서방 팀이 동독에서 시합을 가지면 그는 감금되기도 했다. “서독 수상 슈미트(Schmidt)가 1981년 동베를린을 방문했을 때도 나를 잡아 가두더군요. 내가 공항에 가서 서독 국기를 흔들거나 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서방 팀과의 경기 입장권은 구하기가 아주 힘들었죠. 경기장 입장권은 당원들에게나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기장 전체가 서방 팀을 응원하는 소리로 가득 찼을 테니까요. 함부르크 SV(Hamburg SV)와의 경기가 있었던 날은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야 겨우 당원들에게 입장권이 건네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경기장에 들어갔죠. 공산당원[정식 명칭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임]들은 대개 축구를 싫어했고 그래서 좌석표를 우리에게 팔았거든요.” 그는 자기 말에 속아서 표를 건네준 바보 같은 공산당원 한 명을 흉내내기도 했다.
그는 1985년 다시 체포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서독의 대전에서 그는 베를린의 상징동물인 베를린 곰 인형을 서독팀 감독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선물했고 슈타지가 이를 포착했다. “돌아오는 길에 국경에서 검문을 당했는데 내 차를 다섯 시간이나 뒤졌습니다. 바퀴 휠캡까지 뜯더군요. 그리고 베켄바워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내게 그 사진을 보여주었다. 클롭플라이쉬와 베켄바워 그리고 곰 인형 뒤로 몇 발짝 떨어져, ‘Restaurace’란 표지판 바로 아래서 알 수 없는 여자가 한 명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여자가 밀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슈타지는 그가 프라하에서 산 축구 관련 기념품들을 모두 압수했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적고 있다. “밀수 행위 같은 건 없었다. K.는 자신이 축구 기념품 수집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단속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전에는 결코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고 항의했다.” 클롭플라이쉬는 전체주의 국가에 산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관용과 상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를 심문하면서 소리치는 겁니다. 난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기지를 발휘했죠. ‘날 그냥 보내주시오. 안 그러면 베켄바워에게 전화를 해 이 사실을 알리겠소.’ 물론 난 베켄바워를 잘 몰랐지만 그들은 겁먹는 눈치였 습니다. ‘이 놈이 정말 베켄바워의 친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난 기세를 몰아 ‘이 사실을 서방 신문에 폭로하겠다’고 위협했죠. 그들은 모험을 하지 않았고 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동독인과 접촉하는 서독 사람은 누구나 다 밀정을 붙이는 게 슈타지의 원칙이었다. 나는 오스트리아 키츠뷔헬에 살고 있는 ‘프란츠’라는 이름의 서독인에 관한 ‘신상 자료 요청서’를 클롭플라이쉬의 파일에서 찾을 수 있었다. 베켄바워가 그곳에 산다는 건 독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슈타지 파일에 언급된 제3의 인물은 신원을 확인해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그 자료를 담당하고 있는 서독 관리들은 성을 지워버린 상태였다. 슈타지가 베켄바워에 관해 수집한 정보를 더 찾지는 못했다.
클롭플라이쉬는 그 다음해에 또 체포되었다. 멕시코 월드컵이 열리기 바로 전이었다. 서독 국가 대표팀에게 행운을 빈다는 전보를 친 게 체포 이유였다.
“슈타지 심문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계급의 적에게 행운을 빌어줄 수 있나?’ 내가 대답했죠. ‘이곳 당신 나라 축구는 아이슬란드나 룩셈부르크만도 못 합니다.’ ‘당신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원한다면 서명이라도 해드리겠소.’ 보세 요, 동독은 최악이었죠! 국가 대표팀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이 겨우 5000명 정도 였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은 버스를 동원해 아이들을 실어날라야 했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마침 클롭플라이쉬의 아들 랄프(Ralf)가 들어와 아버지 옆에 앉았다. 20대 초반인 그는 9살 때 체제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담임선생에게 자기 영웅은 바이에른의 스트라이커 칼 하인츠 루메니게라고 말했다가 ‘계급의 적’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몇 년 후 랄프는 루메니게의 유니폼을 얻게 된다. ‘계급의 적’의 옷을 말이다. 바이에른 뮌헨 대표 쉐러(Scherer) 교수가 동베를린에 있는 클롭플라이쉬의 아파트에 잠시 들러 옷을 벗어두고 간 것이었다. “이게 뭐지?” 클롭플라이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쉐러 교수는 자기 옷 안에 루메니게의 유니폼을 받쳐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치를 발휘해 랄프에게 멋진 선물을 했다.
랄프는 유망한 축구선수로 자랐다. 15살 때는 디나모 청소년(Dynamo colt)팀에서 뛰면서 동베를린 유스(East Berlin Youth)팀의 주장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중 의무적으로 입소해야 하는 한 군사훈련 캠프에서 훈련 도중 넘어져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초기 응급조치는 물론 수술도 받지 못했다. (“우린 ‘국가의 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은퇴해야 했다. 그리고 더이상 축구를 하지 못했다. 클롭플라이쉬가 내게 전해준 바에 의하면, “그는 정말 행복해 했어요. 우린 함께 동독을 비아냥거리면서 유쾌하게 웃곤 했죠. 내 생각에 그들은 항상 기계처럼 경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우린 외쳤죠. ‘문제는 공이야, 공을 상대하라구!’” 보고서의 최종 결론의 일부는 이렇다. “소년과 부모를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해 보임.”
동독은 이 이단자들을 서독으로 보내버렸다. 1986년 클롭플라이쉬 가족은 이민비자를 신청했고 3년 만에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슈타지는 주의 깊게 시기를 선택했다. 클롭플라이쉬의 어머니가 임종 직전이었던 것이다.
“며칠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슈타지 요원에게 간청했죠. 어머니가 몇 시간밖에 더 사시지 못할 거라고 의사가 말했거든요. ‘몇 시간? 알아. 하지만 오늘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날 수 없을 걸.’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떠나야 했고 5일 후 어머닌 돌아가셨죠. 장례식 참석도 불허하더군요.”
클롭플라이쉬 가족은 서독의 한 난민 캠프에서 첫해를 보냈다.
동독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그건 클롭플라이쉬의 운일 뿐이었다. 그가 동독을 떠나고 몇 달 후 장벽은 무너졌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홈에서 헤르타의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동독에 살았을 때는 헤르타에 대한 환상이 많았죠. 최고의 클럽이라고 생각했 는데 실망스럽더군요.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무너졌고 헤르타의 다음 경기는 홈에서 바텐샤이트(Wattenscheid)와 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5만 9000명이나 왔 더군요! 2부리근데 말이죠! 동베를린 시민 대부분이 경기장을 찾은 것 같았습니 다. 그 월요일 우린 헤르타가 디나모 베를린과 유니언 베를린의 코치들을 시합에 초청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 공산당원들과 슈타지 요원들을요! 내 말을 믿으세요. 동독의 코치·감독·선수들은 모두 당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현 재 그 사실을 인정하든 않든 간에요. 바텐샤이트와의 경기에서 난 자원봉사자로 일했습니다. 초청받은 당 간부들이 옆을 지나 지정좌석으로 가는 걸 보니 이런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우린 헤르타 때문에 싸웠고 또 고통받았는데 이제 그들은 우릴 탄압한 자들을 초청하는군.’ 기자 간담회에서 헤르타는 이 분들이 경기를 참 관하러 온 것이라고 발표하더군요. 무슨 자랑스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 다음 시합 입장객은 겨우 1만 6000명뿐이었던 것은 이런 실망감 때문일 겁니 다. 난 자원봉사를 그만뒀어요. 여전히 경기장에 가서 시합을 보긴 합니다. 헤르 타야말로 베를린 유일의 클럽이죠. 시합을 보지 않는 사람도 경기 결과에는 늘 관심을 갖습니다. 블라우 바이스(Blau Weiss)가 더 잘 하긴 하죠. 하지만 그 팀 이 헤르타가 될 수는 없죠.”
그도 인정하듯이 결론은 우울했다. “올해로 난 43살입니다. 동독에서 41년을 살았죠. 그땐 어떻게든 살았고 가끔 재미도 있었지만 지금 보면 인생을 낭비한 것 같아요. 그래요, 당신도 알다시피 서독이 무적의 팀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큰 위안이자 격려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동구권 팀을 격파했고 그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