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중심에 있으면서 온 마음으로 죽음을 껴안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의사가 피를 뽑아가더니 얼마 뒤에 심각한 얼굴로 와서 말했다. 나쁜 소식이라고, 내가 암에 걸렸다고 나쁜 소식? 나는 웃음보가 터졌다. 그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웃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나중에 그것이 오진이었고 나에게 암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의사가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라고 했다. 좋은 소식?
우리가 암을 사랑하기 전에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게 진실이다. '그것'이 가난이냐 외로움이냐 실상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좋다' '나쁘다'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한번은 악성 궤양 때문에 의사들로 부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친구의 병상 곁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는데 그녀가 말했다. "사랑해." 내가 말했다. "아니야, 너 나 사랑하지 않아. 네 궤양을 사랑하기 전에는 날 사랑할 수 없어. 언제고 궤양을 보는 눈으로 나를 볼 테니까. 네가 바라는 것을 내가 주지 않거나 네 생각을 위협하거나 그럴 때 넌 궤양을 대하듯이 나를 대할 거야." 비정한 말로 들리겠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는 진실을 듣고 싶어하는 친구였다. 그녀 눈에 눈물이 괴었다. "고마워서 나오는 눈물"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나쁜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별것 아닐 수 있고 별것 아닌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모를 따름이다. 나는 그것이 좋다. 우리는 죽음이 이런 것 또한 저런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한다. 나는 내 코앞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병과 건강, 오는 것과 가는 것, 삶과 죽음을 사랑한다. 나는 삶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본다. 현실은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도, 그게 어떤 것이든, 그런 게 정말 있다면, 좋은 것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게 어째서 문제인가? 우리는 밤마다 자리에 누워 잠을 잔다. 모두들 그런다. 눈 감고 잠을 청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는 사람들도 많다. 당신한테 죽음에 관한 어떤 '생각'이 있기 전에는 오직 평화, 그것이 평화인 줄 모르는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죽음에 대하여 내가 아는 것은 어디 피할 데가 없을 때,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그때 당신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당황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있을 수 있는 가장 고약한 것은 당신의 어떤 믿음이다. 당신이 침상에 누워있고, 의사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고, 당신이 그 말을 믿을 때 모든 혼란이 멈춘다. 이제 당신은 더 잃어버릴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평화 속에 당신 홀로 있다.
아무 희망할 것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유로워진다. 결정권이 그들의 손을 떠났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그들이 살면서 찾고 있던 모든 것이다. 무엇이 자기한테 위임되었다는 착각이 허물어진다. 선택할 게 없으니 두려워할 게 없다. 한바탕 꿈이 태어났다가 한바탕 꿈이 죽어가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님을 비로소 깨치게 되는 것이다.
죽어감은 살아감과 같은 것이다. 죽음에도 길이 있고 당신은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죽어 가면서 내가 죽은 것을 의식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괜한 생각이다. 당장 십초 뒤의 일도 의식할 수 없는 게 우리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지금'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여기 이 순간에 있다.
내 친구들 가운데 하나는 숨을 거두기 전에 '계시'를 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맑게 깨어 있으려고 애썼다. 마침내 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케이티, 우리는 애벌레야." 내가 물었다. "정말?" 그러자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 계시도 없다는 것이 그가 본 계시였다!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 좋고 괜찮다. 어떤 '생각'이 그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있을 뿐이다. 며칠 뒤에 그가 웃는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
다른 친구 하나는 임종을 앞두고 자기 숨이 언제 멎을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티베트 사자의 서'에 있는 과정대로 죽고 싶어 했다. 친구들이 그 책에 기록된 의식을 치러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날 그가 친구들을 불렀다. 친구들이 와서 의식을 치러주었다. 그런데 그가 죽지 않았다. 친구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며칠 뒤에 다시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는다고 했다. 친구들이 다시 의식을 치렀지만 이번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같은 일이 두세 번 되풀이되었다. 친구들이 수근거렸다. "이 친구 정말 언제 가는 거야?"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었다. 장난으로 "늑대다!" 소리쳤다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그가 나에게 몇날 며칠에 자기 침상을 지켜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말했다. "물론, 그럴 수 있으면 기꺼이 그러지요." 그러나 막상 그가 숨을 거둘 때 그의 측근들 가운데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그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완벽한 죽음이었다. 우리 모두 더 이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은 정확한 시간에 죽는다.
아, 이야기들!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그것 말고 다른 뭐가 있겠는가?